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조건
조사반장의 일방적인 통보에 모두 멘붕이 된 채 임상무 방으로 돌아왔다.
임상무는 자리에 앉기도 전에 다이어리를 책상 위에 집어 던지더니 휴지통을 발로 걷어찼다.
쨍
휴지통이 박살 나면서 아침에 먹다 버린 주스 병이 튀어 올라 자기 와이셔츠에 그대로 흩뿌려졌다.
재수 없게 하필 토마토주스를 먹었나 보다.
게다가 오늘따라 평소 잘 안 입는 흰색 와이셔츠까지 챙겨 입었다.
"이런 씨발."
무조건 반사처럼 욕설이 바로 튀어나왔다.
옆에 성환이 있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나온 돌발행동이었다.
이렇게 극대노 한 것은 입사 후 처음 봤다.
200억 세금을 때려 맞을 생각에 임상무는 물론이고 김부장과 성환이까지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다들 사색이 된 채 별다른 대책을 떠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각자 머릿속으로 전무 승진, 임원 승진이 날아가는 상상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성환도 처음 마도잡은 일을 망치겠다는 불안감에 안절부절못하는 듯했다.
방법은 두 가지뿐이다.
첫 번째는 불복.
일단 이의를 제기하고난 후 안 받아들여지면 어쩔 수 없이 행정소송으로 법원의 판단에 맡겨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소송까지 걸 정도면 국세청과 아주 막가자고 하는 것이었다.
설령 이번에 이긴다고 하더라도 다음 세무조사 때 가만 냅 두지 않을 것이 너무나 명확하므로 섣불리 선택하기 어려운 선택지였다.
두 번째는 어찌 되었건 통지받기 전에 조사관들과 합의를 보는 것이었다.
물론 조사반장 정도가 아닌 국장 이상 고위급과의 합의가 필요한 일이었다.
자세한 절차에 대해 전혀 모르는 성환이 답답한 듯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하죠?"
임상무와 김부장 아무 생각이 없는 듯 멍한 채로 있어 내가 대꾸해 줬다.
"어떻게 하긴 어떻게 해. 무조건 사전에 합의를 봐야지."
"네고 없다잖아요."
"세상에 쇼부(합의) 못 치는 게 어딨어? 무조건 찾아야지."
우리 둘 사이의 대화가 못마땅한 듯 임상무가 끼어들었다.
"이번엔 좀 달라. 회사생활 수십 년간 이런 건 처음이야. 이상해……."
성환이 불안한 듯 되물었다.
"그럼 어떡하죠?"
"소송까지 감수해야죠. 태평아 넌 법무팀에 미리 귀띔해 놔."
"네. 그래도 일단은 최대한 쇼부보다가 정 안 되면 그때 가서 불복하시죠."
엄청 귀찮은 일이 되었다.
소송은 기간이 꽤나 오래 걸리는 일이었다.
마무리되기 전에 퇴사하면 땡이지만, 그래도 준비는 해야 했다.
한 번도 해 본 적은 없으나 소송 자료 대응 역시 세무조사 이상의 고통을 수반할 것이 분명했다.
물론 얘들한테 시키면 그만이긴 했지만, 이제껏 세무조사로 고생한 애들한테 2차전 준비하라고 말하기가 상당히 미안했다.
애들 봐서라도 최대한 소송까지는 안 가게 노력 한번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내 사업을 할 때도 이런 상황이 닥칠 수 있으니 좋은 경험이 될 수도 있었다.
* * *
퇴근 시간 전 조사반장을 다시 찾아갔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으십니까? 어차피 곧 있으면 과세예고통지 받으실 텐데."
네고없다고 선 그었는데 뭐하러 찾아왔냐는 말이다.
"반장님하고 커피 한잔하려고요."
"그러시죠."
반장은 대답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까지는 받아주겠다는 식이다.
믹스커피 두 잔을 타서 옆방 휴게실로 반장을 안내했다.
"말씀하시죠."
커피 한 모금 들이키기도 전에 다짜고짜 할 말만 하라는 투였다.
"다툴 여지가 많아 보여서요. 저희 바로 불복할 건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반장은 하나도 겁 안 난다는 듯이 되물었다.
"그거 아니어도 건들게 산더미인 거 모르세요? 특히 회장 자제분이 소유한 회사랑 거래도 많은 거 우선은 그냥 지켜보자고 했는데, 그렇게 나오시면 우리가 지켜보기만 하겠습니까?"
불복하면 나중에 특별세무조사라도 해서 딴것도 털 거라고 대놓고 협박하는 거다.
그렇다면 나도 질 수 없다.
우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말 한 번은 꺼내야겠다.
"왜 이러십니까? 받을 거 다 받으시고 이렇게 나오실 겁니까?"
조사반장 정색하며 삿대질과 함께 소리쳤다.
"뭔 소리야 당신?"
이 정도쯤 되면 사실 막가자는 거다.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받아쳤다.
"그 조사관님 노트북 잘 쓰시나 모르겠네요. 게다가 LA랑 북경에서 매일같이 술집 드나들고, 공무원분들이 금품, 향응 접대 이런 게 괜찮으실지 모르겠네요."
사실 말해 놓고도 살짝은 부끄러웠다.
치사하지만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상대방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그런 사소한 건 저희 내부에서 알아서 해결할 수 있습니다. 담당자 교육해서 재발 방지 대책도 마련할 수 있고."
고발해 봐야 별거 아니고 그 정도는 내부적으로 얼마든지 용인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주지시켜 준 것이었다.
고성이 오간 탓에 옆 회의실에서 조사관들이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수군거리는 게 들려왔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둘 다 조용히 흥분을 가라앉혔다.
더 이상 다퉈 봐야 답이 나올 거 같지 않았다.
그저 다음날을 기약할 수밖에.
그래도 빚진 건 받아야겠다.
"반장님. 그렇더라도 우리 사이에 아직 계산할 게 남았잖아요."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 안 가는 거 같아 상기시켜 주었다.
"해장국이요. 빚 갚으셔야죠. 내일 새벽 같은 시각에 용두동에서 뵙죠."
반장은 이제야 생각난 듯 대답했다.
"그러죠. 내일 아침에 보죠. 단 해장국만 먹고 헤어지는 겁니다. 물론 계산은 제가 할거고 그걸로 빚 갚는 겁니다."
"네."
일단은 시간을 벌었다.
사무실로 들어서자 분위기가 축 가라앉아 있는 게 느껴졌다.
임상무 또 나와서 한바탕 지랄했었나 보다.
아무 소리도 없이 조용히 자판기 두들기는 소리만 들려 왔다.
직원들 모두 귀를 쫑끗 세우고 눈치만 보고 있었다.
자리에 오자 원모가 원망하듯 쳐다봤다.
"우리 팀 이번에 나가리되는 겁니까?"
"그럴 수도 있지. 근데 뭔 상관이야?"
"성과급이요. 이번에 여자친구한테 백 하나 사주기로 했는데."
금세 울상이다.
이럴 땐 위로가 필요하다.
"너는 C받을 거니깐 상관없잖아. 어차피 못 살 텐데."
뭔 개소리냐는 듯 원모가 날 쳐다봤다. 위로는 실패다.
원모가 걱정하는 게 이해가 간다.
조직성과가 낮으면 개인 고과에도 직격탄을 맞는다.
조직이 낮은 성과, 예를 들어 C를 받으면 개인이 아무리 뛰어난 퍼포먼스를 보였어도 S나 A를 받을 수가 없다.
낮은 고과는 당장 올해 성과급은 물론 차기 승진 결과에도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성환은 성과평가와 성과급은 물론 승진과도 전혀 무관하니 애초에 관심이 없었는지 둘 사이의 대화가 궁금한 듯 물어봤다.
"조직평가와 개인평가가 상관이 있나 보죠?"
원모가 회사의 평가 및 성과급 제도에 대해서 간략히 설명해 주었다.
성환은 자기가 책임자였는데, 이런 사태가 발생했는 데도 아무런 감흥이 없어 보였다.
"어찌 보면 다행이네요. 이번에 핸드백 안 사주셔도 되겠네요."
위로랍시고 건넨 말이 불난 데 부채질한 격이었다.
원모는 얼굴만 붉힌 채 차마 대거리를 못 했다.
성환은 자기 위로가 통했다고 스스로 자랑스러하는 듯했다.
재벌 2세라 그런 건지, 아니면 원래 이 자식이 다른 건지 하여간 자기애가 아주 충만하다.
"그건 그렇고. 지난번에 조사관들 신상 조사한 파일 있지?"
"그건 왜요? 회사 내에 관계된 사람 없어 보였는데요?"
"그래도 모르니깐 가져와 봐. 그리고 너네들도 다시 한 번 봐 봐. 자세히!"
조사반장의 파일을 열어보았다.
이전에 조사한 바로는 그룹 내에서 직접 관련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열심히 파 보았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작은 시골 마을 출신에, 물론 처음 들어보는 초, 중,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래도 공부는 꽤 잘했는지 대학은 명문대학교를 나왔다.
개천에서 용 난 스타일이었고만.
K대 법대 및 동대학원을 졸업했으며 전공은 상법학이었다.
뭐지? 이 야릇한 기분은?
뭔가 햇살처럼 빛이 천장에서 새어 나와 비추는 듯한 느낌이…….
K대 법대, 상법학이라…….
그렇다.
평창동의 현인이라 불리게 될 그분, 전직 사외이사이자 주총꾼 정영태교수가 떠올랐다.
면접에서 떨어지긴 했지만, 내가 조카 정영균을 서류까지 통과시켜 주었다. 그리고 따로 시간내서 인생상담까지 해 주었다.
주총도 그렇고 조카 일도 그렇고 나한테 어느 정도는 빚진 감정을 느끼고 있을 것이었다.
전화 한 통해서 조사반장 아는 지 정도는 충분히 물어볼 수 있었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핸드폰을 열고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천과장님 오랜만입니다."
"네 교수님. 안녕하셨죠?"
"덕분에요. 이렇게 전화를 다 주시고. 무슨 일이죠?"
"교수님. 천하제일 주주이시기도 하니 회사가 잘되기를 바라시죠?"
"그야 물론이죠."
오랜만의 통화였지만 아주 우호적인 분위기였다.
조사반장의 이름을 대고 아는 사람이냐고 물어보니 대뜸 놀라며 반가운 척을 했다.
"알다마다요. 내가 논문 지도도 했고 결혼식 때 주례도 봤었는데."
그래! 이거다.
* * *
새벽 5시 반. 눈 뜨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도 부랴부랴 옷을 챙겨입고 집을 나섰다.
어둠이 채 걷히지 않은 새벽 시간인데도 버스에는 사람들이 제법 많이 들어차 있었다.
청소, 배달 등 우리들의 일상을 위해서, 그 일상을 시작할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해주는 사람들이 출근하는 것이었다.
예전 삶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았다.
뒤처질 수 있다는 두려움에 오로지 앞만 보고 성공만 뒤쫓아 가느라고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두 번째 생에서는 더 이상 미래가 두렵지 않게 되었다.
마음속에 여유가 찾아오니 이제야 주변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용두동 좁은 골목길을 돌아 해장국집에 들어서니 조사반장이 미리 와서 자리잡고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자리에 채 앉기도 전에 첫마디를 내뱉었다.
"해장국이죠?"
"안녕하……."
아침 인사를 하는지 알고 뻗은 손이 민망해서 거두었다.
냉혈한 인간.
별거 아니라고 할 수 있지만, 어쨌든 지난번 무전취식범으로 몰릴 위기에서 구해 준 은혜도 모르고.
"잠시만요. 아직 시키지 마시죠."
"왜 그러시죠?"
"저희 회사 주인님이 오시거든요?"
"네? 회장님이요?"
여간 놀란 게 아닌 모양이다.
"아뇨, 그분 아니고요. 소액주주님 중에 회사 일에 관심 많은 분이 계세요."
다짜고짜 주인이라고 하면 최대주주일 테고 조인철회장이 최대주주이니 조회장이 온다고 생각했나 보다.
하지만 소액주주도 주주고 회사의 주인이다.
게다가 정교수는 나중에 3대 주주까지 될 분이다.
잠시 주문을 미뤄가면 기다리는데, 몇 분 안 되어서 식당 문이 열리더니 중절모에 양복을 갖춰 입은 노신사가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내가 인사하는 걸 보고 조사반장이 고개를 돌리자 바로 알아보았는지 화들짝 놀랐다.
"어! 교수님 안녕하세요. 어쩐 일로 여기……."
"자네 왔는가? 얘기 들었네. 오랜만이야. 허허허."
조사반장은 논문 지도도 해주고 결혼식 주례까지 봐준 교수님과 오랫동안 연락 한 번 못 드린 게 죄송했는지 연신 죄송하다고 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만난 지 십 년쯤은 되었는지 지난 세월 동안 있었던 일들을 자세히 주고받았다.
내가 기대하던 바로 그 분위기였다.
반장의 안면엔 웃음꽃이 핀 와중에도 언뜻언뜻 내 눈치를 보고 있는 티가 났다.
오랜만에 은사님을 뵈어 기분이 좋다가도 뭔 청구서가 날아올지 몰라 걱정도 되는 모양이었다.
즐거운 조찬회동을 마치고 오랜만에 기분 좋게 출근길에 나설 수 있었다.
물론 조사반장과 같이 들어가면 이상하니 따로 지하철을 타고 회사로 향했다.
회사 앞 지하철역에 도착하니 아직도 8시가 채 안 되었다.
* * *
오후 시간이 되고 전화벨이 울려 받아보니 역시 조사반장이었다.
생각보다 반응이 빨리 왔다.
회의실 옆 휴게실에 도착하자 조사반장이 테이크아웃 커피 두 잔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살다 살다 공무원한테 커피를 얻어먹긴 처음이었다.
어쩌면 마지막일 수도 있을 거다.
반장이 커피 한 모금을 들이키고는 시원시원하게 바로 본론을 꺼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안 됩니다."
역시 시원시원하다.
"결론은 들었으니깐 이제 본론 말씀하시죠."
내가 왜 안 되냐며 따질 줄 알았었는지 별다른 리액션이 없자 살짝 당황한 빛이었다.
숱하게 공무원들을 겪어봐서였는지 대강 공무원 특유의 어법을 알고 있었다.
'우선 결론은 안 바뀌나 내가 힘써서 이 정도까지는 해 주겠다' 이런 식이다.
반장은 잠시 고민하는 척하더니 본론을 꺼냈다.
"내부적으로 공론화된 마당에 마냥 덮을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은사님과 회사와의 관계도 있고 하니 줄일 수 있는 부분이 있는지 검토는 해 보겠습니다."
역시 예상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투서까지 받은 마당에 그냥 덮을 수는 없고 조금 깎아 주겠다는 거다.
게다가 은사님은 그저 핑계고 뭔가가 더 있을 거다.
"그럼 조건은요?"
직설적인 나의 반문에도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저희 전임 국장님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