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손안의 재벌-26화 (26/191)

26화 반격

"뭐야 휴가야? 휴가신청은 했냐?"

"비서실에서 오지 말라던데요? 괜히 여기저기 숨어있는 취재진하고 마주치면 곤란하다고요."

"잘못한 거라도 있나 보지?"

"그럴 리가요. 그냥 막무가내로 들이대서 물어볼 텐데, 쌩까고 가면 뭔가 찜찜한 게 있어서 그렇다고 몰아갈까 봐 그렇죠."

성환의 말이 맞았다.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것도 아닌데 자극적인 보도와 취재 경쟁으로 이슈화시켜 보도자료를 쏟아 낸다.

이런 게 터지지 않게 하려면 평상시에 유지비가 꽤 많이 들어간다.

불필요한 광고도 꾸를 꾸준히 집행해야 하고 정기적인 접대까지 해야 하기 때문이다.

평상시에 관리대상 언론이 아닌 경우에는 입막음을 따로 해야 한다. 이것 또한 돈이 꽤나 들어간다.

영향력 하나 없는 매체라고 하더라도 광고 정도는 실어줘야 하기 때문이다.

광고를 거절할 경우 그 대가는 클 수 있다. 더욱 자극적인 문구로 기사를 도배해고 어떻게든 클릭 수를 늘리려 하기 때문에 거부하기가 사실상 쉽지 않다.

그래서 각 그룹마다 홍보팀에는 언론사 출신 사람들이 꽤나 포진해 있다. 인맥으로라도 어떻게든 이런 언론사들을 구워삶기 위함이다.

"근데 무슨 일로 전화지? 회사 일은 아닐 테고."

"회사 일로 밀린 건 없습니다."

허! 이 와중에 자랑질인가?

일이라도 있어야 밀리기라도 하지. 일 없어서 안 밀리는 것도 자랑이라고 하고 있다.

"실은 물어볼 게 있어서요."

짐짓 심각한 척 분위기를 잡는 듯한 말투였다.

"뭐지. 쫄깃한 이 기분은? 빨리 말해 결론부터. 아니, 아니다. 결론만."

잠시 뜸 들인 후 말을 이어갔다.

"혹시 우리 팀에서 흘린 건가요? 비서실에서는 며칠 전 초밥 건도 그렇고, 같이 근무하니깐 충분히 알 수 있었을 거라고 해서."

"그래서 내가 했다고 생각하는 거지? 지금?"

"아니 꼭 그런 건 아니고요. 우리 팀에서 누군가가……."

중간에 말을 끊었다.

"우리 팀 애들을 잘 봐봐. 얘네들이 그럴 애들이야? 설령 그랬다고 쳐. 그걸 흘려서 돌아오는 이득이 뭔데?"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걸로 가장 이득 보는 사람이 누군지 잘 생각해 봐."

"유라는 맹세코 아니래요. 오늘 터진 건 우리 둘만 가진 사진이었거든요. 그런데 자기는 절대 아니라고 해요."

여자친구가 아니라고 믿고 싶어서였는지, 제발 우리 팀이었으면 하고 바라는 듯한 느낌이었다.

누나가 시킨 짓이라는 말이 입술까지 튀어나왔으나 도로 삼켰다.

확실한 증거도 없을뿐더러 미래의 적에게 내 존재감을 드러낼 필요는 없다.

괜히 들쑤시기만 할 뿐 소득 없이 경계심만 갖게 할 테니.

정작 복수할 때 걸림돌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누구 짓인지 밝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선 어떻게 해결할지가 중요하지 않나?"

"비서 팀에서는 일단 부인하고 지켜보자고 하는데 여자친구가 서운해해요. 우리 사이 숨기는 거냐면서."

스시집에서 엿들었던 분위기면 충분히 그럴 만도 하다.

"그럼 인정하면 되잖아."

"절대 안 돼요. 회장님이 절대 용납하시지 않을 겁니다."

"그럼 헤어지든가?"

"그럴 순 없죠. 저도 방법이 없어서 미치겠어요."

우유부단한 놈.

머리가 아닌 가슴이 말하는 곳으로 따르려니 자신이 나질 않나 보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놈은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지만 모든 걸 다 갖춘 놈은 작은 것도 도전하기 꺼려한다.

가만히만 있어도 갖게 될 모든 것을 다 던져버릴 용기가 나질 않을 테니.

"못난……."

"죄송합니다."

"나한테 죄송할 게 뭐 있냐."

"처음부터 과장님을 의심해서요. 뭔가 알고 계시는 듯한 느낌이 계속 오는 게 좀 상했습니다. 며칠 전 스시집에서도 그렇고. 그때 여자친구 만났다는 거 아셨죠?"

"누가 모르겠냐? 화장실 갔다 온다는 사람이 삼십 분도 넘게 있다가 오더니, 술 몇 잔 한 것처럼 시뻘게 가지고 들어오는데. 그것도 몇 번씩이나."

모르는 척했어도 어느 정도 티가 났나 보다.

표정이나 말투에서 나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게 있었을 것이다.

"그럴 줄 알았어요. 다른 두 사람은 모르는 거 같고."

원모랑 해규는 성환이 어디 갔는지는 전혀 신경도 안 쓰고 나오는 접시마다 사진 찍느라고 바빴다.

"왜 나한테 전화해서 방법을 찾으려고 하지? 내가 네 수발드냐?"

"그건 아니고. 비서실 통하면 다 회장님께 보고되니까요. 회사 내에서 조심스럽게 부탁할 데도 없고."

내가 퍼트린 거라 의심해서 전화했으면서 금세 핑곗거리를 찾았다.

"일단 밖에서 시간 잡아 봐. 방법이 있나 보자고."

"어디서요?"

"강남에 투쁠만 파는 데가 있다던데."

회도 먹고 곱창도 먹었으니 이번엔 등심이다.

내 위장은 이제는 저가의 무한리필 등심 말고 투플러스 등급 등심을 맞이할 준비가 되었다.

법카로 긁는 것도 아니니 예산 제한도 없다.

"전화로도 괜찮지 않을까요? 굳이 밖에서."

쪼잔한 새끼 얼마나 한다고.

하여간 있는 놈이 더한다.

"확 그냥. 람지 데리고 가불라."

"네? 누구요?"

"아니야. 그냥 아는 사람 있어."

"아! 법조계 분이시구나."

"아니 먹방계에 있어."

"먹방계요?"

"별거 아냐. 나중에 차차 알게 돼."

* * *

투플러스 등급만 취급하는 식당.

손 하나 까닥 안 해도 알아서 최적의 상태로 구워주는 최고급 한우식당으로 수 년 뒤 유명 해외 유투버가 방문해서 쌍따봉을 날릴 집이다.

아직은 크게 유명세를 떨치기 전이라 예약이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었다.

지하에 주차장이 있어 기자들이 함부로 들어와 사진기를 들이밀지 못하는 곳이다.

룸마다 담당 셰프가 따로 배정되어 여러 사람과 마주칠 필요도 없으므로 프라이빗하게 만찬을 즐기거나 중요한 얘기를 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다.

안내받은 룸에는 전 IR파트장 김철수 부장이 방금 도착한 듯 외투를 옷걸이에 걸고 있었다.

"부장님 안녕하세요. 사모님은 좀 괜찮으시죠?"

"그럼 네 덕분이지. 이제 곧 퇴원할 수 있을 거 같아. 그렇지 않아도 소주 한잔 산다고 산다고 했는데 잘됐네. 오늘 딱이네."

김철수 부장 아직 메뉴판을 안 봤나 보다.

곧이어 담당 서버가 들어와서 김철수 부장한테 메뉴판을 건넸다.

"요청하신 메뉴판 여기 있습니다."

호기롭게 받아 쫙 펼쳐 드는데 생각보다 0이 하나 더 붙어 있었는지 설마설마하며 단위 수를 세고 또 세고 있는 듯했다.

"부장님 소주는 담에 사시고요. 오늘은 한 명 더 올 거예요. 그 사람이 부탁하는 입장이니 그 사람이 살 겁니다."

"그럴까?"

급격히 얼굴이 펴지는 게 꽤나 안심이 된 모습이었다.

웬만해선 다들 '아니야 이번에 내가 꼭 사야 돼'라고 한 번은 센 척했을 텐데.

대답하기도 전에 메뉴판을 덮어 버렸다.

아니 던져 버렸다는 게 더 적절했다.

새 직장을 구했다곤 해도 월급으로는 가불한 병원비도 아직 충당 못 했을 것이다.

"온다는 사람이 누군데?"

"천하태평개발 오너요."

"아! 그럼 조성환님?"

김부장 얼굴이 급격히 밝아졌다.

불과 얼마 전까진 주총꾼으로 내부정보 이용해서 어떻게 하면 좀 뜯어볼까 했다가, 지금은 도리어 병원비도 도와주고 직장까지 구해준 은인이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잠시 후 조성환이 종업원의 안내를 받고 룸으로 들어왔다.

역시 주인공인양 부탁하는 입장인데도 늦게 들어오는 건 여전하다.

"처음 뵙겠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대표님."

김부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90도로 숙여서 폴더인사를 했다.

"아닙니다. 별말씀을요. 그리고 대표 아니고 대리입니다. 천하태평개발에서는 대주주일 뿐 직함은 따로 없어요."

"아닙니다. 저희 회사 대주주님이시니 저에게는 주님이시나 마찬가지죠."

딸랑딸랑.

역시 홍보업무 하면서 접대로 쌓은 수십 년 공력이 녹슬지 않았다.

김부장은 천하제일 입사 전 기자 생활을 했던 덕에 마치 취재라도 하듯 육하원칙에 따라 질문을 쏟아내었다.

첫 만남의 순간부터 지금까지의 히스토리에 대해 꼬치꼬치 물었다.

성환은 자기 사생활에 대한 질문이 부담스러웠는지 한편으론 갸우뚱하면서도 마지못해 대답을 이어갔다.

너무 시시콜콜 캐묻는 거 같아 내가 제지했다.

"부장님. 이런 것까지 꼭 아셔야 할 필요가 있습니까?"

"어쩔 수 없어. 어느 포인트 위주로 스토리텔링을 펼칠지 생각하려면."

대답을 들어도 표정 변화가 없는 게 성환은 여전히 안심이 안 되는 모양이었다.

못 믿는다고하면 기분 나빠할까 봐 일부러 농담인 척 건넸다.

"부장님 이거 혹시 기사로 나가는 거 아니에요?"

"나가야지!"

헉! 기사로 나간다니.

취재한 걸 다른 언론사에 판다고 면전에서 말하고 있는 것 아닌가.

황당해서 말문이 막혔다.

내 표정을 읽었는지 김부장 안심하라는 듯 덧붙였다.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니깐 걱정 마. 사람들은 원래 스토리에 열광해. 필연적인 러브스토리로 잘 포장만 한다면 자연스럽게 우호적인 분위기로 바꿀 수 있어."

* * *

다음 날 오전.

대책회의 때 정한 대로 천하제일 그룹 관계자의 말을 빌어 열애설을 부인한다는 뉴스가 나왔다.

성환은 공인이 아니므로 공식적인 입장표명을 할 이유는 없었지만, 그룹사 이미지를 위해 간접적으로 의견 표명을 한 것이었다.

그러나 아니나 다를까. 한 시간도 안 돼 이상현이 지시한 대로 여자친구 소속사에서의 입장발표 뉴스가 나왔다.

소속 가수가 언론보도를 통해 알려진 모그룹 2세와 좋은 감정을 가지고 서로 조금씩 알아가는 단계라는 아주 전형적인 열애 인정 발표였다.

게다가 확인되지 않은 무분별한 추측성 기사를 자제하고 따뜻한 시선으로 응원해주길 바란다는 메시지까지 추가했다.

남자 측에서는 부인하고 여자 측에서는 인정하는 꼴이 돼 버렸다.

온라인상에서는 '나쁜 놈, 못난 놈' 등의 댓글들로 도배가 되었다.

조성환은 금세 재력으로 아이돌 가수를 꼬셔서 놀다 버린 양아치 재벌 2세 놈이 되었다.

여전히 사무실에 출근하지 않고 있는 조성환 책상에는 며칠째 월스트리트저널만 쌓여 갔다.

우리 팀은 물론이고 다른 팀 여직원들까지 삼삼오오 모여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머 그렇게 안 봤는데. 왕 재수다."

"재벌들이 다 그렇지 뭐. 다를 줄 알았어?"

"아니 그래도 생긴 건 순진해 가지고 완전 양아치네."

"그러게. 사진 다 나왔는데 안 사귄데."

"그 여자는 뭔 잘못이야. 나이도 어린데 불쌍해."

비정한 재벌 2세와 버림받은 어린 아이돌, 인터넷 댓글과 비슷한 분위기다.

직접 얼굴 맞대고 같이 일하던 사람들도 이 정도인데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완전히 죽일 놈이 되었을 거다.

모든 게 이상현, 아니 조윤경의 계획대로 맞아들어가고 있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이상현의 계획을 미리 알고 있어서 사실 막으려면 막을 수는 있었다.

대책회의가 끝났다고는 해도 어떻게든 이슈제기를 해서 입장발표를 막을 순 있었다.

그러나 이상현의 계획대로 되도록 일단 놔두었다.

괜히 상대방을 자극할 필요도 없을뿐더러 아예 나락으로 떨어져야 반전이 일어났을 때 더 드라마틱한 효과를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뉴스가 터지고 나서 역시나 성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계획이 있다고는 해도 당장 불안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나 보다.

"댓글 보셨죠?"

짐짓 별거 아니라는 말투지만 역시 말투에선 불안감을 숨길 수 없었다.

"지금 한참 관전 중이지. 완전 청춘의 덫을 뛰어넘었어."

"청춘의 덫이라니?"

남자의 배신을 다룬 역대급 작품인데도 성환이 20세기 드라마를 알 리가 없었다.

"그런 게 있어. 근데 댓글이 왜?"

"저 지금 완전 개새끼 되고 있는 거 안 보이세요?"

"제대로 본 거 아닌가?"

"이 분위기에 장난이 나오십니까!"

갑자기 변한 목소리 톤에 화들짝했다.

예전 생에서 큰 사고 터졌을 때 불려가 세워놓고 까이던 때의 바로 그 목소리였다.

나도 모르게 잠시 쫄았다.

가끔씩 부지불식간에 옛날 버릇이나 기억이 튀어나오는 거 같았다.

전화라서 그 찰나의 움찔함을 안 들켜서 다행이었다.

"걱정하지 말라니까. 그리고 여자친구가 너 대신 욕 먹는 게 좋아 그럼?"

"그건 아니지만. 아무리 그래도……."

"여자친구 감싼다고 생각해 그냥."

"네. 근데 아침에 회장님이랑 눈도 못 마주쳤어요. 집무실에도 안 나가시던데요."

현안이 있건 없건 매일 아침에 회사에서 일일 보고를 받는 조인철 회장이 오늘은 정말 단단히 화가 났나 보다.

회장 루틴이 깨졌을 정도이니 회사에서도 분명 난리가 났을 것이다.

* * *

오후가 되자 다시 대책회의가 열렸다.

상황이 더욱 심각해진 것을 반영하듯 조윤경전무까지 참석했다.

먼저 와서 대기하고 있던 비서실장의 이마엔 반창고 두 개가 붙어 있었다.

다행히 맞은 데 또 맞진 않았나 보다.

아마 날아오는 재떨이를 피하자니 사표를 써야 할 테고 같은 데를 또 맞자니 아플 거 같아서 나름 돌려서 맞았을 것이다.

가족들 생각에 차마 피할 수 없었던 가장의 비애가 엿보였다.

이번 회의 역시 사내변호사인 이상현이 주도했다.

"공식적인 입장표명도 아니고 저희가 꼭 거짓말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일개 직원의 사생활에 대해 회사가 왈가왈부할 입장도 아니고요."

회사에 피해가 없다는 사실도 주지시켜면서 은연중 성환이 임원인 조윤경과 급이 다르다는 것도 각인시켜주는 전략이었다.

조용히 듣고 있던 조윤경의 입가엔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결국 회의는 무대응으로 일관하자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회사 이미지는 홍보라인을 풀가동하여 다른 방식으로 만회하자는 것이었다.

퇴근 시간이 되고 한 인터넷 매체에 기사가 하나 떴다.

'연예인과 재벌 2세의 못다 한 이야기'

뭔가 알려지지 않은 뒷이야기가 있다는 듯 한껏 궁금증을 유발하는 제목이었다.

연이어 다른 매체에서도 이를 인용하는 뉴스가 계속해서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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