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손안의 재벌-30화 (30/191)

30화 인연

세무조사 개시일.

새벽 6시도 안 되어 아직 어둠이 걷히지 않은 데에도 저절로 눈이 떠졌다.

왜 이러지?

이까짓게 뭐라고 긴장하는 거지?

천하제일이야 세금을 몇백 억을 두들겨 맞든 말든 사실 나랑 상관은 없는데.

욕이야 먹겠지만 그거야 잠깐일 테니 충분히 감내할 수 있다.

한 귀로 흘려버리면 그만이다.

게다가 승진도 필요 없을뿐더러 어차피 내년이면 빠이빠이 할 거다.

그런데도 아직 마음 깊숙한 곳 월급쟁이 마인드를 완전히 떨쳐 내지는 못했나 보다.

상관없다고 되뇌이긴 했지만.

세무조사 준비하는 과정에서 지난 세월 체화되어 있던 그 무엇인가가 나온 것이었다.

다시 잠을 청해보려 했으나 오히려 눈만 더 말똥말똥해졌다.

이럴 땐 괜히 뒹굴어봐야 더 피곤하기만 하다.

일어나서 뭐라도 하는 게 차라리 낫다.

커피포트에 끓인 물로 믹스커피 한잔을 섞어 휘저으며 생각에 잠겼다.

오랜만에 달달한 게 한 모금 들어가자 혈당이 급격히 충전된 덕분인지 온 신경이 활성화되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다시 사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우선은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하기 싫은 일은 일절 손도 대지 않고 하고 싶은 것만 골라서 하는 거다.

죽음을 한번 겪어 보고 나니 모든 게 달라졌다.

오늘 한 번 하는 경험이 인생의 마지막 경험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

사람은 어차피 한 번 죽는다.

생각지도 않은 상황에서 갑자기 오늘 당장 눈앞에 닥칠 수도 있다.

돈이 많으면 행복할까?

당근이다.

계속 모아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충분히 쓸 수만 있다면 행복할 것이다.

물론 돈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

하지만 제일 중요하다.

죽음을 겪고 나서도 바뀌지 않는 절대명제이다.

돈은 하기 싫은 걸 하지 않고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도록 하는데 훌륭한 도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권력은 꼭 취해야만 하는 것인가?

누군가에게 바람직한 행동을 하도록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 쓰일 수 있다면 권력은 좋은 것이다.

돈을 잘 이용한다면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도록 권력을 쟁취할 수 있다.

조윤경과 이상현에 대한 복수!

복수가 인생의 목적이 될 수는 없다.

그렇다고 그냥 넘어간다는 건 있을 수 없다.

몸에 문신처럼 새겨 놓아서라도 절대 잊지 않아야 한다.

결론은 나왔다.

우선 돈을 충분히 많이 번다.

이건 변함없는 진리다.

게다가 10년간의 미래를 알고 있는 나에겐 돈을 벌기에 너무나도 유리한 조건을 갖췄다.

무작정 벌기만 한다기 보다는 잘 써야 한다.

물론 주로 나를 위해서 쓰겠지만 그래도 상당 부분을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곳에도 써야지.

그리고 복수는 절대 잊지 말자.

잠 깬 김에 말짱한 정신으로 생각을 정리하고 마음을 다시 한 번 가다듬었다.

회사 갈 시간이 됐나 싶어 시계를 보니 이제 겨우 6시.

아직도 두 시간이 넘게 남았다.

일단은 그냥 나가자.

예전부터 일찍 일어났을 때 루틴이 있었다.

주로 해외 출장 갔다 와서 시차 적응 안 될 때 하던 일이었다.

아침 이른 시각 서울의 유명한 해장국 맛집을 순례하는 것이다.

오늘의 픽은 용두동이다.

해장국이지만 해장하려고 가면 안 되는 집이다.

국물을 들이키는 순간 바로 무장해제되면서 저절로 소주를 주문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국물을 들이키면서 술이 깸과 동시에 소주를 털어 넣게 하여 취하게도 만드는 마력이 있는 집이다.

아침에 가야 차마 소주를 못 시키므로 이 집은 항상 아침에만 간다.

문을 열고 들어서며 해장국 하나요를 외쳤다.

그리고는 안내받은 자리를 찾아서 가는데, 앉기도 전에 해장국이 나왔다.

설마 밖 CCTV로 보고 있었나?

해장국 손님이 아니면 절대 이 시간에 이 골목을 지날 수 없긴 하겠지만.

기름기가 적당히 둘러 져 있는 불그스름한 국물을 한 모금 들이키는데 소주 시키는 걸 정말 어렵게 참았다.

소주 없이 삼겹살 먹는 것보다 더 힘든 경지였다.

몇 번의 숟가락질로 국밥을 비우고 계산하러 나가는데 카운터에서 작은 실랑이 소리가 들렸다.

나이 지긋한 손님 한 명이 지갑을 잃어버렸는지 아니면 집에 놓고 왔는지 계산대 앞에서 지갑을 찾으며 안절부절못하는 거였다.

다음에 들러서 주라는 주인 할머니 말에도 가지 않고 방법을 찾느라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무전취식자처럼 여겨진다는 게 참을 수 없어서 저러는 것일 거다.

내가 주인 할머니께 카드를 내밀었다.

"이분 거까지 계산해주세요."

앞자리 아저씨 놀라면서 돌아봤다.

"아니 왜요?"

"저도 지난번에 이런 적 있었어요. 계산할 때 지갑 못 찾아서 곤란했었는데 뒤에 계시던 분이 대신해 주셨어요."

"그래도 제가 돈이 없는 것도 아닌데."

"그럼 다음번에 이런 일 생기신 분 보면 계산해드리세요. 그럼 되죠, 뭐."

"아니 그래도 어떻게……."

"정말 괜찮습니다."

'돈의 힘으로 선한 영향력을 전파하는 건가'라고 잠시 흐뭇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내 돈도 아니다.

회사 일로 고민하다 일찍 일어나서 나왔으니 업무 관련성이 있다.

그러므로 당연히 법카를 내밀어야 한다.

물론 두 명분 긁는 건 좀 그렇지만.

그래도 천하제일의 소비자일 수도 있으니 손님 대접했다 생각하면 그만이다.

내가 괜찮다는 데도 극구 사양하다가 마지못한 듯 명함 한 장을 건넸다.

지갑은 놓고 다녀도 명함은 갖고 다니나.

"여기 제 명함입니다. 출근하셔서 바로 연락주시면 송금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정말 괜찮다니까요. 다음에……."

"아닙니다. 꼭 보내드리겠습니다."

"네. 정 그러시면 그렇게 할게요."

정말 빚지고는 못 사는 성격인가 보다.

아저씨가 사라지고 명함을 보자 방금 먹은 해장국이 그대로 얹히는 느낌이다.

직장은 국세청, 직급은 사무관이라고 적혀 있었다.

어쩐지 딱 봐도 저승사자 스타일이었다.

안 그래도 오늘부터 세무조사 시작인데 아침부터 느낌 상당히 안 좋다.

* * *

용두동까지 가서 아침을 먹고 회사 근처에 도착했는데도 아직 8시가 채 안 되었다.

사무실 내 자리에 도착하자 먼저 와있던 성환이 놀란 듯 물었다.

"웬일이세요?"

"출근했는데 웬일이라니. 어제 내가 잘렸었나?"

"아니 일찍 오셨길래."

그러고 보니 이놈도 이 시간에 웬일이지?

"그러는 너야말로 웬일이야?"

이 자식이 안 어울리게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게다가 오늘은 웬일로 양복까지 갖춰 입었다.

"눈이 저절로 일찍 떠지더라고요. 뭔가 D-day 같은 기분이 드는 게"

같은 이유로 깬 건가.

이상한데 기분이.

"과장님도 일찍 깨셨나 봐요?"

"미쳤냐 이딴 게 뭐라고 깨게. 아침에 들를 데가 있어서."

능글거리며 웃는 게 다 안다라는 표정이었다.

해장국집을 나와 회사에 오면서 생각을 정리해 봤다.

세무조사 결과야 어찌 되든 나랑 상관 없었다. 그래도 이왕 하는 거 단순히 회사 직원으로서가 아닌 오너 입장으로 대응해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향후 내가 이끌어갈 나만의 비즈니스를 위해 예행연습 한 번 해 보자고 생각하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잠시 뒤 원모가 출근하더니 가방을 내려놓으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과장님, 조대리님!"

"원모야 너도 일찍 눈이 떠졌냐? 웬일이야 오늘?"

뭔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듯.

"웬일이라뇨. 전 원래 이 시간에 나오는데요."

그렇다.

한 번도 원모보다 일찍 출근한 적이 없어서 이놈이 몇 시에 나오는지 몰랐던 거였다.

"제시간에 좀 다녀라."

"죄송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미친놈 열심히 하겠다니!

누가 보면 늦게 출근한다고 갈군 줄 알겠다.

딱히 할 일은 없다만 그래도 오전 내내 일이 손이 붙질 않았다.

반갑지 않은 손님들인데도 기다려진다고 해야 할까.

아마 매도 빨리 맞는 게 낫다고 생각해서 그런 것일 거다.

따르르릉!

또 임상무 전화다. 계속 전화질이다.

"아직?"

"아 진짜! 도착했다고 연락받으면 바로 말씀드리겠다니깐요."

"알았어."

툭.

임상무 십 분마다 계속해서 왔냐고 물어보면서 귀찮게 한다.

그래도 임원인데 언제 올지도 모르는데 나가서 기다릴 수도 없고.

또 뻔히 온 거 알면서 나와보지도 않으면 찍힐 수도 있으니 오자마자 튀어 내려가려고 대기 중인 것이다.

십 분 뒤.

따르르릉!

못 참겠다.

욕 한 번 뱉어야지 도저히 안 되겠다.

"아 씨. 전화드린다니깐요! 쫌!"

그래도 차마 발까진 붙이지 못했다.

"네?"

놀란 듯한 여성분의 목소리.

임상무 전화가 아니었다.

"누구시죠?"

"프런트입니다. 국세청에서 나오셨습니다. 아까 바로 전화 부탁드린다고 해서."

"네. 절대 신분증 같은 거 맡기라고 하지 마시고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전해 주세요. 저희가 바로 내려가겠습니다."

임상무와 김부장을 데리고 1층 프런트로 후다닥 내려갔다.

프런트 앞에는 위아래를 온통 검은색으로 깔 맞춤한 듯한 시커먼 아저씨들이 몇 명 서 있었다.

갓만 쓰고 있었으면 저승사자인 줄 알았을 거다.

임상무 갑자기 나와 김부장을 꼬집더니 90도 폴더인사를 했다.

아니 90도보단 거의 180도에 가까웠다.

헐?

신년 인사차 조인철 회장이 각 사무실 돌아다니며 인사 나눌 때만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근처에 있던 직원들 조회장이라도 왔는지 알고 잠시 우왕좌왕했다.

"뭐야? 지주사 미친개 아냐?"

"맞아. 왜 저래? 누군데 저러지?"

이상한 광경에 근처에 있던 직원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임상무는 조사관들을 꼭대기 층의 막 공사를 마친 회의실로 안내하고 김부장과 나, 그리고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던 조성환이 따라갔다.

회의실에 들어서면서 임상무는 공사한 거 한번 봐 보란 듯이 으스댔다.

"말씀해 주신 대로 나름 잘 꾸며 봤습니다. 편하게 일하시면서 부족한 게 있으시면 언제라도 말씀 주십시오."

"네."

아무 뉘앙스도 전달되지 않는 무미건조한 한마디가 전부였다.

머쓱해진 임상무는 자기 명함을 건네며 김부장, 나, 조성환을 차례대로 소개했다.

명함을 교환하며 그제야 조사관들 얼굴을 제대로 살펴볼 수 있었는데 맨 처음 건네받은 조사반장의 명함이 어디서 많이 본 것이었다.

아침에 받은 명함과 직장명, 직급과 이름이 모두 같았다.

어?

해장국집 그 아저씨였다.

이제야 그 아저씨도 나를 제대로 봤는지 서로 놀라며 동시에 '어'하고 탄식을 내뱉었다.

무슨 영문인지 모르는 임상무는 조용히 속삭이듯 물었다.

"아는 분이셔?"

들은 모양인지 조사반장이 갑자기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제가 아는 동생하고 닮아서요."

그냥 밥집에서 마주친 거지 안다고 할 순 없으니 거짓말은 아니었지만.

굳이 또 모른다고까지 할 필요까지야.

우연히 두 번 만났지만 뭐 특별한 인연도 아닐 텐데.

암튼 상대방이 모른 척하는데 굳이 나도 아는 척할 필요는 없었다.

"네. 저도 아는 형하고 닮아서요. 예전에 저한테 밥 무지하게 얻어먹었는데 그 형. 해장국 엄청 좋아했었죠."

내 농담에도 조사반장은 못 알아듣는 척 진지함을 꿋꿋이 유지했다.

명함교환을 하고 나서 조사반장이 뭔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FBI도 아니고 지갑을 쓱 열어 공무원증을 보여 주더니, 납세자권리헌장을 건네주며 주저리주저리 설명을 이어 갔다.

홈쇼핑 보험 광고에 약관 읽어 주듯이 영혼 없이 굉장히 빠르게 숨 한 번 고르지도 않고 빠른 속도로 읽어 내려갔다.

그러고는 청렴서약서를 내밀고는 다짜고짜 사인하라고 했다.

세무조사 받으면서 이런 건 처음이었다.

이 팀 어지간히 FM인 듯.

명함교환 등이 마무리되자 어느덧 점심시간이 가까워졌다.

임상무 시계 한 번 보는 척하더니 조사반장에게 물었다.

"아니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습니다. 첫날인데 점심 같이하셔야죠. 좋은 데 예약해 두었습니다."

조사반장 약간 곤란한 듯 머뭇거렸다.

"좋은 데면 비싼 곳입니까?"

뭐지?

비싼 데로 모시라는 협박인가?

아무튼 밥 먹으러 가자는 말에 이런 피드백은 처음이었다.

"아니요. 전혀 비싼 데 아닙니다. 부담 갖지 마십시오."

"그럼 갈까요?"

첫 번째 식사 초대에 까이지 않았다.

초반치고 나름 괜찮은 분위기였다.

* * *

회사 앞 일식집.

미리 예약해 놓아서인지 가장 안쪽의 좋은 룸으로 배정받았다.

임상무가 공손하게 메뉴판을 건네는데, 반장이 쓱 훑어보더니 다른 조사관들의 의사는 묻지도 않고 바로 시켜버렸다.

"알탕 4개요."

같이 와서 자기들 것만 시키는 희한한 광경이었다.

좀 단가 있는 거 시키라고 권해도 제일 싼 8천 원짜리 알탕을 끝까지 고집했다.

우리도 어쩔 수 없이 8천 원짜리로 시키자 주문받는 사장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오랜만에 임상무가 예약했다고 잔뜩 기대했었나 보다.

식사가 나오기 전 늘 그렇듯이 한국식으로 학연, 지연, 혈연찾기가 시작되었다.

나이는 물론이고 직전 근무지 등 임상무가 쉴 새 없이 질문하는 통에 조사관들은 은근슬쩍 동문서답으로 넘겨 버리다가 조사반장이 못 참겠다는 듯이 짜증을 냈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아 네 저는 그저 반가운 마음에……."

"임상무님 뭔가 오해하나 본데, 지금 여긴 네트워킹하라고 만든 자리 아닙니다. 내일부턴 식사 따로 합니다."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졌다.

임상무도 면전에서 창피당했는데 차마 반격할 수가 없는지 그저 얼굴만 붉혔다.

모두들 한마디도 없이 그저 수저로 입속에 뜨거운 국물을 들이붓고만 있었다.

대화 하나 일절없는 식사가 끝나고 임상무가 사장님을 찾아 계산하려는데, 조사반장이 대뜸 지갑을 꺼내 카드를 내밀었다.

"여기 알탕 4개 계산해 주세요."

자기들 거는 자기들이 내겠다는 거다.

그러려고 비싼지 물어봤구만?

자기들 예산이 있으니깐.

임상무 거듭 같이 계산하겠다고 했지만, 조사반장은 요지부동 카드 내민 손을 거두질 않았다.

밥 한 끼도 얻어먹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 시절에도 이런 사람이 있었다는 게 조금은 신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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