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보고
지주사 의사결정 안을 들고 조인철회장에게 보고할 일만 남았다.
사안의 중대성을 감안하면 대표이사가 보고하는 게 맞았으나 언론에서 하도 뭇매를 맞아서였는지 도저히 혼자 보고할 엄두가 안 나는 모양이었다.
대표이사는 임상무에게 부당거래 건에 대해 보고하면서 연관 있는 세무조사 건을 함께 묶어서 보고하자고 하였다.
마침 오전에 최종 세무조사 결과통지까지 받았기 때문이었다.
통지서에는 당초 200억에 한참 못 미치는 100억 정도가 추징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사후절차를 통해서 적극적으로 대응해서 가까스로 반 정도에서 막은 것이었다.
임상무는 자신이 제물로 받쳐질게 뻔한테 도무지 피할 방법은 없고 미치고 팔짝 뛸 기분이였을 것이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자존심도 구긴 채 성환을 찾았다.
"혹시 조성환님이 실무책임자이니 회장님 보고할 때 배석하심이……."
무슨 의도인지 알아들은 듯 성환이 웃으며 답했다.
"설마 깨질까 봐 걱정하시는 겁니까?"
임상무 그저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성환은 호의라도 베푸는 마냥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의 보고 건을 가지고 대표이사, 담당임원, 담당과장과 대리가 같이 들어가는 희한한 상황이 되었다.
* * *
천하제일 그룹 50개 이상의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는 조인철회장은 경제인연합회 역할까지 겸하고 있어서였는지 도무지 시간을 뺄 수가 없었다.
심지어 보고진에 아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데도 겨우 15분간의 시간만이 주어졌다.
꼭대기인 21층 회장 집무실.
말로만 들어봤지, 오늘 처음 올라가 봤다.
분명 건물 안의 모든 엘리베이터에는 21층 버튼이 있었지만, 평상시에는 아무리 눌러봐야 불이 들어오질 않았다.
허가된 자에 한에서 미리 약속된 시간에만 카드를 대고서야 비로소 21층 버튼을 누를 수 있다고만 들었었다.
회장 보고시간 30분 전에 임상무와 성환과 함께 대표이사실에 들어가 대기했다.
대표이사는 불안한 마음에 이미 보고했는데도 이것저것 꼬치꼬치 캐물었다.
혹시 회장이 갑자기 툭 물었을 때 바로 대답할 수 있도록 예상 Q&A를 준비하고 있는 것이었다.
보고시간 10분 전이 되어서야 대표이사가 숨을 고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슬슬 올라갈까요?"
앞장서는 대표이사 뒤를 당담임원 임상무와 담당 실무진인 나와 조성환이 뒤따라 들어갔다.
20층 엘리베이터에 들어가서는 대표이사가 자기 사원증을 카드면에 대고 21층 버튼을 눌렀는데 버튼에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사원증을 뒤로도 대보고 앞으로도 대보고 21층을 계속 눌러봐도 여전히 불이 들어오질 않았다.
당황한 대표이사가 내리더니 집무실 안쪽에 앉은 비서를 찾았다.
"김 비서, 왜 안 눌러지지? 얘기된 거 아니었어?"
"통보하고 확인까지 받았는데요. 다시 한 번 확인해 보겠습니다."
당황한 비서는 회장실 비서한테 바로 전화를 돌렸다.
몇 마디 주고받더니 대표이사에게 전달했다.
"아직 오찬 손님께서 안 나가셨다고 합니다. 나가시면 연락드린다고 합니다."
"에이! 비서실 놈들 미리 좀 알려주지……. 하여간 그놈들."
대표는 우리들 앞에서 모양 빠지게 체면 구겼다고 생각해서였는지, 괜히 비서실 탓을 하며 궁시렁거렸다.
20분을 기다려도 연락이 없자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한참을 더 기다리고 나서야 전화벨이 울렸다.
"대표님. 올라오셔도 됩니다."
이제야 대표이사가 사원증을 대니 21층 버튼이 눌러졌다.
겨우 한 개 층 올라가는 게 이렇게까지 힘든 여정이 될 줄은 몰랐다.
그만큼 20층과 21층 사이엔 큰 벽이 존재했다.
그 벽이 오너와 전문경영인의 차이를 실감 나게 해 주었다.
엘리베이터가 열리자마자 데스크가 나오고 한가운데에 직원이 앉아 있었다.
로비층 데스크 직원과는 응대 방식이 사뭇 달랐다.
대표이사가 오든지 말든지 앉은 채 그저 손짓으로 들어가라는 시늉만 할 뿐이었다.
그러나 대표이사 뒤로 성환이 뒤따라온 것을 뒤늦게 확인하고는 화들짝 놀라며 일어나 허리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조성환님. 같이 들어가시는 거였습니까?"
"네, 대표님 보고에 배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럼 미리 알려 주시죠. 아님 그냥 올라오시지 그러셨습니까?"
자기 사원증으로는 어디든 출입 가능한데, 뭐 하러 기다렸냐고 묻는 것이었다.
"개인적인 것도 아니고 보고 자리니까요."
이 자식이 지 카드 대고 들어가서 기다려도 될 걸 괜히 왔다 갔다 똥개훈련만 시켰다.
데스크 왼쪽에 있는 문을 열고 긴장한 채 들어갔는데 회장 집무실이 아니었다.
비서실을 포함한 직속 부서 직원들의 업무공간으로서 회장실에 가려면 여기를 통과해야만 하나 보다.
구중궁궐도 아니고 겹겹이 싸고 있는 구조인가.
비서실을 지나니 또다시 데스크가 나왔는데 여기가 진짜 회장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는 부속실의 근무공간이었다.
고졸 여직원 출신으로 유일하게 임원 승진한 케이스인 부속실장이 부하직원 두 명과 함께 앉아 있었다.
부속실장 역시 대표이사는 안중에도 없고 조성환을 보고는 반갑다는 듯이 인사했다.
"조성환님, 이렇게 업무로 뵈니 더 반가운데요."
"네. 저도요."
말과는 상반되게 전혀 반갑지 않은 표정으로 영혼없이 묻고 답하는 걸 보니 둘 사이에 뭔가 사연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한편 부속실장 자리 옆에는 엘리베이터가 한 기 있었다.
주차장과 21층만 연결된 엘리베이터가 있다는 소문이 사실이었나 보다.
회장이 매일 같은 건물에 출근하는데도 한 번도 마주치지 못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예전 사옥에서 출근할 때마다 로비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자들과 마주치는 게 너무 싫었던 나머지, 신규 사옥 지을 때는 누구도 부딪치지 않게 설계했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떠올랐다.
부속실장이 회장 집무실을 두 번 두드리자 인기척이 들려왔다.
"들어가십시오."
안내받은 문을 열자 또다시 평범하기 그지없는 사무실이 나왔다.
도대체 몇 겹이야!
무슨 원한을 얼마나 많이 샀길래 이렇게 겹겹이 둘러싸여 있는 거지?
짜증이 마구마구 솟구쳤다.
사무실 가운데에는 80년대 영화에서나 보던 낡아빠진 파티션이 한 줄 놓여 있었다.
그사이에 머리가 희끗희끗한 한 분이 양손 검지를 치켜든 채 독수리 타법으로 고스톱 게임에 열중하고 있었다.
운전기사 대기실이었나 보다.
아무리 기사라고 해도 그렇지 이렇게 낡아빠진 책상과 의자를 주고 해도 좀 너무한 듯했다.
"쌌네. 쌌어, 이런."
똥이라도 쌌는지 적나라한 리액션이 절로 튀어나왔는데 소리가 커도 너무 컸다.
회장이라도 들으면 어떡하려고 이 기사분이 보통내기가 아닌 듯했다.
그런데 갑자기 대표이사가 끼어들더니 맞장구를 쳤다.
"시원하시겠습니다."
뭐지 이 뜬금없는 멘트는?
게다가 대표이사는 물론이고 임상무와 조성환까지 90도로 허리를 접어 인사했다.
잠시 멍한 순간이 지나고 깨달음이 찾아왔다.
자세히 보니 공장에서나 입는 작업복 잠바를 걸친 채 열심히 인터넷 화투를 즐기고 있던 그 사람이 바로 조인철 회장이었다.
현장 방문 때나 언론에 비칠 때는 보긴 했으나 당연히 쇼하는 줄로만 알았지, 평상시에도 이러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회귀 전 임원 때는 집무실에서 조회장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조회장은 건강상 이유로 회사에 나오지 않고 자택에서만 가끔 보고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조회장은 이번 판을 졌는지 화가 잔뜩 난 얼굴로 마우스를 던지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야 우리가 온 걸 인지했는지 쓱 한번 보고는 파티션 뒤 탁자 쪽에 가서 앉았다.
연식만 오래되어 보일 뿐 우리 사무실에 있는 탁자와 크기나 모양이 거의 똑같았다.
아마도 자기가 예전에 쓰던 집기 비품을 아직까지 그대로 쓰고 있는 것일 거다.
역시 조크루지란 별명은 허명이 아니었다.
회장이 앉은 테이블 오른쪽 끝에는 투명색 재떨이가 놓여 있었다.
꽁초는 한 개비도 없는 데다가 냄새마저 전혀 나지 않는 게 담배 끄는 용도가 아니었다.
갑자기 몇 달 전 회의 때 이마에 반창고 두 개를 붙인 비서실장이 떠올랐다.
그렇다.
저건 집어던지려는 용도다.
대표이사가 출력한 보고자료를 건네고는 준비한 멘트를 술술 읽어갔다.
세무조사는 수많은 이슈가 있었음에도 국세청의 회유나 합의도 거절하고 원칙대로 대응해서 200억 추징될 걸 100억으로 막았다는 것이었다.
부당거래 언론보도 건에 대해서는 앞으로는 당분간 조성환 개인회사와의 거래를 중지하고 상황을 지켜보면서 적절한 재개 시기를 살펴보겠다고 보고했다.
말하면서도 힐끗힐끗 조회장 표정을 살피는 게, 재떨이라도 날아올까 봐 걱정되서 그런 것 같았다.
능구렁이 같은 대표이사는 보고하면서 일부러 주어를 생략했다.
회장의 반응을 보고 분위기가 좋으면 자기가 지시한 거라고 하고 안 좋으면 담당 임원이나 실무진한테 떠넘기려고 하는 거였다.
하긴 여간 보통내기가 아니니 그런 식으로 대표이사까지 승진했을 것이다.
고민에 빠진 듯 듣고만 있다가 한참만에 조회장이 짜증 섞인 한마디를 내뱉었다.
"똥 싼 거 먹으면 피 두 장씩 가져가나?"
아까 똥 사면서 결국 진 판에서 아직 헤어나오지 못한 것이다.
얼핏 봤을 땐 깔린 똥 쌍피만 먹으면 바로 날 수 있는 판이었다.
그러나 하필이면 싸는 바람에 결국 피 두 장까지 뺏기고 진 것이다.
그 정도면 충분히 짜증 날 법했다.
대표이사와 임상무가 대답 못 하고 주저하는 듯하자 할 수 없이 내가 대답했다.
"동네마다 다른데 두 장 주는 동네가 더 많습니다."
"원칙이 뭐지?"
"원칙은 없습니다. 시작할 때 정하면 그게 원칙이죠."
"자네 고스톱 좀 아는 것 같군."
"네. 저희 집 가훈이……. "
아차! 몇 마디 주고받다 집안 내력까지 발설할 뻔했다.
뭔 소린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다는 듯이 성환은 연신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었다.
"이대표 아까 원칙대로 했다는데 그 원칙이란 게 뭔가?"
"네 원칙이란 음……."
수많은 예상 질문과 답변을 준비했어도 실전에선 항상 빗나가는 법이다.
예상치 못한 질문에 당황한 듯 말문이 턱하고 막혀 버렸다.
난처한 표정의 대표이사가 눈짓으로 도와달라 요청해 왔다.
이럴 때를 대비해 담당 임원과 실무진을 대동한 거니 나서서 답변해 줘야 했다.
성환이 때마침 나서 주었다.
"적당히 타협해서 임시방편으로 덮어놓기보단 좀 손해를 보더라도 정석대로 가는 게 원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다 싸서 피 두 장까지 뺏기면? 차라리 쇼당쳐서 무효로 만들면 손해를 아예 안 볼 수도 있지 않나?"
절묘하다.
이 상황을 그대로 고스톱판에 비유했다.
고스톱을 모르는 성환은 영문을 몰라 갸우뚱거리는데 회장이 알기 쉽게 풀어줬다.
"그러니까 원칙을 지키면 회사에 더 큰 손실을 가져올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걸 따를 거냐고."
"네. 그건 어쩔 수 없는 희생이라고 생각합니다."
"회사의 목적은 이윤 창출인데 이익을 극대화하는 게 원칙이 아니고 뭐지?"
"……그렇긴 하죠."
성환이 힘없이 대답했다.
말장난 같은 회장의 노련한 페이스에 말려들고 있었다.
"시작이면 회사 설립할 때고, 회사설립할 때 이윤극대화를 목적으로 했으니 그게 원칙이라고 할 수 있지 않나?"
뭔 말인진 잘 모르겠으나 막연히 맞는 거 같은지 성환이 더 이상 대꾸를 하지 못했다.
내가 나설 때가 되었다.
"적당한 합의로 손실을 피하는 건 한 번뿐이고 나중에 훨씬 더 큰 손실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당장 이번 판 한 번 진다고 하더라도 고스톱 한두 판 하고 끝낼 거 아니지 않습니까?"
조회장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건은 좀 손실을 볼 수 있다고 하더라도 장기적인 관점에서 미래 회사의 이익을 고려했으니 원칙을 지켰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봐도 이번 답변은 제법 괜찮았다.
현문에 현답이라고 할 만했다.
조회장의 표정도 나쁘지 않은 게 그정도면 됐다라고 하는 듯했다.
"자네 화투 좀 아는 정도가 아닌가 본데."
"잘하진 못하고 그저 즐기는 수준입니다."
"즐긴다라. 자네가 최고 고수겠구만. 허허!"
그러나 웃는 것도 잠시였을 뿐 잠시 뒤 안면을 바꾸고는 질문이 이어졌다.
"부당거래 건은 원칙이 뭔가? 그저 잠시 거래를 멈추고 상황만 지켜보자는 게 자네들이 말하는 원칙인가?"
대꾸할 적절한 말이 떠오르질 않았다.
모두 머뭇거리자 조인철회장이 더욱 날카로운 질문을 내리꽂았다.
"아까는 적당히 타협해서 임시방편으로 덮어놓기보단 좀 손해보더라도 정석대로 가는게 원칙이라고 하지 않았나?"
"네, 그렇습니다."
"그러면 그 건에 대해서는 원칙이 무엇인가?"
"……."
침묵이 이어지자 조회장이 또다시 쏘아붙였다.
"방금 전에는 잠시 손실을 보더라도 장기적인 관점에서 미래 회사의 이익을 고려하는 게 원칙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랬었죠."
"그럼 이번 건을 원칙대로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나?"
대표이사나 임상무 모두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떼지 못하자 내가 대답했다.
"법인을 청산해서 아예 부당거래 자체를 할 수 없게 하는 겁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대표이사나 임상무는 물론 성환까지 생각지도 않은 내 답변에 망연자실한 듯했다.
조회장은 말없이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결국 그렇게 조윤경이 원하는 쪽으로 되었다.
무슨 심경의 변화라도 생겼는지 내가 제안한 안을 조회장이 덜컥 선택해 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