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손안의 재벌-35화 (35/191)

35화 보류

"세무조사 중인 천하제일 그룹에서 지난 수년간 계열사 간 부당거래를 통해 조인철회장의 맏아들 조성환 씨가 대주주로 있는 회사에 일감을 몰아준 정황이 드러났습니다."

심각한 표정의 아나운서가 준비된 뉴스를 읽어 내려갔다.

멘트를 요약하면 이랬다.

천하제일 그룹이 계열사를 통해서 성환이 대주주로 있는 천하태평개발에 비싼 값으로 일감을 몽땅 몰아 줬다는 얘기였다.

이로 인해 계열사는 큰 손해를 보고 천하태평개발이 엄청난 이득을 취했다는 기사였다.

한마디로 어디서든 100원이면 살 수 있는 것을 200원을 주고 사 왔다는 거다.

그럼 200원을 주고 산 천하제일계열사는 딴 데 가서 샀을 때보다 100원만큼의 손해를 더 봤고 200원에 판 조성환의 회사는 그만큼을 더 이득을 본 것이라는 거다.

결국 소액주주를 포함한 천하제일그룹 주주가 손해를 보고 그 손해만큼 고스란히 성환이 이득으로 취했다는 거였다.

이는 배임으로 볼 여지도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건 단순히 세무조사로 세금 몇백억 뚜들겨 맞는 수준이 아니다.

공정거래위원회의 제제를 통해 엄청난 수준의 벌금을 때려 맞을 수도 있으며, 배임 건으로 검찰조사까지 이어져 의사결정한 사람이 구속될 수도 있는 사안이었다.

이 당시에는 재벌들이 이런 식으로 후계자에게 이익을 취하게 함으로써 나중에 그룹을 넘겨받을 때 상속세의 재원으로 삼고자 하는 게 유행이었었다.

그래도 아직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드러날 시기가 아니었는데 천하제일이 첫 빠따로 맞게 되었다.

이런 쌍.

양아치도 아니고 국세청도 조사 기간 내내 이슈로 건들지도 않은 걸 가지고, 언론을 통해 먼저 터트린 것이었다.

악화된 여론을 등에 업고 판을 키워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가려가려는 의도였다.

아주 뒤통수 제대로 맞았다.

뉴스 이후에 다른 언론의 인용 보도가 계속해서 뒤따르면서 댓글창은 재벌에 대한 성토장으로 바뀌었고 그룹 이미지는 시궁창에 처박히게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뉴스 끝나자마자 전화통에 불이 났다.

대외협력팀, 홍보팀은 물론이고 법무팀 이상현에게까지 전화가 왔다.

"태평아. 방금 뉴스 봤어? 일단 큰일로 안 번지게 노력해 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근데 너 전혀 모르고 있었어?"

이 자식이 걱정해주는 척하면서 내 자존심에 스크래치를 한 번 내려 했다.

"세무조사라기보다는 공정거래 이슈 같은데 너희 쪽은 몰랐어?"

멍군이다.

한동안 수화기 너머로는 침묵이 흘렀다.

잠시 뒤 이상현이 휴전을 제안했다.

"일단 누구 잘잘못을 따지기보다는 우선 어떻게 해결할까 생각해 보자."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냐?"

"방법이 있긴 한데, 일단 만나서 얘기하자."

* * *

10시가 훌쩍 넘은 시각인데도 비상소집령이 내려졌다.

마침 회사 근처에 마시고 있어서 바로 대회의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성환은 뉴스에서 자료화면으로 자기 사진이 나오는 걸 보고는 그 와중에 술 마시고 있다고 사진이라도 찍힐까 봐 급하게 자리를 피했다.

"과장님 저 먼저 갑니다. 무서워서 일단 집에 가 봐야겠습니다."

"그래, 그냥 들어가라. 어디 가서 더 마시다가 기자한테 사진이나 찍히지 말고."

"그러면 진짜 죽죠. 내일 못 볼지도 몰라요."

사안의 중요성을 감안해서인지 대책회의실에는 대표이사까지 나와 있었다.

홍보팀, 대외협력팀, 법무팀 등 주요 스탭부서 임직원들이 도착했다.

이어서 우리 팀 임상무, 김부장도 외부 약속으로 술 마시다 왔는지 소주 냄새를 펄펄 풍기며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주요 인사가 모이자 회의가 시작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대책을 마련하기보다 누구 잘못인지부터 따지고 들기 시작했다.

"세무조사하다가 나왔다고 하니 결국 재무팀에서 까발린 거 아닙니까?"

대외협력팀의 챌린지에 임상무가 받아쳤다.

"아니 분명히 이슈 있다고 그런 거래하지 말자고 의견 낸 게 누군데 이제 와서 이럽니까? 다들 이 정도면 괜찮다며 밀어붙인 게 누군데요?"

"법무팀에서 이슈 파악하고 있었으니 잘 막았어야죠."

이대로면 내일 아침은 돼야 대책회의가 시작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쾅!

대표이사가 더 이상 못 듣겠는지 책상을 내리쳤다.

"지금 대책회의 하러 온 거 맞습니까?"

갑자기 싸해진 분위기에 움찔거리는 임직원들 더 이상 한마디도 내뱉을 수 없었다.

분위기가 가라앉자 이상현이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우선은 피해가 더 커지지 않게 하는 게 우선입니다."

"그걸 누가 몰라? 방법을 묻는 거지!"

경영지원실장이 뭔 되도 않는 소리냐며 꾸짖었다.

이상현은 아랑곳하지 않고 할 말을 이어갔다.

"조성환님 회사를 청산하여 다시는 거래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는 것입니다."

후계 구도의 틀로 이용하고 있는걸 깨자는 거였다.

감히 어느 누구도 선뜻 내뱉기 힘든 말을 제안한 것이다.

그렇다.

조윤경이 뒤에 있으니 뱉을 수 있는 말이었다.

조윤경은 조성환만을 후계자로 염두에 두고 조성환이 100% 지분을 가지고 있는 회사를 세워 승계자금을 모으고 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답 나왔다.

이건 조윤경의 작품이다. 국세청이 양아치 짓을 한 게 아니라.

승계 도구로 쓰일 조성환의 회사를 없애서 이득을 보는 자는 물론 조윤경밖에 없었다.

그녀는 사리사욕을 위해서는 회사의 곤경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할 사람이었다.

비서실장이 어이가 없는지 콧방귀를 뀌었다.

"지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우리가 그 구조를 재미 삼아 짰겠어? 다 미래를 보고 한 건데, 이까짓 일로 다 뒤집어엎자고?"

비서실장은 회장의 충복이었다.

회장의 의도를 가장 잘 알고 있으니, 그 의견은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본능적으로 느꼈을 거다.

처리방안에 대한 갑론을박이 자정까지 이어졌다.

한 쪽에선 회사를 없애서 앞으로의 문제를 만들지 말자고 하고 있었다. 다른 한 쪽에서는 그냥 원안대로 밀고 가자는 의견을 냈다.

역시나 모든 안은 초안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건 없었다.

언제나 그렇듯 타협안이 마련되었다.

회사는 그대로 유지하되 당분간 천하제일 전 계열사와는 거래를 하지 않음으로써 상황을 좀 더 지켜보자는 것이었다.

그러다 분위기 좋아지면 서서히 거래를 재개하되 이익 규모는 낮추자는 안이었다.

"그건 앞으로의 문제고 당장 이번에 적발된 건은 어떻게 되는 거죠?"

내가 제기한 문제에 아무도 마땅한 해답을 내놓지 못했다.

잠시 뒤 이상현이 의견이랍시고 몇 마디를 내뱉었다.

"일단은 벌금 선에서 막도록 최대한 노력하되 검찰조사까지 이어질 경우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변호사답게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서 얘기한 것이다.

"그럼 최악의 경우를 대비한 법무팀의 의견이 있으신지요?"

"그럴 경우를 대비해 경영진들이 있는 거 아닙니까? 조회장님 일가는 어느 누구도 그런 거래가 있었다는 것은 전혀 모르고 있었던 거죠. 부당한 거래는 양 회사의 경영진들이 자체적으로 결정한 사항일 뿐입니다."

역시 희생양을 찾아 제물로 삼고 역경을 넘기자는 말이었다.

계열사 대표이사로 영전하면 집과 차, 기사 등 모든 게 바뀐다. 그러나 거기에 대한 대가가 따르는 법.

이런 상황이 생겼을 때 총대를 메야 하는 것이었다.

정말 이런 상황이 생긴다면 아마 대부분 울며 겨자 먹기로 수락할 것이다.

거절하면 업계에 배신자로 낙인찍혀 재취업은 고사하고 먹고살 길이 막혀 버린다.

수락한다면 일이 년 감빵에서 썩긴 하겠지만, 위로금과 새로운 일자리는 물론이거니와 자녀들을 모두 유학까지 보내주고, 다녀와서도 그룹내 취직을 시켜주는 등 확실하게 챙겨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말 그대로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특별히 반대의견을 내기가 어려워 그 타협안으로 의사결정이 내려졌다.

이제 회장에게 보고하는 일만 남았다.

* * *

다음 날 오전 이른 시각.

뒤숭숭한 마음에 저절로 눈이 떠졌다.

특별히 할 것도 없어 씻기만 하고 바로 회사에 오니 아직 8시도 채 되기 전이었다.

출입문을 넘어 자리로 방향을 트는데 멀리 내 옆자리에 성환이 벌써 출근했는지 엎드려 자고 있었다.

"잠이 오냐 지금?"

인기척을 듣자 번뜩 일어나더니 신문을 펼쳐 들었다.

"잠이 안 오니까 일찍 왔겠죠. 과장님도 잠 좀 설쳤나 보네요. 이렇게 이른 시간에 오고."

"얘기 들었지?"

"네. 아침에 비서실 통해서요."

역시 비서실을 통해 거의 실시간으로 모든 사항을 보고받고 있었다.

성환 곧이어 목소리 톤을 한참 내리깔고는 비장하게 물었다.

"그 국세청놈들 어떻게 하죠? 비열한 새끼들 가만 냅 두지 않을 거죠?"

상대를 잘못 찾긴 했으나 충분히 빡쳐 있다는 느낌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기회가 왔다.

조윤경의 짓임을 밝힐 수 있겠다.

이 정도 되면 마냥 내가 이간질하는 거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울 것이었다.

"국세청 짓이라고 생각해?"

"당근이죠. 예전에 우리가 그쪽 제안 거절하던 날 그놈들이 내부거래 어쩌고 한마디 했잖아요."

듣고 보니 조사반장의 마지막 말이 떠오르긴 했다.

그래도 이건 아니다.

그런 건 결과에 대한 확신이 서야만 터트릴 수 있는 사항이다.

"아니야. 국세청이 아직 파보지도 않은 걸 언론에 흘리는 것은 말도 안 돼."

"왜죠?"

"괜히 미리 터트렸다가 만족할 만한 결과를 못 얻으면 어떡하려고. 괜히 실력이 없다거나 봐줬다는 둥 여론의 뭇매를 맞을 텐데. 절대 그럴 수 없어."

"그럼 누구란 거죠?"

"잘 생각해 봐. 이번 일로 가장 덕을 볼 사람이 누군지. 그 사람이 범인이야."

성환은 무슨 말을 하는지 통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마침 모르는 번호로 휴대전화가 울렸다.

"여보세요?"

"조사반장입니다."

성환에게 조용히 하라고 '쉿' 하면서 스피커폰을 눌렀다.

"네 반장님. 무슨 일이시죠? 꼭두새벽부터."

"출근하시기 전에 먼저 한마디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네 말씀하십시오."

"우선 어제 보도로 나간 일은 저희가 한 게 아닙니다. 심증은 있었으나 아직 제대로 파서 발견하거나 적발한 사항도 아니었습니다. 저희도 일이 커져 난감할 뿐입니다."

"그럼 국세청 말고 아는 데가 없을 텐데 누구 소행이라는 말씀이시죠?"

"저희도 당황한 마음에 여러 루트를 통해 알아봤는데,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내부고발이나 제보인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상대방의 어투라든지 현재 상황을 비추어 봤을 때 거짓말 같지 않았다.

상황은 점점 더 조윤경의 짓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네, 반장님. 말씀 충분히 알겠습니다. 혹시 개인적으로라도 더 파악되는 거 있으시면 연락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그럼 끊겠습니다."

휴대폰 종료 버튼을 누르고 성환을 쳐다봤다.

"지금 이자 말을 믿자는 겁니까?"

"국세청 쪽은 이득 볼 게 없다니깐. 피해만 가지."

"노트북이나 강탈하고 세금 깎아줄 테니까 사람 박아놓자는 놈들을 어떻게 믿어요?"

"그럼 통화 하나 더 해보자. 김철수부장이 언론 쪽 생리를 잘 아니까."

통화목록을 뒤져 김철수 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역시 스피커폰을 눌러 성환이 들을 수 있게 했다.

"부장님. 아침 일찍 죄송합니다."

"아니야 괜찮아. 그렇지 않아도 출근하면 너한테 전화하려고 했어."

"네. 좀 알아보셨어요?"

"방송사 후배들 통해서 알아봤는데 제보받은 거래."

"제보요?"

"방송사랑 공정위에 똑같은 내용으로 제보했나 봐. 거래 회사랑 규모까지 자세히 아는 거 보니깐 내부 소행이 맞을 거야. 누군지는 알 수 없고."

"네, 그렇군요. 부장님 더 파악되는 거 있으면 연락 부탁드릴게요."

"그래. 너도 수고하고. 주님께 안부 좀 전해드리고."

"네, 그럴게요. 부장님도 수고하십시오."

통화를 끝내고 조성환을 쳐다봤다.

"주님! 이래도 못 믿으시겠습니까? 설마 얼마나 지났다고 그새 김철수부장님의 취재력을 잊어버린 건 아니겠지?"

"아니, 그냥 답답해서 그렇죠."

"가장 이득 볼 사람을 떠올려 보라니깐!"

"모르겠다고요. 그게 누군데요 도대체."

"조윤경!"

"네?"

"조윤경 전무!"

"네? 누나요? 장난합니까?"

"내가 장난하는 걸로 보이냐?"

"과장님 저 안 참습니다. 한 번만 더 누나 이름 부르면 이제 안 참을 겁니다."

"조윤경! 조윤경! 조윤경! 세 번은 괜찮냐?"

"아, 진짜! 이런 씨!"

소리를 버럭 지르며 오른쪽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이건 예전에 따가리 하던 시절에도 한번을 보지 못했던 광분한 모습이었다.

순간 또 쫄 뻔했다.

내 입장이 달라졌음을 마음속으로 한 번 더 떠올리고 나서야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왜 조윤경일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 조용히 설명해주었다.

"이번 건은 단순한 게 아니야. 승계가 너한테 이루어지고 있는 걸 방해한 거라고. 그걸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이 누구겠냐?"

성환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답은 알고 있었지만 차마 대답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당연히 상속대상자 중에 하나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확인 사살이 필요했다.

"거봐 누나 맞잖아."

이번일 뿐만이 아니라 예전 여자친구와의 스캔들과 세무조사 때 해외사무소 관련 이슈까지 되짚어 줬다.

성환은 스캔들 당시 조윤경이 여자친구 괜찮다며 힘내라고 했던 말들, 어제 방송을 보고 집에서 식구들 앞에서 위로란 듯이 건넸던 말들을 되뇌었다.

그리고 지금의 상황 즉, 자기가 피해를 보고 후계 구도에서 멀어질 때 가장 덕을 볼 사람이 누나라는 것을 깨달은 듯했다.

이전에 자기에게 위로차 건넸던 말들이 모두 거짓이었음을 알아차린 듯.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믿고 싶지는 않은지 한마디 했다.

"과장님 말씀은 듣고 보면 너무 그럴듯합니다. 반박하기 어려울 정도예요."

"예전부터 알아챘는데 차마 남매사이 이간질한다고 할까 봐 그냥 지켜보기만 했어. 그래도 이번엔 선을 넘었다. 이제 네가 알아야 할 거 같아서 얘기한 거야."

나야 좀 있으면 여길 뜨면 그만이니 뭔 상관이겠냐만은 그래도 복수를 위해서는 성환을 이용해야 했다.

성환이 커야 조윤경에 대한 복수가 수월해질 수 있다.

그러니 성환이 조윤경의 진짜 정체를 알아야 한다.

끝까지 모르면 핏줄 때문에 성환이 내 복수에 오히려 방해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그럴듯하다고 하더라도 일단 제 판단은 유보하겠습니다."

모든 상황이 조윤경이 맞다고 말해주지만, 차마 자기 누나가 그랬을 거라고는 믿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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