소설리스트

내 손안의 재벌-40화 (40/191)

40화 단무지

창문 블라인드 사이로 삐져나온 아침 햇살에 잠이 절로 깼다.

술 마시면서 굳게 마음먹었던 어제의 다짐은 보통 다음 날 기상과 함께 사라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오늘 아침은 어젯밤의 마음가짐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왜 무슨 말이야? 회사 그만두려고 그러는 거야? 너 이번에 S 받으면 차장 승진 케이스인 거 몰라?"

내가 S를 받지 않겠다는 말에 놀란 듯 임상무가 첫마디로 뱉은 말이었다.

"그건 아니고요."

"그럼 뭐야. 대체 왜 그러는 건데?"

임상무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되물었다.

"제가 S를 안 받는 대신 원모 B로 올려주세요. 그건 가능하지 않나요?"

"허!"

내 말에 어이가 없어서였는지, 아니면 비웃기라도 한 건지 외마디를 뱉을 뿐이었다.

"가능한 건 맞죠?"

"정의의 사도라도 나셨나? 뭔진 모르겠지만 잠깐의 영웅심 때문에 후회할 짓 하지 마라."

남들을 밟아가며 조직 내에서 계속 승승장구해 왔던 임상무에게는 도무지 납득이 안 가는 모양이다.

"후회 안 할 겁니다."

"최고 성과를 주고 승진시켜 주겠다는데 거절하는 놈은 네가 처음이다. 앞으로도 없을 거고. 네가 스스로 걷어찬 거야."

"네. 알고 있습니다."

"이번에 승진하면 남들보다 몇 년 빠른 건지 알아? 사고만 안 치면 30대에 임원 달수 있는 거 모르는 건 아니겠지?"

"알고 있다니까요!"

나도 모르게 언성을 높여 소리를 질러댔다

임상무 잠시 놀라는 듯하더니 팔을 휘이휘이 저어가며 나가라는 시늉을 했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나가."

다이어리를 책상 위에 던지고 철푸덕 자리에 앉으니 원모가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과장님, 괜찮으세요?"

"뭐가?"

"상무님께 혼나신 거 아니에요?"

제법 고성이 오갔는지 밖에서도 싸우는 소리로 오해했었나 보다.

"혼나긴 개뿔. 그냥 싸운 거지."

* * *

시간 드럽게 안 간다.

더군다나 시계를 쳐다보고 있으면 유독 더 늦게 가는 거 같다.

어젯밤 집에서 맥주 두 캔을 더하는 바람에 종일 속이 뒤집힐 듯이 쓰려왔다.

맘 같아선 지금이라도 당장 나가서 해장하고 싶지만 아쉽게도 이 시간엔 주변에 식사 가능한 식당이 없었다.

더구나 11시 반은 되어야 편하게 나갈 수 있는데 아직 한 시간도 넘게 남았다.

전전긍긍하는 게 보였는지 옆자리 성환이 한마디 했다.

"배고프시나 봐요. 근데 계속 시계 쳐다본다고 시간이 빨리 갑니까?"

"내가 언제 시계 보고 나갔냐? 여는 식당이 없어서 그렇지."

"뭐 드시게요?"

"뭔 상관이시지? 살 것도 아니면서."

"제가 살게요. 어제 술도 얻어먹고 했으니깐 해장 정도는 쏴야죠."

이 자식이 웬일로 점심을 사겠다고 한다.

이럴 땐 개카는 물론 법카로도 가기 힘든 곳을 골라야 한다.

"그럴까? 어디가 좋을까?"

재빨리 짱구를 굴려 봐도 금세 머릿속에 떠오르질 않았다.

이럴 땐 초록창에서 찾아야 한다.

물론 내가 아닌 원모가.

뒤돌아 원모를 찾으려는데 역시 눈치 빠른 놈이 이미 초록창을 열어놓고 날 보면서 대기 중이었다.

심지어 부르지도 않았는데 대답부터 나왔다.

"넵."

"잉?"

"부르신 거 아니었나요?"

"아직. 부르려고 하긴 했지만."

"그럼 먼저 부르고 말씀하십시오."

미친놈.

알았다. 시킨 대로 해주마.

"원모야!"

"네!"

"중국집인데 아주 가까워. 게다가 졸라 비싸. 예약해."

"넵. 인원은요? 두 분이요?"

지난번에 끼려다가 뺀찌 먹은 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는지 살짝 떠보는 거다.

"세 명이지. 양아치도 아니고 술은 셋이 먹고 해장은 둘이 할까 봐."

성환도 같이 가자며 한마디 거들었다.

"당연히 셋이 가야죠. 좋은 데로 예약해 주십시오."

원모 얼굴이 금세 싱글벙글하게 해지더니 초록창 속으로 빨려 들어갈 듯 검색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 * *

가까운 데를 잡으랬더니 정말 회사 코앞의 호텔 중식당을 예약했다.

세계 중화요리 대회에서 입상한 화교 출신 셰프를 전면에 내세운 곳으로 임원 정도는 되어야 가끔 가 볼 수 있을 법한 그런 고급 식당이었다.

오픈 시간 전이었는데도 역시 서비스가 좋아서 그런지, 밖에 세워두지 않고 룸으로 안내받았다.

룸 안에서 기다릴 수 있게 해준 것이다.

원모는 테이블 한쪽에 놓여있는 메뉴판을 펼치고는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못 볼 거라도 봤냐? 왜 그래?"

"과장님 이것 좀 보세요. 짜장면이 2만 원이에요."

성환이 궁금한 듯 물었다.

"그래서 비싸다는 거예요? 아니면 호텔치고는 싸다는 거예요?"

보아하니 놀리려는 게 아니라 정말 궁금해서 묻는 것이었다.

"당연히 비싸죠. 게다가 군만두는 얼마야. 일십백천……. 헉, 5만 원인데요?"

메뉴판에는 먹음직스러운 군만두 사진이 큼지막하게 붙어 있었고, 가격표에는 정말 0이 4개나 박혀 있었다.

'군만두는 서비스가 아니고 엄연히 요리다,'라고 주장하는 듯했다.

"에이, 아니겠지. 군만두가 어떻게 5만 원이나 할라고. 잘못 썼겠지."

원모에게 메뉴판이 오타일 거라고 말하고는 성환에게 눈짓으로 사인을 보냈다.

다행히 알아들었는지 맞장구를 쳤다.

"그러겠죠? 설마 5만 원이나 할라구요. 오천 원이면 몰라도."

설마 5성급 호텔에서 식당 메뉴판을 잘못 적었을 리가.

그래도 원모는 호텔 식당을 와 본 적이 없어서였는지 내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모양이었다.

"원모야. 탕수육 하나에 식사 하나씩 시켜 봐. 군만두는 서비스로 달라고 하고."

"네."

오픈 시간이 되고 나서야 주문받으러 종업원이 룸으로 들어왔다.

원모가 메뉴판을 들고 시킨 대로 주문을 하였다.

"탕수육에 짜장면 하나, 짬뽕 두 개요. 그리고 군만두 서비스 부탁합니다."

"네?"

주문받던 종업원의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원모는 빨리 말해서 종업원이 못 알아들은 걸로 생각했는지, 다시 천천히 또박또박 말해줬다.

"탕수육 1개, 짜장 1개, 짬뽕 2개에 군만두 서비스요."

"저희는 군만두를 서비스로 제공하고 있지 않습니다."

원모는 예상 밖으로 단호한 종업원의 답변에 적지 않게 당황했다.

"에이, 얼마 치를 시켰는데 오천 원짜리 하나 못 주신다는 거죠?"

단골이라도 되는 양 너스레를 떨어봐도 종업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손님. 저희 레스토랑 정책상 그건 어렵습니다."

웃음을 못 참겠는지, 보다 못한 성환이 나서서 거들었다.

"죄송합니다. 셰프님께 말씀만 한번 전해주세요. 이분께서 군만두 오천 원어치 부탁드린다고요."

곤란한 표정의 종업원은 나이스한 성환의 말투에는 대꾸하지 않았다.

"네, 말씀 전달해드리겠습니다."

종업원이 룸을 나가고 나자, 성환은 걱정하지 말라는 투로 말했다.

"이번엔 잘 알아들으신 거 같은데, 서비스 챙겨 주실 거에요."

"아, 네."

잠시 후 종업원이 음식이 놓인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음식을 하나씩 테이블에 내려놓는데 마지막 접시에는 군만두 딸랑 한 개가 덩그러니 놓아져 있었다.

'이게 뭐지?'라고 쳐다보는 원모의 표정이 점점 굳어져 갔다.

"아니 서비스를 달라고 하니까 딸랑 하나 주신 거예요?"

"네, 말씀하신 대로 전해드렸습니다."

"네?"

"특별히 군만두 오천 원 분량 부탁드린다고 전해드렸습니다."

시킨 대로 서비스 챙겨줬는데 웬 불만이냐는 뜻이었다.

"오천 원어치라고요?"

"네."

"오천 원에 한 개라고요?"

"네. 저희는 군만두 일 인분에 10개가 제공되고 있습니다."

눈이 휘둥그레지고 입은 벌어진 채 좀처럼 다물어지지 않았다.

"원모님 드세요. 저는 군만두 별로 안 좋아합니다."

"그래. 너 먹어라, 오천 원어치 전부 다."

"아이 씨 정말……."

원모는 이제야 속은 걸 알았는지 한참 동안 분한 표정을 거두질 않았다.

원모는 말로만 듣던 짜장으로 해장하는 놈이었다.

면을 쓱싹쓱싹하고 비벼 한 젓가락 가져가려는 찰나에 뭔가를 깨달은 듯했다.

벨을 눌러 종업원을 찾고는 따지듯이 물었다.

"아니 아직까지 단무지를 안 주시면 어떻게 합니까? 기다리다 짜장면 다 불어 터지겠네요."

담당 종업원이 당황했었는지 잠시 머뭇거리다가 답했다.

"저희는 단무지를 제공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럼 시키면 되잖아요. 얼만데요? 단무지도 5만 원에 10개 나옵니까?"

아까 군만두의 충격이 아직 가시지 않은 듯했다.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저희 업장에서는 단무지가 준비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럼 짜장면을 단무지 없이 먹으라는 말씀이세요?"

그저 고개 한번 끄덕이며 대답을 대신하고는 종업원이 종종걸음으로 룸을 나갔다.

원모가 절망하듯 고개를 떨구었다.

이것은 마치 몇 시간 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사형수가 마지막 식사 메뉴를 정하며

"짜장면으로 하겠습니다. 군만두 서비스에 단무지는 많이 챙겨주세요."라고 말했는데

집행관이 "너의 마지막 소원은 들어주겠다. 단 군만두 서비스는 한 개밖에 안 되고 단무지는 없다."라고 답했을 때의 사형수 표정과도 같았다.

단무지가 '너 따위 사형수 놈 입안에서 씹히는 걸 감히 허락할 거 같으냐. 짜차이나 먹고 짜져 있어라.'라고 확인 사살까지 당한 듯.

원모가 단무지 없이 목이 메는 듯 불어 터진 짜장면을 억지로 구겨 넣고 있을 때 마침 룸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세요."

성환의 대답과 함께 들어온 사람은 전속 운전기사였다.

"말씀하신 거 여기 있습니다."

이 말과 함께 내미는 운전기사의 두 손에는 방금 편의점에서 산 듯한 샛노란 김밥용 단무지 한 통이 들려 있었다.

"원모님 이거라도 같이 드세요."

성환이 내미는 단무지를 받아든 원모의 표정은 마치 수십 년간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담배 한 모금을 빨았을 때의 환희에 찬 표정과도 같았다.

"감사합니다."

생명의 은인이라도 되는 양 연신 고맙다고 머리를 조아렸다.

고맙다는 말을 듣는 게 당연하다는 듯 겸양 하나 없는 성환의 태도 역시 이상한 건 마찬가지였다.

재벌의 조련법이랄까? 예전에 익숙히 봐 왔던 것이었다.

갖고 노는 것처럼 하다가 무심한 척 한 번씩 챙겨주면서 자기 수하로 만들어간다.

식사를 마쳐 갈 때쯤 성환이 지나가는 듯 말을 건넸다.

"과장님. 아침에 임상무 방에서 무슨 얘기하신 거죠?"

"별거 아냐."

"깨졌다면서요."

"누구야? 사람이라도 심어 놓은 거야? 깨지긴 개뿔."

"아니요? 아까 원모님이 말한 거 들어서 그래요."

"그냥 좀 의견충돌이 있어서 그랬지 별건 아니야."

괜히 자기가 관련된 얘기라고 느꼈는지 원모가 불안한 말투로 한마디 했다.

"과장님 제 문제라면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성환도 동조하듯이 거들었다.

"네. 그건 신경 안 써도 될 거예요."

* * *

식사를 마치고 레스토랑 문을 나서는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윤경이 마침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중이었다.

뒤에는 기획실장, 인사팀장 등 핵심부서 임원과 함께 이상현이 뒤따르고 있었다.

조성환 개인회사를 없애게 됐다고 자축이라도 했나.

아무튼 상당수 주요 임원들이 조윤경의 수하로 들어간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조윤경이 우리 일행을 발견하고는 반가운 표정으로 성환에게 인사를 건넸다.

"성환아. 너 요즘 왜 이렇게 얼굴 보기가 힘들어. 어제도 성북동에서 한참 기다렸다 갔는데."

"누나 왔다고 들었는데 미안. 어제는 야근하고 회식하느라고."

"아, 근데 이 사람들은 누구?"

조윤경이 면전에다 삿대질로 나와 원모를 가리키며 물었다.

법무팀 이상현이 재빨리 나서서 소개해주었다.

"재무팀 천태평과장입니다. 그리고……."

원모 이름을 몰라 얼버무리고 넘기려는데 원모가 허리를 90도로 숙여서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전무님! 김원모대리라고 합니다."

눈치 없는 자식.

아무것도 모르니 뭐라 할 수도 없고.

난 조윤경 낯을 보자 갑작스럽게 분노가 치밀어 인사를 건네는 것도 잊었었다.

내 이름을 들은 조윤경은 위아래로 조용히 훑으며 엷은 미소를 건넸다.

마치 '너구나'라고 하는 듯했다.

우연이긴 해도 남매끼리 그리고 친구끼리의 만남이지만 왠지 서먹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그저 몇 마디 인사를 주고받고는 각자의 길로 갔다.

* * *

사무실로 돌아오니 벌써 두 시가 훌쩍 지나 있었다.

다른 팀에서 점심 먹고 이제 오냐는 식으로 째려봤지만, 성환이 뒤따라오는 걸 발견하고는 재빨리 눈에 힘을 푸는 게 느껴졌다.

이 시간이면 엎드리고 자고 있어야 할 김부장이 안 보였다.

임상무방으로 귀를 기울이니 김부장과 둘이서 나누는 얘기가 들려왔다.

"미친놈이네요. S 주겠다는데도 말겠다고 하고."

"싫다는데 할 수 없지."

"위에다가는 뭐라고 하실 건데요?"

"뭐라고 해? 자기가 싫다는데."

그럼 그렇지. 임상무가 순순히 자기 의지대로 나한테 S를 준다고 한 게 아니었다.

의심하면서도 잠시나마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다 라고 생각했던 내가 한심했다.

남이 시킨 걸 자기가 결정한 것처럼 돌리는 스킬, 어찌 보면 저게 임상무가 지금의 자리까지 초고속으로 승진할 수 있게 한 무기였을 거다.

"네 상무님, 그럼 태평이는 A주고 원모를 B로 올리겠습니다."

"그렇게 해."

성과급이 좀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그래도 좋게 생각하자.

A면 S와 큰 차이가 나는 건 아니니.

그저 퇴사가 한 달 정도 밀리는 수준일 것이다.

* * *

며칠이 지나고 새 메일이 도착했다.

개인별 성과평가 공지가 났으니 확인해보라는 메일이었다.

다들 KPI 면담을 통해 자기 등급을 대강 아는데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회사망에 접속하여 평가 결과를 보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혼자만 들리게, 아니 자기 혼자와 나만 들리도록 작은 목소리로 환호 또는 비명을 질러댔다.

"예스"

"이런 X발."

원모를 돌아봤다.

역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접속해서 열어본 모양이었다.

자기 평가점수를 확인하고는 바로 내 쪽을 돌아봤다.

녀석은 곧 울먹거릴듯한 얼굴이었다.

성환은 미리 알기라도 했던 양 너스레를 떨며 원모를 쳐다보았다.

"오우, 원모님 B 받으셨나 봐요."

"네."

원모는 실실거리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분명 좋은 거 같긴 한데 며칠 전 성환한테 단무지 받았을 때의 그 환희에 찬 표정에는 한참 못 미쳤다.

나의 희생이 단무지 한 통, 그것도 중국집용도 아닌 김밥용 단무지에 밀렸다.

"과장님은 확인 안 하십니까?"

"난 하나도 안 궁금해."

"에이 그래도요. 그렇다고 확인도 한 번 안 해 봅니까?"

성환이 괜스레 계속해서 재촉했다.

궁금한 마음에 마지 못한 듯 마우스로 몇 번의 클릭을 했다.

열린 화면에서는 최종 평가 점수란에 S라고 적혀있었다.

'어?'

성과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지만.

그래도 S를 포기한다고 했는데도 S를 주니 왠지 기분이 좋아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옆자리 성환은 눈꼬리를 살짝 올리며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