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세무조사
퇴근 시간을 지나 회의가 끝났지만, 기분은 좋았다.
내일이면 주말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무 이슈도 없이 마음 편하게 보내기만 하면 된다.
오랜만에 강원도 가서 쉬면서 엄마랑 맞고나 칠까?
아니다.
그러다 날밤새고 몸만 더 피곤해질 거다.
자리로 돌아오니 성환은 역시 퇴근했는지 없었다. 원모만 내가 퇴근하길 기다린다고 사무실을 지키고 있었다.
"기다리지 말고 알아서 퇴근하라니까?"
"그래도 혹시 회의 끝나고 자료 고치실 게 있나 해서요."
뭐 쓴 게 있다고 고치냐고, 하여간.
"아주 다음 주에는 고도화 작업 80%라고 써라, 그냥."
"80%요? 넵!"
이 자식한텐 도무지 농담 한마디 건넬 수 없다.
그래도 저녁도 못 먹고 기다렸는데 미안한 마음에 마냥 화낼 수도 없고.
"알았으니까 들어가 그냥."
"그래도 과장님 아직 계신데 제가 어떻게."
"가라고 쫌!"
"넵, 그럼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짐도 안 챙기고 나가는데 등 쪽엔 가방이 들려 있었다.
헐? 아예 옷 입고 가방까지 멘 채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나 보다.
짐을 챙기면서 휴대폰을 보니 부재중 전화가 두 통 와 있었다.
이상현의 전화였다.
주말이라고 한잔 하자고 전화했을 것이다.
전화를 거니 기다렸다는 듯이 통화음 채 한번도 지나기 전에 받아버렸다.
"어 태평아."
"전화했었어?"
"아직 사무실이지? 지금 나갈 건데 한잔해야지."
지난주에 한잔했으니 이번엔 빼도 될 법한데 오늘 왠지 거절하기 싫다.
상현은 공작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조윤경한테도 깨졌을 거다. 과연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정문에서 만나 길 건너 좁은 골목길을 굽이굽이 들어가 허름한 순댓국집에 도착했다.
주인아주머니께서 반갑게 맞이해 줬다.
"아니, 왜 이렇게 오랜만이야. 얼굴 다 잊어 먹겠다."
맞다.
지난 생에서 이상현과 한 달에 한 번은 들러서 소주 한잔 걸치던 그 집이었다.
몇 달간 이상현을 피하느라고 굉장히 오랜만에 왔다.
꼬릿한 돼지 내장 냄새는 여전했다.
지난 생에서 임원으로 승진한 이후로는 잘 안 갔었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음식이긴 했지만 데려간 놈들이 싼 거 사준다고 욕할까 봐 갈 수가 없었다.
"태평아, 이 집 오랜만이지?"
"그러게. 한 십 년?"
나도 모르게 말이 나왔다.
"뭐?"
"미안. 딴생각하다 말이 헛나왔네. 한 몇 달은 된 거 같은데."
소주를 시키니 안주 나오기 전에 간 몇 조각을 따로 내어주셨다.
분식집에서 순대 시킬 때 딸려 나오는 푸석푸석한 간 따위와는 차원이 다르다.
'아!'
한 입 베어 물자마자 절로 나오는 탄성!
차가운데도 푸석한 느낌 하나 없이 스윽하고 베어지는데 고소함이 터진다.
예전 외국 친구가 푸아그라보다 맛있다고 했을 때는 몰랐었는데 나중에 푸아그라 먹을 기회가 생기고 나서부터는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깨달았다.
"역시 죽이네. 사장님 왜 간은 따로 안주로 안 팔아요?"
역시 사람 좋은 척하는 이상현.
인싸답게 듣기 좋은 말만 잘 골라서 한다.
"내장보다 비싸게 받을 수도 없고, 또 따로 팔면 그것만 시켜 드실까 봐 그렇지."
모든 것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
하다못해 순댓국집의 메뉴판조차도.
어색한 웃음과 함께 자꾸 술 권하는 이상현의 모습이 보통 때와는 사뭇 달랐다.
뭔가가 있었다.
감추려 해도 똥 마려운 강아지마냥 안절부절못하는 티가 났다.
이상현이 쓸데없이 동창들 얘기 꺼내는 척하다가 자연스럽게 화제를 전환 시켰다.
"조성환님, 이번에 정말 다행이다."
"그러게. 생각보다 스무스하게 넘어갔네. 다 네가 신경 쓴 덕이지 뭐."
"에이, 내가 무슨 신경을 썼다고."
"법무팀이 최후 보루고 네가 실무책임자니깐 다 네 덕이지 뭐."
"아니야. 다 우리 팀에 괜찮은 애들이 많아서 그래."
지가 사고 터트린 장본인이면서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거짓말 참 잘한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뜸을 들이는 것일까.
"근데 무슨 할 말 있어? 아까부터 좀 그런 거 같은데?"
"혹시 전 IR팀장 김철수부장말이야."
이거였다.
이 자식이 어떻게 알았지?
아니 어디까지 알고 있지?
속마음을 숨기고 별일 아니라는 듯 태연하게 대답했다.
"맞다. 그분 얼마 전에 회사 한번 오셨을 때 봤어."
"김철수부장 천하태평개발로 입사한 거 알았어?"
"어. 나중에 들었어."
이 자식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통 감을 못 잡겠다.
다 알면서 떠보는 건지 아니면 잘 몰라서 캐내려고 하는 건지 도무지 모르겠다.
"이번에 조성환님 나중에 나온 기사들 그거 김철수부장 작품이라는 얘기가 있어."
"정말? 대단한데 그분. 싸라있네."
못 알아들어 먹은 눈치다.
아직 이 대사가 나온 영화가 나오기 전이었나 보다.
"가만히 놔둬도 조용해졌을 테지만 빨리 마무리돼서 잘됐어. 오히려 이미지도 좋아졌다고 하고."
"그러게 다행이다."
"그런데 김철수부장을 조성환님이 입사시키라고 했다던데. 조성환님이 김부장님을 어떻게 알고? 혹시 네가 다리라도 놓은 거야?"
최대한 눈을 쳐다보면서 대답해야 했다.
눈을 마주치지 못한다면 이 자식이 분명히 알아차릴 테니.
"지난번 주총 땐가 조성환님이 홍보 쪽에 아는 사람 있냐고 물어봐서 전화번호 주긴 했었지. 직접 컨택해서 채용했나 보구나."
미세하게 눈썹 한쪽이 살짝 올라갔다.
이놈이 뭔가를 알아냈을 때의 루틴이다.
마치 '너였구나'라며 쳐다보는 것 같았다.
여기까지 아는 줄 알았으면 아까 입사한 거 들었다고만 안 하고 그냥 소개해줬다고 말할 걸 후회가 들었다.
거짓말은 안 했지만, 정황상 처음에 숨기려고 했다는 게 드러난 거다.
이 자식 역시 고단수다.
"상현아, 근데 그거 김철수부장 작품이라고 어디서 들었어?"
"언론사 간부랑 점심식사하다가 얼핏 들었어. 그 바닥에 많이 알려진 거 같더라구."
거짓말이다.
많이 알려졌다니.
김철수부장은 절대 그런걸 새 나가게 할 사람이 아니다.
그러고 보니 오후에 조성환과의 대화가 생각났다.
누나가 이것저것 궁금해했다는 바로 그 말이 떠올랐다.
이놈이 순진하게 누나가 물어보는 대로 다 까발렸나 보다.
자기가 역시 사람 보는 눈이 있어서 직원을 잘 뽑았다 든지 자기가 스토리를 잘 구성해 줘서 기사가 잘 나왔다 든지 자화자찬하느라고 바빴을 거다.
안 봐도 비디오다.
모자란 놈.
상대방이 다른 편인지도 모르고 히든카드를 까서 보여준 셈이었다.
포커에서 카드 한 장을 오픈하면 승률은 반토막 난다.
이상현의 오늘 술자리의 목적은 바로 이거였다.
내가 적인지 아닌지 떠보는 자리였다.
확실히 현재 자기들의 적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겠지만, 최소한 언젠가 적이 될 수도 있음을 직감했을 것이다.
앞으로는 이 자식 앞에서 더욱 주의해야겠다.
* * *
내 오피스텔 창문은 동남향으로 나 있었다.
커튼을 쳐놓고 잠에 들어서인지 내리쬐는 아침햇살에 절로 눈이 떠졌다.
다시 잠을 청해봐도 한번 깬 잠을 다시 이룰 순 없었다.
주말인 오늘은 아무것도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온전히 나만의 취미와 맛있는 음식으로만 채우리라.
짜파게티와 너구리의 조합.
도중에 물 버리는 게 더럽게 귀찮지만, 오늘은 나를 위해 기꺼이 할 수 있다.
짜파구리가 방송 타기 전이어서 아직 이 요리를 먹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실수로 잘못 섞어 끓였거나 이것저것 시도하는 사람들만 빼고는.
게다가 오늘은 집 앞 마트에 가서 큰맘 먹고 채끝등심까지 샀다.
100그램에 만원도 훌쩍 넘는 고기를 무려 300그램이나 샀다.
오늘은 나를 위한 날이다.
사실 매일이 그렇지만 오늘은 더욱 특별했다.
내 생일이다. 그런데 아무도 축하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엄마 빼고.
아침에 걸려온 한 통의 전화.
너무 일찍하면 아들이 깰까 봐 느즈막한 시간에 걸려왔다.
"아들 생일 축하해."
"고마워 엄마. 그렇지 않아도 들르려고 했는데 좀 바쁘네."
"뭐하러 멀리 와. 요즘은 인터넷이 편한데."
"인터넷이라니?"
"너 인터넷뱅킹도 안 해? 나도 하는데. 굳이 용돈 주러 내려올 필요 없다고. 인터넷 잘 터지니깐."
역시 엄마다.
사리 분별에 밝고 신식문물에 대한 거부감도 없다.
게다가 매일매일 고스톱으로 뇌를 단련해 돌아가실 때까지 치매 걱정도 없을 것이다.
정말 안심이다.
투포환 아주머니보단 못하지만, 채끝 짜파구리는 나름 비주얼 폭발이었다.
재료비만 삼만몇천 원.
노동력과 가스비, 수도료 등까지 고려하면 훨씬 비싼 고퀄 라면이다.
소고기 향을 음미한 후 라면 한 젓가락을 맡아 올리려는데 전화가 울렸다.
원모다.
이 자식은 정말 타이밍 하나는 죽이게 맞춘다.
"왜?"
온갖 짜증을 제대로 싫어서 수화기 너머로 전달했다.
"과장님 사무실 언제 오십니까?"
응? 오늘 토요일이 아니었나?
급하게 달력을 찾아 넘겨봐도 분명 오늘은 토요일이 맞다.
"뭔 개소리야? 토요일에."
"어제 과장님께서 오늘 점심 같이하자고 하셨잖아요."
찐이다.
진심 끝판왕이다.
이놈한테는 농담을 농담이라고 꼭 얘기해줘야 했다.
도저히 대꾸할 말이 없었다.
그저 미안하단 말 밖엔 아무것도 떠오르질 않는다.
"원모야 미안. 오늘이 내 생일인지도 모르고 그랬나 보네."
"과장님 생일이십니까? 정말 축하드립니다."
영혼은 집에 모셔두고 나왔나 보다.
"고마워. 그래서 말인데 오늘 생일이라 회사 가기 좀 그래서."
"네 알겠습니다. 어쩔 수 없죠, 뭐."
"그래. 원모야 너도 빨리 들어가라. 맛있는 거 사 먹고 전표 올려. 내가 사인해줄게."
"네 과장님도 생일이신데 댁에서 불쌍하게 라면 같은 거 해 드시지 말고요. 꼭 맛있는 거 사드세요."
혹시 CCTV라도 달렸나 천장 위를 둘러봤으나 당연히 없었다.
이 자식이 눈치는 없어도 신기가 있는 걸까?
통화하느라고 그새 면이 불었다.
채끝등심은 수분이 빠졌는지 질겅질겅 씹히는 게 껌 씹는 줄 알았다.
하여간 도움 안 되는 자식.
3만원이 넘는 짜파구리를 천 원짜리 사발면보다도 못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엄마 빼고 생일 축하한다는 말은 들었다.
비록 영혼은 없었지만.
* * *
오랜만에 편안한 주말을 보내고 어김없이 월요일 아침이 밝아왔다.
만원 지하철에 올라 이리저리 떠밀리다 겨우 도착했다.
오늘도 역시 출근시간까지 30분도 넘게 남았다.
샌드위치도 몇 달 먹으니 지겹다.
도저히 목구멍으로 넘길 자신이 없었다.
오늘부터 아침은 다시 분식집이다.
아람이와 함께는 아니지만, 아람이 아니 람지의 창창한 미래를 생각하면 더 이상 혼자 먹는 김밥이 쓸쓸하지 않을 것 같았다.
분식집 문을 열고 들어서자 반갑게 맞아주는 주인 아주머니.
"아니 왜 이렇게 오랜만에 왔어? 김밥이랑 라면 만두 오뎅 또 뭐였더라?"
"아뇨. 김밥 한 줄이요."
"그 아가씨 안 오나 봐?"
"네, 그만둔 지 좀 됐어요."
아주머니 급실망한 듯 힘없이 돌아섰다.
비극적 영화에서 엔딩 장면의 주인공 표정으로써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아침 매상의 꽤 큰 부분을 차지하던 No.1 고객이 몇 달 만에 다시 돌아왔다고 생각했었나 보다.
김밥 한 줄에도 어느 정도 배가 불러왔다.
배를 뚜드리며 도착하니 성환이 기다린 듯한 모습이었다.
"생일이셨다면서요. 축하드립니다."
"이틀 지났다. 363일 뒤에 얘기하든지."
돈도 많은 놈이 꼭 말로만 축하한다고 한다.
성환이 조용히 찌그러지자 원모가 웬 전표를 한 장 내밀었다.
법카가 없어 개카 쓰고 영수증을 붙인 것이었다.
"뭐야?"
"어제 사인해 주신다고 맛있는 거 먹으라고 하셨잖습니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직한 새끼.
근데 금액을 잘못 봤나?
15만 원이 넘었다.
"뭐지? 혼자 이렇게 많이 먹을 수 있나? 그것도 점심에?"
"주말인데 출근했다고 여자친구가 삐져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러게 왜 토요일에 오라고 하셨습니까. 과장님."
"내가 언제 오라고 했……. 아니다. 잘했어. 사인해 줄게 근데 뭐 먹었냐?"
"채끝 스테이크요. 그 집 장난 아니더라고요."
이 자식! 내 돈 주고 산 채끝 짜파구리는 다 망쳐 놓고!
지는 주말에 데이트하면서 잘도 처먹고 경비처리까지 하겠다고?
또 당했다.
어리버리한 척하면서 실속은 다 챙긴다.
이놈 똑똑한 걸 숨기는 게 확실하다.
오전에 임원회의가 한창일 텐데 임상무 급하게 집무실로 돌아왔다.
회의 끝나지도 않았는데 누군가의 호출이 있었던 듯.
잠시 뒤 여기저기 통화하더니 김병국부장과 날 호출했다.
"태평아 뭔 일인지 알아? 갑자기 회의 도중에 나와서 우릴 찾지?"
김병국부장이 뭔 영문인지 몰라 불안하긴 했었나 보다.
"글쎄요. 뭐 별거 있겠어요? 일단 가 보시죠."
노크하고 집무실에 들어서자 임상무가 더욱더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었다.
"이것 봐 봐."
임상무가 다급하게 건넨 공문에는 세무조사 사전통지라고 적혀있었다.
아 씨발!
욕이 절로 나왔다.
왜 하필이면 이때!
조금만 버티면 퇴사하는데.
운도 정말 더럽게 없다.
세무조사라니!
재무팀의 최대 고비인 동시에 존재의 이유이기도 했다.
5년 만에 한 번씩 돌아오는, 알면서도 당하는 공포 그 자체다.
단지 무서운 것뿐이 아니다. 힘들고 짜증 나고 더럽고 치사하고 암튼 온갖 나쁜 수식어를 다 붙여도 세무조사보단 나을 정도로 짜증 끝판왕이다.
종잣돈은 개뿔. 그냥 내일 사표 쓰고 딴 데 알아보는 게 낫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