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미꾸라지
기사에는 다정한 포즈로 손을 잡고 걷는 데이트 현장 사진뿐만이 아니었다.
어제 스시집에 각자 따로 들어가서 나오는 사진까지도 있었다.
보는 눈을 피해 각자 따로 들어가서 은밀한 연애를 하고 나왔다는 식의 보도였다.
연예패치 헤드라인에 나간 후 다른 언론사들도 앞다투어 보도하기 시작하였다.
무차별적인 사생활 보도도 모자라 속보 경쟁이 붙기라도 한 듯 미확인된 사항에 대해서도 자극적인 보도가 이어졌다. 저널리즘의 기본원칙은 당연히 무시됐다.
아침에 사무실을 나간 성환은 오후가 되도록 전화 한 통 없이 두문불출이었다.
그룹 내에서는 여기저기 부서가 꽤나 부산했다.
홍보라인 쪽에서 비상체제가 가동되는 모양이었다.
오후 늦은 시간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는데, 이상현이었다.
평상시 최대한 티를 안 내려고 노력했지만 차마 예전처럼 금요일마다 전화해서 술 마시자고 할 정도까지는 못되었다.
조성환을 모신다는 핑계로 이리저리 피해 다니다가 가끔 유관부서 회의에서나 마주쳐 인사만 했다. 몇 개월째 개인적으로는 전화도 몇 통 하지 못했었다.
핑계도 어느 정도껏 해야지 너무 지나치면 들킬 수 있으므로 조심해야 했다.
최대한 마음을 가다듬고 나서야 간신히 다정한 척 전화를 받을 수 있었다.
"상현아. 무슨 일이야?"
"태평아, 나야. 회사 주변에 대기하는 기자들이 많아서 조성환님 당분간 사무실 못 들어가실 거야."
"그렇구나. 네가 고생이 많다."
"고생은 뭘. 그리고 조금 있다가 대책회의 하는데 너도 참석해라."
홍보, 대외협력, 법무 등 관련 부서도 아닌데 참석하라는 거 보니 뭔 꿍꿍이가 있는 게 분명했다.
"재무팀이 이번 일과 무슨 상관인데 참석하라는 거지?"
"우선 소문이 터져 나온 곳부터 찾아야 하는데 아무래도 조성환님이 지금 재무팀에 계시니까 다들 거기서 시작됐다고 의심하고 있어."
가만있다가는 뒤집어쓰기 딱 좋은 각이었다.
"뭐라고? 누가 그래? 우리도 뉴스 보고 알았는데."
"알아. 당연히 난 알지. 그런데 비서실에서 자꾸 문제를 제기해서 말이지. 아무튼 너무 부담 갖지 말고 와 봐. 내가 잘 대응해 줄게."
물론 이상현 말을 다 믿을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비서팀 얘기는 사실일 것이다. 그놈들은 항상 문제 터지면 희생양을 먼저 찾는다.
가장 약한 고리를 찾고 거기다 든 책임을 떠넘기면서 자기들은 쏙 빠져나간다.
미꾸라지 같은 놈들이 우리 팀, 아니 정확히는 나를 타겟으로 잡았다.
이참에 몇 달 전 월스트리트신문 건으로 복수라도 하려는 게 분명했다.
대책회의를 위해 마련된 회의실로 들어서자 무거운 정적만이 감돌고 있었다.
참석자들은 얼굴을 보고도 서로 가벼운 인사 한마디 건네지 않았다.
연신 자기 노트만 쳐다보거나 뭔가를 끄적이고 있었다.
가운데 비서실장이 미리 와서 앉아 있었다. 이마에는 흰색 반창고가 붙어 있었다.
조인철 회장이 아침 보고를 받다가 재떨이를 던졌다는 소문이 진짜였나.
어쩐지 참석자들은 차마 실장 이마를 쳐다볼 수가 없어서인지 모두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던 거였다.
대상자 전원이 참석하자 간단히 사건개요 설명과 함께 회의가 시작되었다.
설명이 끝나고 역시나 어디서 소문이 새어 나갔는지 발본색원이 시작되었다.
비서실 이부장이 날 날카롭게 노려보고는 물었다.
"조성환님 운전기사에게 보고받기를 기사에 나온 사진 중 하나가 어제 강남 초밥집이었다고 합니다. 어제는 재무팀에서 천과장 포함 몇 명이 회식을 가졌고요. 어제 참석했던 재무팀 직원들 중에서 흘린 게 아닌가요? 몇 달 동안 계속 옆에서 지켜보고 전화도 듣고 하니 아무래도 가장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어디서 샜는지가 그렇게 중요한가라고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가만히 있으면 인정하는 꼴이 되니 반격이 필요했다.
"비서실에서는 전혀 몰랐습니까?"
"네, 저희는 오늘 아침에 인터넷 기사 보고 알았습니다."
"출근부터 퇴근 후 귀가까지 일거수일투족을 수행하는 비서실에서 그런 사실을 몰랐다는 게 자랑이신가 보네요?"
비아냥대는듯한 말투에 비서팀 이부장의 우락부락한 얼굴이 더 험상궂게 구겨졌다.
"뭐라고!"
험악해진 분위기를 수습하고자 이상현이 나섰다.
"자자 두 분 다 자제하시고요. 지금 이 자리는 누가 잘못했냐 따지려는 자리가 아니고 대책을 마련하자는 자리입니다."
이상현의 말에 홍보팀 담당직원이 덧붙였다.
"열애설 상대방 소속사 측에서도 발표를 더 미룰 수 없다고 하니 빨리 우리 측 입장을 전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중재 발언 후 더 이상의 티격태격 없이 본격적인 회의가 진행되었다.
그룹 입장에서 쿨하게 인정하는 게 좋을지, 일단 부인하는 게 이미지상 타격을 덜 입는지 등에 대한 논의가 이어졌다.
일단은 부인하되 보도한 언론사를 상대로 법적 대응을 한다고 발표하면서 시간을 끌자는 의견이 대다수였다.
평상시 우리 그룹이 광고를 많이 실어주는 언론사에게 우호적인 기사를 쓰게 하면서 자연스럽게 수그러들기를 보자는 것이었다.
회의가 끝나고 엘리베이터에 오르는데 뒤따라왔는지 이상현이 다정하게 어깨를 둘렀다.
"태평아. 요즘 왜 이렇게 얼굴 보기 힘들어."
"그냥 좀 바빠서 조성환님 멘토하니깐 아무래도 신경이 많이 쓰이네."
"그렇겠지. 근데 오늘은 안 계시니까 딱 한 잔 어때? 같이 술 한잔한 지 몇 달은 된 거 같은데"
마땅한 핑곗거리가 떠오르질 않았다.
게다가 오늘도 거절하면 대놓고 피하는 것밖에 안 되니 어쩔 수 없었다.
"그럼 딱 한 잔만할까?"
"오 웬일? 그래 가자!"
회의가 늦게 끝나는 바람에 사무실로 들어가니 이미 퇴근시간이 꽤 지나서 그런지 인기척이 없었다.
그런데 모퉁이를 돌아 내 자리 쪽으로 방향을 트니 처음 보는 듯한 사람이 사무실 안에서 뭔가를 찾는 듯이 얼쩡거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시죠?"
나의 물음에도 전혀 당황한 기색 없이 대답했다.
"네. 오후에 전표를 올렸는데 다시 찾아볼 게 있어서요. 다들 퇴근하신 거 같으니 내일 다시 오겠습니다."
별일 아닌 듯이 인사하더니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컴퓨터를 끄고 짐을 챙기는데 옆자리 성환의 자리가 뭔가 조금 이상했다.
아까 사무실을 나갔을 때는 성환 노트북이 분명 펼쳐져 있어서 뭘 검색했는지도 봤었는데 지금은 덮어져 있었다.
원모가 꺼 놨을 수도 있으려니 하고 별생각 없이 사무실을 나왔다.
회사정문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상현이 데려간 곳은 회사 근처의 곱창집이었다.
지난번 성환과 함께 팀 전체가 회식했던 그 곱창집이었다.
"너무 늦어서 강남에 좋은 데는 자리 없을 거 같고 그나마 여기가 제일 나은 거 같아. 네가 좋아하는 데잖아."
이상현 이놈과 곱창을 먹었던 적이 있었던가?
맨날 허름한 포장마차에서 쏘야나 두부김치를 먹었던 거 같은데.
"그래 여기 괜찮은 집이야. 근데 너 원래 곱창 먹었나?"
"나? 없어서 못 먹지."
소곱창집은 돈 없는 고시생은 물론이고 직장인들도 사실 선뜻 자기 돈 내고 가기엔 부담스러운 곳이었다.
우리는 학창시절부터 싼 곳만 찾아다녔던 게 습관이 되어서인지 직장인이 된 이후에도 주로 가성비 좋은 포장마차만 다녀서 이런 곳을 같이 와 본 적이 별로 없었다.
좁은 계단을 올라간 식당 이 층에는 빈 테이블뿐이었다.
"오늘 우리가 전세 냈네. 뭐 먹을까 태평아?"
곱창집에서 뭐 먹냐니.
"일단 3인분 시켜 봐."
원수와 마주 앉아서인지 제대로 먹을 수나 있을까 했던 생각은 기우에 불과했다.
오래 구웠는데도 어디서 채워지는지 곱이 가득 들어차 있다.
입에 넣고 씹자마자 퍼지는 내장 특유의 비릿함과 함께 부드러운 기름기가 입속으로 쫙 퍼지는데 느끼하다기보단 고소함에 가까웠다.
이상현은 내가 잘 먹는 모습에 흐뭇하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역겹고 가증스러운 새끼다.
"여기 오길 잘했나 보다. 어제 초밥 먹었으니깐 오늘은 곱창이 딱이지."
어제 먹은 걸 내가 얘기했었나?
이상한 마음에 지나가는 말투로 물었다.
"어제 초밥 먹은 거 어떻게 알았어?"
잠시 머뭇거리던 이상현이 별일 아니라는 듯 답했다.
"아까 회의 때 비서실 부장이 말했었잖아. 어제 스시집 사진이라고."
"맞다. 그랬지. 하여간 어제는 담백하게 했으니깐 오늘은 기름칠이 딱이지."
간단히만 하자는 게 한 시간도 안 돼 처음처럼 세 병이 비워졌다.
별 의미 없는 일 얘기를 주고받는 와중 이상현의 핸드폰이 울렸다.
"미안. 나 잠깐 전화 좀 받고 화장실 다녀올게."
"그래. 천천히 통화하고 와."
내가 들으면 안 되는 건지 자리를 피하는 상현에게 귀를 쫑긋 세웠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소리와 함께 문 여는 소리까지 나는 게 아예 가게 밖으로 나간 듯했다.
빈틈없이 치밀한 놈이다.
그래도 나에겐 능력이 있다. 누가 어떻게 왜 쥐여주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왕 생긴 거 언제 없어질지 모르니 있을 때라도 최대한 활용해야 했다.
온 정신을 집중하니 소리가 살짝 들려 왔다.
"뭐라고? 없다고?"
"잘 찾아본 거 맞아? 숨긴 파일도 다 찾아봤어?"
"그리고 김기사한테 똑바로 하라고 전해. 누구랑 언제 어디서 만나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다 보고하라고 해. 어떻게 보고도 안 받은 게 기사에 뜰 수가 있지?"
답 나왔다. 퍼즐처럼 맞춰졌다.
아까 사무실에서 얼쩡거리고 있던 놈은 이상현의 수하다.
조성환 노트북에서 파일을 다운받고 나오다가 나랑 마주친 거였다.
다운받고 나서 자기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노트북을 덮었을 것이다.
게다가 조성환 운전기사는 조인철 회장이 고용해서 월급을 주고 통상적인 보고를 받고 있을 테지만, 그 이상 일거수일투족에 대한 보고는 이상현에게 하고 있었다.
아마 이상현을 통해서 조윤경에게 최종 보고가 올라갔을 것이다.
벌써 오래전부터 감시당하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어쩐지 이 곱창집엔 이상현과 와본 적이 없었다.
몇 달 전 운전기사를 통해서 조성환과 회식했던 것을 보고받아서인지 아까 내가 좋아하는 곳 아니냐고 했던 것이었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자리로 돌아온 이상현은 앉자마자 웃으면서 잔을 채워줬다.
"미안해. 배가 좀 아파서."
배 만지면서 표정을 찡그리는데 연기력 쩐다.
"그래. 기름기가 많아서 그럴 수 있지. 근데 아까 중요한 전화야?"
"아니 그냥. 와이프 전화. 너랑 있다니깐 조금만 마시고 오라네."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바로 거짓말이 튀어나왔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엿듣지 못했다면 아무 의심 없이 믿었을 것이다.
이놈은 예전부터 항상 이랬을 테고 난 아무 의심 없이 믿어 왔을 것이다.
악마는 함부로 인간에게 본 모습을 안 보인다.
상대방이 경계하고 도망칠까 봐 처음엔 천사의 모습으로 친근하게 다가온다. 그러다 최후의 순간에야 비로소 본 모습을 드러낸다.
지난 생의 최후였던 동작대교에서의 이상현의 표정이 그의 본모습이다.
그 표정을 잊으면 안 된다.
* * *
다음 날 아침 출근길.
출납직원과 눈인사를 나눈 후 내 자리 쪽을 돌아보는데 역시 성환이 없었다.
마땅히 맡은 현안도 없어서 없어도 딱히 상관은 없다만 불편한 게 하나 있었다.
체조시간에 앉아서 스포츠신문을 펼쳐 들기가 어려워졌다.
옆에서 월스트리트저널이라도 펼쳐야 나도 맘 편히 스포츠신문을 볼 수 있겠는데, 옆자리 빈 와중에 체조시간 혼자 앉아서 신문 펼치기엔 아직 공력이 부족했다.
그렇다고 오늘부터 일어나서 체조하기에는 더 쪽팔린다.
차라리 자리를 피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에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계단으로 가는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급하게 계단을 오르던 사람과 부딪칠 뻔했다.
"죄송합니다."
중요한 통화를 하는지 사과의 말에 대꾸도 없이 뒤 한번 안 돌아보고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자세히 보니 어제저녁 빈 사무실에서 어슬렁거렸던 바로 그 직원이었다.
"네 과장님. 19층 6번 회의실이요? 지금 가고 있습니다."
뭔가가 있다는 생각에 조용히 뒤따라갔다.
6번 회의실 옆방은 다행히 비어있었다.
통화하는 척 옆방으로 들어가 회의실에 귀를 기울이니 역시나 이상현과 몇몇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져왔어? 일단 다 열어 봐."
어제 조성환 노트북에서 빼 온 파일을 열어 보는 것 같았다.
여러 번의 마우스 클릭 소리가 들리더니 이상현이 말을 꺼냈다.
"두 번째 거랑 세 번째 거가 좀 괜찮네. 이것들 송기자한테 넘겨."
"조성환님이 자기 PC에서 뽑은 자료인 거 알면 어떡하죠?"
"괜찮아. 어차피 같이 찍은 사진인데 공유했겠지. 여자 쪽에서 흘렸다고 생각할 거야. 아니 그렇게 만들어야지."
"네."
역시 이번 열애설도 정보를 흘린 건 이상현 이자식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아예 기사 쓰라고 사진까지 넘기는 것이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가장 이득을 보는 자는 물론 조윤경이다.
조윤경이 이때부터 벌써 동생의 이미지를 깎아내리고 점점 회장의 눈 밖에 나도록 하여 나중엔 천하제일을 차지하려는 수작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이미 장기 프로젝트가 시작된 것이다.
남매끼리 싸우든 말든 누가 그룹을 승계받던 큰 상관은 없겠지만, 그래도 원수가 잘되는 꼴을 볼 수는 없었다.
게다가 너무 크게 되면 막상 내가 복수하기가 어려워질 수도 있었다.
적당한 수준에서 더 이상 못 크게 하다가 결정적 순간에 무자비하게 짓밟아야 한다.
"키썸엔터에는 뭐라고 하죠?"
"걔네들한테는 일단 열애설 인정한다고 발표하라고 해. 그때 얘기한 거 방송이랑 광고모델 건 넘겨주겠다고 하고."
"네? 인정하라니 왜요?"
"멍청한 놈들아. 걔네가 인정하는데 우리가 부인하면 누가 욕먹겠어?"
"조성환님 여론이 안 좋겠죠."
"그렇지. 거기 기획사야 피해자 코스프레 하면 되고. 설령 잘 안 된다고 하더라도 그냥 한 명 버리는 것밖에 더 돼? 다른 거 큰 거 하나 챙기는 게 낫잖아."
"네 알겠습니다."
중소 기획사가 무슨 힘이 있겠나.
천하제일 그룹이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는 그래도 꽤 영향력이 있으니 거부하고 싶어도 거부할 수 없는 처지일 것이다.
게다가 기획사 입장에서는 한창 뜨고 있다곤 해도 언젠간 반짝하다가 곧 사라질 스타를 끝까지 보호할 필요도 없다.
그룹에서 한 명쯤은 아웃시키더라도 다른 거 확실한 걸 하나 받는 게 더 나을 수 있다.
* * *
오후가 되니 사무실 안이 웅성거렸다.
역시 다른 인터넷 매체에서 자극적인 사진과 함께 기사가 나온 것이다.
마치 속옷을 연상시키는 듯한 옷만 걸치고 둘이 바닥에 누운 듯한 셀카가 실린 것이었다.
분명 어제 성환 노트북에서 빼낸 자료일 테며 일부러 전체 사진이 아닌 교묘하게 필요한 부분만 잘라냈을 것이다.
한 시간 후 처음 보는 번호로 핸드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과장님……. 전데요."
맥아리 하나 없이 기어가는 듯한 목소리의 조성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