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손안의 재벌-21화 (21/191)

21화 면접

주총이 끝나고 한가한 어느 날.

사무실 전화가 울렸다.

"재무팀 천태평입니다."

"과장님? 정영태입니다."

전직 사외이사이자 주총꾼이었으며, 미래의 대주주가 될 그 정교수다.

나와는 10년 뒤에나 조우할 인연 정도라 생각했었는데, 정교수에게 좋은 인상을 남겼는지 생각보다 빨리 연이 닿은 분위기다.

"네 교수님. 그때 인사도 제대로 못 드렸었는데 잘 들어가셨나요?"

"지난번엔 도움 많이 받았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하나 물어볼 게 있어서."

"네 말씀하시죠."

"제 조카가 천하제일 그룹 신입사원으로 지원했는데, 서류 통과했는지만 미리 좀 귀띔해 줄 수 있을까요?"

뭐지? 막 친한 사이도 아닌데 이런 부탁을 하고?

말 그대로 통과여부를 물어보는 건지 아니면 통과시켜달라고 에둘러 청탁하는 건지 구분이 안 됐다.

"통과했는 지가 궁금하신 거죠?"

"네. 동생이 통 부탁해서 말이지. 그렇다고 그만둔 지 십 년도 더 된 친구한테 이런 일로 전화할 수도 없고. 지금 천하제일에 아는 사람이 천과장밖에 없어서 염치 무릅쓰고 전화했어요."

좋은 기회다.

이번에 한 번 도움을 준다면 언젠가 날릴 청구서의 명분을 쌓을 수 있다.

"네. 그럼요. 조카분 이름이 뭐죠?"

"정영균이라고 한수대 컴공과 전공이에요."

한수대라.

지방소재 사립대학으로 요즘 같은 취업난에 면접은커녕 서류 통과하기도 버거울 것 같다.

그런데 정영균?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이름이었다.

'한수대 출신 정영균? 설마 YK의 정대표?

만일 그 사람이 맞다면 이번 천하제일 공채에 떨어진다. 아니 떨어져야 했다.

그는 바로.

대학 졸업 후 바로 창업에 뛰어들어 향후 나스닥까지 상장할 유니콘 기업의 창업자가 될 사람이기 때문이다.

창문으로 한 줄기 서광이 비치는 듯 했다.

이미 상장한 기업은 미래에 벌어들일 이익이 주가에 선반영되어 있다.

아무리 성장주라고 해도 많이 올라봐야 열 배는 어림없다.

그러나 상장 전 주식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초창기에 주식을 가질 수 있다면 열 배는커녕 수백 배의 차익까지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몇 가지 질문을 통해 조카가 바로 그 사람이란 걸 확신할 수 있었다.

"교수님. 제가 알아보고 바로 전화드리겠습니다."

"그래. 부탁할게요. 천과장."

그룹 내에선 한창 상반기 그룹 신입사원 공채 시즌 중이었다.

연초에 졸업했거나 여름학기 졸업 예정자를 대상으로 채용을 진행했다.

올해는 100대 1 이상의 말도 안 되는 경쟁률을 기록하였다.

더군다나 앞으로는 공채시즌마다 지난해 최고 기록을 매년 새로 갈아치울 정도로 취업난이 점점 더 가중될 것이다.

서류전형, 인적성검사 및 1, 2차 면접 등 4개의 과정을 다 합치면 두 달 가까이 소요되는 프로젝트다.

또한 외부로부터 채용 청탁도 엄청나게 들어오는 시기다.

십 년 뒤쯤에는 거의 사라질 테지만, 이 시절에는 그래도 알음알음 이런 청탁이 어느 정도는 용인되는 분위기였다.

물론 이 시절도 최종 면접까지 통과시킬 수 있는 빽은 회장 아니면 불가능하긴 했지만.

웬만한 권력 있는 자들도 최고위급 임원을 통해서는 1차 면접까지만 통과시켜 줄 수 있을 뿐 2차는 불가능한 분위기였다.

만약 이런저런 사람 몫으로 2차까지 다 통과시켜 준다면 그룹 내에선 빽 없는 신입을 단 한 명도 찾아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건 기회다.

정영균을 서류까지는 통과시켜야 한다.

면접은 어차피 떨어질 것이다. 그리고 미래를 위해서도 붙어서는 안 되니 신경 쓰지 말자.

면접만 보게 만들어서 큰 도움을 줬다는 인상만 남기면 그만이다.

임상무를 이용해야겠다. CFO이니 그 정도 통과시켜 줄 체급은 된다.

임상무 방 소리에 귀를 기울이니 연신 통화 중이었다.

"알겠습니다. 알아봐 드리겠습니다."

"네, 신경 쓰도록 하겠습니다."

이 시절 채용 시즌에는 평상시 우호 관계를 유지해야만 하는 부처, 즉 국세청이나 공정위 같은 사정기관 공무원들로부터도 수많은 청탁 전화를 받게 된다.

지금도 한참 그 문제로 통화한 모양이었다.

지원자와 청탁자와의 관계(직계가족이 가장 강력), 청탁자의 사회적 지위와 그룹과의 우호 관계를 고려하여 받을 것은 받고 내칠 것은 내쳐야 했다.

지금 임상무는 상당히 곤혹스러운 입장일 것이다.

전화를 끊은 것을 확인하고 방문을 노크했다.

'똑똑'

"들어와."

청탁 때문에 고민이 많은지 임상무는 넥타이를 풀어 헤치고 고통스러운 듯 머리카락을 쥐어짜고 있었다.

"상무님. 공채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싫어. 그냥 나가. 그렇지 않아도 미치겠구만. 이맘때만 되면 뭔 놈들이 사돈의 팔촌까지 다 챙기려고 해. 이놈의 혈연사회 아주 지긋지긋하다."

변기에 앉아 일주일은 못 본 변을 밀어내고 있는 듯한 표정으로 손사래를 쳤다.

"중요한 분인데요."

"중요한 사람 누구?"

"주총 때 왔던 그 전직 사외이사분이요. 아무튼 그분 조카가……."

임상무는 황당한지 말을 다 들어보지도 않고 끊어 버렸다.

"장난해? 사외이사 조카가 뭐 어쩌라고? 장차관 조카도 번호표 뽑으려고 지금 광화문 밖에서 각 잡고 줄 서 있는 판에."

그렇다.

아직은 그저 전직 교수이자 사외이사이며 현재는 미미한 소액주주일 뿐이다.

더군다나 내 입장에서나 챙겨야 할 사람이지 회사 입장에서는 그저 장삼이사, 필부필부, 그저 그런 평범한 사람에 불과했다.

"그럼 서류전형이라도 어떻게……."

"아. 씨 나가라니까."

바로 인상 쓰는 게 오랜만에 미친개 성격 나왔다.

자리로 돌아와 인사팀 최차장한테 전화를 걸었다.

"재무팀 천태평입니다."

"왜? 지금 한창 바쁜데 중요한 일 아니면 끊지?"

꼭 이렇게 티 내면서 일하는 사람들 있다.

종일 회사 뒤편에서 쪼그리고 담배 피면서 노가리 까다가 꼭 퇴근할 때쯤 되면 일 많다고 야근 준비하는 스타일.

"중요한 겁니다. 이번 서류전형 통과했는지 좀 알려주세요."

"지금 뭐 하자는 거야. 물어볼 걸 물어봐야지. 나도 몰라 끊어."

뚜뚜뚜뚜.

정말 끊었다.

화가 끓어올랐지만 참았다. 입장을 바꿔 생각하면 나도 마찬가지였테니.

그렇다면 플랜B다.

성환을 조용히 불렀다.

"조대리님"

내가 자기 부를 때 님자를 붙이거나 말투가 나긋해지면 바로 부탁이라는 걸 직감하는 듯 고자세로 돌아봤다.

'또 뭐'라면서 귀찮아하는 표정이다.

"빨리 말씀하시죠."

그래 일단은 참자. 부탁하는 자의 자세는 굽히는 거다.

"그분 기억나나? 주총꾼으로 오해했던 전직 교수."

"기억하지. 그냥 간 사람. 왜요?"

부탁받는 자의 자세다.

말이 반은 짧아졌다. 그냥 말을 놓지 꼭 어설프게 들었다 놨다 한다.

"그분 조카가 이번에 원서접수를 했다는데, 1차 면접까지는 보게 해주는 게 어떨까 해서."

"그분이 우리한테 중요해요?"

"중요하지, 엄청나게 중요한 분이야. 조대리는 아직 몰라서 그래. 어떻게 안 될까?"

"뭐가 엄청난데요?"

싫으면 싫다고 하지 말꼬리 잡기 시작이다.

"1차 면접만 보게 해달라고 그냥. 그럴 만하니까 얘기하는 거 아니겠어? 자세히는 묻지 말고 그냥 어떻게 좀 해 봐."

갑작스런 짜증에 더 이상의 말대꾸는 없었다.

"되겠지? 서류 통과했는지 알아봐 주는 것도 안 될까?"

"그런 청탁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놈 표정을 보아하니 핑계다.

유배생활 중에 취업청탁이나 한다고 회장 귀에라도 들어갈까 봐 걱정하는 거다.

좋은 말로는 안 될 거 같다.

조용히 휴대폰을 들고 갤러리 끄트머리에 저장되어 있던 룸살롱 동영상을 찾아서 성환에게 메시지로 보냈다.

띠링

"회장님 전화번호 불러봐. 아니다 됐다. 어차피 메일로 보내면 되니깐."

성환은 지난번에 몰래 촬영했던 동영상인 것을 확인하고는 눈동자가 위아래로 흔들렸다.

"정말 이러실 겁니까? 겨우 이런 걸로?"

겨우 이 정도가 아니다.

마윈에 투자한 손정의가 될 수도 있는 기회다.

정영균과의 인연을 위해서라면 충분히 쓸만한, 아니 반드시 써야만 하는 카드였다.

"제가 알아봐 드리면 지우는 거 맞습니까?"

"당연하지."

"어떻게 믿죠?"

"내가 양아치냐? 그런 걸로 거짓말하게?"

"그럴지도."

면전에서 날 양아치라고 했다.

지금은 그냥 넘어간다.

"정영균이라고 한수대 컴공과 출신. 확인해 봐."

성환은 잠시 후 비서실 자기 담당직원과 통화한 후 활짝 웃으며 전해줬다.

다행히 서류는 통과한 듯.

"과장님. 떨어졌대요. 이제 휴대폰 주시죠."

헐!

떨어진 게 웃기나?

이 자식은 자기만 아는 이상한 놈이란 걸 깜빡했다.

"안 돼."

"알아봐 달래서 알아봐 줬잖아요."

"1차 면접 보게 하는 게 조건이야."

"아니 그런 게 어딨어요!"

"시간없다. 발표나기 전에 해결해라."

성환은 똥 씹은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아무리 황태자라고 해도 채용청탁은 여간 녹록한 게 아닐 테니 이해는 간다.

조회장 귀에라도 들어가면 사달이 날 테니.

다음 날.

성환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나를 불렀다.

"서류 전형이요."

떨어졌나 보다.

"내가 힘 좀 썼으니깐 며칠 뒤에 면접 보라고 통지 갈 거예요. 그러니깐 이제 휴대폰 주시죠."

역시 종잡을 수 없는 놈이다.

성환이가 보는 앞에서 동영상을 삭제했다.

그래도 못 미더운지 한마디 덧붙였다.

"어디 복사해 놓은 거 아니겠죠?"

"내가 양아치냐?"

성환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그럼 아니냐?'는 식으로 흘겨봤다.

"아무튼 완전히 삭제된 걸로 알겠습니다. 아니면 재미없습니다."

소식을 듣고는 바로 정교수에게 전화 걸었다.

"교수님. 천하제일 천태평입니다."

"네. 과장님. 알아는 보셨습니까?"

"이런 말을 하기는 좀 그렇지만 제가 힘 좀 썼습니다. 결과가 안 좋은 거 돌리느라고 시간 좀 걸린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아이고. 양해라뇨 과장님. 정말 감사드립니다."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성환은 내가 수화기를 내려놓자마자 어이없다는 듯이 한마디했다.

"너무하신 거 아니에요? 완전 자기가 한 것처럼 하시네."

"내가 한 거지. 내가 널 이용했으니깐."

성환은 허탈한 웃음과 함께 자기 노트북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대단하다. 할 말은 많지만, 굳이 하진 않을래."

"하많하않?"

"네?"

"사자성어도 몰라? 아니 아니다."

아직 줄여 쓰는 말이 대세인 시절은 아니었다.

* * *

인적성검사까지 결과가 나온 후 인사팀으로부터 메일 한 통을 받았다.

신입사원 1차 면접관으로 참가하라는 거였다.

통상 과차장급 에이스들이 차출되니 당연한 일이었다.

면접 당일이 되고, 인사팀에서 대상자들의 입시자원서와 질문지 및 평가표 등을 미리 전달받았다.

평가표에는 여러 항목별로 A~D까지의 평가점수와 최종 등급을 기재하는 란이 있었다.

이 몇 장짜리 문서로 과연 직무적합도를 물론이고 한 사람의 인성과 가치관까지 파악할 수 있을까?

또 그게 옳은 건지에 대해서는 정말 의문이 든다.

하지만 그렇다고 특별한 대안이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수백 명이 넘는 인원을 뽑아야 했기 때문에 심층적으로 볼 방법도, 여력도 없기 때문이다.

물론 뽑아 놓는다고 해도 일 년 안에 절반 이상은 퇴사할 것이다.

이는 채용 방법상 문제도 문제지만, 이보다는 지원자의 회사에 대한 기대치와 실제 사이에 괴리감이 크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며칠만 출근해보면 답 나온다.

'이따위 회사에 입사하려고 몇 년 동안 그 고생을 했던 건가?'

'저놈들은 뭐가 잘났다고 내가 이게 모자란다 저게 부족하다고 감히 함부로 평가할 수 있을까?' 등등.

이때 못 참으면 나가는 거고, 참으면 선배들처럼 조직에 그저 순응하면서 살다가 나중에 면접관이 되어 자기와 비슷한 젊은 친구들을 뽑는 거다.

예시 질문들이 낯뜨거워 도무지 눈을 뜨고 보기가 힘들었다.

'입사 후 포부가 뭔지, 일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등 기본적인 비전에 대한 질문부터

'다른 지원자보다 스펙이 부족한 거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냐, 옆에 있는 사람보다 어떤 점이 뛰어나 당신이 뽑혀야 할 거 같냐' 등 압박질문까지 업무와 별 상관없는 질문뿐이었다.

첫 번째 면접자들 5명이 들어왔다.

하나같이 잔뜩 긴장해서였는지 아니면 미리 외워온 것과 다른 질문을 해서 당황했는지 답변조차 제대로 못했다.

그나마 조금이나마 답하는 친구들은 질문과 다른 엉뚱한 말만 늘어놓을 뿐이었다.

대답 안 하고 쭈그리고 있으면 바로 탈락이라는 것을 아는지 적절한 답이 아닌 줄 알면서도 그냥 외워온 것을 내뱉은 것이다.

그래도 어차피 탈락이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랄까.

그저 그런 면접이 계속되고 마지막 면접자들이 들어왔다.

5번째 지원자의 서류를 펼쳐 보았다.

정교수의 조카 정영균의 입사지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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