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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안의 재벌-18화 (18/191)

18화 주주총회 준비 - 2

주주총회 하루 전 최종 리허설 날이 되었다.

실적 나쁘고 이슈 많은 회사는 가능한 한 적은 인원이 참석하도록 주총 장소를 가장 멀고 교통이 안 좋은 공장에서 개최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천하제일은 별다른 이슈가 없었기에 본사에 회의장을 마련했다.

주요 기업들은 비슷한 날에 주주총회를 개최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도 대부분의 상장기업들의 주주총회가 열리는 3월 셋째 주 금요일로 잡았다.

많은 기업 주식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세력들이 여러 주총에 참석해서 경영권을 행사해 판을 어지럽히게 하지 않겠다고 암묵적으로 담합한 것이었다.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열리면 세력들이 동시에 여러 군데에 참석할 수 없으니 총회꾼들 방해도 그만큼 줄어들 수가 있기 때문이다.

회사 규모에 맞게 회사 내 가장 큰 장소를 마련했다.

너무 많은 사람이 와도 문제지만 너무 적은 사람이 와도 상당히 모양이 빠진다.

그래서 대부분의 좌석에 주주인 척 위장한 회사직원들과 미리 섭외한 우호 주주를 앉힌다.

젊은 회사직원들만 있으면 너무 짜고 치는 티가 나므로 연배 있는 어르신들 위주로 몇 명 섭외해서 앉혀 놓는 것이다.

물론 이런 우호 주주들도 총회꾼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섭섭지는 않게 챙겨 준다.

우리 팀에서도 성환을 제외하고 전원의 동원령이 내려졌다.

성환은 언론에서 얼굴이 알려져 있어 참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난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무대 상단 의장 옆 CFO석에 앉았었지만, 오늘은 맨 뒷줄 구석 철제의자에 쪼그려서 앉아 대본을 읽고 있었다.

드디어 리허설이 시작되자 의장의 인사말부터 본격적인 안건에 대한 발표가 이어졌다.

첫 번째 안건에 대한 소개 도중 내가 대사 칠 차례가 왔다.

"의장!"

손을 들어 발언권을 요청하니 진행요원인 원모가 다가와서 마이크를 넘겨주었다.

"먼저 글로벌 대내외 환경의 어려움 속에서도 한 해 동안 회사를 성장시켜 주신 의장 및 모든 회사 임직원들의 노력에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미리 준비해 주신 자료로 내용 확인을 다 했으며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바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안건은 박수로서 의결할 수 있기를 요청드립니다."

다 짜고 치는 고스톱이었다.

리허설 뿐인데도 너무 낯뜨겁다.

오글거려서 귀까지 뜨겁게 달아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적당히 좀 하지 너무 티 팍팍 낼 필요까지 있을까 싶지만, 대사를 바꿀 생각은 없었다.

귀찮기도 하고 빨리 끝나기만 하면 장땡이니깐.

내 대사가 끝나자 여기저기에 앉은 직원들이 외쳤다.

"옳소!"

"찬성합니다."

그다음 의장이 기다렸다는 듯이 발언했다.

"주주님들 뜻이 그러하시면 박수로써 의결하기로 하며 혹시 이견 있으신 분 계십니까?"

여기저기 앉은 전 직원 일제히

"아닙니다."

"없습니다."

라고 말하며 박수를 쳤다.

"그렇다면 본 안건은 사전투표 결과 ~~~ 가결되었음을 선언합니다."

선언과 동시에 땅 땅 땅.

의사봉을 세 번 두드렸다.

이런 식으로 여러 안건이 가결되고 주총이 마무리되는 것이다.

두 번의 리허설을 마치고 회의장을 빠져나오는데 입구에 성환이 기다리고 있다가 날 보더니 야리꾸리한 표정과 함께 두 손으로 엄지척을 날렸다.

"과장님 연기 잘하시던데요? 게다가 주연이야. 대사 젤 길어. 막 길어. 엄청."

"돈이라도 내고 보던지. 네가 이동진이야 뭐야? 어디서 평가질이야?"

주인이 마름 놀리는 양 거들먹거리는 게 여간 재수 없는 게 아니었다.

나중에 큰 부자가 되면 천하제일 주식 사서 주총 와 가지고 이놈부터 몰아내야겠다.

"노력에 감사드린대. 크크 게다가 옳소, 찬성합니다가 뭡니까? 80년대에요?"

"그럼 네가 대본 쓰던지요."

사무실로 복귀하자 김병국 부장 오래 기다린 듯 얼굴 보자마자 급하게 불러세웠다.

"태평아, 리허설 잘 끝났어?"

할 말은 있는데 멈칫거리는 게 옆에 성환이 듣는 게 좀 신경 쓰였나 보다.

"괜찮으니까 하실 말씀 있으면 빨리하세요. 바쁘니깐."

"해규한테 들으니깐 내일 그 사람 온다고 했다며? 그 전직 교수."

몇 년 전 주총의 기억이 다시 떠올랐는지 몸서리치는 게 느껴졌다.

행여나 깽판이라도 쳐서 분위기 난장판 될까 봐 걱정하는 거다.

이해는 간다.

주총 난리 났다고 뉴스라도 타면 자리를 내놓아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언론에서 난리 치기까지 하면 삼진당할 때까지 봐줄 문제가 아니었다.

원스트라이크면 그대로 아웃이다.

덕아웃으로 돌아갈 필요 없이 그냥 집으로 가야 했다.

"예상 Q&A라도 뽑아놔야 하지 않을까?"

"뭐하러요. 살짝 올려서 봉투 쥐여 주면 그냥 가겠죠. 안 가더라도 우호 주주도 몇 명 섭외해 놨을 텐데 알아서 제지하겠죠. 그분들도 밥값은 해야죠."

"안 가면 어떡하려고? 요즘 이슈가 얼마나 많은데. 경제신문 기자도 몇 명 온다고 했단 말이야."

듣고만 있던 성환이 한마디 꺼냈다.

"왜 봉투를 주지?"

김부장은 어이가 없어서인지, 아님 궁색한 말 말고는 답변하기가 곤란해서인지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나도 막상 적절한 답이 떠오르질 않았다.

굳이 답변하자면 그냥 관행이다라는 정도밖에 할 말이 없었다.

평상시 이에 대해 한 번도 의문을 가지거나 대안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냥 매년 그래왔으니 인수인계받은 대로 했고 다음 사람에게 그대로 인수인계해 주면 될 일이었다.

한참을 생각한 후 드디어 할 말이 떠올랐는지 김부장이 답을 꺼냈다.

"돈이 좀 들더라도 좋게 구슬려서 보내고 빨리 끝내는 게 더 낫습니다. 괜히 적대적으로 대했다가 이것저것 파기만 하고 득 될 게 하나도 없어요. 회사 입장에서는."

"우리가 구린 게 있어요?"

"아뇨. 그럴 리가요. 괜히 여러 말 나오면 구린 게 있다고 여길까 봐서 그렇죠."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의 대립이었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르다라고만 단정할 수는 없었다.

"미국에서는 이런 건 상상도 못 할 일입니다."

이놈 미국 또 타령이다.

그냥 구경만 하려고 했더니 어느새 나도 참전했다.

"미국은 좀 다르지. 사회환경이나 문화가 완전 달라서 총회꾼 같은 걸 용납하질 않아. 그런 방법으로 돈이라도 받았다가 걸리면 고발당해서 파산할 수도 있고."

"한국은요?"

"우린 그런 거에 좀 관대한 편이야. 떼법이 어느 정도 통하는 사회여서 그런 거지만, 앞으로는 점점 나아질 거야."

이후 내가 CFO할 때쯤이면 기업 측의 고발이 늘어나고 사회 수준도 높아지면서 총회꾼의 피해가 줄어들고 이들을 챙겨주는 문화도 옅어지긴 했었다.

사실 성환 말대로, 구린 게 없다면 당당하게 하면 된다.

주총의 장석에 앉은 대표이사의 진행 능력이 좋고, 관련 지식에 해박하면서 임기응변 능력까지 갖췄다면 주총 준비가 훨씬 수월해질 수 있다.

미리 선을 그어놓고 그 이상은 절대 허용하지 않겠다는 단호함을 보여준다면 주총꾼들이 헤집어 놓을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려면 주총을 대여섯 시간은 할 수도 있다는 각오가 전제되어 있어야 하지만.

실무진뿐이 아닌 대표이사가 각오하고 대여섯 시간을 한번 진행한다면 다음 해부터는 이런 주총꾼들이 확실히 줄어들 거다.

먹을거리도 없는데 파리가 꼬이지는 않는 법이니.

총회꾼들에게 어떤 대가도 지불하지 않는다고 방침을 정하고 단호하게 밀고 나가면 피해를 없앨 수 있지만, 그때까지 총회가 시끄러워지는 건 각오를 해야 했다.

그러나 문제는 대표이사가 그런 각오를 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우선 내년에도 대표이사를 계속하여 의장 자리에 앉을 수 있는지에 대한 확신이 없다.

게다가 실무진들을 닦달하여 한해 한해 넘기면 되니 본인이 굳이 힘들일 필요가 없는 것이다.

"지금부터라도 정석대로 하면 되지 않나?"

"맞는 말이지만 이미 리허설도 끝났고 갑자기 바꾸기엔 너무 늦었어."

"오늘 준비하면 되잖아요."

이 자식이 좋게 좋게 수긍하질 않았다.

"조대리가 의장석에 앉으면 그땐 바꿔봐."

"앉을 일이 없겠죠."

성환 말이 맞았다.

오너는 등기 대표이사를 맡지 않으니 의장 자리에 앉아서 당할 일이 없다.

"그래. 내년부터는 정석대로 하죠. 언젠간 바뀌어야 하지 않겠어요?"

어차피 내년에 나 없다.

너희들끼리 지지든 볶든 맘대로 해라.

* * *

드디어 주총일이 밝았다.

오늘은 한 시간 일찍 출근하여 대본을 외우려는데 대사가 너무 길어서인지 도무지 외워지지가 않았다.

대놓고 읽으면 쪽팔릴 거 같아 조그만 쪽지에 옮겨 적었다.

준비를 마치고 주총장에 들어서는데 한 시간이나 남았는데도 이미 대부분 직원들이 자기 위치에 자리하고 있었다.

참석 주주들을 살피고 있던 해규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과장님 빨리 오셨네요."

"쉿! 말하면 어떻게 해?"

"괜찮아요. 어차피 다들 알 건데요 뭘. 이렇게 양복 입고 오는 일반 주주는 없어요."

내가 봐도 회사직원인 티가 너무 났다.

"그 사람 왔어?"

해규는 대답 없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난 주주 역할이라 정해진 자리에 착석해 주위를 둘러보니 섭외한 우호 주주들이 벌써 자리해서 회사에서 제공한 간식을 먹고 있었다.

이분들이 배가 든든해야 나중에 '옳소', '그럽시다', '찬성합니다'라고 크게 소리쳐 줄 수 있다.

주주총회도 실내집회의 한 종류이므로 혹시 모를 소요에 대비해 관할 경찰서에서 경찰관 한 명을 보내 주었다.

총회꾼의 전직을 보면 의외로 경찰 출신들이 꽤 있다.

요즘은 그렇지 않지만, 예전에는 참석 경찰관한테도 거마비를 챙겨주었으며, 그 경찰들도 몇 년 주총 참석하면서 총회꾼들이 제법 두둑한 봉투를 받는 것을 심심치 않게 지켜 봐 왔다.

이런 경찰관 중 일부가 퇴임 후 주총꾼으로 활약하는 경우가 있었던 것이다.

회의장 입구에서는 몇몇 직원이 참석 주주 안내를 맡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주주님. 참석장과 신분증 있으십니까?"

"네, 여기요."

안내직원이 참석장과 신분증을 확인하는 사이 옆에서 해규가 빠르게 주총꾼 리스트와 비교하면서 분류했다.

미리 정해놓은 분류기준에 따라 각자 다른 곳으로 안내하려는 것이다.

첫 번째는 주총꾼 리스트에도 없고 느낌상 그저 주총이 뭔지 구경 한번 하러 온 것 같은 일반 주주이다.

이런 사람들은 바로 총회장으로 안내받는다.

두 번째는 총회꾼 중 사전에 거마비를 받은 사람이 합의를 깨고 출석한 유형이다.

이런 사람들은 조용히 옆에 VIP 대기실이라고 따로 마련된 곳으로 안내받는다.

대기실 안에는 덩치 크고 짧은 머리에 검은 정장을 입은 위압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보안 요원들을 세워놓아 심리적 위축감을 주도록 해 놓았다.

대부분은 그냥 시간도 남고 해서 구경하러 온 것이지만 일부는 받은 금액이 너무 적다고 불평하기도 했다.

구경 왔다고 하는 사람들은 간식이랑 선물 좀 쥐여 주고 그 자리에서 돌려보낸다.

금액이 적다고 불평하는 사람들한테는 '맘대로 해라, 앞으론 챙겨주는 거 없다'고 협박 비슷하게 한다.

그러면 대부분은 못 이기는 척하고 내년엔 더 챙겨달라며 조용히 돌아간다.

세 번째는 총회꾼 리스트에는 없으나 총회꾼인 것 같은 포스를 풍기는 유형이다.

이 사람들도 우선 조용히 VIP실로 안내받는다.

커피 한잔을 내주면서 질문 몇 번 해보면 사이즈 딱 나온다.

그냥 궁금해서 온 거 같으면 신규사업이나 향후 사업계획 등을 설명해주면 나름 대접받았다는 생각에 상당히 만족해하며 주총장에 들어간다.

그러나 자기가 주총꾼임을 열심히 어필하는 사람들도 있다.

데뷔한 지 얼마 안 되었거나 아직 눈에 띌만한 활약을 하지 못해서 리스트에 안 올라온 경우이다.

이 경우에는 회사에 관해 몇 마디 나눠보면 빠르게 파악할 수 있다.

회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주총꾼 위세를 풍기려는 사람은 바로 주총장으로 안내해도 된다.

주총꾼은 아무나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회사의 재무제표에 대한 이해는 기본이고 공개된 장소에서 자기 의견을 상당한 시간 동안 논리적으로 피력할 수 있어야 하며 적당히 두꺼운 얼굴도 갖춰야 한다.

그냥 말도 안 되는 억지로 윽박만 지르는 사리 분별없는 자들은 의사진행에 방해되므로 발언권도 뺐을 수 있고 심하면 퇴장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회사에 대해 많이 알고 있고 언변이 좋은데다 적당한 철면피일 것 같은 사람에게는 최소한의 거마비를 쥐여 주고 돌아가도록 한다.

약간의 실랑이가 있으나 대부분은 봉투와 선물을 들고 돌아간다.

총회 시작 30분 전.

아직까진 별문제가 없었는데 멀리서 해규가 갑자기 허둥지둥하고 있었다.

해규 앞에 뿔테안경을 걸친 반백의 노신사가 한 손에는 보란 듯이 법전을 들고 있었다.

누가 봐도 은퇴한 법대 교수 포스를 풍기는 게 딱 그 사람이었다.

해규가 기다렸다는 듯이 조용히 그분을 VIP룸으로 안내했다.

어떻게든 참석 못 하게 돌려보내는 게 우선이었다.

곧이어 누군가 낯익은 한 명이 회의장 쪽으로 들어섰다.

헉!

자세히 보니 며칠 전에 인사했던 전 IR파트장 김철수부장이었다.

안내석에 앉아 있던 직원들이 알아보고는 일어나서 맞이했다.

"안녕하세요. 팀장님. 지금 저희 주총이라서요. 잠시 기다리시고 주총 끝나면 점심같이하시죠."

고개는 깍듯하게 숙였어도 말투에선 '하필이면 이렇게 바쁠 때 또 놀러오냐'는 식의 핀잔도 섞여 있는 듯했다.

"안녕. 애들아 나 점심 먹으러 온 거 아니야. 주총 온 거야."

하고 웃으며 주주총회 참석장과 신분증을 조용히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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