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노트북
"과장님 죽겠습니다. 지난주말도 못 쉬었는데……."
오늘따라 애들 엄살이 심했다.
엄밀히 말하면 엄살만은 아니었다.
세무조사 시작하고 평일 야근은 물론이고 주말에도 집에서 저녁 못 먹은지 한참되었다.
조사관들은 꼭 퇴근하면서 내일 아침까지 자료 달라고 던져놓고 간다.
물론, 있는 자료를 주는 건 찾기만 하면 되니 번거로울 뿐 힘들진 않았다.
문제는 없는 자료를 요청하는 건데, 그럴 땐 좀 곤란했다.
없다고 하면 '그냥 세금이나 때려주세요' 하고 사정하는 격이다.
그래서 새벽까지 남아서 만드는 거다.
오래된 자료인 척 일부러 헤지게도 하고, 그 시절 담당자와 임원들의 가짜 서명까지 하면서 별의별 방법을 다 써서 만들어낸다.
그러니 야근을 피할 수 없다.
20층 회의실에 조사관들을 몰아넣은 우리는 밑에 층에서 대책반을 따로 마련해서 몰래 작업 중이었다.
"아니, 내일까지 과거 5년 자료를 어떻게 찾아요."
방금 전에 퇴근하면서 조사관이 던져 주고 간 요청자료 리스트에 원모가 발끈했다.
질질 짜는 소리는 듣고 싶지는 않지만, 윽박지르기도 미안했다.
당근이라도 던져서 살살 다독여줄 수밖에.
"그래 원모야 고생이 많지? 이번 주말에 데이트해. 법카줄게."
단순한 놈, 내 제안에 그새 약간 풀린 듯한 표정이었다.
"채끝 스테이크 또 먹는다고 뭐라고 하시는 건 아니시겠죠?"
뒤끝도 길다. 그게 언제 적 일인데 아직까지…….
"내가 언제 뭐라고 했다고 그래? 이번에 뉴욕스트립 말고 더 비싼 립아이로 가. "
원모가 의아한 듯 되물었다.
"지난번에 그 집 안 갔었는데요."
역시 실망시키는 법이 없다.
식당 이름으로 잘 못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옆에서 조용히 듣고만 있던 성환도 끼어들었다.
"아쉽네요. 원모님. 뉴욕스트립 그 집 죽이는데."
"왜요?"
호기심에 원모 눈이 왕밤만큼 커졌다.
"식당 이름을 보세요. 거긴 막 야시시하게 입고 서빙해 줘요. 하긴 여자친구분하고는 가기 좀 그렇겠다."
표정 하나 안 바뀌고 능숙하기 그지없다.
설마 성환이 거짓말을 하리라고는 생각을 못 했는지 반짝거리는 눈망울로 날 쳐다봤다.
"과장님. 세무조사 끝나고 거기 데려가 주시면 안될까요?"
뉴욕스트립은 채끝이고 립아이는 꽃등심이야 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성환의 표정이 '절대 안 돼'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자. 그럼 이번 주말엔 여자친구랑은 그냥 립아이로 가라."
"감사합니다."
일단은 넘긴 거 같아 다행이다.
나 같으면 초록창이라도 열고 찾아봤을 텐데 단순한 놈 그대로 믿어 버렸나 보다.
* * *
다음 날 오전.
자료를 들고 성환과 함께 조사관들이 있는 회의실로 갔다.
"안녕하십니까. 어제 요청하신 자료입니다."
대답도 없이 그저 검지를 뻗어 옆에다 놓으라는 시늉만 했다.
시선 한 번을 마주치지도 않고 다들 자기들 컴퓨터만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반장은 상주하지 않고 가끔 한 번씩 오며 진행 상황을 체크했다.
이렇게 반장 없을 때 다른 조사관들이 틈만 나면 갑질을 했다.
자료를 두고 나가려는데 조사관 한 명이 갑자기 나를 불러세웠다.
"어이 과장님. 이거 좀 한번 봐 봐."
조사관의 가리킨 화면엔 노트북 가격 비교 창이 떠 있었다.
"큰 애가 이번에 중학교 갔는데 노트북 사달라고 하도 졸라 가지고요. 난 잘 몰라서 그런데 뭐가 좋은 건지 좀 봐 줘."
맨날 인터넷 쇼핑만 하는 성환이 익숙한 듯 하나를 골라주었다
"이게 좋겠는 데요? 최신형인데다가 가격도 나쁘지 않고요."
조사관은 성환이 추천한 노트북을 보고는 갑자기 정색했다.
"아 비싸네. 이런 씨발. 공무원 월급 얼마나 된다고 컴퓨터 하나를 이렇게 처받아. 하여간 이놈들 얼마나 남겨 먹고도 세금 잘 내는지 싹 다 털어 봐야 한다니까?"
뜬금없는 욕설에 성환이 매우 당황했다.
그러나 다른 조사관들은 늘 있는 일인 것처럼 미동 하나 없었다.
"요즘 노트북 다 그 정도는 합니다."
눈치 없는 성환이 대꾸하자 조사관의 푸념이 시작됐다.
"그래요? 아이고 우리 아들내미 가난한 공무원 아빠 둬서 남들 다 가지고 있는 이 정도 노트북도 하나 못 갖게 생겼네."
"그럼 제가 더 저렴한 거 찾아봐 드릴까요?"
분위기 파악 못 하는 거 같길래 손을 휘저으며 가만있으라고 사인을 줬다.
잠시 뒤 조사관이 한껏 부드러운 말투로 물어봤다.
"혹시 회사에 돌아가긴 하는데, 안 쓰고 폐기하려는 노트북 있나? 그거라도 줘야지 뭐."
까놓고 말하지 꼭 이런 식이다.
아까 처음에 본 모델로 사달라는 얘기였다.
다시 나서려는 성환을 제지하고 내가 대답했다.
"네 조사관님. 저희가 폐기대상 중에 쓸 만한 거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사무실에 돌아온 성환이 따지듯 물었다.
"과장님. 폐기대상인데 쓸 만한 게 어딨어요? 그냥 좀 저렴한 거 추천해 주면 되지."
"아니, 그런 얘기가 아니라니깐?"
귀찮다는 듯 대답하고 바로 원모를 찾았다.
"원모야!"
"네."
"여기 카드 줄 테니까 노트북 좀 사 와라."
원모는 세무조사를 받은 경험이 있어서였는지 대강 무슨 상황인지 파악했다.
"지금 당장 가서 여기 적힌 모델로 사 와. 윈도우, 한글, 오피스 전부 다 깔고 지금 바로 가져와. 가격은 상관없고 지금 당장 가져올 수 있는 걸로 사와."
성환이 이해 안 간다는 듯 되물었다.
"아니 왜요?"
"사 달라는 얘기였잖아. 못 알아들었어?"
"그러니까 왜 사 주냐고요."
막상 듣고 보니 대답하기 곤란했다.
사 달라니까 당연히 그냥 사 줘야 한다고만 생각했었다.
"그게 싸게 먹혀."
맞는 말이긴 한데 말해 놓고도 궁색하기 그지없었다.
납세의 의무를 핑계로 권력을 휘둘러 사리사욕을 채우는 이런 문화는 머지않아 곧 없어진다.
내가 당장 지금부터 나서서 바꿀 수도 없고, 지금은 최대한 문제 안 일으킬 만한 수준에서 물 흐르듯 흘러가게만 하면 그만이다.
성환은 더 이상 묻지는 않았으나 못마땅한 표정을 거두진 않았다.
* * *
퇴근 시간이 다가올 때쯤 원모가 땀 범벅이 된 채 노트북 가방을 들고 돌아왔다.
성환은 고개를 휘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아직도 이해 안 가?"
"네. 원리원칙대로 하면 안 되나요? 꼭 이런 식으로 해야 해요?"
"원리원칙이란 절대적인 게 아니야. 때로는 에둘러 가는 게 원칙인 경우도 있어. 과정에서 피해를 보는 사람이 없고 결과가 좋으면 그게 원리원칙이야."
성환은 대답이 없었다.
노트북을 들고 성환과 함께 조사관들이 있는 회의실로 찾아갔다.
"네가 갖다줘."
"제가요?"
"어. 네가 말해."
성환은 할 수 없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회의실 안으로 들어서니 조사관들이 마침 가방을 싸고 외투를 입으며 퇴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성환의 손에 노트북 가방이 들려 있는 것을 보자 조사관의 얼굴이 확 피는 게 느껴졌다.
성환이 가방을 건네며 설명했다.
"마침 얼마 전 다른 부서에서 구매했다는데 사양이 안 맞는다네요. 환불도 안 되고 쓰는 사람도 없어서 폐기하려는데 비용도 들고 하니 조사관님께서 가져가시는 게 어떨지요?"
"제가요?"
조사관은 뭔 말인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확인해 보시고, 혹시 작동 안 되면 불편하시겠지만 폐기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건네받은 조사관은 가방을 열어 노트북을 꺼내 이리저리 돌려가며 확인했다.
새 제품인지 꼼꼼히 확인해보는 것이었다.
확인을 마친 조사관은 조용히 가방에 도로 집어넣었다.
"네 큰 흠집 같은 건 없는 거 같네요. 정 폐기 하시겠다면 제가 가져가서 좀 쓰다가 대신 처리해 드리겠습니다."
이건 뇌물이 아니다.
우린 폐기물을 건넸고 조사관은 우리 대신 비용부담까지 하면서 폐기해 주는 거다.
정신승리를 했지만 찜찜한 구석이 남았는지 성환의 표정이 여전히 어두웠다.
"금세 생각한 거 치고 임기응변은 꽤 잘하던데?"
"그래도 영 찜찜한데요……."
"앞으로도 그런 찜찜한 기분이 많이 들거야. 어쩔 땐 치욕적이고 참기 힘들 수도 있겠지만, 그럴 때마다 오늘의 이 기분을 떠올려 봐. 조금은 도움이 될 거야."
내가 그룹 오너 입장이 되어본 적은 없었으나, 임원 생활을 거치면서 어렴풋이 그럴 거라고 짐작할 정도는 되었다.
"무슨 말씀이시죠?"
"찜찜하다며?"
"그 말이 아니라, 저 노트북 정말 조사관 아들이 쓰는 걸까요?"
"무슨 소리야 그게?"
"아까 원모님이 그러는데 노트북매장 사장님이 프로그램 깔아주면서 재밌는 거 많이 넣어드렸다고 살짝 귀띔해 줬다고 하더라고요."
"그걸 지금 얘기하면 어떻게 해?"
큰일 났다.
이놈들이 시키지도 않은 일을 벌려 놓고 얘기도 안 하다니.
재빨리 조사관들 회의실로 뛰어갔으나 이미 모두 퇴근했는지 아무도 없었다.
명함을 뒤져봐도 당연히 핸드폰 번호가 적혀있지 않았다.
방법이 없다.
내일까지 확인 안 하길 바랄 수밖에.
허탈한 마음에 털레털레 사무실로 돌아오니 원모가 웃으며 맞이했다.
"사장님이 취향을 모르니까 이것저것 장르별로 쫙 깔아주셨다는데 내일 엄청 고마워하실 겁니다."
"아이 개새……. 아니다, 네가 뭔 잘못이냐?"
영문도 모르고 고생만 작살나게 한 원모가 욕먹을 일은 아니었다.
"야 조성환! 아들이 쓴다고 원모한테 얘기 안 했어?"
"아들 핑계 댄다고 생각했죠. 눈 막 돌아가는 게 딱 봐도 완전 자기가 쓸 거던데요?"
할 말이 없었다.
어쩌면 성환이 말이 맞을 수도 있다.
* * *
다음 날 아침.
조사관들 출근 시간에 맞춰 성환과 함께 회의실을 찾아갔다.
"안녕하십니까!"
"네, 안녕하십니까."
어제 노트북을 받아 간 조사관이 오늘 아침엔 만면에 웃음을 띠고는 반갑게 인사를 받아줬다.
다행이다.
아직 안 봤나 보다.
"조사관님. 사실 어제 그 노트북에……."
성격 급한 조사관 내 말을 도중에 끊었다.
"아 네. 돌아가긴 하더라고요. 아들놈이 엄청 좋아하던데요? 새벽 늦게까지 안 자고 가지고 노는 거 같더라고요. 오늘 아침에 눈이 시뻘게져서는, 하하."
음……. 중학교 1학년 남학생이라.
때가 되었다.
가만 떠올려보니 딱 그맘때쯤이었던 거 같다.
신세계를 접해본 게.
"그런데 아까 노트북 어쩌고 하실 말씀이 뭐였죠?"
이제야 자기가 말을 끊었다는게 생각난 모양이었다.
"아닙니다. 노트북에 한글이 깔려있는지 기억이 안 나서요."
"아, 그런가요? 제가 가서 확인해 볼게요."
헉!
아빠한테 걸리는 건 막아야 한다.
"아닙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어제 들은 거 같습니다. 워드, 한글, 오피스 다 깔려있다고요. 확인 안 해 보셔도 될 거 같아요."
오후에 조사반장이 출근했기 때문에 오늘은 아무도 회의실 옆방 휴게실을 찾지 않을 거다.
눈앞에 쫙 펼쳐진 시내 뷰와 최고급 안마의자를 썩히기에는 너무 아까웠다.
옆방 얘기도 주워 들을 겸 오후에 여기서 안마나 받으며 짱 박혀 있어야겠다.
조사관들은 한 주 간 새로 발견한 사항들을 공유하고 어떻게 처리할지 논의했다.
대부분 내용은 심각한 게 아니었지만, 조사관 한 명이 우리가 처음부터 우려했던 사항을 건들었다.
"해외 주요 도시마다 연락사무소가 있는데요. 경비 규모가 어마어마합니다. 주재원은 물론 현지 채용 인력까지 더하면 연간 급여만 해도 매년 수십억 이상 나가는 거 같습니다."
해외사무소에서 쓰는 비용이 과연 본사 경비가 맞냐는 문제였다.
본사 비용이 아니라면 그만큼 회사 이익이 줄어서 세금도 줄었으니, 그 세금을 토해내라 할 것이다.
그것만 하면 다행이지 괜히 해외에 자금을 빼돌렸다는 의혹까지 받으면 더 큰 문제다.
코에 걸면 코걸이요 귀에 걸면 귀걸이라고 할 수 있는 사항으로 누구 하나 확실히 맞다 틀리다 할 수 없는 사항이다.
"해외사무소가 하는 일을 확인해야지. 현지 시장 조사하려고 쓰는 비용이 아닐까?"
캐봐야 애매모호한 것 뿐이 없을 거란 걸 반장은 경험적으로 알고 있는 거다.
반장의 날카로운 질문에도 조사관이 꿋꿋이 대답했다.
"단순히 시장조사만 한다기엔 규모가 너무 큽니다. 좀 이상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거지?"
"자료 요청해서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이런!
해외사무소까지 자료 요청한다니 우리 애들 이제 죽었다.
원모 립아이 데이트도 몇 주 더 미뤄야 할 수도 있었다.
잠시 후 차선임인 경험 많은 조사관이 한 가지를 제안했다.
"반장님. 이번에 고생 많이 했는데 홍주무관하고 김주무관 출장 한 번 보내시죠."
그렇다.
자료 받아봐야 기다리다 날 다 셀 거다.
그냥 겸사겸사 가서 확인해 보자는 얘기였다.
"홍주무관하고 김주무관이 하나씩 찍어 봐. 어디 가고 싶어?"
역시 경험 많은 조사관인 듯했다.
출장 핑계로 부하직원들 해외여행 한 번씩 보내주려는 거다.
"저희는 그냥 필요한 곳을……."
"쫌! 필요한데 말고 가고 싶은 데를 말하라고. 너 로스엔젤레스 가봤어?"
"아니요."
"그럼 LA는?"
"네?"
빵 터지는 바람에 안마의자에서 떨어질 뻔했다.
하급자는 선배가 모르는 걸 고쳐주려 하지 않는 게 역시 공무원다웠다.
"그럼 홍주무관은 미국 가고 김주무관은 얼마 전에 휴가도 다녀오고 했으니 오래 비우긴 곤란하니까 가까운 북경 가보는 게 어때? 거기 한국 술집도 많다는데?"
떡 줄 놈은 생각지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신다.
하긴 조사관들이 마음먹으면 따를 수밖에 도리가 없긴 했다.
아니 그게 오히려 나을 수 있다.
회사 근처에서는 우리 돈으로 밥도 못 사는데 해외에서는 보는 눈도 없으니 제대로 접대도 할 수 있으니까.
그래야 나중에 협상의 여지가 넓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선임 조사관의 교통정리에 반장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승낙의 표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