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손안의 재벌-37화 (37/191)

37화 희생양

세무조사와 부당거래 보도 건에 대한 회장보고는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대표이사나 임상무는 성환 개인 회사를 없애거나 유지하는 건 상관없고 오로지 회장 심기만 안 거스르면 됐으므로, 바뀐 결과에 대해서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직접적인 이해관계자인 성환은 달랐다.

사무실 자리로 돌아오자마자 성환이 다짜고짜 따지듯이 물었다.

"과장님 회사입니까? 없애라 마라 아주 그냥 맘대로시네요. 당초 얘기한 거랑 완전히 다른 거 아니에요?"

왜 내 맘대로 결정해서 대답했냐고 책망하는 거였다.

어느 정도 이해는 갔다.

나중에 그룹을 물려받을 때 재원으로 쓸만한 알짜배기 회사를 없애버리자고 했으니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도 맞은 기분이었을 거다.

"이미 까진 패라는 걸 모르겠어?"

"그게 무슨 말이죠?"

"내 패를 이미 상대방한테 보여줬는데 그걸로 승부를 걸 수 있겠냐고?"

성환은 도무지 내 말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고개를 휘저을 뿐이었다.

"이미 그런 방식으로 승계하겠다는 걸 모두가 알게 되었는데 미쳤다고 그대로 하겠냐고?"

"그렇긴 하죠."

"어차피 버린 패라고. 회장님 말씀이 맞아. 어차피 버린 패를 들고 있어 봐야 아무 소용없어. 딴 걸로 돈을 딸 생각을 해야 하는 거라고."

고스톱 용어를 섞어서였는지 성환은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대강 무슨 의미인지는 파악한 것으로 보였다.

"그럼 어떻게 합니까?"

성환은 불안해하고 있었다. 다 잡아놓은 고기를 뺏기기라도 한 것처럼 그룹 승계의 큰 그림이 날아갔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방법을 찾아야지. 언제나 그랬듯이 방법을 찾게 될 거야."

물론 내가 찾을 건 아니였다.

나의 말에 성환은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은 모양이었다.

승계방법만 달라졌을 뿐 결과는 같을 거라는 믿음에 한결 마음이 놓인 것이었다.

이성적으로는 누나를 믿어야 하지만 지금 돌아가는 판을 보면 이제는 누나가 바로 자신의 최대의 적임을 직감하고 있는 듯했다.

"그건 그렇고, 똥이니 쌌느니 도대체 무슨 얘기들을 하신 거죠? 대강은 알아듣겠는데 도무지 뭔 말인지……."

"그런 게 있어. 화투패 안에 인생이 다 있는 거야."

더 못 알아듣겠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도 성환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회장님 오랜만에 웃으시던데요."

"뭐? 언제 웃으셨지? 난 못 봤는데."

"아까 고수 어쩌고 할 때요."

"헐……. 그게 웃으신 거라고?"

"그 정도면 박장대소죠. 그런 거 몇 년 만인 거 같은데요."

나도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어서 잘은 모르겠으나 이들의 관계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부자지간의 관계와는 사뭇 다르다는 것은 확실해 보였다.

"그러지 말고 너도 이참에 배워 봐라. 고스톱."

"에이 시골 할머니들이나 하는 걸 제가 왜요?"

말도 안 된다는 듯이 손사래를 쳤다.

그러면서도 약간 궁금하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요즘은 인터넷으로 젊은 사람들도 많이 치거든. 그리고 좀 배워 가지고 가끔 회장님 상대도 해드리고 그래라."

"그런 거 같이할 사이는 아닙니다."

갑자기 안색을 바꾸더니 정색을 했다.

"얘가 아직 모르네. 판돈은 정하기 나름인데. 나중에 계열사 같은 거 걸고 해 봐. 혹시 알아? 이기면 진짜로 줄지."

이제야 관심이 커졌는지 눈빛이 말랑말랑해졌다.

성환은 바로 노트북을 켜고 인터넷 창을 열었다.

내가 불러준 사이트로 접속해서 회원가입도 하고 게임 룰을 익히기 시작했다.

그러나 몇 시간도 안 되서 바로 후회가 밀려왔다.

근무시간 중에 이어폰도 안 끼고 소리는 최대치로 올린 채 종일 붙잡고 있었다.

그냥 혼자하면 될 걸 수시로 툭툭 쳐가며 물어본다.

"뻑이 뭐에요?"

"비광은 왜 2점인가요?"

질문 지옥이 시작되었다.

괜히 하라고 했다.

귀찮다고 그만 좀 물어보라고 다그치는데도 연신 질문질이다.

"쪽도 피 한 장 가져올 수 있나요?"

슬슬 화나려고 한다.

그래도 참자.

그냥 무시하고 말자.

내가 대답을 안 하자 뒤를 돌아 원모를 찾았다.

"원모님 쪽도 피 원래 주는 거예요?"

원모가 곤란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면서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전 고스톱 칠 줄 모르는데요."

내가 홱 돌아 원모를 노려봤지만, 원모는 은근슬쩍 눈을 깔고 시선을 피해버렸다.

얍삽한 놈.

저놈 분명히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거다.

나중에 할 줄 아는 거 밝혀지면 그땐 아주 뭉개버릴 테다.

퇴근 시간이 지나고 하나둘씩 사무실을 나서는데 성환은 여전히 삼매경 중이었다.

세무조사 때도 절대 안 하던 야근을 다 한다.

퇴근 시간이 한참을 지나도록 일어날 생각을 안 하고 노트북만 붙잡고 있었다.

잠시 뒤 마우스 던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씨발 쌌다."

역시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인가보다.

성질머리하고는.

게다가 똥 사는 데도 일가견이 있다.

* * *

조회장의 보고 후 며칠이 안 되어서 기자회견 일정이 잡혔다.

대표이사가 나서서 보고해도 될걸 조인철 회장이 직접 마이크를 잡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회장이 직접 기자회견에 나선다는 소식에 온갖 내외신 언론사들이 앞다투어 몰려와서는 회견장을 빼곡히 채우게 되었다.

주총 대응을 주로 맡아온 우리 팀은 진행요원 역할을 부여받아 포토라인을 지키고 있었다.

약속된 시간이 되자 조인철회장이 등장했다.

역시 몇십 년은 더 된 공장 작업복 차림에 구멍 난 구두를 신고 있었다.

게다가 구두는 좌우가 바뀐 상태였다.

오래 신으면 구두가 한쪽으로만 닳게 되므로 좌우를 바꿔 신음으로써 균형을 맞춘다는 소문이 사실인 모양이다.

역시 조크루지다.

뉴스 댓글에 다 쇼다, 구라다 하는 건 나는 안 믿는다.

조회장은 찐이다.

조회장의 등장과 함께 연이어 터지는 플래시 때문에 도무지 눈을 제대로 뜰 수조차 없었다.

간단한 인사와 함께 연단에 준비한 문서를 꺼내 놓고는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천하제일 그룹을 아껴 주신 주주 및 채권자 여러분, 그리고 국민 여러분께 우선 심려를 끼쳐드린 점 대단히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저희 천하제일 그룹은 제 자녀 회사에 대한 일감 몰아주기 등의 의혹에 대해 조사에 성실히 응할 것이며 재발 방지를 위해 해당 법인을 청산할 예정입니다. 아울러 앞으로는 더 이상 이와 같은 의혹을 받지 않도록 관계사 간 거래에 대해 투명성을 제고하도록 노력할 것을 약속드리는 바입니다."

예상치 못한 강력한 대책 마련에 기자들이 연신 손을 들며 질문하려 했으나, 발표를 마친 조회장은 바로 회견장에서 퇴장해 버렸다.

역시 그날 천하제일 뉴스는 저녁 뉴스 메인을 장식했다. 그룹의 대책에 대해서는 인터넷상에서 찬반 논란이 거세게 일었다.

그래도 역시 예상 밖의 강력한 재발방지 대책 덕분에 어느 정도는 그룹에 대한 악화 여론이 누그러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회장의 결단에 힘입어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막대한 징벌적 벌금을 맞긴 했지만, 경영진의 구속을 피할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다만, 천하제일개발과 가장 거래가 많았던 콘도/레져사업을 담당하던 계열사 대표이사가 배임혐의로 구속수사를 받게 되었다.

검찰로부터 피의자 조사를 받으러 가는 날 자신의 운명을 직감이라도 한 듯 계열사를 돌아다니며 작별 인사를 했다고 한다.

자기가 십자가를 멜 테니 꼭 자기와 가족들을 챙겨달라고 시위를 한 것이었다.

이 정도까지 했는데도 안 챙겨준다고 하면 다음에 이렇게 총대 메는 경영진이 아무도 없을 것이다.

따라서 회사에서는 어쩔 수 없이 뒤를 봐줄 수밖에 없었다.

배임건은 이렇게 계열사 대표이사 한 명이 구속되는 선에서 적당히 마무리되었다.

구속된 임원이 불쌍하기는 했지만, 어차피 자기가 선택한 거다.

게다가 자기는 물론 자녀들까지 최소한 중산층 이상의 삶을 살아가도록 보장까지 받았다.

나는 물론 선택하지 않았을 테지만, 남들의 선택에 대해서 내가 옳다 그르다 할 입장은 안 된다.

서로의 입장과 가치관이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 * *

빡센 세무조사가 모두 끝나고 한동안 정말 한가한 시기를 보내게 되었다.

이맘때면 으레 저마다 할 일이 없으면서도 열심히 일하는 척할 때다.

놀고 있다는 걸 상사가 알기라도 하면 자질구레한 일이 떨어질 수도 있고, 곧 다가올 성과평가에도 전혀 도움이 안 되기 때문이다.

예전엔 일이 없을 땐 사실 '이렇게 월급 받아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일을 찾아서 하진 않았지만, 최소한 일하는 척이라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다.

받는 만큼만 하면 된다.

게다가 월급은 절대 넉넉히 주는 게 아니므로 결국 조금만 일하면 되는 거다.

사실 월급은 업무에 대한 대가라기보다는 자기의 시간을 파는 대가이기 때문에 그 시간 동안 회사 일을 안 한다고 해서 월급 루팡이 되는 건 아니다.

일없을 땐 당당히 놀면 된다.

그게 마음먹은 대로 잘되지는 않긴 하지만.

그래도 지금의 난 상관없다.

마음먹은 대로 하면 그만이지 굳이 일하는 척 안 한다.

자금 파트 두 명이 내 옆으로 지나가면서 컴퓨터 화면을 한번 흘겨보는 게 느껴졌다.

이어서 조용히 한마디씩 하며 씹는다.

"천과장 봤어? 아예 대놓고 종일 인터넷쇼핑이네."

"냅 두세요. 인사팀에서 컴퓨터로 뭐 하는지 다 지켜본다는데 저러다 폭망하겠죠. 거기다 지금 성과평가 기간인데요."

"아무리 그래도 옆에 조성환님 있는데도 저 지랄이야."

"지가 윗사람이라고 아주 난리도 아니라는데요? 반말 찍찍해대고."

"또라이 아냐? 어떻게 자기 밑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

"그러게요. 설령 그렇다 쳐도 언제까지 조성환님이 지 밑에 있을지 알고."

안 들릴지 알고 뒷담화 까는데 다 들린다.

신경 쓰지 말자.

내 컴퓨터 화면을 지켜보든 말든 나랑은 상관없다.

부러우면서도 차마 시도조차 해볼 생각은 못 하고 욕만 내뱉고 있는 거다.

그저 정신 승리할 뿐이다.

출납직원이 앞쪽에 김부장 자리로 와서는 조용히 불렀다.

"상무님이 부르십니다."

"지금?"

임상무가 찾는다는 말에 김병국부장 벌떡 일어나서는 서류뭉치를 들고 나간다.

자금 파트나 IR 파트의 부장들도 이어서 임상무 방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평상시와는 뭔가가 좀 달랐다.

가만히 귀를 기울여보니 성과평가에 대한 얘기 중이었다.

임원과 부서 단위의 KPI(핵심성과지표), 즉 성과평가가 한창 진행 중이었는데, 결과가 나온 듯했다.

"재무팀 이번에 S 못 받았어. A야."

"아니, 왜요?"

임상무의 통보에 김부장이 놀란 듯 반문했다.

전통적으로 다른 부서와는 달리 재무팀은 S를 주로 받아 왔었다.

재무팀에게 A라는 평가는 좋은 평가가 아니었다.

"아무래도 세무조사 때문이지 뭐."

"우리가 잘 막은 거잖아요."

"그걸 누가 알아? 결과만 보면 100억이나 추징당한 건데. 아무튼 추징도 크게 당했으면서 우리 부서가 잘했다고 하기가 좀 그렇긴 해."

임상무의 말을 듣고 있던 자금파트장이 불만 가득한 말투로 말했다.

"저희는 세무조사랑은 별 상관없는데요."

자기 파트 일도 아니면서 전체팀 일이라고 싸잡아서 평가받는 게 억울한 모양이었다.

예전에 실적 안 좋을 때 우리 덕 본 건 생각도 안 하고…….

하여간 저런 사람들 꼭 있다.

IR 파트장도 자기들 올해 목표 충분히 달성했다면서 궁시렁거렸다.

제법 긴 시간 동안 파트별로 논공행상이 이어지자 임상무가 정리하듯 말했다.

"됐고. 일단 우리 팀 A니깐 C는 3명 이상 줘야 해. 파트별로 한 명씩 골라 봐. 그리고 S는 팀 전체에서 1명 줄 수 있는데, 그건 내가 결정할 거니까 신경 끄고."

개인 성과는 우선 부서 성과에 연동이 된다.

부서 성과가 좋으면 상대적으로 개인성과도 좋은 점수를 받는 인원을 늘릴 수 있는데, 성과가 좋지 않으면 반대로 개인성과도 좋은 점수받는 인원이 줄기 마련이다.

어쩔 수 없이 C를 줘야 하지만, 그 점수를 받는 사람은 상당한 타격을 입을 거다.

'나보고 나가라고 하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이렇게 심리적인 타격은 물론이고 보상 측면에서도 당장 올해 성과급과 차기 연봉 인상률이 줄어든다.

게다가 승진에도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송지환 과장이 있으면 좋았겠지만, 중국 청도로 발령 난 바람에 방패막이가 사라졌다.

부서원 중 누구 하나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

예전 생에서는 남들 일에 관심이 없어서였는지, 누가 무슨 성과를 받았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기억나는 게 있다면 올해 내가 S를 받고 조기 승진한다는 것.

6개월이 넘도록 부하직원이자 멘티인 조성환 대리를 떠받들고 모시던 대가였었다.

그러나 이번엔 좀 다르긴 하다.

S를 못 받을 수도 있을 거다.

물론 지금 내 입장에 승진은 크게 상관없지만, 성과급이 달라진다는 게 문제였다.

S를 받으면야 늘어나는 성과급으로 퇴사 시점을 조금은 앞당길 수 있기 때문이다.

자리로 돌아온 김병국부장이 파티션 아래 머리를 처박고는 쥐어짜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누구를 C를 줘야 하는지 고민 좀 될 거다.

자기가 욕을 안 먹으면서도 누구라도 납득할 만한 그런 평가 결과.

사실 그런 건 없다.

다 자기 처지와 사정이 우선이지 납득이고 말고의 여지는 절대 없다.

오전 내내 자리에서 꿈쩍도 안 하고 고민 또 고민하는 모양이었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해가 뉘엿뉘엿해질 때쯤 김병국부장 고개를 들어 올리더니 나를 찾았다.

"태평아, 잠깐 시간되냐?"

헐. 나였어?

설마 나한테 C 주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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