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손안의 재벌-19화 (19/191)

19화 협상

IR파트 직원들은 매뉴얼에 없던 상황이 발생해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했다.

김철수 부장은 괜찮다는 듯 직원들의 등을 툭툭 두드리고는 주총장에 들어섰다.

창사 이래 첫 케이스로서 몇 년 만에 주총 매뉴얼 업데이트가 필요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나와 눈이 마주친 김부장은 며칠 전 헤어졌을 때와 같이 다정한 표정을 건넸다.

"태평아. 오랜만이야. 소주 한잔해야 하는데."

"그러게요. 일주일이나 됐네요. 다시 봬서 반갑습니다."

흑화다.

모든 패와 전략을 짜고 실행했던 과거의 장수가 이제는 적이 되어 나타난 것이다.

전혀 짐작조차 하지 못했었다.

며칠 전엔 그저 근처 지나가다 얼굴 보러 들렀다고만 생각했을 뿐.

지나가는 말로 그냥 온 게 아닐 거라던 성환의 말이 갑자기 떠올랐다.

사람은 역시 선입견 없이 바라볼 때만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법인가 보다.

갑작스런 전 부서장의 출현에 행사 준비하던 IR파트 직원들이 다급하게 하나둘 회의실로 모여들었다.

귀를 기울이니 분위기가 여간 심각한 게 아니었다.

"부장님. 어떡하죠?"

"지난번 왔을 때 너네들 무슨 중요한 얘기 한 거 없어?"

"모르겠어요. 이것저것 물어본다는 느낌은 있었는데 그냥 궁금해서라고 생각했죠."

"일단 그때 얘기했던 사람들 다 찾아서 정보 흘린 거 없는지 빨리 파악해."

"네."

갑자기 발등에 불이 떨어져 우왕좌왕하는데 주총 시작시간이 점점 다가왔다.

조만간 대표이사, 감사 등 주요 임원들이 모두 자리할 것이다.

그 전에 어떻게든 주총장에서 김철수부장을 내보내야만 했다.

한편, 전직 교수 출신 총회꾼을 데리고 들어간 해규가 한참이 지나도 나올 생각을 안 하자 도와주려는 마음에 내가 직접 VIP실로 향했다.

자리에 마주 앉아 한창 옥신각신 중이었다.

"교수님. 이거 받고 가시면 안 돼요? 정말?"

"필요 없다고 몇 번을 말해. 나 실적이랑 사업계획 들으러 온 거라니까."

"실적은 이미 공시했고요. 사업계획은 지금 담당 직원 불러서 설명드린다니까요."

"지금 주주 못 들어가게 막는 거 맞지?"

맞은편 의자에 앉아 법전을 쥔 채 윽박지르고 있는 정교수의 얼굴 어딘가 모르게 매우 낯이 익었다.

어디서 봤었는지 한참 동안을 생각하자 드디어 떠오르는 한 인물.

평창동의 현인이라 불리는 그분이 확실하다.

지금은 아니고 곧 다가올 미래에 그렇게 불리게 된다.

서울 변두리가 마곡지구로 개발되면서 그 지역 유지 출신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토지를 수용당하면서 벼락부자가 된 인물이다.

보상받은 돈으로 다른 부동산을 매입한 게 아니라 당시 박스권을 맴돌던 국내 우량주식에 몰빵 투자하여 몇 년 안에 초특급 거부가 되었다.

해박한 경제지식과 우직한 성품 그리고 정세를 읽을 줄 아는 혜안까지 겸비하고 평상시 기부도 많이 한 덕에 평창동의 현인이라고까지 불리게 되었다.

10년 뒤엔 천하제일 3대 주주가 될 사람이 과거에 몇 주 가지고 거마비나 챙기던 총회꾼과 동일인이었다는 것을 전혀 몰랐었다.

전적이 베일에 싸여 있어 그랬을 수도 있지만 무슨 사연이 있어서인지 개명을 한 탓에 전혀 연관을 지을 수가 없었나 보다.

"안녕하십니까, 교수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재무팀 천태평이라고 합니다."

공손하게 꾸벅 인사하고 명함을 건네주자 정교수 마음이 조금은 풀린 느낌이 들었다.

"아니, 왜 주주인 내가 총회에 오겠다는데 오지 마라 봉투 받고 가라 이러지?"

"네 죄송합니다. 이 친구가 오해했었나 봅니다."

나의 말에 당황한 듯 해규가 끼어들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그냥 좋은 데 가셔서……."

"너 바쁘니깐 그만하고 이제 나가. 내가 잘 말씀드려 볼게"

해규의 팔을 잡아서 문밖으로 내보내고는 말을 이어갔다.

"교수님 죄송합니다. 주주로서 당연히 참석하셔야죠. 몇 년 전 주총 때문에 약간 오해가 있었나 봅니다."

"그게 언제 적 얘기라고. 내가 그까짓 돈 몇 푼 때문에 온 거 같아? 공시나 보도자료 보다 보니깐 회사 전망이 밝아서 좀 더 투자하면 어떨까 하고 왔는데, 이렇게 문전박대해도 되는 거야?"

"죄송합니다. 교수님. 저희는 주주 한 분 한 분이 모두 회사의 주인이므로 최선을 다해서 모시고자 합니다. 궁금한 거 지금 여쭤보셔도 되고 주총장에서 발언하셔도 됩니다."

"이제야 좀 말이 통하는 사람이 있네. 천과장이라고 했나?"

기분이 한층 더 풀렸는지 내 명함을 한 번 쭉 훑어봤다.

"네. 교수님, 아니 주주님. 앞으로도 종종 뵐 일이 있을지 모르죠."

"그래야지."

"그럼 주총장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궁금한 거 있으시면 언제든지 저한테 전화 주시면 됩니다."

"그럼 그래야지. 자네 좀 맘에 드네."

"감사합니다."

이분은 주총꾼으로 온 게 아니라 정말 관심 있어서 온 게 맞았다.

게다가 10년 뒤엔 3대 주주가 될 사람이고 그때 가서 그의 의결권으로 어떤 도움을 받을지 모르니 지금부터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이 기회에 내 이름과 얼굴도 익혔고 좋은 인상도 남겼으니 오히려 다행이다.

정교수를 총회장의 가장 좋은 자리로 안내하고 내 자리로 찾아가는데 반대편 김철수부장이 핸드폰을 쥐고는 총회장 밖으로 급하게 나가는 게 보였다.

일단 따라 가보자.

김부장은 주변을 두리번두리번하더니 아무도 따라오는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고는 복도 끝 계단으로 나갔다.

귀 기울여보니 와이프에게 전화가 걸려온 모양이다.

"여보. 이제 괜찮아. 말해봐."

"괜찮다니까 왜 갑자기 퇴원 얘기를 해? 다음 주까지 기다려 달라고 원무과에 다 얘기해 놨다니깐."

"쓸데없는 말 하지 말고 몸조리나 잘해. 애들 밥은 내가 잘 챙겨주고 있으니깐 걱정하지 말고."

며칠 전 웃는 얼굴에도 얼핏 그늘이 졌다고 느껴진 게 병원비 때문이었나 보다.

통화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온 김부장이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주총자료를 펼쳐 드는데 IR 직원이 다가갔다.

"부장님. 잠시만요. 얘기 좀 나누시죠."

김부장 기다렸다는 듯이 VIP대기실로 말없이 따라나섰다.

대응 매뉴얼을 다 꿰차고 있어서 직원들이 먼저 불러주길 기다렸을 것이다.

주총이 시작되기 전이라야만, 협상이 가능하지 일단 주총이 시작되면 협상은 없다.

아무리 깽판 치고 난리 쳐도 지금 등급이 올라갈 뿐 봉투는 내년부터 받을 수 있다.

김부장은 지금 당장이나 늦어도 다음 주까지는 봉투를 받아야 한다.

그것도 꽤 많이.

아무래도 쉽지 않을 것이다.

최고 등급 총회꾼의 거마비라고 해도 병원비에는 턱없이 모자랄 테니 말이다.

귀 기울여 보니 지난주 화기애애했던 분위기와는 완전 딴판이었다.

답답한 마음에 한숨 소리만 들리는데 한참을 말이 없다가 IR파트 이과장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부장님. 어쩐 일로 오신 거예요?"

"말했잖아. 주주로서 총회 참석한 거라고."

"왜 그러세요. 저번 주에는 소스 얻으려고 오신 거예요? 이러려고 그때 꼬치꼬치 캐물으셨어요? 애들 보기 부끄럽지도 않으세요?"

부끄러울 게 어디 있을까? 아니 부끄러우면 또 어떠한가?

와이프의 목숨이 달려있을 수도 있는데.

그까짓 모멸감 잔뜩 얹은 시선쯤이야 견디지 못할까?

김부장이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이과장이 다시 윽박질렀다.

"뭘 원하십니까? 봉투 드리면 돼요?"

IR 놈들은 선배한테도 예의가 더럽게 없다.

입장 바꿔서 생각하면, 김부장이 먼저 뒤통수 친 거니 나름대로 이해는 간다만 사정을 모르고 저러는 거니 안타깝기만 했다.

"광고. 나 인터넷 언론사 하고 있잖아. 거기 광고 하나 줘. 광고료는 다음 주까지 지불하면 되고."

"광고료는요?"

"800"

김부장은 총회꾼 봉투에 담을 수 없는 큰 금액인지 뻔히 알고 있어서 다른 쪽으로 요구한 것이었다.

"허, 말도 안 되는 거 아시잖아요. 듣보잡 언론사에 광고 낸다고 할 수도 없을뿐더러 한다고 쳐도 금액도 너무 터무니없고요."

"방법 있는 거 알잖아. 총회꾼 봉투 주는 거도 증빙 없이 다 준비해 놓으면서."

"그건……. 아, 어쨌든 팀장님께 말씀드리고 올게요. 잠시 기다리세요."

"많이는 못 기다려 20분 남았어. 시작하면 바로 들어갈 거야. 나 주총장 들어가면 어떻게 될지 알지? 조회장 아들이 지분 가진 회사랑 거래한 거, 다 까 보라고 할 거야."

"아 씨 좀……."

이과장이 문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걷어차고는 씩씩거리면서 대기실을 나왔다.

IR파트장을 찾아가 김부장의 요구 조건을 전하는데 아무래도 내가 나서야 할 때 같았다.

"말씀 중에 죄송한데요. 김철수 부장님 오신 거 같은데 제가 잠깐 먼저 만나 뵙고 말씀 나눠도 될까요?"

"천과장이 왜? 우리 일에 신경 쓰지 말고 빠져."

아직 분위기 파악이 안 되는지 말 그대로 부탁으로 들었나 보다.

세게 나갈 필요가 있었다.

"총회꾼 대응은 우리 경리 파트 담당인 거 모르세요? 그리고 저번 주에 IR파트에서 김부장한테 이것저것 회사 일 다 떠벌린 거 같던데 아닌가요?"

"뭐라고? 이 자식이 어디서."

"5분이면 됩니다."

찔리는 게 있는지, 아니면 문제가 생겨봐야 자기들만 다칠 테니, 이 자식 저 자식 욕만 늘어놓지 별다른 제지를 하지 못했다.

김철수 부장은 대기실 의자에 태연한 척 앉아있긴 했지만, 시간이 점점 지나가면서 초조한 모습이었다. 이러다 주총 시작하는 게 아닐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이과장이 협상안을 들고 올 거라 예상했는지 나를 보자 실망한 표정이 역력했다.

"태평아, 네가 웬일이야?"

"부장님. IR 애들은 결정 못 해요. 자기들 전 부서장이 들쑤시러 왔다고 위에 보고하고 집행할 수 있겠어요?"

"그럼 대표 불러와. 아님 임상무라도."

"그분들 지금 주총 참석해야죠. 이제 곧 시작할 텐데."

"나도 그럼 주총장 들어갈게."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려는 자세를 취했다.

뻥카다.

"지금 나가시면 협상 없습니다."

붙잡으려는 시도도 없이 예상외로 단호한 나의 말에 김부장은 체념한 듯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유가 뭐예요?"

"뭐긴 뭐야? 실적 때문이지 광고로 먹고사는 회사가 운영이 안 되니깐."

"김부장님이 그럴 분이 아닌 거 알아요. 저한테는 사실대로 말씀해 주시면 안 되나요?"

차마 엿들었다고 하기도 뭐하고 먼저 말을 꺼내기도 뭐하다.

한참을 얼굴을 숙이고 있던 김부장이 고개를 들더니 어렵게 말을 꺼냈다.

"급하게 돈이 필요해. 와이프가 병원에 있어."

"많이 아프세요?"

안타까운 표정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얼마나 필요하신데요?"

"1,000"

헉!

잠깐 사이에 200이 늘었다.

하마터면 나도 모르게 욕 튀어나올 뻔했으나 간신히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물었다.

"지금 당장 봉투에 담을 수 없는 금액이란 거 아시잖아요. 그리고 광고 계약은 내부의사결정도 필요하니깐 빨라야 다음 주에나 가능하고요. 다음 주까지 마련하면 되는 거예요?"

"어. 더는 늦으면 안 돼."

"어느 병원인데요?"

"슬기로운 병원."

"아 거기요? 제가 다음 주까지 방법 한번 찾아보겠다고 약속드려도 될까요?"

"믿긴 하지만 확실해야 해서. 너한테 미안하기도 하고."

"미안할 거 없어요. 예전에 저 사직서 쓰던 날 저 붙잡고 해 주신 말씀 기억하세요? 전 부장님께서 말씀해 주신대로 살려고 노력 중이에요. 예전엔 그러지 못했지만, 다시 태어난 지금은 그렇게 살려고 노력 중입니다. 항상 감사했습니다."

"내가 무슨……."

"부장님도 그때 말씀처럼 사실 분인 거 알아요. 저 한번 믿어주세요."

감동해서인지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였는지 두 눈엔 글썽글썽거리는 눈물방울이 맺혀있었다.

김부장과 얘기를 마치고 회사 정문까지 그를 안내했다. 전 부서원들 낯을 볼 면목이 없다면서 인사도 없이 가는 뒷모습이 안쓰러워 지하철 타는 곳까지 바래다주었다.

시계를 보니 어느덧 10시 20분.

주총 시작한 지 20분이나 지났다.

갑자기 첫 번째 안건 때 발언할 대사가 떠올라 부랴부랴 달려 총회장을 들어섰지만, 한발 늦었다.

대표이사가 첫 번째 안건에 대해서 똥 씹은 표정으로 쭉 읽고 있었다.

읽기 시작하자마자 내가 손들고 발언해서 박수로 넘겨야 하는데 손드는 자가 없으니 할 수 없이 계속해서 읽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없으면 다른 직원이 알아서 손들고 내 대사 치면 될 걸 가지고 도무지 빠릿빠릿한 놈들이 없다.

아무튼 의장석 옆자리 임상무 눈에선 레이저라도 나올 듯 부라리는 게 등골이 오싹할 정도였다.

뭐 쫄 필요는 없다.

오히려 내 덕에 문제없이 끝날 수 있다는 생각에 가뿐히 씹어주었다.

민감한 이슈에 대한 질문이나 고성 한 번 없이 내 대사 빼고는 대본대로 착착 진행되어 30분 만에 주총이 종료되었다.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임상무가 흥분해서 날 찾았다.

"야! 너 왜 이렇게 늦게 와! 대표님이 3분 넘게 계속 말씀하셨잖아!"

"다행인 줄 아세요. 김철수부장 들어 갔어 봐요. 대환장 파티될 거 내가 어떻게 막았는데."

"이 자식, 하여간 말은."

"대표님한테 가서 큰일 날 뻔한 거 우리가 막았다고 생색 한번 내세요."

"그럴까?

"지금 바로 가시는 게 좋을걸요?"

"그래야겠지? 흐흐."

좋텐다. 참나.

잠시 뒤 대표이사실에 다녀온 임상무 입이 귀에까지 걸렸다.

"나이스! 태평."

굳이 내 자리까지 찾아와 다 들으란 듯이 소리치며 엄지척을 날렸다.

실컷 주총 준비한 IR파트장이 똥 씹은 표정인 게 재주는 자기들이 넘고 돈을 내가 벌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를 제외한 모든 직원들은 부러움 잔뜩 머금은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아마 미친개가 저 정도로 칭찬하는 모습을 입사 이래 처음 봐서였을 것이다.

주총장에 못 들어가자 혼자 사무실에 남은 성환이 궁금했는지 바로 물어봤다.

"한 건 해결했다면서요. 저번 주 그 팀장 왔다고? 완전 대박."

"그러게 그냥 놀러 온 줄 알았는데."

"거봐. 내가 뭐랬어요. 세상에 그냥이 어딨겠어. 더군다나 퇴직하고 나타난 게 처음이라면서."

하여간 이놈은 평상시는 단답형이더니 듣기 싫은 말은 꼭 길게 한다.

"알았어. 알았다고. 됐냐?"

"그건 그렇고 어떻게 해결한 거예요? 봉투도 안 썼다는데."

맞다.

해결한 게 아니었다.

잠깐 유보한 거지.

"그래서 말인데 조대리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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