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람지
"무슨 일이야? 부탁하는 거면 네가 사는 거지?"
"헐, 생명의 은인한테 정말 이러기에요? 쪼잔하게 왜이래요? 그래도 부탁하려니깐 일부러 적게 시켰구만."
"무한리필인데 적게 시켰다니 무슨 소리야?"
생전 처음 들어본 말이라도 되는양 놀라며 반문했다.
"무한리필이라뇨?"
"일정 금액 내면 계속 채워준다고 뷔페처럼."
"헐, 대박! 그래서 사장님이 남기지 말라고 했구나."
그것도 모르고 내 주머니 사정 생각해서 두 바퀴만 돌았다는 거였다.
"아빠 모시고 다녀와 봐. 무한리필집은 아빠도 좋아하실 거야."
"아빠 바깥 음식 안 좋아하신다니깐요."
순진한 건지 모르는 척하는 건지.
문득 이런 딸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메뉴판을 다시 펼쳐 들고는 쭉 훑어봤다.
"그럼 한 바퀴 더 가볼까?"
"아뇨. 숯불도 거의 꺼졌는데요. 좀 쉬었더니 배도 웬만큼 찼어요. 그냥 근처 카페에 가서 디저트나 먹어요."
카운터에서 계산서를 받는 사장님의 표정이 마냥 밝지만은 않아 보였다.
"또 오……."
습관이 된 듯 또 오시라는 말을 하다가 갑자기 깨달았는지 중간에 끊었다.
차마 또 오시라는 말을 내뱉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고깃집을 나오니 바로 건너편에 프랜차이즈 카페가 보였다.
길을 건너는데 고깃집 사장님 알바생에게 하는 말이 들려온다.
"잘 기억해둬. 나중에 저 사람들 오면 받지 마. 특히 저 여자 손님 오면 무조건 예약 다 차서 자리 없다고 해."
다음에는 돈이 좀 들더라도 일반 고기집을 가야겠다.
카페 카운터 옆 냉장고에는 형형색색의 갖가지 조각케익이 놓여있었다.
"여긴 제가 살게요. 고르세요."
아람이가 쏘겠다니. 처음이다.
무슨 어려운 부탁을 하려고 산다는지 살짝 걱정까지 앞섰다.
"그럴래? 근데 고르긴 뭘 골라."
주문을 기다리는 알바생에게 준비된 듯 바로 질문을 던졌다.
"여기 케이크 얼마나 있어요?"
"네? 무슨 말씀이신지……."
역시 무슨 말인지 몰라 당황한 모습이었다.
"케이크 여기 있는 게 전부예요?"
아람이는 고개를 홱 돌려 흰자위를 드러내고 노려봤다.
눈이 커졌는데도 검은색 눈동자는 사라지는 처음 보는 신공이다.
이럴 땐 꼬리 내려야 한다.
"농담이야. 내가 살게. 어떻게 너한테 얻어먹겠어. 여기 치즈케익 두 개랑 아메리카노 두 잔 주세요."
"그러시겠어요? 또 얻어먹기 좀 미안해서 그렇죠."
다행히도 바로 화가 풀린 모습이다.
"미안하다니, 네 스타일 아니잖아. 그냥 저기 자리에 앉아 있어."
아람이는 내가 손으로 가리킨 자리로 가진 않고 냉장고 쪽으로 발을 옮기더니 알바생을 불렀다.
"저기요. 캐롯, 가냐슈, 레드벨벳, 티라미수……도 같이 주세요."
또 당했다.
어차피 진열대에 있는 거 다 시킬 바엔 차라리 하나씩 다 달라고 하면 될 걸 꼭 굳이 중간에 멈출 것처럼 살짝 기대하게 만든다.
"너 아까 배 찼다고 하지 않았어?"
"고기 배가 찼다는 거죠. 디저트 배 따로 있는 거 모르세요?"
그래야지. 암 그래야지.
그래야 네 스타일이지.
한결같아서 좋다.
시킨 게 많아서인지 셀프임에도 종업원이 직접 우리 자리로 가져다줬다.
저 멀리 테이블에 앉은 커플 수군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것 봐. 뭔 조각케익을 다 시키냐?"
"본사에서 나왔나 보지. 그냥 한입씩 먹고 말겠지."
종업원이 테이블에 케익을 올려놓자마자 아람이 바로 치즈케익 하나를 포크질 두 번에 해치웠다.
"아닌가 봐. 다 먹으려나 본데? 대박."
창피하거나 부끄러울 건 없다.
어차피 사람들은 남의 일에 별 관심이 없다.
관심은 딱 5초 정도뿐이다. 그 이상 관심 둔다고 한들 뭔 상관이란 말인가.
남에게 피해 주는 것도 아닌데.
역시 아람이는 주위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적당히 두꺼운 얼굴에 자신감까지 구비했다.
세 개째의 케익이 사라지고 나서야 비로소 아람이가 부탁할 게 있어서 만나자고 했다는게 떠올랐다.
"무슨 일이야? 부탁하려고 한다는 게?"
"제안같은 걸 받았는데 주변에 상의드릴 사람이 없어서요. 과장님이 그래도 계약서 많이 보셨을테니까 물어보려고요."
제안? 계약?
사회생할 일 년 이상 해봤다고는 해도 아직 이십 대 초반 풋내기였다.
뭔가 사기라도 당하는 게 아닌지 걱정이 몰려왔다.
"무슨 일인데?"
"친한 친구 오빠가 인터넷방송 관련 일을 하는데요. 저보고 1인 방송해 볼 생각 있냐고 해서요."
친구 오빠라니 약간은 안심이 되기도 했다. 그래도 방송 출연 등을 미끼로 사기치는 인간들이 하도 많아서 찜찜한 마음은 가시질 않았다.
"갑자기 웬 방송? 대학교 간다며?"
"대학 나와도 직장 잡기도 어렵고 설령 입사해도 아시잖아요. 뻔한 거."
아람이 말이 맞다.
분식집에서 헤어질 때 해주고 싶던 말이었는데 몇 달 만에 본인이 몸소 깨우쳤나 보다.
"그렇긴 한데 무슨 방송이야? 설마 이상한 방송 그런 거 아니야?"
"헐. 말이라고. 절 어떻게 보고. 그런 거 아니에요."
아람이 손사래까지 치며 어림없는 소리 말라는 표정이었다.
"알았어. 어련히 잘하려고. 아무튼 일단 조심해. 방송 쪽에 얼마나 사기꾼이 많은데."
"괜찮아요. 제가 무슨 애도 아니고 걱정하지 마세요."
가방에서 파일철을 꺼내더니 종이 몇 장을 꺼내 보여줬는데 맨 앞장에는 매니지먼트계약서라고 적혀있었다.
"이게 뭐야?"
"계약서 초안이요. 저보고 재능이 있는 거 같다고 개인방송하자고 해서요. 전속계약부터 하자는데 영 불안해서 말이죠."
"그러니까 무슨 방송?"
평상시 캐릭터랑 안 맞게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이더니 조용히 말을 꺼냈다.
"비웃기 없기에요."
"비웃긴 누가 비웃어. 괜찮아 말해봐 뭔데 도대체?"
"먹는 거예요. 그냥 방송 틀고 먹는 거래요. 이상하죠? 처음에 저도 들었을 때 오빠한테 미쳤냐고 했어요."
말해놓고도 민망한지 내 눈치를 살살 살폈다.
올 게 왔다.
근데 생각보다 빨리 왔다.
막연히 먹방 크리에이터에 소질 있다 정도라고 생각했었는데 자신의 길을 이렇게 빨리 찾을 줄이야.
살짝 대견하기도 하다.
"넌 잘할 거 같아. 소질 있어."
"헐, 대박. 완전 예상 밖이야. 당연히 왜 그런 걸 하냐, 미쳤냐, 그런 걸 누가 본다고 이럴 줄 알았는데."
"내가 왜 난 떡잎부터 알아봤는데. 그리고 너한테 추천하려고도 했었어."
"역시 달라. 요즘 친구네 집에서 몇 번 밥 먹었는데 친구 오빠가 보더니 재미있대요. 그런 게 재미있는 사람이 있기도 하나 봐요."
"그런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는 시대가 올 거야. 잘 생각했어."
아직은 크리에이터라는 직종이 확 뜨기 전 초창기 시절이었다. 이들에 관한 권리를 보장하는 표준계약서도 마련되지 않은 시기였다.
당연히 예전 생에서도 표준계약서를 보지 않긴 했다. 그래도 대략 계약상대방의 권한 및 의무에 관한 사항, 수익배분 조항, 지식재산권 관련 조항 등 적절하게 기재되어 있는 것 같았다.
"음 나름 구색은 갖춘 거 같네. 수익분배 비율 7:3? 이거 동의하는 거야?"
"네. 꽤 높은 비율이라고 하더라구요. 그리고 중요한 게 이건데요."
손으로 가리킨 쪽은 활동명을 쓰는 란이었고 아무것도 기재되어 있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제일 중요한 항목이다.
"생각해 놓은 거라도 있어?"
"네 얘기는 다 끝났고 겹치는 거 있는지도 확인했어요."
"활동명은 뭐로 할 건데?"
잠시 뜸을 들이는 듯하더니 비장한 각오를 보여주듯이 또박또박 대답했다.
"람지요. 아람이니깐 람이고 다람쥐같이 먹는다고 람지. 촌스러워요?"
뜨거운 커피를 뿜을 뻔했다.
"다람쥐처럼 먹다니. 무슨 다람쥐가 고기도 뜯어 먹냐? 사자면 몰라도. 차라리 람이언이라고 하지 그래."
"뭐라고요?"
또다시 흰자 출현했다. 한마디도 덧붙이지 못할 분위기.
그런데 안타깝다.
몇 년 후 먹방계 최강의 크리에이터가 될 사람의 활동명과 겹쳤다.
자세히 방송을 본 기억은 없었다. 스튜디오가 아닌 집에서 편하게 먹는 스타일로 제작하여 큰 인기를 얻고 수백만의 구독자 수를 보유하게 된 크리에이터 람지였다.
람지는 이미 활동을 시작했을 것이다.
"람지 쓰는 사람 있을걸? 잘 찾아봐. 내가 어디서 본 거 같아."
"아니 없대요. 아무도 쓰는 사람 없다고 확인했어요."
이상하다.
그럼 아람이는 시작한 지 얼마 안 돼서 실패하고 접는다는 건가?
그 이후에 다른 사람이 람지 이름으로 인기를 얻는 거고?
"없다니 다행이네. 아무튼 열심히 해 봐."
격려를 하긴 했어도 아쉬운 마음이 가시질 않았다.
아람이는 분명 소질 있는데.
매니지먼트 회사가 어떤 회사인지 평판은 좋은지 내일 알아보려고 회사 이름을 따로 적어 놓고는 계약서를 아람이에게 건넸다.
계약서를 챙겨서 가방에 집어넣으면서 잠시 주저하더니 말을 꺼냈다.
"근데 좀 고민되는 게 있어요."
아람이의 낯빛이 급격히 어두워지는 것을 보니 큰 걱정거리가 있는 듯했다.
"뭔데 말해봐. 좋은 회사인지는 계열사 아는 사람 통해서 알아봐 줄게. 그거 확인한 후에 도장 찍어."
"회사 문제가 아니고요. 그냥 겁나는 게 좀 있어서요."
한참을 주저주저하더니 조용히 입을 뗐다.
"인터넷에서 인기 좀 끌고 하면 평상시 알고 있던 사람들이 나쁜 말 남기고 욕하고 그런다고 해서요."
아람이는 언어폭력, 신상털기와 같은 것을 걱정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 시기에 인기 있는 사람들이 악플에 시달리는 건 스타면 통상 겪어야 하는 유명세 정도라고 여겨지고만 있었다. 본격적으로 큰 이슈화가 되진 않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앞으로 많은 스타들이 악플에 못 견디고 생을 마감하는 일이 늘어날 거다.
이로 인해 사이버폭력 제재에 대한 사회적 합의와 관련 법률 제정 등이 이루어질 테고.
차마 어차피 넌 인기를 못 끌 테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신상털기가 걱정되다니 혹시 아람이가 학폭과 관련되어 있는 게 아닐지 조심스럽게 걱정도 들었다.
전혀 그럴 만한 인물이 아니란 건 알고 있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거 아닌가.
"왜 걱정되는 거라도 있어? 혹시 학교 다닐 때 친구들 괴롭히고 한 적 있어?"
단도직입적인 나의 질문에 두 손으로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사람을 뭘로 보고."
"그럼 뭐가 걱정되는데?"
한숨을 푹 내쉬더니 말을 이어갔다.
"그 반대에요. 중학교 때 저 괴롭히던 친구가 있었어요. 친구도 아니죠. 아무튼 초등학교 때는 제일 친했는데 중학교 올라가면서 나쁜 애들과 어울려 다니더니 저를 괴롭히더라고요."
표정과 말투는 그냥 조금 괴롭힌 정도가 아니라고 말해 주고 있었다.
"네가 괴롭힌 것도 아니라면서 뭐가 걱정이야? 걱정은 걔네들이 해야지."
"실은 고등학교 올라가면서 걔네들 피하려고 일부러 먼 곳으로 지원해서 갔거든요. 그런데 중학교 졸업식 때 절 보면서 했던 얘기가 아직도 생각나요."
"뭐라고 했는데?"
"손으로 자기 눈을 가리키면서 지켜보겠다고 자기한테서 도망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냐고 그러더라고요."
뉴스에서만 접하던 집단 따돌림 그런 장르를 직접 당사자에게 들으니 상황이 그려지면서 등골까지 서늘해졌다.
듣고만 있는 나도 이 정도인데 당사자는 얼마나 무서웠을까.
몇 년이 지났어도 아직 그때의 공포를 잊지 못한 것 같았다.
"그래서 걔네들이 찾아올까 봐 걱정이야?"
"네. 아무래도 방송이라도 나오면 찾아올 수도 있고, 댓글에다 그때 괴롭힘당하고 심부름했던 것들 까발리면서 욕 같은 거 남길 수도 있고요. 또 무슨 짓을 할지 몰라서 무서워요."
평상시 생각했던 것과는 정반대였다. 신상털기를 가해자들이 걱정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피해자가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라니.
위로의 말 아니고는 특별히 도움을 줄 만한 말을 찾기가 어려웠다.
어차피 인기도 없어서 걔네들이 안 볼 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도 전혀 도움이 안 될 것이다.
별다른 말 없이 안타까운 표정만 짓고 있는데 아람이 자세를 고쳐 잡았다.
"그래서 말인데요. 나중에 본명이 밝혀질 수도 있으니깐 개명 먼저 해서 계약서 사인하고 성형도 하려고요. 그리고 기획사에서는 살 빼라고 하니까 겸사겸사 다이어트도 좀 하려고요."
"아니 네가 뺄 살이 어딨다고."
"그래도 좀 마른 듯한 사람이 잘 먹는 게 훨씬 보기 좋대요."
"그건 그렇긴 하지. 상황을 반전시키는 묘미도 있고."
결연한 말투를 보아하니 아람이는 맘속으로 이미 결정해놓았다. 답은 정해져 있고 난 그저 아람이 결정에 대한 지지 의사를 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 난 네가 잘 헤쳐 나갈 거라 믿어. 열심히 해 봐."
"그래서 말인데요. 아무한테도 말씀 말아 주세요. 회사 언니들한테도 절대 말씀 말아 주세요. 전 다시 태어나는 거예요. 제 과거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이. 물론 과장님만 빼고요. 그러니깐 과장님이 비밀 꼭 지켜 주셔야 돼요. 그걸로 생명의 은혜와 퉁치는 거에요."
다이어트에다가 성형으로 얼굴도 바꾸고 거기다 방송이니 두꺼운 화장까지 더한다면 아람이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개명까지 한 후라 본명이 드러나도 마찬가지일 테다.
그렇다면.
"너였구나 람지가."
아람이가 바로 그 람지였다.
동일인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었다.
수백만 팔로워를 거느린 세계적인 먹방 스타를 바로 앞에 두고 감쪽같이 몰라봤다.
아람이는 과거와 단절하고 새롭게 태어나는 데 성공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