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손안의 재벌-32화 (32/191)

32화 200억

며칠 뒤 조사관들이 임상무를 호출하여 출장 필요성을 설명하자 바로 항공편과 숙소 등 모든 스케줄이 잡혔다.

엿들었던 대로 출장지는 LA와 북경으로 결정되었다.

성환이 유학시절 친구들도 만날 겸 LA를 동반하고 나는 북경을 다녀오게 되었다.

북경과 LA 사무소 측에는 미리 연락해서 대응 준비를 시켰다.

해외사무소들은 오직 한국 본사의 영업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조직으로 꾸며 놓았다.

본사제품을 소개하고 시장조사하는 사진을 찍어 놓는 등 각종 증거자료를 구비해 놓았다.

준비는 끝났으니 그냥 맘 편히 접대하고 놀다 들어오면 그만이다.

* * *

조사관과 내가 공항에 내리자 북경사무소 대표인 주상무가 마중 나와 있었다.

차량에 탑승하고 북경 시내 사무실 쪽으로 출발하는데, 조사관이 지나가는 투로 슬쩍 한번 떠 봤다.

"들으니까 시내 가는 길에 좋은 발 마사지 집이 있다던데……."

주상무가 예의상 대꾸해 주었다.

"네, 그럼요. 중국에는 사방에 다 있습니다."

"발 마사지가 시차 적응에 무지 좋다던데……."

한 시간 차이다.

핑계를 좀 그럴듯하게 대든가 아니면 까놓고 말하든가 하지 이래저래 둘러대는 게 좀 피곤한 스타일인 듯했다.

그래도 센스 있게 모르는 척 받아줄 필요가 있었다.

"오랜만에 비행기 타니까 엄청 피곤하긴 하네요. 주상무님께서 좋은데 하나 추천해 주시죠."

눈치없는 주상무도 이제야 알아들었다.

"네, 좋은 데로 모시겠습니다."

의사처럼 하얀 가운을 입은 전문 치료사가 해주는 정통 발 마사지.

오랜만에 받으니 온몸에 땀이 흠뻑 차올랐다.

노곤해지는 게 잠이 쏟아지고 배도 고파왔는데, 조사관도 마찬가지였나보다.

마사지를 마치고 차량에 탑승하자마자 조사관이 또 지나가는 투로 슬쩍 던졌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한국시간으로 식사 시간 지나니깐 배꼽시계가 울리네요. 하여간 이 시계가 제일 정확하다니깐?"

8천 원짜리 알탕도 안 얻어먹던 사람이 맞나 싶다.

아무런 대꾸가 없자 한마디 더 거들었다.

"유명한 훠궈집이 어디 있다던데……. 이번이 아니더라도 언젠간 먹을 수 있겠죠. 뭐, 북경에 평생 다시 한 번 못 오겠습니까?"

"주상무님! 가는 길에 그 유명한 훠궈집에 한 번 들렀다 가시죠. 저도 배가 많이 고프네요. 비행기를 너무 오래 타서 그런지. 허허허"

조사관은 내가 비꼰 걸 못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연신 좋아라 하는 표정을 숨기질 못했다.

저녁을 마치고 식당을 나서는데 밖이 어느새 어둑어둑해졌다.

"오늘은 장거리 이동해서 피곤하니 숙소 들어가서 쉬었다가 내일 사무소로 가시죠."

오호 땡큐다.

뭔가 좀 아는 사람이 왔다.

출장은 무슨 출장, 그냥 출장 핑계로 해외여행 왔다고 생각하고 쉬다 가려나 보다.

호텔로 들러 체크인을 하고 방으로 가려는데 조사관이 그윽하게 쳐다봤다.

"지금 헤어지는 건가요?"

좀 아까 피곤하다고 쉬잔 사람이 누군데.

항상 이렇다.

출장자들은 밤에 뭔가가 있기를 기대한다.

제대로 된 유흥 시설도 없는 시골 벽지에서도 그러한데 하물며 여긴 북경이다.

향응을 기대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짐 푸르고 30분 후에 로비에서 뵙죠."

조사관이 콧노래를 부르며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이럴 줄 알고 미리 주재원을 시켜 예약한 곳이 있었다.

오랜만에 방문한 코리아타운 술집에서 목이 쉬어라 노래를 부르고 또 불렀다.

예전 주재원 생활하면서 백 번도 넘게 와봐서 그런지, 오랜만이었는데도 여전히 지겹다.

조사관은 뻔히 가짜 양주 티가 나는데도 벌컥벌컥 마시더니 완전 떡이 되었다.

간신히 부축하고 나와 호텔 방에 처넣으니 어느덧 12시.

하루가 정말 길다.

다음 날 오전 8시.

로비에서 만나자고 한 조사관 나타나질 않았다.

30분쯤 지났을까?

저 멀리서 등산복 차림으로 걸어 나오는 남자가 보였다.

사복을 입고 있어서 못 알아볼 뻔했다.

조사관은 날 보더니 놀라는 투로.

"아니 과장님, 왜 양복을 입고 계시죠?"

뭐? 출근하는데 양복을 입지 그럼 뭘 입어.

"회사 가려고요. 근데 조사관님은 복장이……."

"오늘 아침에 만리장성 가기로 한 거 아닌가요?"

뭔 개소리?

내가 언제 그랬다고.

출장 오기 전부터 이미 어디 갈지 미리 스케줄을 다 짜 놓은 모양이다.

거기다 오늘 일정을 어제 나한테 은근슬쩍 흘렸다고 생각했나 보다.

"아, 맞다. 제가 깜빡했네요. 양복 입어도 갈 수 있습니다. 케이블카 타면 되니깐요."

오전에 만리장성을 들렀다가 점심으로 북경에서 제일 유명한 식당인 전취덕에서 가서 북경 오리를 먹었다.

이는 북경 출장 필수코스였다.

이전에 수많은 출장자들을 안내해왔던 나로서는 백열 번째 되는 방문이었다.

오후에는 자금성을 가서 대강만 훑어보았는데도 벌써 저녁 시간이 되었다.

오늘도 역시 사무소엔 못 갔다.

어쩐지 조사관 등산복 입고 나오더니 애초부터 갈 생각이 없었나 보다.

LA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고 들었다.

저녁 식사와 술집으로 이어지는 똑같은 코스를 돌고 호텔로 돌아왔다.

이건 뭐 깃발만 안 들었지, 영락없는 여행사 가이드다.

출장 셋째 날이자 마지막 날 아침.

드디어 북경사무실로 갈 수 있었다.

조사관은 나보고 나가서 일보라고 하더니 자기 혼자 회의실에 들어가 미리 세팅해 놓은 자료들을 뒤적이며 뭔가 열심히 하는 척했다.

그래도 양심은 있는지 조금은 일하는 척하려는 모양이었다.

옆방에서 노트북을 펼치고 인터넷서핑을 하는데, 서울에서 전화가 왔는지 조사관의 심각한 통화 소리가 들려왔다.

"네? 그걸 다요? 아니 왜 이제 와서……."

"……."

"가짜요? 그럴리가요."

"……."

"네. 알겠습니다."

상대 목소리는 들리지 않아서 자세히는 모르겠으나 분명 심상치 않은 분위기였다.

조사관이 점심을 도시락으로 주문해달라고 하더니 회의실에서는 한 발짝도 나오지도 않고 자료를 뒤적였다.

현지 담당 직원들을 불러서 이것저것 질문하면서 자료를 요청했다.

받은 자료를 복사해서 가방에 챙기고 있었다.

분명 뭔가가 있다!

놀다 가려고 작정한 사람이 갑자기 진지 모드로 전환했다.

폭풍처럼 일하다 출발시간 얼마 안 남기고 간신히 공항에 도착해서 돌아오는 비행기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조사관은 비행기 안에서도 옆자리에 앉아있는 두 시간 내내 한마디도 없이 이것저것 노트에 열심히 적고만 있었다.

그렇게 2박 3일의 짧은 출장 일정이 마무리되었다.

* * *

출장을 마치고 다음 날.

회사로 출근했는데 사무실 분위기가 영 심상치 않았다.

"네? 조사 기간을 연장한다고요?"

스마트미팅 시간에서 김병국부장의 갑작스러운 공지에 팀원 전체가 탄식을 내질렀다.

한 달이 넘도록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영혼까지 탈탈 털렸다.

이제 좀 끝나나보다 안도했는데 다시 수렁으로 빠져 버린 느낌이었다.

"아니, 얼마나요?"

"아직 몰라. 아마 오늘내일 중에 통보가 올 거야."

조사 기간 연장은 매우 좋지 않은 징조였다.

숨긴 장부가 나오거나 탈세 혐의가 포착되거나 자료협조가 안 돼서 부득이한 경우에만 연장이 가능했다.

즉, 매우 안 좋은 시그널이었다.

"무슨 내용인지도 몰라요?"

"지금 여기저기 루트로 파악 중인데 알아내기 어렵나 봐."

어쩐지 어제 북경에서 조사관의 급격한 태도 변화가 이상하다고 했다.

분명 이와 관계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우려했던 대로 해외사무소 경비 관련한 이슈일 가능성이 높았다.

뭐라도 들을 수 있을지 몰라 조사관들 방 옆 휴게실로 갔다.

안마의자에서 쉬는 척하며 귀를 기울이는데, 여기 분위기도 심각한 건 마찬가지였다.

같이 북경에 갔었던 김주무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냥 확인 정도 하고 오라고 하셨으면서, 마지막 날 갑자기 털라니……. 무슨 일이시죠?"

조사반장이 심각한 듯 대답했다.

"투서가 들어온 거 같아. 증거자료 다 거짓이라고."

"네? 누가요?"

"누군진 몰라. 자세한 것까지 제보한 걸 보니깐 회사관계자겠지."

내부인이 맞을 거다.

안타깝지만 제보자는 실상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우리 팀 사람일 확률이 가장 높았다.

근데 아무리 떠올려도 그럴만한 사람이 없는데…….

그래도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다.

이상현도 그런 놈일 줄은 예전엔 꿈에도 몰랐을 정도였으니.

"그럼 어떻게 하죠? 묻었던 거도 다시 팔까요?"

다른 조사관이 할 일이 늘어나서였는지 불평하듯 읊조렸다.

"그래도 자세한 제보가 왔는데 그냥 넘어갈 순 없어. 공모했다고 의심받을 수 있으니깐 우선 최대한 파보고 규모 보고 나서 결정하자고."

조사반장이 정리하듯 발언하자 다들 조사관들은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웬만해선 그냥 넘어갈 분위기가 아니었다.

오너 입장에서 세무조사 한 번 제대로 대응해 보자던 첫 다짐은 온데간데없어졌다.

마냥 귀찮기만 헸다.

그냥 될 대로 되라고 손 놔버려도 상관은 없다만, 한 달 이상 고생한 게 아깝긴 했다.

더군다나 집에도 못 들어가고 없는 자료 만드느라 고생한 팀원들이 눈에 밟혔다.

물론 투서 낸 놈만 빼고.

사무실로 돌아와 팀원들을 싹 훑어봤다.

LA에서 오고 있는 성환을 제외하고는 모두 자리에 앉아서 조용히 일하고 있었다.

당연히 성환은 아닐 테니 일단 제외하고.

사무실은 평상시와 다름없는 너무나 평온한 일상의 풍경이었다.

그런데 뒷자리 원모가 내가 서서 둘러보는 게 영 불편했는지 힐끔힐끔 나를 훔쳐보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정말 수상했다.

"너냐?"

"죄송합니다."

헐? 그냥 묻기만 했는데 바로 자백해버리다니.

"이런 개새끼가!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냐?"

원모는 울기 일보 직전까지 얼굴이 구겨지더니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개자식. 우리가 얼마나 고생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뒤통수를 쳐?"

한참을 욕먹더니 원모가 갑자기 억울하다는 듯이 정색했다.

"과장님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겨우 그 정도로 개자식에 뒤통수를 치다뇨."

"뭐가 겨우 그 정도야? 이 자식이?"

"……전표 안 올릴게요. 그냥 제 돈으로 메꾸겠습니다."

갑자기 삼천포로 빠진 듯.

"뭔 개소리야?"

"고생했다고 빌려줘 놓고선 이십만 원 좀 넘었다고 이러실 수 있습니까? ……그냥 제 돈으로 할게요."

맞다! 립아이!

여자친구랑 맛있는 거 먹으라고 법카 빌려줬던 게 이제야 떠올랐다.

"아, 난 또 뭐라고. 미안 미안. 원모야. 내가 오해했었다."

"뭔 소리입니까……. 욕이란 욕은 실컷 다 해놓고는."

"내가 잠시 딴생각하다가 오해했어. 미안. 전표 올리고 이번 주말에 또 가. 더 비싼데 가서 먹고 올려. 사인해 줄게."

원모의 얼굴이 금세 환하게 펴졌다.

그건 그렇고 빨리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

어쩔 수 없이 법무팀에 물어볼 수밖에 없다.

핸드폰 첫 번째 신호음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상현이 받았다.

"태평아. 무슨 일 있어? 요즘 통 연락도 없더만."

"아니, 뭐 좀 물어보려고. 세무조사 관련해서."

"연장 통보받은 거? 그거 별로 신경 안 써도 될 거야."

무슨 문제인지 알려주기도 전에 답을 말해버렸다.

분명 오전에는 김병국부장이 아직 통보받지 않았다고 했었는데 이 놈은 벌써 알고 있었다.

"고마워, 상현아. 그런데 어떻게 알았어? 아직 통보 못 받았다고 들은 거 같은데."

잠시간의 정적이 흘렀다.

짱구 굴리는 소리가 수화기 너머까지 들려왔다.

"어. 국세청에 아는 사람 있어서 먼저 들었어. 아직 통보 못 받았나 보구나? 곧 보낸다고 했는데……. 난 네가 통보받고 나한테 전화한 줄 알았지."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

이제 대강 알겠다.

이놈이 거짓말할 때의 습관이 보이는 거 같았다.

"역시 네트워크 죽이는데? 변호사라 다르긴 다르구나."

"그렇지 뭐. 그건 그렇고 물어본다는 게 뭐야?"

"별건 아니고. 조사연장 사유가 정당한지 검토해 줄 수 있어? 그리고 국세청에서 알아챈 게 뭔지도 알아봐 주면 더 좋고."

"나도 대강 듣기로는 일단 해외사무소 경비 관련 사항 같던데. 예전에 네가 주재원 나갔을 때도 그거 막느라고 힘들었잖아."

아뿔싸!

이건 내가 대리시절 지난 세무조사 때 알려준 것이었다.

가짜로 서류 만들어서 사인까지 하고 온갖 조작을 일삼았었다고 자랑삼아 털어놓았었다.

어차피 걸리지도 않을뿐더러, 한 번만 넘어가면 되니깐 문제가 될 여지도 없었다.

천하제일 조직에서 마치 중요한 위치에 있으면서 뭔가 대단한 일을 하고 있는 양 으스대며 떠벌렸던 것이다.

물론 다른 사람에게는 아니고 이상현에게만 얘기했었다.

이놈이 범인이다.

이놈한텐 과거의 내가 알려줬으니 나도 공범일 테지만.

자랑삼아 떠벌린 나한테 겉으로는 맞장구는 치면서도 속으로는 나만 더 잘나가는 거 같아 부럽고 질투심이 났던 거였다.

* * *

며칠 후 정식으로 조사기간 연장 통보를 받았다.

법무팀을 통해 연장 사유가 부당하다며 이의제기를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2주간 조사 기간이 연장되고 야근이 계속되었다.

연장 기간이 마무리될 즈음 조사반장이 우리를 호출하였다.

"네? 200억이요?"

조사반장이 대략적인 세금을 통보해주자 놀란 임상무가 뱉은 첫마디였다.

"네. 그 정도가 적정하다는 판단입니다."

"아니 어떻게……. 말도 안 돼……."

크게 놀라는 임상무는 아랑곳하지 않고 조사반장이 쐐기를 박는 발언을 했다.

"파이널 오퍼입니다."

그냥 받든지 말든지 결정하라는 말이었다.

통상적으로는 정식으로 세금이 얼마 나왔다고 통지하기 전에 양쪽에서 어느 정도 합의를 본다.

그래야 나중에 정식으로 통보받고 나서 난리 치고 소송을 하니 마니 하는 귀찮은 절차를 생략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번 건은 멘트로만 보기엔 합의여지가 없는 듯 보였다.

실무책임자인 성환이 나섰다.

"네고 가능합니까?"

"네고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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