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대스타
10시도 넘어가는데 두 놈은 통 집에 갈 생각을 안 했다.
위로는 할 만큼 해서 이제 더 앉아있기도 힘이 들었다.
"니들은 집에서 기다리는 사람도 없냐? 집에 좀 가자."
"무슨 소리예요. 한잔하자던 사람이 누군데……."
혀가 살짝 꼬인 원모가 투정을 부리듯 쏘아붙였다.
성환은 약간 곤란한 듯 얼버무렸다.
"전 좀 더 있다 가려고요."
"아니 왜? 넓은 집 놔두고."
"누나가 오늘 집에 온다고 하는 거 같아서요."
이 자식이 조윤경과 마주치기 싫어서 야근 핑계로 사무실에 남아있었던 것이었다.
판단을 유보하겠다고 했지만, 이미 심적으로는 누나가 적일 수 있음을 인정하고 있는 거다.
눈치가 빠른 건지 없는 건지 원모가 뭣 모르고 끼어들었다.
"누나라면 조윤경 전무님 말씀하신 거예요?"
쓸데없는 말 하지 말라고 눈짓을 보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왜요? 누나가 기다리고 좋지 않나? 뭐 선물이라도 주려나 보죠?"
성환이 의아한 듯 되물었다.
"식구끼리 선물이요?"
"식구끼리니까 선물이죠. 우리 누나는 저번 달에 옷도 사줬는데."
"우리 누나는 그럴 사람 아닙니다. 하나라도 뺏어가면 뺏어갔지. 절대 조그마한 사탕 한 알이라도 그냥 줄 사람 아니에요."
판단 종료.
드디어 적임을 인정한 것이다.
성환은 자세를 고쳐잡고는 추가 주문을 넣었다.
"여기 돼지껍데기 두 개요."
"너 껍데기도 먹을 줄 알아?"
"못 먹으세요? 천과장?"
이 자식이 또 취한척하면서 슬슬 말을 놓는다.
"먹으세요가 뭐냐? LA 사투리냐?"
"하여간 꼭 지적질이라니깐. 그냥 의미만 통하면 된 거지."
그래, 그냥 내가 참는다.
존대 좀 하면 어떻고 안 하면 좀 어떠냐.
잠시 후 알바생이 초벌한 껍데기를 들고 오다가 손님 발에 걸렸는지 휘청거리면서 접시를 손에서 놓치고 말았다.
접시 밖으로 탈출한 껍데기가 공중에 붕 떠올랐다 두 바퀴를 돌고 바닥에 떨어졌다.
다행히 손님한테 직접 쏟은 건 아니어서 다친 사람은 없는 듯했다.
그러나 껍데기에서 튀어나온 기름이 옷에 조금 튀었는지 선글라스를 낀 옆 테이블 여자 손님이 갑자기 소리를 꽥 지르는 것이었다.
"아이 X발! 뭐 하는 거야!"
이제 막 고등학교 졸업한 듯 앳되어 보이는 여자 알바생은 당황해서 어찌할 줄을 몰랐다.
급하게 카운터로 뛰어가 물수건을 들고 와서는 옷에 튄 기름을 닦아 주려는데 갑자기.
짝!
소리와 함께 알바생이 뒤로 나가떨어졌다.
손님이 격분해서 따귀를 걷어 올린 것이었다.
"이게 어디서 걸레를 들이대?"
"죄송합니다. 제가 세탁비라도 어떻게……."
자기가 따귀를 맞았는데도 대뜸 일어나 사과부터 했다.
그러나 여자 손님은 전혀 받아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이게 얼마짜리인 줄이나 알아? 네 월급으로 세탁비라도 될 거 같아?"
여자 손님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갖은 욕설을 다 쏟아부었다.
가게 사장은 굽신거리기만 할 뿐 알바생이 다쳤는지는 안중에도 없었다.
넘어지면서 좀 까졌는지 알바생의 팔꿈치에는 빨갛게 핏기가 돌았다.
그런데도 가게 사장은 연신 손님께 사과하라고만 다그칠 뿐이었다.
살벌한 분위기에 다른 손님들 모두 잠자코 있는 그때!
갑자기 성환이 소리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거참 입에 걸레라도 물었나. 더럽게 땍땍거리네."
여자와 동석한 남자 두 명이 성환의 말을 듣고는 벌떡 일어났다.
"뭐라고 이 새끼야? 뚫린 입이라고 못 하는 말이 없네? 더 뚫어서 아예 귀랑 만나게 해줄까?"
멘트가 아주 살벌했다.
한 명이 욕을 내뱉는 와중에 다른 한 명은 조용히 맥주병을 비우고는 거꾸로 쥐었다.
화장실 가는 척 도망가야 하는지, 일행이 아닌 척 옆 테이블로 살짝 옮겨야 할지, 아니면 성환을 도와야 할지 결정을 미처 못 내리고 있었다.
원모는 어쩌는지 보려고 슬쩍 돌아봤는데.
없다.
이 자식, 그새 내뺐다.
나까지 도망가기는 좀 그렇다.
조용히 성환에게 속삭였다.
"근처에 수행비서 있어서 이러는 거지? TV 보면 이럴 때 막 도와주러 나타나잖아."
아무리 그래도 믿는 구석이 있어서 이러는 거겠지라며 한 가닥의 희망을 걸어봤다.
"아뇨. 드라마 많이 보셨구나. 그거 다 구라에요."
덩치 두 명이 맥주병을 거꾸로 쥐고는 우리 자리 쪽으로 다가왔다.
난 이제 곧 큰일 할 사람이다.
별것도 아닌 술자리 시비로 생을 마감할 수는 없다.
'안녕, 잘 살아라' 하고 내빼려는 순간.
아까 그 선글라스 낀 여자가 덩치 두 명을 잡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른 사람들 못 듣도록 작게 말하긴 했지만, 상당히 다급한 목소리였다.
"오빠 앉아. 가만있어."
"나래야! 나서지 마! 저 싸가지 없는 자식 손 좀 보게."
"오빠들이나 제발 좀 나서지 마! 가만히 좀 있으라고!"
다행히 설득이 먹힌 듯 멈추었다.
이제 조용해진 틈을 타 이 가게를 나서기만 된다.
그러나 성환이 돌았는지 한마디를 더 내뱉었다.
"야! 덩어리들! 왜, 쫄았냐?"
덩치 두 명이 도저히 못 참겠는지 달려들려는데 선글라스 여자가 혼신의 힘을 다해 소리를 질렀다.
"제발 좀 가만히 있으라고!"
선글라스 여자가 갑작스럽게 화를 내는 바람에 덩치 두 명은 마지못한 듯 자리에 도로 앉았다.
"저 여자분 밀친 거 사과는 해야지."
성환이 선글라스 여자를 향해 알바생에게 사과하라고 다그쳤다.
그러자 그 여자는 자리에 앉아 알바생을 불렀다.
자존심이라도 상했는지 직접 가지는 않고 그저 앞으로 불러 세웠다.
알바생이 앞에 서자 앉은 채로 조용히 한마디 했다.
"미안해요."
그 한마디를 남기고.
여자는 무언가에 쫓긴 듯 덩치 두 명과 함께 가게를 바쁘게 나섰다.
가게 문밖으로 나가면서 남녀 일행들이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래야! 누가 동영상이라도 찍고 있어서 말린 거지?"
"그런 거 아냐."
"그럼 왜 말렸어?"
"오빠, 저 사람 누군지 몰라?"
"몰라 누군데? 그 새끼, 꼭 기생오라비같이 생겨 가지곤."
"천하제일 아들인 거 몰라? 얼마 전에 유라 그년이랑 스캔들도 났잖아. 괜히 천하제일에 잘못 보여서 나 이 바닥 뜨는 거 보려고 그런 거야?"
"뭐라고 저 새끼가? X됐다. 혹시 나래 너 얼굴 저놈이 알아본 거 아니겠지?"
"나도 몰라. 알아봤으면 어떻게 해?"
"괜찮아, 선글라스도 꼈고 여기 손님 아무도 못 알아봤을 거야."
사이즈 딱 나왔다.
나래가 본명이고 스타일 보니 배우보다는 가수가 맞을 것이다.
스케줄 끝나고 매니저들이랑 한잔하고 들어가려는데 이 사달이 난 것이었다.
성환이 이 자식. 영웅심에 나선 게 아니었다.
그 여자가 자기를 알아봤다는 걸 눈치채서 그랬던 게 분명했다.
옆 테이블 진상들이 나가고 안정을 찾을 때쯤 원모가 들어왔다.
비열한 자식!
마치 화장실이라도 다녀온 것처럼 바지 자꾸 올리는 척 엉거주춤 돌아왔다.
"어디 갔다가 이제 오냐?"
"화장실 좀 다녀오느라고요. 껍데기 아직 안 나왔나 보네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연기 쩐다.
"화장실 어디야? 나도 좀 갔다 오게."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검지로 주방 쪽을 가리켰다.
"저기요."
대충 얼버무린 거였다.
이 가게 화장실은 2층에 있다.
거짓말했다고 확 깨버리려다 오늘 자리가 위로의 자리인 만큼 그냥 참기로 했다.
옆자리 성환 오늘 자기가 한 일이 뿌듯한지 웃음기를 거두질 않았다.
"조대리 오늘 아주 한따까리 제대로 했어. 아주 영웅 났어?"
"영웅은 무슨 영웅. 그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겁니다."
이 자식은 항상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
어투나 뉘앙스는 들을 생각조차 안 한다.
잠시 뒤 장어집 사장이 우리 테이블로 와서는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껍데기 2인분 다시 바로 해드리겠습니다."
"천천히 주세요. 근데 알바하는 분 많이 다치신 거 같은데 괜찮으신가요?"
"쟤는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아닙니다. 천천히 주셔도 되니깐 저분 좀 챙겨 주세요."
사장은 우리 말을 듣고서는 이제야 걱정이라도 됐는지 조용히 알바생을 불러서는 주방 쪽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아까 그 손님들 돈 안 받고 보냈다."
"네?"
"너 월급에서 깐다고. 그런지 알아."
걱정해주러 가는지 알았는데, 아니었다.
"아니 왜요? 아까 그 손님 발에 제가 걸린 건데요."
"네가 엎었잖아!"
"다친 사람도 전데요?"
"누가 넘어지래?"
"넘어져서 다친 게 아니라 그 손님이 밀어서 다친 거라고요! 아까 그 손님이 사과한 것도 보셨잖아요."
사장이 더 나쁜 놈이다.
그래, 이 집은 오늘이 마지막이다.
생각 같아선 껍데기도 취소하고 지금 당장 일어나서 나가고 싶었으나 이미 입구 쪽에서 굽고 있어서 그냥 참았다.
잠시 뒤 주방 한쪽에서 끅끅대며 간신히 울음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장은 달랠 생각은 안 하고 다그치기에만 바빴다.
"왜 영업집에서 울고 지랄이야. 잘못은 지가 해 놓고."
"제가 잘못했다뇨. 밀친 건 그 여자였다고요!"
우는 와중에도 따질 것은 따지고 넘어갔다.
"됐다. 그냥 가라. 내일부터 나오지 말고."
잘못도 없는데 따귀까지 맞고 일당도 뺏긴 마당에 알바마저도 잘렸다.
어린 친구들에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사회를 물려주면서 희생만 강요하는 것 같아 기성세대로서 부끄러워졌다.
잠시 뒤 알바생이 껍데기 2인분을 들고 우리 테이블로 가져왔다.
나갈 땐 나더라도 마지막으로 하던 업무까지는 마무리하려는 프로정신이 엿보였다.
간신히 울음은 그쳤지만, 눈물을 흘렸던 자국은 아직 선명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주문하신 껍데기 나왔습니다."
성환이 걱정하는 투로 말을 건넸다.
"괜찮으세요? 많이 다치신 거 같은데."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까는 경황이 없어서 미쳐 말씀 못 드렸어요. 정말 고맙습니다."
조용히 고개를 몇 번이고 끄덕이면서 고맙다고 하고는 돌아갔다.
가까이에서 보니 어디선가 매우 낯이 익은 모습이다.
어디서 봤을까 생각해보았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떠오르질 않았다.
"원모야. 성환아 방금 그 알바생 어디서 많이 본 거 같지 않냐?"
성환이 뭔 뜬금없냐는 듯이 뚱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글쎄요……? 태어나서 오늘 처음 봤습니다."
원모도 한마디 덧붙이며 거들었다.
"내일부터도 못 볼 거 같은데요. 사장 씩씩대는 거 보니 오늘 잘릴 거 같은데."
원모놈. 이럴 때 보면 눈치 엄청 빠른 거 같다.
"나도 다신 못 볼 거 같다. 이제 이 가게 오지 말자. 사장이 아주 쓰레기네."
원모도 안타까운 듯 끄덕였다.
"그리고 애들한테도 여기 오지 말라고 해. 여기 법카 찍히면 사인 안 할 거라고 전달하고."
"넵."
이 집 매상에서 미미한 비중이겠지만, 게다가 내 돈도 아닌 법카지만 쪼금도 팔아줄 마음이 싹 사라졌다.
마지막 소주잔을 비우고 일어서려는데 알바생이 짐을 챙기고 나서는 게 보였다.
세수한 듯 눈물 자국은 안보였으나 억울하고 분한 마음은 아직 가시지 않은 듯했다.
한쪽 어깨엔 자기 몸집보다 더 큰 기타 가방을 들쳐 매고 있었다.
기타를 들쳐 맨 모습을 보고서야 떠올랐다.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가녀린 체구에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를 갖춘 가수 '리애'다.
솔로 아이돌보다는 싱어송라이터라는 수식어가 더 잘 어울리는 한 시대를 풍미했다고 할 만큼 손에 꼽힐 정도의 대형가수 그 '리애'였다.
막연히 어렸을 때부터 음악교육을 받을 정도로 여유 있는 집안에서 자랐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닌 듯.
리애는 문을 나서기 전 우리 테이블에 잠시 들렀다.
"아까는 정말 감사드립니다."
괜찮다는 데도 꾸벅 인사를 멈추지 않았다.
"아닙니다. 내일 꼭 병원 가셔서 진단서라도 받아놓으세요. 혹시 나중에 증인이라도 필요하시면 이 번호로 연락 주시고요."
내가 명함을 건네자 리애가 조용히 받고는 가게 밖으로 나섰다.
'미리 사인이라도 받아 놓을까.'라고 잠시 생각했었으나 미친놈도 아니고 너무 이상해 보였을 것이다.
그저 얼굴 한 번이라도 익혀놓고 명함 한 장 건넨 걸로 만족하자.
신기한 경험이었다
시대의 아이콘이 될 탑스타와 이렇게 마주치다니.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오늘 일을 얘기해 주고 싶다.
그럴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술자리를 끝내고 전철 타고 집에 오니 벌써 자정이 훌쩍 넘었다.
더 팔아줄 기분이 아니어서 그냥 일어나는 바람에 살짝 부족한 기분이 들었다.
냉장고를 여니 들어간 지 몇 달은 넘어 보이는 멸치볶음과 감자조림에서 역한 냄새가 진동했다.
"안주는 비록 썩었지만, 신에게는 아직 맥주 두 캔이 남아있습니다."라고 냉장고가 보고하는 듯한 환청이 들려왔다.
맥주는 유통기한이 길어서 다행이다.
시원하다 못해 위장까지 얼어붙게 할 정도로 차가운 한 모금을 넘기자 머리가 띵해질 정도로 정신이 번쩍 뜨였다.
곰곰이 생각해도 이건 아닌 거 같다.
수족 같은 놈은 팽개치고 나만 승진하는 건 말이 안 된다.
내가 비록 청렴결백하게 살진 않았어도 내 손가락들까지 안 챙기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