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손안의 재벌-16화 (16/191)

16화 재벌김밥

지난달 정 동사장과의 통화.

"동사장님 말씀 감사합니다. 그렇다면 제가 부탁 하나 해도 될지요?

"우리가 어떤 사이입니까? 무슨 부탁이라도 좋으니 말씀만 해 주십시오."

"하대리 아시죠? 같이 출장 다녔던, 북경에도 같이 다녀오고요."

"네, 알다마다요. 인상도 좋고 업무능력도 출중한 거 같던데요."

"네, 그래서 말인데요."

……

"좋습니다. 저희도 마침 그 포지션에 누군가가 필요했습니다."

* * *

합작법인 CFO로 가는 송지환과장은 자기 밑에 실무진을 한 명 보내 달라고 인사팀에 지속적으로 요청하고 있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주재원 TO를 늘릴 수 없다는 말뿐이었다.

하대리는 지난달 부로 퇴직하게 되어 새로운 직장을 구해야 했다.

주주사간에 커뮤니케이션을 원활하게 해야 할 포지션이 필요하긴 했으나 이 자리는 단순한 통역보다는 업무의 전문성을 더 필요로 했다.

마침 정 동사장은 딸 일로 나에게 빚을 진 게 있었고 빚지고 사는 성격도 아니었다.

한마디로 모든 게 딱딱 맞아떨어졌다.

하대리는 천하제일을 퇴사하여 새로운 직장을 구했고 송지환 과장은 TO를 늘리지 않고도 자기 밑으로 중국어를 할 줄 아는 재무전문 인력을 얻었다.

하대리는 CEO인 정 동사장이 현지 채용한 것이니 거기에 대해 천하제일 측에서 왈가왈부할 사항도 아니었다.

* * *

계약이 끝나고 열린 티타임 시간.

성환이 내 팔을 붙잡고 하대리가 있는 테이블로 데려갔다.

"과장님. 이 그림 이거 과장님 작품이죠?"

"뭔 소리야?"

"하대리님이 대신 말씀 좀 해보시지. 어떻게 된 거예요?"

하대리는 대답 없이 웃음만 지을 뿐이었다.

"뭐긴 뭐야? 보이는 그대로지. 하대리 잘려서 새 직장 구한 게 다야."

"못 도와줘서 미안했었는데 이렇게 하대리님 다시 보게 되니깐 다행이네요."

"네, 저도 다행입니다. 조성환님."

한 달 만에 다시 만난 세 명은 장소를 옮겨 밤 깊도록 회식 자리를 이어갔다.

* * *

중국 출장을 마치고 돌아와 오랜만에 출근하는 날이었다.

사무실의 푹 가라앉은 듯한 무거운 분위기는 여전했다.

빨리 탈출하고 싶은 마음뿐인데 오늘따라 시간은 더디게만 갔다.

11시 30분.

"나 먼저 간다. 부장님은 니네들이 알아서 챙기든 말든……."

오늘도 어김없이 일등으로 구내식당 내려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좀 아까 자리를 비운 성환이 두 손에 큰 접시를 안고 들어왔다.

점심 약속이 있어서 먼저 나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하여간 직접 들고 온 척은.

회전문 앞까지 수행비서가 가져왔을 게 뻔한데 주차장에서부터 들고 온 척 무거워 죽겠다면서 힘겹게 연기하고 있었다.

성환이 자리로 와 힘겹게 뭔가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집에서 보내 주셨는데요. 같이 먹으라고 많이 싸주신 거 같은데 같이 하시겠습니까? 원모님도 같이 하죠!"

패밀리사이즈 피자 한 판보다도 더 큰 접시.

알록달록 꽃무니가 새겨진 평평한 도자기 그릇에 김밥이 꽃잎인양 가지런히 겹겹이 놓여 있었다.

김밥 속은 무지개색 깔 맞춤한 듯 빨주노초파남보 색깔이 다 들어 있었다.

그렇다.

이것은 바로 '재벌김밥'이다.

이제껏 어려서부터 집에서 싼 김밥이라 함은 자고로 소풍 날에만 먹는 거였다.

작은 종이 박스나 은박지에 싸여져 있는 김밥들.

막상 먹으려고 하면 모양도 뭉개지고 옆구리는 죄다 터진 김밥들.

그나마 플라스틱 통에 들어 있는 경우에는 빈 공간 사이사이에 단무지가 무식하게 꼽혀 있던 그런 도시락.

이런 것들이 내가 생각한 집에 싼 김밥에 대한 이미지였다.

그런데 이런 품위 있는 김밥이 있을 줄이야.

격식 있는 모양, 알록달록한 색감과 담아놓은 맵시를 보니 역시 재벌들은 김밥도 다르게 먹는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게다가 어쩌면 김밥을 담고 있는 저 평평한 접시는 조선 시대 사대부 집안에서 쓰던 백자일 수도 있다.

김밥 같은 걸 진품명품에나 나올만한 그릇에 담아서 배달하다니.

분명 집에서는 김치찌개를 고려청자에다 담아서 먹을 수도 있을 거다.

그래도 자존심이 있지 먼저 식당가서 밥 먹겠다고 일어났는데 다시 앉는 건 모양 빠져서 도저히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괜찮아. 난 아침에도 김밥 먹어서."

"네, 그럼 맛있게 드세요."

이놈은 두 번은 안 권한다. 정 없는 새끼.

"원모야, 해규야 가자."

두 녀석은 화려한 김밥의 자태에 입맛을 다시다 뜬금없이 한 방 먹은 듯 화들짝했다.

"네?"

"뭐해? 점심 먹으러 가자고."

"아, 저희는……."

"확! 그냥 가자니까?"

나도 안 먹는데 너네들만 먹게 냅두겠냐?

시퍼렇게 눈을 뜨고 쏘아보니 도리가 없었는지.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따라나섰다.

11시 35분.

구내식당 오늘도 어김없이 일등이다.

메뉴는 순댓국.

그러나 오늘따라 최악이다.

맑디맑은 탕 안에 순대 두 개, 머릿고기인지 내장인지 하여간 고기 같지 않은 고기 세 조각만이 보였다.

아무리 숟가락으로 휘저어봐도 그게 전부였다.

그마저도 '난 돼지다'라고 선언하는 듯 누린내 진동했다.

미안해서 차마 맛있게 먹으란 말은 못 하겠다.

"많이 먹어 애들아."

"네 과장님도요."

똥 씹은 표정들이다.

순대 손질이 잘 안 되어서 진짜 똥을 씹은 것일 수도 있다.

사실 아침 사당역에서 콩나물 시루같은 지하철 3대를 타보지도 못 하고 보냈었다.

결국 늦게 도착해서 아침도 못 챙겨 먹었다.

그렇게 배는 고팠는데도 이 순댓국은 도저히 먹을 게 못 되었다.

방금 본 고급진 김밥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냥 김밥 먹는다고 할걸, 괜히 뭣도 아닌 자존심 찾느라 입맛만 버렸다.

해규가 국물 몇 숟갈 떠먹다 도저히 안 되겠는지 조용히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정말 맛없네요. 과장님."

"그래. 그냥 가자. 이따 3시쯤 떡볶이나 먹으러 갈까?"

"네, 그러시죠."

시무룩하게 답했다.

"알았어. 순대랑 오뎅도 시켜줄게."

대답이 없다.

그래도 안 풀리나 보다. 시끼들.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마치고 털레털레 들어오는데 12시라 그런지 모두 점심 먹으러 나간 듯 사무실이 텅 비어 있었다.

자리에 앉을 때 뭔가를 발견한 원모.

"어? 김밥 있습니다."

내 자리와 성환 자리 사이 작은 테이블에 김밥 접시를 올려놓고 나간 듯했다.

접시 한쪽 구석에만 빠진 자리가 있는 걸로 보아 반의반도 안 먹고 남긴 것이었다.

"조성환님이 저희 거 남겨 놓으신 거 같은데요. 과장님."

"이따 떡볶이 드시지 말고 이거 그냥 드시죠."

두 놈이 주워 먹자고 아우성이었다.

순수한 마음에 맛보라는 것인지, 얄팍한 자존심을 건드리며 멸시하는 건지 판단은 잘 안 되었다.

후자일 확률이 높은데 이놈들은 못 알아 처먹는다.

"누굴 거지새끼로 보나? 먹다 남은 거 주워 먹으라고 일부러 남겨 놓은 거야 뭐야?"

마시던 음료 캔을 소리 나게 턱 내려놓으며 두 놈을 노려봤다.

"야, 우리 밥 먹으러 간 거 뻔히 아는데 이걸 먹으라고 남겨뒀겠냐? 버리려는 거지. 그리고 설령 먹으라고 남겨 뒀다 쳐. 이게 목구멍에 넘어 가냐 너희들은?"

잔뜩 찌푸린 미간을 내비치며 다그쳐도 별 소용없었다.

"넘어 가긴 하죠. 사무실에 아무도 없기도 하고요."

"저희 생각해서 맛 한번 보라고 일부러 놓고 가신 거일 수도 있잖아요."

이놈들은 입사 5년도 안 돼서 머슴력 만렙 찍었다.

"너네 음란서생 안 봤냐? 한석규가 고기 구워 먹다가 일부러 남기잖아. 머슴들 치우면서 먹으라고. 이게 딱 그거야. 모르겠어?"

"한국 영화 안 보는데요."

"전 한석규 모르는데요."

이놈들 답 없다. 포기했다 내가.

"그래, 한두 개만 먹어봐 그럼."

"네."

대답도 하기 전에 벌써 랩을 벗기고 두세 개를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와 대박. 이거 뭐지?"

"존나 맛있다."

두 놈이 연신 감탄사 연발이었다.

재벌김밥이 다르긴 다른가?

궁금하긴 했다.

"왜 그러는데?"

물어보는데 저절로 침이 목구멍 뒤로 넘어 갔다.

다행히 이놈들은 먹느라고 내가 입맛 다시는 걸 보지 못했다.

걸렸으면 개쪽이었을 텐데 다행이다.

"무슨 맛인데?"

"설명이 안 돼요. 그냥 드셔보세요. 과장님도"

"됐어. 니들이나 먹어. 난 배 안 고파."

"그래도 한 개만 드셔 보세요."

두 번의 권유.

한 번만 더 해라. 속으로 읊조렸다.

"재벌 집 김밥이 어떤지 언제 먹어 보겠어요. 딱 한 개만 드셔 보세요."

다행이다.

세 번 됐다.

그래도 이놈들은 누구랑 다르게 예의상 세 번은 권하는구만.

이제 못 이기는 척, 하나 먹어봐도 될 만한 그림이 됐다.

"궁금하긴 하네. 그럼 맛만 살짝 볼까?"

난 조용히 김밥 한 개를 집었다.

참기름을 잔뜩 머금은 듯한 영롱한 빛깔에 깻가루까지 듬성듬성 박혀 있었다.

김밥을 말은 지 못해도 한두 시간은 되었을 텐데도 김이 평소에 내가 먹던 것과 아예 종류가 다른 건지 밥을 둘러싸고 있는데도 전혀 눅눅해지지 않았다.

그냥 방금 구운 김 그대로의 상태였다.

이놈 집 주방엔 일본 마끼 명인이라도 있다는 건가.

입에 넣는 순간부터 느낌이 달랐다.

천국의 김밥, 바른 이선생 같은 곳의 김밥은 마른 입에 닿자마자 눅눅한 김이 입술과 천장에 붙기 바쁘지만, 이 김밥은 아무 방해도 없이 목구멍까지 미끄럼 타듯이 넘어 갔다.

게다가 한 번 채 씹기도 전에 생각지도 않은 청량감이 파도처럼 몰려왔다.

대! 박! 사! 건!

이것은 분명 파인애플이다.

어떻게 김밥에 파인애플을 넣을 생각을 하지?

어쩐지 피자 그릇 같은데 담아오더니 이것은 정녕 하와이안 김밥이었단 말인가?

난 피자를 먹어도 꼭 하와이안 피자에 파인애플 토핑 세 개 더 추가한다.

그야말로 내 취향 저격이다.

과일인데 과일이 아닌 척 전혀 거부감이 없이 시금치, 우엉, 햄 등 다른 속 재료와 한데 엉켜가며 어우러지고 있었다.

시너지란 말은 바로 이런데 붙이는 거다.

이건 3천 원이 아닌 10만 원을 내더라도, 추운 겨울 몇 시간을 줄 서서라도 먹을 만하다.

아니 반드시 먹어야 하는 바로 그런 김밥이다.

"과장님, 다 먹었는데 어떡하죠?"

한두 개만 먹는다는 걸 넋 놓고 먹다 보니 어느새 바닥이었다.

게다가 시간은 12시 30분.

좀 있다가 조성환이 돌아와서 빈 그릇을 보기라도 한다면.

생각하기도 끔찍하다.

"아, 이것들이 쪽팔리게. 이 자식들아, 맛만 보라니깐 다 처먹으면 어떻게 해? 니들이 거지새끼야?"

"아니 그게……. 과장님도 좀 많이……."

"내가 뭘. 지네들이 다 처먹고."

적반하장도 유분수다.

역시 짬밥이 무기다.

"아무튼 빨리 총무팀에 전화해서 가져가라고 해."

"네."

원모가 조직도를 열어 인물 검색하고 전화를 걸었다.

전화번호 찾는 데만 일 분은 흘러간 듯하다.

하여간 느려 터진 놈.

"안 받는데요? 점심시간이라 그런가 봅니다."

"핸드폰 없어?"

다시 검색해서 전화번호를 누르는 데 또 일 분.

"핸드폰도 안 받습니다. 어떡하죠?"

하여간 느려 터진 데다 머리도 잘 돌아가지도 않는 놈이다.

"그냥 네가 총무팀 갖다 주고 와. 가서 조성환님이 그릇 가져가라고 했다고 하고."

"네."

접시를 들고 느릿느릿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시계를 보니 12시 40분.

원모가 접시를 들고 나간 지 얼마 안 되어 점심 마친 직원들이 우루루 사무실로 복귀했다.

그 무리 사이에 보이는 조.성.환!

음흉한 웃음기를 잔뜩 머금고 날 쳐다봤다.

귀 좀 기울여 놓을걸.

왜 이럴 땐 소머즈 능력이 생각 안 나지.

아무튼 좆됐다. 마주친 게 분명하다. 하여간 느려 터진 원모 새끼.

"식사하셨습니까, 과장님."

뻔히 알면서도 떠보는 게 역시 둘러치기 선수다 이놈은.

"좀 아까. 조대리도 식사는 하셨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태연하게 답했다.

확인 사살이 들어왔다.

"어떠셨어요. 김밥 맛있죠?"

"엉?"

무슨 영문인지 모르는 듯한 뚱한 표정을 지어도 이놈이 안 넘어간다.

"아! 방금 들어오는 길에 원모님 만났는데. 빈 접시 들고 가길래 맛있으셨냐고 물어보니까 잘 먹었다고 하더라고요."

쉰 거 같아서 버렸다고 하면 될 걸 바보 같은 놈 유도 심문에 넘어갔다.

"아 애들이 점심을 제대로 못 먹었다고 해서……. 버리긴 아까웠나 보지 뭐."

이놈은 대충 그냥 넘어가면 될 걸 도무지 끝낼 생각을 안 한다.

내 책상 위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단무지 한 덩이가 덩그러니 널브르져 있는 게 보였다.

아차!

이건 아까 먹다가 흘린 거다.

누가 봐도 내가 먹다 흘린 거다.

전혀 노란빛깔을 품지 않은 순백의 단무지.

피클인 척하고 있었던.

입에 넣고 한번 씹기 전엔 아무도 단무지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할 만한 극강의 비주얼.

"뭐야 이거."

아무것도 아닌 듯 손으로 훔쳐서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이놈 자식 비웃는 건지 야리꾸리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일단 자리를 피하자는 생각에 일어났다.

커피 마시러 가는 척 탕비실로 들어가려는데.

시선이 줄곧 나를 따라오는 게 느껴졌다.

'탕탕탕'

괜히 탕비실 커피 통에다 분풀이를 해댔다.

옆에서 찻잔을 홀짝홀짝하던 이수진 대리가 괜히 나 때문에 긴장 탔다.

"과장님, 괜찮으세요? 무슨 일 있으세요?"

"아니. 속이 좀 안 좋아서."

"아까 복도에서 김대리님이랑 조성환님이랑 얘기하시던데. 과장님이……. 뭐더라? 하여간 거의 혼자 다 드셨다고. 혹시 그거 때문에 배 아프신 거 아니에요?"

뭐라고? 원모 개새끼. 오늘부터 야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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