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손안의 재벌-24화 (24/191)

24화 제일 비싼 걸로

"네가 람지였구나!"

갑자기 환희에 찬 얼굴로 손뼉을 치자 아람이는 황당한지 연신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였구나라뇨? 갑작스런 이 분위기 전환 뭐지? 고기 얹혔나요?"

더 말하면 괜한 소리라도 나올까 봐 입을 꾹 다물었다.

천기누설을 조심해야 한다.

혹시 결과가 달라질 수도 있으니.

"아무것도 아냐. 람지란 이름하고 너무 잘 어울려서."

"헐 언젠 또 사자 같다더니."

결과를 알고 나서 보니 이제야 아람이의 이미지와 목소리가 크리에이터 람지와 비슷한 구석이 있는 것도 같았다.

무심한 듯 시크한 척하면서도 은근 다정다감하게 감싸 안을 수 있는 느낌, 즉 츤데레 이미지. 다가올 시대에 딱 맞는 스타일이다.

"근데 성형하려면 돈 많이 들 텐데 괜찮겠어?"

"뭔 말이 그렇죠? 견적 많이 나온단 말한 거죠. 지금?"

다시 흰자를 띄웠다.

손짓으로 연신 아니라고 하는데도 무서운 표정을 거두질 않았다.

"아니, 그게 아니고. 쌍꺼풀만 하더라도 엄청 비싸다고 들어서."

"돈 대줄 것도 아니면서 걱정은. 아무튼 기획사에서 해 주는 건 아니지만, 선급금으로 지원해 준대요. 나중에 수익에서 차감하면 된다고 하고요."

계약서를 다시 달라고 하여 살펴보니 아람이가 말한 대로 기재되어 있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람지의 기획사 사기 등 뉴스를 접했던 적은 없었던 거 같다. 물론 뉴스에만 안 나왔을 수도 있고 뉴스화가 되었으나 내가 못 봤을 수도 있지만.

"그래서 언제 시작하는 건데?"

"다이어트랑 수술도 그렇고 연습도 해야 해서 좀 걸릴 거 같아요. 연습비 지원은 따로 없으니까 종종 과장님 부를게요."

아람이는 항상 뭔가 맡겨 놓은 것처럼 말한다.

"내가 왜? 내가 스파링 파트너야?"

"헐? 생명의 은인한테 밥 한 끼도 못 사나요?"

"한 끼라니?"

"한 끼 맞죠."

한 끼는 맞구나. 양이 달라서 그렇지.

저놈의 은인 타령은 언제쯤 그만두려나.

"그래. 알았어. 대신 장소와 메뉴는 내가 정한다."

"그러시죠. 헤헤."

아무튼 괜찮다. 미래의 스타한테 그 정도 투자를 못하랴.

미래의 최고 경영자가 될 나와 먹방 슈퍼스타 아람이, 아니 람지의 콜라보라니.

벌써부터 흥분된다.

어떤 걸 해 볼 수 있을지 상상만으로도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 * *

다음 날 사무실.

요 며칠간의 만남에 절로 웃음이 나기만 했다.

유니콘기업 창업자와 먹방 스타라니!

의자를 뒤로 쭉 뺀 채 창문 밖만 쳐다보고 실실거리고 있었다.

가만히 지켜보던 성환이 한마디 꺼냈다.

"과장님 무슨 좋은 일 있다고 실실 쪼개세요?"

이놈이 쪼개냐니.

내가 잘못 들었는지 귀를 후벼봤지만, 전혀 이상한 데가 없었다.

"뭐라고? 방금 뭐라 그랬어?"

"쪼갠다고요. 그게 왜요? 네거티브한 말인가요?"

저자식 분명히 알면서도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게 확실하다.

"아니다. 욕도 아닌데 뭘."

"욕 아니었어요?"

그렇다면 욕인지 알고 했다는 소리밖에 안 되는데.

"말을 말자."

"근데 과장님 오늘 저녁 시간되시나요?"

"일단 안 돼."

"일단이라뇨? 그게 무슨 말인지."

"한국말 못 알아들어? 우선 안 되는데 사정사정하면 한번 들어보고 생각해 보겠다는 거 아냐."

이제야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가만히 끄덕였다.

"곱창 드시겠습니까?"

갑자기 밥 먹자니. 뭔가 이상하다.

거기다 어제 기름칠 잔뜩 해놔서 도무지 고기는 못 넘길 거 같다.

"안 돼 바빠."

"갑자기 바쁘다니 왜요?"

"곱창이 싫다는 거잖아."

"아, 네. 그럼 회는 괜찮으세요?"

"회는 좋아. 아니지. 이유가 먼저지. 갑자기 왜 이러지? 뭔 일 있어? 뭔 꿍꿍이야 갑자기 밥 먹자니. 돈 떨어졌어? 법카 빌려줘?"

쉴새 없이 쏟아진 나의 질문에 무슨 대답부터 해야 할지 고민하는 듯하다 어렵게 입을 뗐다.

"실은 오늘 저녁에……."

갑자기 어머니한테 전화가 와서는 오늘 저녁 외식을 하자는 얘길 꺼냈다고 하셨단다. 지난 경험상 이런 경우는 십중팔구 집안에서 점찍어놓은 여자분과의 선자리라고 직감해서 부서 회식 핑계를 대고 거절했다고 했다.

지난달에도 갑자기 외식하자고 해서 약속장소로 갔더니 가족들은 아무도 없고 웬 여자분이 기다리고 있었다고 했다.

핑계대고 거절은 했어도 문제는 남았다. 보통 비서실 운전기사가 회식자리 참석부터 귀가까지 책임진다. 이런 동선은 당연히 집안에 보고된다.

실제 회식자리를 만들어야 했던 것이다.

급하게 회식을 잡을 수밖에 없어서 나에게 도움을 청한 것이었다.

이런 일이라면 얼마든지 좋다.

대신 메뉴는 내가 정한다.

크게 인심 쓰는 척하며 대답해줬다.

"조대리가 정 그러면 내가 시간을 좀 내주지. 거기로 갈까? 도산공원 쪽에 스시집 유명한 데 있다던데."

몇 년 뒤 미슐랭 3스타를 받을 스시집.

가격도 가격이지만 아무나 손님으로 안 받는 곳으로도 악명이 높은 곳이었다.

"네, 거기 가시죠."

생각보다 쿨한 답변.

게다가 가게 이름도 말 안 했는데 단번에 알아들었다.

임원 때도 가기 힘들었던 그 스시집을 가보는구나.

뒤를 돌아 원모를 찾았다.

이미 대화를 다 듣고 있었는지 눈도 마주치기 전에 대답부터 나왔다.

"네, 저도 참석하겠습니다."

"뭐야 김칫국은, 누가 너도 간데? 넌 그냥 빨리 예약이나 해. 당일이라 어려울지 몰라."

"네? 우리 회식…… 아니었나요?"

한껏 기대에 찬 환한 얼굴에서 점점 어둠이 깔리더니 울상으로 변했다.

"이 자식 뭔 농담도 못 하겠네. 빨리 네 명 예약해. 해규도 가자고 말해주고."

"네. 정말 감사합니다."

회식 가자는데 정말 감사하다니.

하이엔드 스시야의 힘이 대단하긴 하나 보다.

원모가 수화기를 들고 예약 전화를 하려는데 성환이 막았다.

"대리님, 거기 내가 단골이니깐 예약해 놓을게요."

"그러시겠습니까? 알겠습니다."

마침 성환이 단골이라니.

오늘 바다 비린내 제대로 맡고 올 생각에 절로 흐뭇해졌다.

잠시 뒤 탕비실로 쓰윽 들어가는 성환 누가 들을까 조심스럽게 전화 거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전데요."

"네. 카운터 쪽 말고 룸으로 두 개 잡아주세요."

넓게 먹으려나?

암튼 재벌 2세라 다르긴 다르다.

최고급 식당을 당일 전화해서 예약하는 것도 대단한데 거기다 4명이서 룸 두 개를 쓸 수도 있고.

* * *

오랜만의 강남 진출.

퇴근 시간이라 그런지 차는 꽉 막히고 택시 미터기의 말은 달리기를 잠시도 멈추질 않았다. 십 년 전이라고 해도 택시비는 비쌌다.

회식이니 당근 법카 가능하지만, 택시 타는데 살짝 기분이 뭐 같기도 했다.

이왕 같은 곳에 가면서 자리도 남을 텐데 굳이 따로 택시를 타고 가야 하다니.

기사 포함 5명이니 충분히 탈 수는 있었을 텐데 성환이 차마 조수석에 탈 수는 없고 그렇다고 뒷자리에 같이 꾸겨져서 탈 수도 없었나 보다.

나보고는 자기랑 같이 자기 차 타고 가자고 했지만 원모랑 해규 생각에 난 그냥 애들하고 같이 택시타고 간다고 했다.

교통지옥을 뚫고 힘들게 식당에 도착했다.

문을 열자 두건을 둘러쓴 셰프들이 우렁찬 소리로 맞이해주었다.

"이라세이마세!"

예약된 룸으로 안내받아 가는길.

어두운 조명에 고급스런 장식들이 놓여있어 분위기에 먼저 압도당했다.

방문을 열어주자 성환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제가 사는 거니깐 맘껏 드십시오. 뭐 드시겠습니까?"

난 룸으로 안내해준 종업원을 쳐다봤다.

"여기 생선 얼마나 있어요?"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어제의 충격이 아직 가시질 않았나 보다.

"무슨 말씀……."

"아니에요. 그냥 젤 비싼 거 주세요."

"과장님 여기 메뉴 따로 없어요. 오마카세라고 그냥 셰프님이 알아서 주세요."

참내, 내가 오마카세도 모르려고.

사실 이 시절엔 그런 말이 있는지도 몰랐었다.

"알아. 농담한 거야."

가만 생각해보니 이 자식이 메뉴 없는 거 뻔히 알면서 뭐 먹겠냐고 물어본 거였다.

맛있는 거 산다니까 오늘은 그냥 넘어간다.

계란찜부터 시작해 전복찜, 흰 살 생선회, 등 푸른 생선 초밥 및 성게알 등이 차례로 올라왔다. 술 한 병이 다 비워가도록 성환은 통 대화에 참여하지 않고 연신 휴대폰만 쳐다보고 있었다.

사실 대화 자체도 거의 없었다.

해규는 접시마다 올라오기 무섭게 사진 찍기 바빴고 원모는 연신 감탄사를 내가며 우걱우걱 집어 먹었다. 고급 초밥집에 처음 온 티를 팍팍 내고 있었다.

"과장님 근데 여기 회 좀 오래된 거 같지 않아요? 맛있기는 한데 탱글탱글 씹히는 맛이 없어요. 막 잡은 게 아닌가 봐요."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갓 잡아 사후 경직된 채 잘게 썰어낸 활어만 질겅질겅 씹어먹다가 제대로 된 숙성회를 처음 맛보면 그런 생각이 들 법도 하다.

"그냥 먹어. 닥치고 술이나 따라."

두 병째 술이 들어오고 잔을 채우는데 성환이 갑자기 일어났다.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한 삼십 분이나 지났을까. 성환은 두 병째 술이 바닥날 때쯤 들어 왔다. 그러고는 십 분 정도 있다가 다시 방을 나갔다.

"속이 좀 안 좋은가 봐요."

원모는 마치 이 말이라도 기다렸다는 듯이 성환이 접시를 가리켰다.

"속 안 좋으시면 제가 먹어도 되겠습니까?"

"네. 그러시죠."

건성으로 대꾸하는 둥 마는 둥 방을 나서는 엉거주춤한 뒷모습.

뭔가 싸한 느낌이 드는 게 아무래도 수상했다.

귀를 기울여 성환의 발소리를 따라갔다.

스르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는데 역시 화장실이 아니었다.

"오빠 왜 이제 와. 오래 기다렸잖아."

"유라야. 미안. 직원들이랑 할 얘기가 좀 있어서."

이놈이 두 탕 뛰려고 룸 두 개를 예약했던 것이었다.

대외적으로는 회식이고 실은 데이트하려는 속셈이었다.

상대방은 예전에 회의실에서 우연히 통화한 걸 엿들었던 걸그룹 그녀였다.

재벌 2세와 한창 뜨고 있는 걸그룹 아이돌과의 만남.

눈에 불을 켜고 여기저기 쑤시고 있는 수많은 언론에 발각되기라도 한다면 무조건 헤드라인 각이다.

더구나 자숙기간에 집에서 맺어주는 인연도 마다하고 연예인과 스캔들이라도 나면 이번엔 정말로 쫓겨날지 모른다.

아이돌 그녀에게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

한참 주가 상승 중인 와중에 재벌 2세와의 스캔들은 진위와 관계없이 이미지에 치명상을 입어 앞으로의 연예계 생활에 큰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따로따로 와서 아무도 보는 눈 없는 독립된 공간에 짱 박혀서 데이트를 즐기는 것이다.

혹시 나중에 언론에서 터지기라도 하면 여러 동료들이랑 왔다고 할 수도 있고 당장 오늘 집에다도 회식왔다고 증명도 할 수 있고. 그야말로 일석이조다.

성환은 술잔을 기울이다가 꽤 많은 시간이 흐른 걸 깨달은 듯 급하게 일어났다.

"오빠 갔다 올게. 너무 오래 비웠다."

"그냥 여기 있으면 안 돼? 알아서 마시다가 가라고 하면 되잖아."

"안돼. 직원들이랑 같이 나가야 해. 기사가 대기 중인데 지금 회식하는 줄 알고 있거든."

"아직 우리 사이 집에다 감추는 거야?"

"아니 꼭 그런 건 아니고 지금 오빠 상황이 좀 그래서. 너도 연예계 생활에 지장 있을 수도 있고 해서."

"또 내 핑계야. 됐어."

한참 동안 어르고 달래서야 가까스로 여자친구의 화가 조금 풀린 듯했다.

성환이 이놈은 아직 집안 눈치 보는 중이다.

집안에서 점찍어준 사람과 결혼하긴 싫고 그렇다고 지금 만나는 여자친구를 부모에게 자신 있게 소개하지도 못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모양이다.

삼십 분이 넘어서야 우리 룸으로 들어온 성환.

마치 전화 통화하고 들어 온양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는 시늉을 한다.

"죄송합니다. 전화 좀 하고 오느라고요. 많이 드셨네요. 안주 좀 더 내오라고 할까요?"

"와. 이런 곳도 리필이 돼요?"

성환이 오는지 마는지도 모르고 안주빨만 세우던 원모.

더 시켜준다는 말에 신난 모양이다.

"왔다 갔다 바쁘네? 어디 좋은 거라도 감춰 놨나 봐?"

잠시 몸이 움찔하고 눈을 못 마주치는 게 어떻게 알았냐고 하는 듯했다.

"감춰놓긴요. 과장님도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뭔진 잘 모르겠으나 자신감을 가져."

"네?"

무슨 영문인지 몰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머리가 아닌 가슴의 소리를 따르라고."

* * *

다음 날

여느 날과 다름없이 아침체조와 스마트미팅 시간이 지나고 직원들이 하나둘씩 사라졌다.

탕비실, 회의실, 복도 등 구석구석에 짱 박혀 상사 뒷담화와 각종 연예계 비화 등을 주고받는 티타임 시간이다.

최대한 신경을 안 쓰고 귀 기울이지 않도록 노력했다.

괜히 내 욕이라도 들을라치면 어찌해야 할지 고민되기 때문이다.

어차피 조만간 회사 나갈 텐데 괜히 얼굴 붉히며 악감정만 쌓을 필요는 없다.

얼마 안 있어 갑자기 주위가 웅성웅성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상한 분위기에 절로 신경이 쓰였다.

IR 쪽은 물론이고 반대편 마케팅팀에서도 몇몇 직원들이 일어나서 우리 자리를 기웃거리는 게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이거 봤어? 어머머. 유라랑 조성환님이래."

"연애패치 뜬 거 봤어? 대박. 걸그룹……대박."

여기저기 짱 박혀 있던 재무팀 직원들도 하나둘 기어 나와 성환을 흘끔거렸다.

무슨 난리가 났는지도 모르고 월스트리트저널을 보고 있던 성환.

핸드폰이 울리자 번호를 확인하고는 놀란 듯이 받았다.

"네? 뭐라고요?"

소식을 들은 것이다.

급하게 인터넷 창을 켜고 검색하는 성환은 뭔가를 보더니 갑자기 주먹을 내리쳤다.

어찌할 줄을 모르는지 잠시 부들부들 떨다가 자리를 박차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성환 자리의 컴퓨터 화면에는 성환과 유라의 다정한 포즈의 사진이 떠있었다.

대한민국 대표 황색언론이자 연예계 전문 인터넷 매체인 연애패치의 헤드라인이 성환과 유라의 스캔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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