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주주총회 준비 - 1
다음 날 오후 탕비실에서 봉지 커피 한 잔하고 나서는데 IR파트 자리가 부산했다.
손님이 왔는지 직원들이 모두 나와 뺑 둘러서서 얘기 중이었다.
궁금한 마음에 그쪽으로 지나쳐가며 슬쩍 쳐다보니 전 IR파트장 김철수부장이 왔다.
지나가는 길에 예전 부서 부하직원들과 인사라도 하러 온 모양이다.
마침 김부장과 눈이 마주치자 반갑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 왔다.
"태평아. 잘 지내지? 이제 재무팀 에이스라며?"
"안녕하세요. 부장님 덕분이죠. 그리고 이제가 아니라 옛날부터 에이스였고요."
"하하 여전하네."
환한 얼굴로 손뼉 치며 웃는 모습이 나쁘지 않아 보였다.
마지막 출근날 퇴직 인사 후 돌아서던 뒷모습.
특히 가방을 멘 쪽으로 축 늘어진 어깨가 아직 생생한데, 오늘 웃는 모습을 보니 자신감을 되찾은 거 같아 다행이었다.
자리로 돌아오자 성환이 누군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방금 인사한 사람 누구예요? 외부 사람 같지는 않아 보이는데."
"예전 IR파트장 했던 김부장님."
"그래서 IR 사람들 다 모여 있었구나. 근데 왜 왔대요?"
"몰라. 지나가다 들렀겠지. 옛날 직원들 생각도 났을 거고."
"에이, 그냥 왔을 라고요. 다들 반기는 거 보니 좋은 분 같긴 하네."
"좋은 분이셨지. 어떻게 보면 은인이기도 하고."
* * *
입사 후 처음 주도적으로 한 일은 해외 파견인력 업무 매뉴얼을 만드는 것이었다.
재무팀은 특성상 회사에 대한 충성도를 높이 평가하는 분위기여서 그런지 경력직을 잘 뽑지 않았다.
게다가 내가 나이는 적은데 직급을 높게 받아 탐탁치 않았는지 처음엔 주위에서 경계하며 텃세 부리는 게 심했었다.
통상 파견을 나가면 선임자와 한두 달 정도 같이 있으면서 인수인계받게 된다.
사람마다 전달해주는 정도와 방법이 모두 제각각이어서 제대로 된 인수인계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사고도 빈번히 발생했었다.
이전 회사에서의 업무 경험과 사고 사례 등을 참고하여 두어 달간 고생한 끝에 나름 훌륭한 수준의 매뉴얼을 뽑았다고 확신하였지만, 그 기대는 유관부서 발표 때 무참히 깨지고 말았다.
'넌 컨설팅만 해봐서 실제 회사 실무를 너무 모른다'는 식의 인신공격이 이어졌다.
'정해진 매뉴얼에 따라서 일해야 하는 시스템 노예냐'는 식의 거부반응을 직접적으로 표출하는 사람도 있었다.
몇 개월의 노력으로 어렵게 뽑아낸 결과물이 한낱 쓰레기에 불과했다는 자괴감이 들자 회사를 그만둘 생각에 사무실에 밤늦게까지 혼자 남아 사직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사직 이유에 뭐라고 쓸지 한참을 고민 또 고민했다.
'업무 부적응'이라고 썼다가 지우고는 다시 '사람들이 좆같아서'라고 쓰고 막 지우려는 찰나 뒤에서 누군가 내 어깨를 툭툭 쳤다.
"천대리 사표 쓰는 거야? 좆같아서? 크크"
화들짝 놀라 돌아보니 IR파트장이 한 손엔 핸드폰을 쥐고 사진을 찍는 자세를 취하며 음흉하게 웃고 있었다.
회사 앞에서 한잔하고 퇴근하려고 가방 챙기러 왔다가 혼자 있는 날 발견한 것이다.
그냥 지나가도 될 걸 오지랖 쩐다.
진작에 집에 프린터 하나 장만해 놓을걸.
괜히 돈 아낀다고 안 사 놓고 회사에서 출력하려다가 개쪽만 당했다.
다 걸린 마당에 뭔 핑계가 필요하냐.
"그만두려고요."
"사표니깐 당근 그만두는 거겠지. 지금 그거 물어본 게 아니잖아. 뭐가 좆같은데?"
다른 파트여도 같은 재무팀 소속이니 평소에 인사 몇 번 나누고 식사 한두 번 한 게 전분데 꽤나 친한 척하는 게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었다.
"별거 아닙니다. 그냥요."
"에이 싱겁게. 재무팀에서 경력 뽑은 것도 신기한데 바로 나간다니 재밌어서 그렇지. 아무튼 말해봐. 비밀로 해 줄게."
"아닙니다. 먼저 퇴근하겠습니다."
가방을 챙기고 나가려는데 김부장이 내 팔목을 붙잡았다.
"한잔하자."
팔을 이끌며 김부장 얼굴이 닿을 듯 가까워지자 전작에 이미 술이 과했는지 냄새가 코를 찔렀다.
무슨 안주를 먹었는지도 다 알겠다.
붙잡고 통 놔줄 생각을 안 하는 데다 어차피 시간도 늦었는데 저녁이나 먹고 가자는 생각에 마지못한 척 김부장을 따라나섰다.
술 한잔 두잔이 들어가자 간단히 저녁만 하자는 생각은 안드로메다로 달아나 버리고 어느새 혀 꼬인 발음으로 했던 얘기 하고 또 하는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더 이상 듣기 귀찮은지 그만 일어나자는 김부장을 붙잡고 연신 소맥을 말았다.
한껏 취한 와중에도 김부장이 해주던 말이 생각났다.
'편견이 힘들어서 그만두는 건 도움이 안 되며 줄이 없음을 한탄하지 말고 너만의 길을 가라.'
'지금 몸담고 있는 회사라는 세계가 너의 세계의 전부는 아니다. 직장은 그냥 밥벌이일 뿐이다'
'박혀 있는 놈들의 열등감의 표출이지 네가 못나서 그러는 게 아니다.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사람들 가지고 뭔 고민하냐, 직장이 삶에 있어서 그렇게 중요한 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아등바등하냐' 등 일장 연설을 쏟아부었었다.
다음 날 아침.
출근길에 김부장과 눈이 마주치자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건넸다.
그런데 씹혔다.
게다가 '이 자식 뭐지? 왜 반갑게 인사하지?'라는 표정이었다.
갑자기 싸해진 분위기를 풀 요량에 친한 척해 줬다.
"부장님 어제 잘 들어가셨죠?"
"뭔 말이야? 네가 어제 나 술 마신 거 어떻게 알았어?"
아니, 어제의 그 일장연설은 무엇이었던가.
술이 사람의 기억, 그것도 두 시간을 통째로 날려 버릴 수도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
그래도 그 얘길 듣던 시절에는 사실 이해도 잘 안 갔었고, 그저 위로의 말이려니 해서 잘 새겨듣지 않았지만, 나이가 들고 경험이 쌓이면서 자연스럽게 그 말들이 맞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 * *
김부장 IR 사람들과의 티타임을 마치고 사무실을 나가는 길에 내 자리에 들러 어깨를 툭 치더니 컴퓨터 화면을 쳐다봤다.
"천과장. 사표 쓰더니 아직도 다니네?"
그랬다.
예전에 쪽팔릴까 봐 일부러 기억 안 나는 척 배려해 준 거였다.
"부장님 덕분이죠. 벌써 가시게요? 소맥 한잔해야 할 텐데"
"괜찮아, 조만간 또 보겠지."
"네, 담에 소주 한잔 대접할게요."
"아서라 너 취하면 무서워. 우리 아버지도 아니고 했던 말 하고 또 하고. 밑에 애들한테 그런 꼬장 부리지 마라."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아무튼 조심히 들어가세요."
회사 생활하면서 몇 안 되는 진짜 선배 느낌 나는 분이다.
언제 또 만날진 모르겠지만 소주 한잔하게 되면 예전에 고마웠었다고 꼭 말해 드려야겠다.
옆자리 성환 귀가 어찌나 밝은지 그냥 또 넘어가질 않았다.
"과장님 술 꼬장 완전 진상이신가 보네."
"뭔 소리야? 그냥 하는 얘기지. 알잖아? 나 나이스한 거."
성환 마시던 물을 뿜을 듯이 질색하며 나 들으란 듯이 혼잣말을 했다.
"모르는 거야. 분명 나이스가 뭔 뜻인지도 몰라."
* * *
한가한 오후 시간을 보내면서 낮잠이나 때릴까 하는데 뒷자리 해규 통화 소리에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여보세요? 어르신~ 힘들게 괜히 오지 마시고요. 저희가 차비라도 보내드릴 테니 가까운 데 가셔서 식사나 한번 하세요."
그러고 보니 해규 녀석 출근하자마자 전화통을 붙잡고는 한 번도 놓질 않았다.
여기저기 수십 군데는 넘게 통화하면서 어떨 땐 달래기도 하고 어떨 땐 협박 비슷하게 윽박지르기도 하면서 왔다 갔다 했다.
해규가 통화를 마치고 잠시 쉬는 사이 음료수를 하나 건넸다.
지난달엔가 수진이가 준건데 안 좋아하는 거라 몇 달째 자리만 차지하고 있어서 이 기회에 해규 놈한테 버린 것이다.
버리면서 인심도 쓰는 일타쌍피다.
"이거 마셔. 그런데 무슨 전화를 그렇게 많이 해?"
"다음 주에 주총이잖아요."
맞다.
M&A건 신경 쓴다고 팀 돌아가는 일에 신경을 쓰지 못했다.
일 년에 한 번씩은 무조건 해야 하는 정기주주총회가 곧 열린다.
문제만 안 생기면 삼십 분이면 끝나는데, 문제 안 생기게끔 준비하는 과정이 지루하고 짜증 난다.
"네가 총회꾼 담당이냐?"
"벌써 3년째잖아요. 아주 죽을 맛입니다. 올해까지만 하고 내년엔 바꿔 주세요."
"이제 막 얼굴 튼 사람들도 많아졌을 텐데 한 3년 더 해야지."
"헐! 전 그냥 사표 쓸게요."
해규의 일그러진 표정이 전혀 농담 같지 않은 분위기였다.
주주총회는 주식회사의 최고 의사결정기구다.
최소한 1년에 한 번 정기적으로 모여 주요한 사항을 결의한다.
재무제표를 승인하는 것에서부터 배당금은 얼마를 지급할지, 임원은 누구를 임명하고 자를지 등이 주주총회의 주요한 결의사항이다.
보유 주식 수에 따라 의결권이 결정되기 때문에 소액주주들은 영향력이 거의 없다.
물론 소액주주들이 한꺼번에 모이면 가능하지만 그렇게 연대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의결권은 미미할지라도 소액주주들은 주주총회에 참석하여 발언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이를 악용하는 게 바로 총회꾼이다.
단 1주만을 가지고도 주주총회에 참석하여 깽판 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총회꾼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여러 회사 주주총회마다 참석하여 깽판을 치거나, 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함으로써 회사 경영진을 곤란하게 하고 의사진행을 더디게 하거나 방해한다.
그런 행위를 통해 자신들의 존재감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부각된 존재감은 바로 자신들의 몸값이 된다.
기업에서는 얼마간의 돈을 쥐여 주고라도 그런 사람들이 주주총회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게 사전작업을 한다.
기업 입장에서는 그게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괜히 깽판 쳐서 언론에 이슈라도 되면 그 회사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의심하거나 파 보거나 하기 때문이다.
몇 해 전 어떤 기업에서는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킨 회장의 연임이 안건으로 걸려 있어서 시민단체, 사측을 옹호하는 주주 세력들과 총회꾼들이 모두 모여들어 소리 지르고 몸싸움까지 하는 등 완전 대환장 잔치가 된 적도 있었다.
언론에서도 크게 보도되어 주가도 출렁이고 안 좋은 소문까지 난 경우였다.
그래서 그런지 기업에서는 더욱더 총회꾼들의 주주총회 참석을 막고자 한다.
기업별 IR담당자들 간에 총회꾼들의 명단을 공유하는 경우도 있으며, IR 담당자는 매 주주총회 시즌마다 그들을 예의 주시하고 사전작업을 한다.
주총 의사진행 등 전반사항은 IR파트에서 총괄하고 있으나 총회꾼 대응 및 현금 지급은 항상 경리 파트 담당이었다.
아무래도 증빙 없이 돈을 집행해야 하고 혹시 모를 IR 직원과 총회꾼의 공모를 방지하고자 업무분장을 해 놓은 것이다.
주총 시즌 때는 총회꾼 대응을 담당한 직원이 상대방 스타일에 따라 아쉬운 소리로 달래기도 하고 협박을 섞어 가며 윽박지르기도 한다.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다.
"해규야 힘드냐?"
당연한 걸 물어보냐는 식의 황당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말이라고요. 총회꾼 담당 이거 좀 IR로 넘기면 안 될까요? 주주총회가 우리 일도 아닌데 왜 뒤치다꺼리를 우리가 하죠?"
"조금만 참아라. 그리고 이게 너의 경쟁력이 될 수도 있어."
"무슨 말씀이신지?"
"한 3년 하니깐 대충 이 바닥 생리 다 파악했을 거 아니야. 어느 정도 진상이면 S급이 되고 거마비 얼마 받을 수 있는지."
"그러니깐 그게 무슨"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을 못 해 본 모양이다.
"멍청하긴. 너 나중에 잘리면 그 노하우 살려서 여러 회사 주식 사 가지고 총회꾼으로 활동해. 완전 초 S급 되지 않겠냐? 지금보다 훨씬 많이 벌 텐데."
해규는 어처구니가 없는지 헛웃음만 지어 보였다.
"헐, 그만두라는 말씀이신가요?"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지. 한 3년만 더하라는 얘기지."
갑자기 웃음기를 거두고 창백해진 얼굴로 날 노려봤다.
찐으로 화났다.
"농담이야. 새끼. 올해까지만 하고 내년엔 바꿔줄게, 진짜."
어차피 내년 주총 땐 나 없다.
지금 뭔 말이든 못할까.
잠시 쉬었다가 해규는 다시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다.
"네, 안녕하십니까? 교수님 천하제일입니다. 1년 만이시죠?"
"아니요. 힘들게 오실 필요 없으세요. 저희가 가까운데 놀러 가시라고 교통비랑 작은 선물 보내드릴까 하는데 댁 주소 그대로시죠?"
"괜찮습니다. 안 오셔도 된다니까요. 잠시만요……."
욕설과 함께 갑자기 수화기를 내팽개치는 해규.
상대방이 회유에 안 넘어가고 부득부득 참석하겠다며 끊은 모양이다.
위로의 말이 필요할 때다.
"뭐야? 누가 깽판 치러 온대?"
"아니요. 그런 건 아닌데 완전 진상이에요. 못 들어 보셨어요? 몇 년 전 주총 난장판 만들었다던 그 법대 교수."
"누구지? 가물가물한데"
해규가 답답한 마음에 총회꾼 리스트를 내 눈앞에 펼쳐 주었다.
리스트에는 총회꾼들의 신상정보, 어느 회사 주총에서 어떤 발언을 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깽판을 쳤는지와 함께 등급이 기재되어 있다.
거마비도 수만 원에서 수백만 원까지 천차만별이다.
"이 사람이요."
해규가 가리킨 사람은 전직 K대 법대 상법학 교수였다.
S급 중에서도 Top 클래스로 꼽히는 인물이다.
리스트에 기재된 정교수의 히스토리를 보다 보니 예전에 전설처럼 내려오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처음엔 대학 동기인 대표이사와의 연으로 사외이사를 맡다가 퇴임 후에는 주주총회에서 우호 주주로 섭외된 분이었다.
몇 년이 지나 특별한 이슈가 없어서 주주총회에 따로 모시지 않았는데, 그 뒤로 자신의 가치를 깨닫게 되고 흑화한 것이었다.
물론 동기는 대표이사를 그만둔 이후여서 회사와 별다른 연도 없었다.
사외이사 시절 알음알음 알게 된 민감한 사항을 무기로 주주총회를 조인철 회장 성토의 장으로 바꾸어 놓게 되면서 데뷔와 동시에 바로 최상위 등급으로 올라갔다.
그 뒤로 매번 섭섭지 않게 챙겨줘서 한 번도 안 왔었는데 이번 주총엔 그 사람이 온다고 했다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