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성과
나한테 무슨 말로 통보해야 할지 고민했던 거였나?
C면 성과급도 거의 안 나오니 목표 종잣돈을 마련하려면 퇴사 시점이 몇 달 밀릴 수도 있다.
김부장이 위아래 입술을 말은 채 심히 곤란한 척 연기했다.
난 온 우주의 기운을 모아서 최대한 기분 나쁜 표정에 담아 노려보았다.
"무슨 일인데요. 갑자기?"
슬쩍 어깨를 움찔거리는 게 역시 찔리는 게 있는 모양이다.
"그냥 할 얘기할 게 있어서."
조용히 앞장서더니 회의실로 들어갔다.
"태평아 너도 알다시피 이번 세무조사 건도 있고 해서 우리 팀 이번에 S 못 받고 A 받았어."
일단 슬쩍 간 보며 내 눈치를 살피는 모양이었다.
"그럼 우리 중에서 C도 줘야겠네요. 몇 명이죠?"
김부장 고민하는 척하더니 힘겨운 듯 입을 뗐다.
"이번에 자금이나 IR은 실적 달성해서 원래 우리 쪽에서 C를 세 명 줘야 하는 거 내가 상무님하고 싸워서 간신히 한 명으로 막았어."
하여간 이 얍삽한 인간.
내가 모른다고 면전에서 바로 사기 행각이다.
"세 명씩이나? 제가 상무님한테 가서 따질게요. 무슨 말도 안 되는."
김부장 당황한 듯 두 손을 절레절레 저었다.
"괜찮아. 내가 다 얘기 끝내서 한 명으로 막았으니깐 신경 안 써도 돼."
끝까지 거짓말이다.
한층 밑밥을 까는 게 분위기가 좀 이상했다.
"그러시죠. 그럼 한 명 누구요? 설마 나?"
"아니 설마 너를 어떻게?"
펄쩍 뛰며 손사래를 쳤다.
그럼 그렇지.
내가 C일 수는 없지.
괜히 걱정했다.
주무과장을 C를 주는 건 회사 나가라는 얘기다.
경리과장을 곱게 내보낸다는 건 불가능하다.
이래저래 주워들었거나 직접 묻은 것들이 얼마나 많은데.
국세청 같은데 투서라도 하면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그럼 왜 부르셨죠?"
"왜긴 네가 주무과장이잖아."
오랜만의 성과평가라 기억이 안 났다.
부서원들 성과평가는 부서장인 김부장이 최종 결정을 하긴 하지만, 통상 주무과장과 협의하고 있다는걸.
임원 생활하면서 예전 직원일 때의 경험이나 기억들을 많이 잊어버렸다.
"말씀하시죠."
"그래서 말인데 이번에 원모가 C를 받아야 할 거 같아."
"네? 원모가 왜요?"
몇 달 전 세무조사 때 원모를 갈구다가 성과 가지고 농담 삼아 협박했던 게 떠올랐다.
이러다 진짜 C라도 받으면 날 죽일 놈으로 생각할 것이다.
"우리 파트에 걔밖에 없어."
"아니 왜요? 그러다 과장 승진 못 하면요?"
"그렇다고 이번에 수진이나 학형이 대리 누락시킬 순 없잖아. 다른 애들도 다 사정이 있고, KPI(핵심성과지표) 점수도 높아서 안 돼."
아무래도 마땅히 받을 만한 다른 애들이 떠오르질 않는다.
그렇다고 이대로 원모에게 마상을 입힐 수는 없다.
"다른 파트에 넘기죠."
"그건 절대 안 돼. 이게 마지노선이야."
"아무튼 전 동의 못 하겠습니다."
"태평아. 잠깐만……."
부르는 소리를 뒤로하고 회의실을 박차고 나왔다.
방법이 없지만 임상무랑 직접 얘기 좀 해봐야겠다.
자리로 돌아왔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원모 자식 인기척을 느꼈는지 재빨리 Alt+Tab을 눌렀다.
화면이 워드 파일로 바뀌고 태연하게 보고서 쓰는 척했다.
이 자식이? 확 그냥 C 때려불라!
원모가 마침 아무 일도 아닌 듯 뒤돌아서 웃으며 인사했다.
"과장님 오셨습니까?"
미친놈 오후 3시에 오셨냐니.
딴짓하다 들킨 거 같아서 말이 헛나왔나 보다.
"오셨냐니. 지금이 몇 신데. 내 자리에 맘대로도 못 오냐?"
"아니요. 어디 갔다 오셨나 해서요."
"지금 뭐 하는 중이지?"
"네, 보고서 쓰려고요."
"뭔지 한번 볼까?"
내가 컴퓨터 쪽으로 얼굴을 들이밀자 원모가 화들짝 놀랐다.
워드 파일 상단 제목 위치에는 딸랑 asdf 라고 적혀있었다.
자판 치는척하려고 영어로 놓은 것도 모르고, 왼손가락 순서대로 두드렸나 보다.
설마 화면을 보리라고는 생각 못 했을 것이다.
"아……. 이제 시작하려고요."
원모는 사람 좋은 표정으로 그저 웃어넘겼다.
그래, 이맘때에는 다 일하는 척하는 거지 뭐.
나도 그런데, 아니 난 더 심한데 애들한테 엄격하게 하면 나도 꼰대밖에 안 된다.
하물며 내가 월급 주는 것도 아닌데.
"그래, 열심히 해 봐. 아, 부장님한테 보고할 만한 것 좀 써 봐."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두 눈을 똘망똘망 뜨고 애처롭게 올려다본다.
그래!
공과사는 구분해야 하지만, 그래도 수족처럼 부리는 놈을 내팽개칠 순 없다.
"과장님 듣자 하니까 우리 팀 이번에 S 못 받았다면서요."
"나도 방금 들었어. 근데 왜?"
"아……. 아닙니다."
원모는 뭔가 말하려다가 도로 집어넣듯이 침을 꿀꺽 삼켰다.
"왜 말해 봐. 할 말 있잖아. 좋은 말할 때 빨리 말해라."
그래도 잠시 더 머뭇거리다가 할 수 없다는 듯 고개 숙이며 말을 꺼냈다.
"사실은 성과급 때문에요. 곧 결혼할지도 몰라서요. 들어갈 돈도 많을 테고."
성과급 잘 받게 해달라고 대놓고 말하고 있는 거다.
결혼 앞두고 성과급은커녕 승진까지 누락된다면?
내 일이 아닌데도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다.
정말 그렇게 되면 회사 때려침과 동시에 결혼까지 때려칠 수도 있다.
다행히 결혼한다고 쳐도 난 식장 문밖에서 소금 세례를 받을지 모른다.
옆자리 성환이 이어폰 끼고 고스톱치는 척하면서 대화를 다 엿들었는지 껴들었다.
"원모님, 축하합니다. 좋으시겠어요."
항상 이놈은 멘트와 표정이 불일치한다.
어쩜 이리도 영혼 하나 안 담고 축하 인사를 건넬 수 있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네, 감사합니다. 다 조성환님 덕분입니다."
미친놈.
성환이 뭐를 한 게 있다고 덕분이라는지.
딱히 아니라고는 안 하는 성환 놈도 이상하기는 매한가지다.
김부장하고 얘기해봐야 답정너인 듯하니 변하는 건 없을 거다.
임상무한테 직접 얘기나 한번 해 봐야겠다.
* * *
임상무는 마침 외부 일정이 있는 듯 계속 자리를 비우다가 퇴근 시간이 돼서야 사무실로 들어왔다.
바로 사무실로 따라 들어가자 마침 잘 왔다는 듯이 반겼다.
"왔어? 그렇지 않아도 부르려고 했는데."
"네. 저도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그래 앉아 봐. 잘됐네."
"네."
임상무는 냉장고 쪽으로 가더니 문을 열고 시원한 사이다 두 캔을 꺼냈다.
"무슨 말 하려는지 알아."
뭐지? 독심술이라도 하나?
"네?"
"성과평가 때문에 온 거 아냐?"
역시 몇십 년 짬밥을 꽁으로 먹은 건 아니었다.
불만을 내비치려고 미간 사이를 잔뜩 찌푸린 채 대답했다.
"맞습니다."
"알았어. 이번에 우리 팀 S 배정 한 명 받았는데 너 줄 거니깐 걱정하지 마."
마치 공치사라도 들으려는 듯 내 대답을 기다리는 얼굴이었다.
웬일이지? 미친개가?
엄청나게 대들었는데도 저러는 거 보면 분명 어디선가 압력이라도 있었던 모양이다.
임상무가 절대 먼저 들이밀었을 리는 없다.
내 성과평가 얘기가 나오자 원모 생각을 잠시 잊었었다.
"제 거 여쭤보러 온 게 아니라 원모 얘기 좀 하려고요."
"그래? 원모가 왜?"
"김부장이 원모 C 준다고 하길래요."
"그런데?"
뭐 그런 걸로 얘기까지 하냐는 식이었다.
"원모 이번 세무조사 때 집에도 제대로 못 가고 진짜 고생한 거 아시잖아요."
"모두가 같이 고생한 거 아니었나? 게다가 김부장이 결정할 사항이고."
성과평가는 직속상관인 김부장 재량인데 왜 자기한테 따지러 오냐는 식이었다.
"올해 우리 파트가 고생 제일 많이 했는데 할 일 없이 빈둥대는 자금이나 IR 애들한테 C 하나 더 얹혀 주면 안 될까요?"
"누가 고생한 거 모르나? 그리고 딴 파트는 노는 줄 알아?"
이 정도 얘기했는데도 반응이 이렇다면 뾰족한 방법이 없다.
원모 얼굴을 어떻게 볼까.
임상무 방을 나오니 퇴근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대부분 집에 가고 자리에 없었다.
역시 원모만 일하는 척하면서 내가 퇴근하길 기다리고 있었다.
눈치 보지 말고 퇴근 좀 제때 하라고 해도 맨날 저 모양이다.
"과장님, 퇴근 안 하십니까?"
찔리는 마음에 도무지 얼굴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저 딴 데 보는 척 대답할 수밖에.
"가야지. 근데 넌 왜 안 가?"
"보고서 좀 쓰려고요."
말 듣자마자 원모 컴퓨터 쪽으로 고개를 돌려서 화면을 쳐다봤다.
역시 워드파일을 켜놓긴 놓았는데 맨 위에 제목란에는 그대로였다.
asdf 라고 적혀 있는 게 한 글자도 늘긴커녕 고치지도 않았다.
이게 뭐라고 그냥 참자.
C 받고 날 원망할 수도 있으니 가능하면 건들지 말자.
"집에 안 가냐? 나 기다리지 말고 때 되면 알아서 그냥 좀 가라니깐!"
"참나, 기다린 거 아니라니깐요."
원모가 평상시와 다르게 정색하고 달려들었다.
"안 기다렸으면 뭐 한 거냐? 보고서는 개뿔. 아침부터 그대로면서. 뭐라고 썼는지나 봤냐?"
원모는 이제야 화면을 한 번 살펴보더니 뒷머리를 긁적였다.
쪽팔리는 건 알았나 보다.
"그냥 좀 전에 부장님하고 KPI 면담해서요."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는 게 부장한테 언질이라도 들은 모양이었다.
"부장님이 뭐라는데?"
"얘기 들었습니다. 이번에 C 하나 줘야 하는데 받을 사람이 저밖에 없다고요."
"방법 찾고 있으니깐 좀 기다려봐."
"아니에요, 과장님. 방금도 그걸로 상무님 방에 들어갔다 오신 거 다 알아요."
'너도 할 만큼 한 건 알겠다' 정도의 표정이랄까.
아니면 이미 포기했는지 달관한 듯한 인상을 풍겨왔다.
"그러니깐 좀 기다려 보라니까."
"알겠습니다. 그래도 과장님께 한 말씀은 드리려고 기다렸습니다."
"말해 봐. 결론부터 아니 결론만."
"아, 이 와중에도 그러십니까?"
또다시 정색하고 달려들었다.
내 성격에 안타까운 건 안타까운 거지만, 공감하는 척하며 같이 힘들어하는 건 도저히 안 되겠다.
그건 내 스타일이 아니다.
"징징거리는 거 듣기 싫으니까 그러지."
"신경 써 주신 거 충분히 잘 알고 있으니깐 저한테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된다고요."
뭐지?
애틋한 표정을 짓는 이유는 뭘까?
자기가 말해놓고도 상당히 만족해하는 거 같았다.
그냥 포기한 건가?
내일 사표라도 던질 생각인가?
도무지 모르겠다.
"집에 바로 갈 거냐?"
"좀 아깐 가라면서요?"
"한잔하고 가야지."
"네."
힘없이 대답했다.
짐을 챙기려는데 뜬금없이 옆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왔다.
"저도 가시죠."
"아이 깜짝이야. 뭐야?"
성환이었다.
당연히 퇴근했는 줄 알고 옆자리를 제대로 안 봤었나 보다.
아까부터 재킷 뒤집어쓰고 엎드린 채 자고 있다가 방금에서야 깬 모양이었다.
물론 둘 사이의 대화도 다 들었을 테고.
* * *
생각지도 않은 번개가 이뤄졌다.
회사 근처 장어집에서 화로를 사이에 두고 세 명이 둘러앉았다.
시간도 그렇고 장소도 2차에 어울리는 곳인 만큼 이미 손님들 대부분이 얼큰하게 취해 있었다.
옆 테이블에 상당한 미모의 여자가 야밤에 선글라스를 낀 채 장어를 흡입하고 있었다.
오늘따라 물도 좋다.
장어는 냉동이긴 했지만, 주문 즉시 초벌로 구워서 테이블로 가져다주었다.
숯불에 이미 반 이상 검게 그을렸지만 매콤하게 양념을 휘감은 장어 한 조각은 부산 기장 바닷가 앞에서 먹었던 팔딱팔딱 뛰던 장어보다도 훌륭했다.
"축하합니다."
장어를 집자마자 성환이 건넨 한마디였다.
미친놈. 아까 뻔히 들었으면서 축하한다는 말이 나올 수 있지?
"방금 뭐라고? C 받는다는데 축하한다니?"
"그거 말고요. 결혼하신다면서요."
"아침에 벌써 들었잖아. 그리고 축하한다고 이미 말했을걸?"
"그랬나?"
생전 처음 들어본다는 듯이 양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고는 괜히 민망한지 술잔을 들며 외쳤다.
"그런 의미에서 건배!"
헐. 건배래!
분위기 파악을 못 하는 건지 개념이 없는 건지 분간이 안 됐다.
술자리를 드라마로 배워서 이런 것일 거다.
나 같으면 욕 한번 뱉을 법한데 원모는 그저 그러려니 하는 듯했다.
"도대체 두 분 왜 이렇게 죽상이시죠? 그까짓 성과평가 좀 나쁘게 받으면 뭐 큰일이라도 나나?"
역시 다이아몬드 수저를 물고 태어난 자가 느낄 수 있는 감정은 아니었을 것이다.
"넌 당연히 모르겠지. 그게 기분이 얼마나 뭐 같은지. 성과급도 깎이는 데다가 승진 누락도 될 수도 있어."
원모의 심정을 대변하듯 내가 답해주었다.
그러나 성환은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 듯한 표정이다.
"그건 잠깐 기분 좀 나쁘면 되는 거고 결혼은 일생을 통틀어 가장 좋은 일인데 비교할 걸 비교하셔야죠."
딱히 반박할 말이 떠오르질 않았다.
"좋아하는 사람과 결혼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행복인지 모르나 봐. 결혼 앞두고 겨우 성과평가 가지고 이러는 게 난 도무지 이해가 안 가."
성환은 열변을 토하듯 하더니 소주 한잔을 입속으로 털어 넣었다.
그렇다.
각자 자기 나름대로 사정이 있는 거고 섣불리 경중을 비교할 수 없다.
비교할 필요도 없고.
"그래 네 말이 맞다."
더 이상 성과평가 가지고 왈가왈부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