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손안의 재벌-22화 (22/191)

22화 미래를 위한 투자

정영균은 동네 마실이라도 나온 차림이었다.

말끔한 검은색 정장 차림의 다른 지원자들 사이에서 옷차림부터 눈에 확 띄었다.

게다가 운동화는 거무튀튀한 게 세탁한 지 일 년은 된 듯했다.

면접관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얼굴을 찌푸렸다.

오디션 프로그램이었으면 바로 탈락 버튼을 눌렀을 것이다.

네 명의 다른 지원자들은 면접관의 반응을 보고 '한 명은 제쳤다'라고 안도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뻔한 질문과 답변이 이어지고 내가 마지막 질문을 했다.

"십 년 후 회사에서의 자신의 모습은 어떨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역시 뻔한 질문이었지만, 난 그저 정영균의 대답이 듣고 싶었다.

"저는 최연소 임원이 되어 세계 곳곳을 누비며 천하제일의 사업영역을 넓히고 있을 것입니다." 등

재미와 감동 두 마리 토끼를 모두 놓친 뻔한 대답이 이어졌다.

마지막 정영균 차례.

"십 년 뒤엔 여기에 없을 것 같은데요."

쯧!

옆자리 면접관이 대놓고 혀를 찼다.

마치 '넌 십 년 뒤는커녕 아예 입사도 못 할 거야'라고 팩폭을 날려준 것이다.

"왜 그런 생각을 하셨죠?"

"뽑힐 거 같지 않아서요."

옆자리 면접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면접은 그렇게 끝났다.

인사팀에 제출할 평가표를 정리하는 도중 살며시 다른 면접관들을 떠보았다.

"마지막 지원자 어때요? 솔직해서 괜찮지 않았나요?"

긍정적인 뉘앙스를 살짝 풍기며 물어봤으나 대답들은 무척 적나라했다.

"글쎄요. 제발 떨어뜨려 달라고 사정하는 거 같던데요."

"저런 지원자는 처음이에요. 옷차림도 지저분하고 면접 자세도 안 되어 있던데요."

가망 없을 듯.

언뜻 엿 본 평가표 등급란에는 대부분 D라고 기재되어 있었다.

아무리 내가 A를 주더라도 무조건 탈락각이다.

며칠 후.

혹시 몰라 발표 전 성환을 통해 알아보았으나, 역시나 불합격이라고 했다.

그것도 지원자 중 최하위급 점수였다는 말을 인사팀에서 굳이 덧붙였다고 했다.

바로 정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교수님. 조카분 합격은 어려울 거 같습니다."

"그렇군요. 신경 많이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미리 예상이라도 한 듯 전혀 놀라지 않은 반응이었다.

"도움 못 드려서 죄송합니다. 마침 제가 면접관이어서 조카님을 봤었는데요. 다시 따로 한번 만나볼 수 있을까요? 조언을 좀 드릴 수 있을 거 같아서요."

정교수에게 도움도 주면서 미래의 스타경영자와 친분을 만들 수 있는 기회다.

도랑 치고 가재 잡는 격이다.

"그래 주실 수 있을까요? 괜히 시간만 뺏는 게 아닐런지."

"아닙니다. 조카분 가치관도 뚜렷하고 제가 볼 땐 아주 괜찮은 친구 같던데요. 혹시 도움을 드릴 수 있게 되면 전 그것만으로도 만족합니다."

전화를 끊자 그새 엿들었는지 성환이 또 참견이다.

"헐, my pleasure래. 무슨 약점이라도 잡힌 거 있으세요? 왜 그렇게 집착하지? 캐릭터랑 안 맞게."

"뭐? 골룸이라고? 이게 어디서."

"그건 my precious고! 영어도 이 모양인데 어떻게 입사했는지 몰라?"

혀 차는 소리와 함께 자기 노트북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외면했다.

이놈이 좀 오냐오냐해주니 자꾸 선을 넘으려고 한다.

그래도 갈굴만한 거리가 딱히 없었다.

그냥 조용히 화풀이 한번 해 볼 수밖에.

"넌 내가 면접 봤으면 그냥 나가리야. 질문이고 뭐고 없이 바로 아웃이야."

"네. 잘 알겠습니다. 근데 난 면접 안 보는데요? 한 번 보고 싶긴 했지만."

안 봤다도 아니고 안 본다라니.

진심 재수 없다.

근데 딱히 틀린 말도 아니고 오히려 솔직하니 반박할 수가 없었다.

* * *

약속한 날이 되어 회사 앞 카페에 나가 정영균이 오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면접 때 그대로의 복장으로 카페에 나타났다.

슬리퍼만 신었으면 꼭 집 앞 슈퍼에 담배 한 갑 사러 나온 줄 알았을 거다.

"안녕하십니까."

꾸벅 인사하고 앉는 걸 보니 그래도 예의는 바르다.

"안녕하십니까? 저 면접 때 뵀던 거 기억하시나요?"

"네. 마지막 질문 주셨죠. 큰아버지께서 도움 많이 받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일단 정교수한테 남긴 첫인상은 좋았다.

도움 쿠폰이 있다면 적립도장 한 번 찍은 격이다.

"제가 보기엔 취업에 모든 걸 건 듯한 인상은 아니었고 오히려 일부러 면접에 떨어지려고 한 거 같던데. 제 말이 맞나요?"

정영균은 약간 고민하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네 어느 정도는요. 제 길이 아닌 거 같아서 도무지 몰입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럼 왜 지원하신 겁니까?"

"부모님 때문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처음 얘기해보는 사이인데도 비교적 자신의 처지나 바람 등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정영균은 친가나 외가 쪽 모두 교수, 판검사나 의사 등을 배출한 엘리트 집안에서 태어나 온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자라 왔다고 했다.

특별한 꿈도 없이 그저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 공부만 하다가 고등학교 진학했고 게임을 접하면서 그때부터 컴퓨터만 붙잡고 살았던 것이었다.

당연히 성적은 점점 바닥을 쳤고 부모님이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없었고, 대학 재학 중에도 취업준비보다는 게임이나 영상 컨텐츠 만드는 데 집중했다고 한다.

그렇게 졸업할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부모님 등쌀에 못 이겨 마지못해 취업시장에 나온 것이었다.

일이 년 정도 취업준비하다가 결국 안 되겠습니다라고 부모님을 포기시키고 나서 자기가 원하는 걸 해 보려는 속셈이었다.

"제가 감히 충고드릴 입장은 아닌데요. 그래도 조금 더 인생을 살아온 사람의 입장에서 한 말씀만 드리겠습니다. 부모님 기대는 하루라도 빨리 놓게 만드시고 자신의 인생을 사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이런 얘기를 처음 들어봤는지 눈이 휘둥그레졌다.

"부모님은 자식이 실패하면 나락으로 떨어질까 봐 두려운 마음에 그저 안정적으로 살았으면 하는 거예요. 부모님 말 잘 들어서 최고로 잘되면 적성에도 안 맞는 판검사, 의사하면서 사는 거예요."

"그게 좋지 않나요? 사회적으로도 성공한 거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은 티가 났다.

"제 말 아실 거 같은데요. 자기 꿈을 가지고 자기 삶을 사는 게 중요하다는걸."

"생각은 하고 있지만 막상……."

"무슨 일을 하고 싶으신데요?"

"친구랑 얘기 중인 게 있습니다. 사업하려고요."

"그럼 하면 되지 왜 망설이죠?"

"돈이 부족해서 그렇죠. 조그맣게라도 시작하려면."

드디어 왔다.

수백 배가 터질 수 있는 기회다.

큰 결심이라도 한 것마냥 헛기침과 함께 제안을 날렸다.

"그럼 제가 투자해 드려도 될까요?"

뜻밖의 나의 제안에 매우 놀란 듯 반문했다.

"아니 갑자기 왜요? 무슨 사업인지도 아직 말씀 안 드렸는데요."

맞다.

십 년 후 나스닥에 상장할 YK를 알고 있는 것일 뿐. 이 자리에선 아직 듣지 못 했다.

"스타트업은 자신감과 패기만 있으면 되니깐요. 사업모델이 어떤 겁니까?"

면접 때와는 다르게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향후 구상을 쭉 늘어 놓았다.

내가 익히 알고 있었던 YK 사업과 전혀 연관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YK의 성공 결과만 아는 거지 성장과정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세 번의 실패를 딛고 네 번째에 성공한 것일 수도 있다.

"생각해 놓으신 회사명은 있으십니까?"

"네. 기운쎈친구들이요."

첫 번째 사업, 이 회사는 망하고 친구들하고는 헤어진다.

기억으로는 YK를 동생과 같이 설립했다고 들었던 것 같다.

정영균은 조심스럽게 내 표정을 살펴보더니 진지하게 물어봤다.

"혹시 어느 정도까지 투자하실 수 있으신지요?"

대답 잘해야 한다.

이번에 투자하면 망한다.

그렇다고 바로 거절한다면 다음번 투자기회가 나에게 오지 않을수도 있다.

완곡히 거절하면서 다음을 기약하는 그럴듯한 답변이 필요하다.

"네 사업모델이 아주 흥미롭네요. 저도 조만간 직장생활 청산하고 벤쳐캐피탈을 설립할 계획 중입니다. 그때 혹시 자금이 필요하시면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거 같습니다."

몇 번의 실패를 할진 모르나 결국엔 문화 콘텐츠, 플랫폼 사업 쪽으로 방향을 잡을 것이다. 그때 기회 봐서 올라타면 된다.

말이 되어 직접 달릴 필요는 없다. 잘 달리는 말에 올라타면 그만이니.

* * *

오랜만의 저녁 약속.

퇴근 시간이 가까워지자 뱃속에 기름칠할 생각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아침에 문득 걸려온 전화. 아람이 번호였다.

"안녕 아람아. 오랜만이야. 잘 지내지?"

아람인 역시 안부 따위를 묻는 의례적인 인사말은 하지 않고 다짜고짜 본론이다.

"도대체 한우 언제 쏘실 거예요?"

맡겨 놓은 게 있었나 잠시 고민했었다.

"나야 아무 때나 괜찮아."

"그럼 오늘!"

답정너다.

오늘 소고기가 땡기셔서 친히 전화를 주신 거였다.

약속장소인 고깃집은 벽 한쪽이 온통 연예인들 사인과 TV 출연 맛집임을 알리는 홍보 간판들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소고기 무한리필 집.

식당 외부 유리창엔 안내문 형식으로 '운동부 출입금지'라고 써놓았다. 운동하는 사람들이니 워낙 많이 먹을뿐더러 술도 안 시킬 테니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예약된 자리로 안내받아 가보니 약속 시간이 20분이나 남았는데도 아람이가 벌써 앉아 있었다.

게다가 숯불도 미리 달라고 해 놓았는지 고기만 빼고 만반의 준비를 모두 갖춘 상태였다.

"아예 그냥 먼저 시켜서 먹고 있지 그랬어?"

몇 달 만에 보자마자 뱉은 말 치고는 좀 너무했나 싶어 살짝 미안했다.

"제가 고기를 못 구워서요."

그렇지, 암 그래야지.

잠시 미안했던 거 취소다.

무한리필에다 한우인데도 나름 합리적 가격대에 가성비 좋은 집이다.

고기는 시키면 가져다주는 곳이었다.

메뉴판에는 등심부터 차돌박이, 안창살 등 상당히 많은 부위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주문받으러 알바생이 왔다.

"어떤 거 드릴까요?"

"어떤 거 있는데요?"

"네. 등심, 차돌박이, LA갈비 등 웬만한 부위는 다 있습니다."

"이 집 고기 얼마나 있어요?"

무한리필집에서 고기가 얼마나 있냐니.

주문받는 알바생이 처음 들어보는 듯한 질문에 몹시 당황했다.

"네?"

"좀 있다가 떨어져서 없다고 하실까 봐 미리 여쭤보고 그거 먼저 시키려고요."

"아, 네. 저희 모든 종류 다 많이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럼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주세요."

왼손으로는 맨 위에 적힌 등심을 가리키고 오른손으로는 맨 아래 LA갈비를 가리켰다.

"네?"

알바생이 흠칫 놀라며 날 쳐다봤다.

그냥 다 주세요 라고 하면 될 걸 굳이 손으로 가리켜서 괜한 혼란만 줬다.

하여튼 오랜만에 나왔다.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주문 신공.

보통 사람은 호불호가 있어서 '이거 빼고 다 주세요' 할 텐데 아람이 사전엔 불호란 없다.

"네 맞아요. 일단 일 인분씩만 다 주세요."

내가 주문하자 아람이 갑자기 흘겨보더니 바로 주문을 바꿨다.

"과장님 안 드시게요? 그냥 이 인분씩 주세요."

그래 많이 먹어라.

어차피 무한리필이라 추가 요금도 없다.

"술은 안 시켜?"

"술 들어갈 배가 어딨어요? 고기 넣기도 빠듯한데."

고기 먹는 자의 자세를 갖췄다.

그래도 저녁에 고깃집에서 술 안 시키면 민폐다.

"나만 마실게. 소주랑 맥주 한 병씩 주세요."

30분 뒤 이 인분씩 두 번째 주문이 들어가자 가게 사장님이 우리 자리로 왔다.

"손님. 음식 남기시면 환경부담금 있습니다. 정말 주문 들어가도 괜찮으시겠어요?"

"네. 그러니까 빨리 주세요. 중간에 끊기면 못 먹어서 남길 수도 있어요."

역시 찐이다.

지난번 봤을 때는 양이 많긴 했지만 그래도 라면 몇 개, 토스트, 계란 뭐 이정도였던거 같은데 못보던 사이 완전히 급이 달라졌다.

마치 먹방 생중계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벌어진 입이 좀체 다물어지질 않았다.

아람이는 먹방 스타가 될 자질이 보이는 듯했다.

다만 아직 부족한 면도 있었다.

너무 먹기만 한다.

중간에 얘기도 좀 하고 해야 하는데 입을 오로지 먹는 데에만 쓴다.

고기 먹는 내내 사장님 딴청 피우는 척하며 우리쪽 테이블을 흘끔흘끔 봤다.

조용히 알바생을 불러 소곤거리는데 다 들렸다.

"저기 3번 테이블 진짜 먹는 거야? 잘 봐. 몰래 싸서 빼돌리는지."

"진짜 먹는 거 맞아요. 알바 3개월 동안 처음 봐요. 저렇게 먹는 사람."

"난 개업한 지 3년 만에 처음이야. 가서 운동부인지 살짝 떠봐."

"저렇게 마른 운동부가 어딨어요?"

"하여간 무슨 계통 사람인지 캐봐."

"왜요?"

"담부터 그 계통 출입금지 시키게."

아람이 드디어 배가 찼는지 그제야 고개를 들고 날 쳐다봤다.

"잘 지내셨어요, 과장님?"

만난 지 한 시간도 넘어 드디어 안부를 물었다.

"빨리도 물어본다. 그럼. 잘 지내지."

"오늘 왜 이렇게 말씀이 없으세요?"

헐?

보자고 해 놓고 고개 처박고 흡입만 한 게 누군데.

"보면 볼수록 신기하다. 너희 집 외식하면 몇 인분 시켜 보통?"

"저희 외식 잘 안 해요. 아빠가 바깥 음식 안 좋아하세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외식 한 번으로 가장의 권위를 내세우기에는 그 대가가 너무 컸을 것이다.

차라리 외식을 싫어한다고 하는 게 낫지.

숯불을 빼러 오신 사장님 뭔가를 물어볼지 말지 전전긍긍하는 모습이다.

"운동부 아닙니다."

내가 선수를 치는 바람에 허를 찔렸는지 머쓱한 미소 한 번 날려 주고는 숯불 빼는 것도 잊어버린 채 자리를 떠났다.

"그나저나 그냥 고기가 먹고 싶었던 거야? 아니면 할 말이라도 있어서 불렀어?"

아람이가 자세를 고쳐 잡고 입을 뗐다.

"실은 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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