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손안의 재벌-34화 (34/191)

34화 정공법

조사반장은 거두절미하고 시원시원하게 딜을 제안했다.

반까지는 아니더라도 아쉽지 않을 만큼은 깍아 주도록 노력할 테니 몇 가지 제안을 받으라는 거였다.

그중 하나는 퇴직 공무원한테 임원 자리 하나 마련해 달라는 거였다.

전임 국장이 다른 데로 영전해서 갔는데 좋지 않은 일에 연루되어 임기를 못 채우고 곧 옷을 벗게 된다고 했다.

모양새는 자진 사퇴로 갖추었으나, 업계 소문이 좋지 않게 나는 바람에 공공기관 임원은커녕 로펌이나 회계법인 등 관련 업계 쪽으로도 가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우리가 받아달라는 것이었다.

임원 자리 하나 내주고 세금을 깎을 수 있다면 우리 입장에서는 분명 남는 장사였다.

3년 치 연봉은 물론 사무실과 차량 지원 비용, 비서 및 기사 채용에 따른 비용이라고 해봐야 줄이는 세금에 비하면 새 발의 피이기 때문이다.

조사반장의 제안은 지금 이 자리에서 바로 '콜'할 정도로 매력적이긴 했지만, 우선은 무척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넙죽 받아주면 좀 더 세게 부를 걸 그랬나 하고, 몇 개 더 얹으라고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땐 월급쟁이의 가장 큰 무기가 있다.

그것은 바로 '나에겐 권한이 없습니다'라고 하는 거다.

처음에 일할 때는 마치 자기가 다 결정할 것처럼 하다가 나중에 곤란한 문제가 생기거나 중요한 결정을 할 때가 되면 자기가 의사결정할 문제가 아니라고 한 발 빼는 거다.

"반장님 말씀 충분히 알아들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결정할 사안이 아니라서요. 상무님께 잘 말씀드려보고 답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네, 최대한 빨리 답변 부탁드립니다. 저희도 기한이 있어서요."

그래 이 정도면 선방이었다.

그냥 두었으면 홈런이 될 걸, 펜스 위로 뛰어올라 관중석으로 넘어가는 공을 잡아냈다.

3루 주자는 홈으로 불러들였지만, 그래도 한 점으로 막았다.

제안받은 걸 알리고자 김병국부장과 성환을 데리고 임상무 방으로 들어갔다.

이런 건 절대 문서로 남기면 안 된다.

불법거래라고 비쳐질 수도 있기 때문에 구두보고하고 그 자리에서 끝내야 했다.

문을 열고는 기세등등하게 두 팔을 위로 벌리며 들어갔다.

쇼생크 탈출 한번 따라해 봤다.

지옥같은 세무조사 탈출이다.

"뭐야? 하늘이라도 무너졌냐?"

역시 영화 한 편 안보는 노땅들 전혀 못 알아본다.

"아뇨. 쇼부쳐 온 게 있어서요. 받을지 말지 결정해야 합니다."

자랑질 좀 섞어 늘어놓는 나의 말에 잔뜩 구겨져 있던 임상무의 얼굴이 펴지는 게 느껴졌다.

이미 저 멀리 날아가 버린 줄 알았던 전무 승진이 다시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조건이면 무조건 받아야지. 그리고 부대표 직급 정도는 줘야 하겠지? 어느 계열사가 좋을까? 흐흐."

임상무가 신났는지 대표라도 된 양 직급은 물론 회사까지 자기가 결정하려고 했다.

"증권회사 쪽에 공동대표 정도로 박아놓으면 되지 않을까요? 마침 그 자린 공석인데다 아무래도 거기가 워낙 대외 이슈도 많고 하니까 딱 일 거 같은데요?"

김병국부장 역시 눈치 있게 바로 맞장구쳐 줬다.

그런데 지금까지 한마디도 안 하고 듣고만 있던 성환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고개는 10도 정도로 약간 삐딱하게 젖혀 놓고선 오른쪽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었다.

예전부터 보던 바로는 심기가 매우 불편할 때 짓는 표정이었다.

오너도 아닌 것들이 직급 가지고 농담한다고 빡돈 건가?

어느 대목에서 거슬렸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이전 생 같았으면 이 표정 보면 바로 꼬리 내리고 눈치만 봤을 텐데 이젠 안 그래도 돼서 정말 다행이다.

"왜? 조대리 뭐가 불만이야."

내 말을 듣고서야 이제야 성환이 같이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임상무와 김부장은 급격히 웃음기를 거두었다.

김칫국부터 마신 게 조금은 민망했는지 임상무가 한마디 거들었다.

"그러고 보니 실무책임자 의견도 안 들어 봤네. 조성환님 의견은 어떠십니까?"

성환은 허리를 꼿꼿이 세워 자세를 고쳐잡고선 다짐한 듯 물었다.

"매번 이런 식이었습니까?"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반응에 임상무와 김부장은 할 말을 잃고 입만 벌린 채 얼어붙어 버렸다.

나도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지 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무슨 말이야? 알아듣게 설명해 봐."

"매번 이런 식으로 덮고 이번만 넘기자 뭐 이런 식이었냐고요."

"그럼 그래야지. 200억 다 세금 맞는 거보단 낫잖아. 돈도 얼마 안 들고."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정색하고 달려드는 게 이전과는 뭔가 결이 좀 달랐다.

그래도 다 된 밥에 재를 뿌릴 순 없었다.

"그럼 어떻게 해.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해왔고 그 제안을 받는 게 최선이야. 이미 쇼부친 거나 다름없어."

이미 끝났다는 나의 말에도 수긍하지 않고 고개를 좌우로 흔들다가 대답했다.

"거절하면 되죠. 세상에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은 없습니다."

임상무와 김부장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그저 불안한 마음에 관망만 할 뿐이었다.

내 편을 들자니 성환이한테 찍힐 거 같았고, 그렇다고 성환이 편을 들자니 올해 승진은 완전 날아갈 테고 아주 곤란했을 것이다.

상대측에서 나름 합리적인 제안을 해왔는데, 그 제안을 거절하겠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아니 그에 훨씬 못 미치는 제안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이제껏 거절해 본 적도 없었을뿐더러 과거에 누가 거절한 적이 있었다고 들어본 적도 없었기 때문에 애초에 거절한다는 것은 고려대상 자체가 아니었다.

"그래서 200억 세금 나왔습니다. 어쩔 수 없으니 그냥 내시죠. 이렇게 보고하자고?"

"시시비비를 다퉈 보면 적당한 수준에서 막을 수 있지 않을까요?"

아직 경험이 없어서 이상적으로만 생각하는 거 같아 안타까웠다.

세상이 그렇게 생각대로만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 자식은 아직 모른다.

"그럼 다음엔, 5년 뒤 다음 세무조사 때는 어떡하지?"

"바꿔야죠. 이제부터라도 바꿔서 다음 세무조사 땐 문제 안 되게 해야죠."

성환은 한마디도 안 지고 계속 대꾸했다.

고집을 꺾을 생각이 없는 듯했다.

"바꾸다니 무슨 말이야?"

"그냥 좋은 게 좋은 거지 하면서 덮고 넘어가는 건 근본적인 해결책이 안 됩니다."

말은 그럴듯했다.

원론적인 말에 반론을 제기할 순 없었다.

다만 현실적인 한계가 있음을 알려줄 수밖에 없었다.

"그걸 누가 모르나? 해결책이 없으니깐 그렇지."

"왜 없어요?"

"뭔데?"

"해외사무소를 전부 없애죠."

비대해진 연락사무소를 없애서 앞으로는 본사 경비 이슈가 될 만한 논란거리를 제거하자는 말이었다.

"그럼 거기 직원들은 다 짤라?"

"법인으로 만들어서 고용승계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앞으로는 법인을 설립하여 자체자금을 조달해서 운영하자는 거였다.

수십 년간 아무 의심없이 운영해 온 틀을 완전히 깨자는 발상이었다.

생각해 본 적도 없었을뿐더러 설령 생각했다 하더라도 그에 따르는 수많은 후속 절차들이 귀찮아서라도 차마 입에 담지 못했을 것이다.

성환의 말에 마땅히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 다물고 있는 나에게 성환이 한마디 덧붙였다.

"덮기만 한다면 넘어가는 건 잠시일 뿐 결국엔 드러납니다. 상처는 좀 나더라도 아예 도려내면 새살이 돋아나 더 단단해질 수 있을 겁니다."

어디서 많이 보거나 들어봤을 만한 장면이었다.

재벌 2세가 주인공인 드라마에서 나온 대사였나?

망나니가 어느 날 갑자기 각성해서는 나쁜 놈한테 일갈하는 장면으로 쓰일 법한 멘트였다.

물론 나쁜 놈 역할은 나였다.

회귀한 건 난데 주인공 노릇은 이 자식이 하는고만?

그런데 맞는 말이니 대꾸할 수 없었다.

그저 인정할 수밖에.

우리같은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도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지금 당장의 위기만 넘기면 된다. 다음엔 다음 사람이 알아서 하면 된다. 우리가 했던 것처럼'

그러나 성환은 입장이 달랐다.

처음에는 노트북을 상납하는 것도 모자라 출장 핑계로 해외여행까지 시켜주고 하는 걸 못마땅하기는 했어도 그래도 그 정도까지는 받아들였을 것이다.

실무책임자 입장에서 이래야 하는 거라고 배우려고 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무책임자 입장이 아닌 미래 오너의 입장에서 돌아보니 이런 식으로는 결코 해결책이 될 수 없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수년 후면 임상무, 김부장, 나, 세 사람 중 여기 이 부서에 남아있을 사람은 한 명도 없을 테고 자기는 최고경영자가 되어 모든 위험을 안아야 함을 느꼈을 것이다.

임상무와 김부장도 결연한 성환의 말에 토하나 달지 않고 조용히 있었다.

"그럼 어떡하자고."

앞으로의 대응전략을 묻는 나에게 성환이 잠시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그러니까요. 어떡하죠?"

업무경험이 없어서 미쳐 디테일까지는 고려하지 못한 것이었다.

일단 방향이 정해졌으니 세부사항은 방향대로만 밀고 나가면 된다.

* * *

다음 날.

세무조사 2주간의 연장 마지막 날이었다.

짐을 모두 챙긴 조사관 일행들과 인사를 나누기 위해 방문한 회의실에는 마침 조사반장이 나와 있었다.

임상무가 조사반장을 휴게실로 따로 불러내었다.

회의실에서 옆방에 귀를 기울이니 임상무의 얘기가 들려왔다.

종전 제안에 대한 거절 의사를 밝힌 것이었다.

"지난번 반장님 말씀은 천과장 통해서 잘 들었습니다. 경영진 간 논의 끝에 원칙에 어긋나는 행위는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뜻밖의 거절에 매우 놀란 듯한 조사반장은 굳은 표정으로 반문했다.

"감당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임상무는 조성환의 의지가 없었다면 오금이 저려서 대답도 못 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든든한 백이 있었다고 믿어서인지 차분하게 대답했다.

"물론이죠. 원칙대로 하는데 감당 못 할 게 뭐 있습니까?"

"네, 알아들었습니다. 상부에 제대로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조사반장은 가만 넘어가지는 않겠다고 협박 비슷한 말을 남긴 것이었다.

이에 질세라 임상무도 한마디를 덧붙였다.

"저희도 법무팀 통해서 소송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평온한 표정으로 회의실로 들어온 임상무와 조사반장은 상대측 일행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이렇게 연장까지 한 세무조사가 모두 마무리되었다.

현장 조사가 종료되고 결과통지가 나오기까지 몇 주간은 물 밑에서 엄청난 공방이 이어졌다.

추가문의 및 자료 요청이 계속 이어졌고, 거기에 대한 대응을 하느라고 끝나도 끝난 것이 아니었다.

일단 선전포고는 했지만 어떤 결과가 나올지 몰라 뒷감당을 할 생각을 하니 마음 한구석이 꽉 막힌 듯 내려가질 않았다.

일도 손에 잘 잡히지 않았고 성환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나보다.

"과장님 한잔하시겠습니까?"

웬일로 성환이 퇴근길에 술 한잔하자는 제안을 다 해 왔다.

멀리 가기도 귀찮고 해서 회사 앞 장어집으로 갔다.

특별히 조용히 할 말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헛헛한 마음에 들르기엔 딱이었다.

회사 앞 장어집.

시끌벅적한 분위기에 마주 앉은 사람의 얘기도 잘 안 들릴 지경이었다.

"과장님. 왜 통지가 안 나오죠? 뭔 얘기 들으신 거 없으세요?"

"왜 자신 있게 원칙대로 하자고선. 좀 쫄리긴 하나 보지?"

"방법은 맞다고 생각하는데요. 결과가 안 나와서요."

"기다려 봐. 별거 있겠어? 그래봐야 200억이지 뭐."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내 말에 성환은 약간은 안도가 되는 듯했다.

잘 익은 장어를 뒤집고 있는데 벨소리가 울렸다.

내 전화는 물론 성환의 전화도 동시에 울리고 있었다.

전화기 화면에는 김철수부장 번호가 떴다.

"부장님 오랜만입니다. 잘 계셨죠? 한잔할 때 된 거 같네요."

의례 안부 전화인지 알고 인사를 건네는데 수화기 너머 목소리는 사뭇 심상치 않았다.

"태평아. 내 말 잘 들어. 좀 있으면 9시 뉴스에 나올 거야."

"네? 뭐가요?"

"나도 후배 통해서 얼핏 들었는데 우리 회사 건으로 나올 거야. 주님과 관계있는 걸로."

주님이면 김부장이 농담 삼아 천하제일개발의 대주주인 성환을 지칭했던 말이었다.

말투로 봐서는 절대 좋은 일이 아닌 분위기였다.

하긴 재벌 2세가 뉴스에서는 절대 좋은 일로 나올 수는 없지.

"그렇게 안 좋아요?"

"더 안 좋기가 어려울 정도야. 내가 좀 더 알아볼 테니깐 너는 우선 주님 안심 좀 시켜드려."

웬만해선 걱정하지 말아라, 내가 해결해 볼게 정도였을 텐데.

그런 비슷한 말조차도 없었다.

"네, 알겠습니다. 부탁드릴게요. 부장님."

한편 같이 울린 전화를 받은 성환도 표정이 썩어 들어갔다.

전화를 마치고는 땅이라도 꺼질 듯한 한숨을 푹 내쉬었다.

비서실을 통해 같은 내용을 전해 들은 모양이었다.

"과장님 뉴스 같이 보셔야겠네요."

"너도 들었냐? 나도 방금 김철수부장님 전화 받았어."

마침 우리는 TV와 가까운 자리에 앉아 있었다.

야구가 없는 날이라서 그런지 뉴스채널에 고정되어 있었다.

많이 기다릴 필요조차 없었다.

9시를 땡하고 알리는 시계 화면이 나오면서 뉴스 시작하자마자 헤드라인에 떴다.

[천하제일그룹 내부 부당거래 적발]

제목과 함께 뉴스가 흘러나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