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손안의 재벌-15화 (15/191)

15화 화장실이 급해서

계약이라니 뭔 이슈라도 터졌나 걱정부터 앞섰다.

다행히도 수화기 건너에서 들려오는 말투에서는 불안의 느낌이 전달되지는 않았다.

"무슨 일이시죠? 직접 전화를 다 주시고요."

"합의한 지 일주일이 넘었는데 아직 계약서 쓰자는 말이 없어서요."

"죄송합니다. 저희 내부적으로 이제 막 결제가 끝나서요. 곧 간단하게 실사하고 계약서 사인하면 될 거 같습니다."

"그렇군요. 그럼 기다리겠습니다. 그런데."

"네, 말씀하세요."

"하나 더 여쭤볼 게 있는데요."

본론이었다.

어쩐지 이미 메이드된 걸 가지고 일정 때문에 일일이 전화할 사람이 아니다.

"네, 말씀해보시죠."

"저희 딸이요. 언제 한국 갈 수 있냐고 하도 보채 가지고요. 미리 집도 구해놓고 해야 해서 염치없지만 여쭤봅니다."

딸 가진 아빠의 마음은 똑같다.

새로운 출발을 응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이 앞설 것이다.

"네. 저희가 연습실과 가까운 곳에 숙소와 학교를 알아보고 있습니다. 조만간 결정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네, 감사합니다. 제가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정 동사장은 딸 일로 큰 호의를 받은 고마움을 어떻게 갚을지 전전긍긍하고 있는 것이었다. 신세를 지고는 못 사는 전형적인 중국 남방 사람의 기질을 타고났다.

맞다.

이 생각을 왜 진작 못 했을까.

"동사장님 말씀 감사합니다. 그렇다면 제가 부탁 하나……."

* * *

오랜만에 중국어로 길게 통화해서인지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였다.

옆자리 성환 부럽다는 듯이 나를 쳐다봤다.

"과장님 중국어 잘하네요."

"파견도 갔다 왔는데 쪼금은 해야지."

"뭔 말을 그렇게 오랫동안 심각하게 하세요?"

"심각하긴. 별거 아냐."

무심코 시계를 보니 벌써 점심시간이 훌쩍 지났다.

12시 반이 넘었다.

뒷자리 원모가 점심 먹으러도 안 가고 한참을 기다린 모양이었다.

"너 왜 아직 여깄어. 점심 먹으러 안 갔어?"

"과장님 해장하셔야죠."

이 자식 또 딸랑딸랑이다.

원모의 말에 성환이 끼어들었다.

"해장이라뇨? 어제 두 분이서 술 한잔하셨어요?"

"네. 어제 과장님 보고서 쓰신다고 10시까지 야근하셔서요. 끝나고 같이 한잔하고 들어갔습니다. 과장님 속 괜찮으세요?"

개자식. 입 겁나 싸네.

거짓말한 거 바로 걸렸다.

성환이놈 입이 벌어지는 게 하나 걸렸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어? 과장님 좀 아깐 어제 시간 남아서 이삽십 분 정도 보고서 쓰고 약속있어서 갔다고 하지 않았나?"

말은 이렇게 하지만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게 그럴 줄 알았다는 투다.

자신 없이 말꼬리를 흐려졌다.

"그렇게 됐어."

내가 말해놓고도 참 구차하다.

그렇게 됐다니. 그것도 핑계라고 참나.

우선 자리를 피하자라는 생각에 벌떡 일어났다.

"나 밥 먹으러 간다."

"같이 가야죠 과장님. 해장하려고 여태 기다렸는데."

아무튼 이 자식 입도 싼 놈이 엄청 끈덕지기까지 한다.

그냥 성과평가 D 주고 날려 버려야겠다.

할 수 없이 같이 가자고 끄덕이자 옆자리 성환도 같이 일어났다.

"저도 같이 가시죠. 해장하러."

이 자식까지 같이 따라나선 이유는 분명 내 입으로 어제 3시간 넘게 야근했다는 걸 싵토하게 만들려는 의도일 것이다.

"부대찌개 먹으러 갈 건데? 미국 스타일하고는 안 맞을 텐데"

"부대찌개가 미군 부대에서 나온 건데 미국 스타일이 아니고 뭐죠?"

졌다.

그냥 달고 가자.

오랜만에 외부식당에서의 점심이었다.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한 턴이 돌아 다행히 빈자리가 있었다.

회사 바로 옆 건물 식당이라 딱 봐도 손님 90% 이상이 우리 회사 사람들이었다.

90% 이상이 조성환을 알아본다는 얘기다.

얼굴만 알지 인사도 한 번 해 본 적 없는 직원들이 자기도 모르게 일어나서 인사하려다 앞 사람이 말리자 쭈뼛쭈뼛 앉는 모습도 보였다.

다들 자기들 테이블에서 말을 나누는 척하면서 온통 우리 테이블에만 집중하고 있는 게 느껴졌다.

4인용 테이블 안쪽엔 내가 바깥쪽엔 성환과 원모가 앉았으며 내 앞 테이블 끄트머리에 수저통과 물통이 놓여 있었다.

반대편 오른쪽에 앉은 원모는 손을 뻗어봐야 닿지 못할 거리다.

그런데 성환은 도통 물 따르고 수저 놓을 생각을 안 했다.

못 하는 게 맞을 거다.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을 테니.

아니면 미리 세팅되어 있거나 종업원이 따로 놓아 주는 곳만 다녔을 수도 있고.

아무튼 눈치 없는 원모 자식도 나서지 않고 날 쳐다만 보고 있었다.

이놈 일부러 그쪽에 앉은 게 틀림없다.

그렇다고 내가 수저를 놓아 줄 순 없지.

더워서 못 참겠다는 듯이 두 손으로 부채질하며 조용히 말을 꺼냈다.

"목마르다."

못 알아들었는지 미동도 없었다.

짜증 나는 목소리로 한 번 더 말했다.

"목마르다고!"

성환은 역시 못 알아들었으나 원모가 곧 이어질 나의 갈굼이 걱정되었는지 그제야 일어나 물통을 들었다.

이제야 뭔 말인지 깨달았는지 성환이 수저통을 열고 숟가락과 젓가락을 놓아 주었다.

겉으론 딴 일 하는 척하면서 다들 본 모양인지 손님들 하나같이 놀라는 표정이었다.

부대찌개가 끓기를 기다리는데 식당 반대편 끝에 앉은 인사팀 성과장 일행들의 씹는 소리가 들려온다.

"저기 재무팀 천과장 맞지? 조성환님 데리고 다니면서 엄청 위세 떤다면서?"

"가관도 아냐. 여러 사람 있는 데선 '조대리'라고 막 부르고, 둘이 있을 땐 아마 엄청 싸바싸바하겠지만."

"오늘도 지가 상석에 앉아서 팔짱만 끼고 있잖아."

"냅 둬. 할 수 있을 때 실컷 하라고 해. 언제까지 그러나 보자."

"그러게요. 줄도 없을 텐데. 그냥 저러다 말겠죠."

자기들끼리 멋대로 재단하고 판단하고 위안 삼고 난리다.

말은 저래 씨불여도 실은 부러워서 저러는 거 다 안다.

예전엔 경력직이어서인지 공채 출신들로부터 텃세 부린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었다.

자격지심이었는지 중요한 순간에 어떤 특정 무리에 들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어딘가 모르게 불편한 감정이 느껴졌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임원까지 승승장구하면서 그런 시선을 은근히 즐길 수 있는 정도까지 되었다.

'경력직 사원이라 연봉은 좀 높여서 왔겠네.'

'그래도 성골이나 진골도 아니니깐 결국 우리들 뒤치다꺼리만 할 거야.'

라면서 경력직 사원을 깎아내리는 것은 사실상 자기들의 열등감이었다는걸 나중에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 아니면 받아줄 데가 없으면서도 자기들은 순혈이라 여기 남아야 한다고 스스로 정신 승리만 하고 있는 것이다.

* * *

며칠이 지났다.

J사 인수 TF팀 내에서 실사 결과에 대한 보고가 있어서 성환과 함께 참석했다.

지분 인수시에는 인수 이후 발생 가능한 리스크를 파악하여 향후 문제가 터졌을 때 양도자가 그 책임을 지도록 계약서를 작성한다.

이번 인수건에 대해서도 계약체결 전 리스크의 파악을 위해 인사, 법무, 재무 등 전 방면에서 실사가 이루어졌다.

재무제표가 맞는지, 세무신고는 제대로 해서 탈세는 없었는지를 확인하는 재무실사는 매우 전문적인 일이므로 회계법인에 맡겼으나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회계법인 보고서에는 그동안 J사가 이익을 축소 신고하여 법인세를 탈세하였으며, 그 금액이 가산세를 포함해서 100억을 초과한다고 기재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TF팀에서 난리가 났다.

사업팀 박승재차장이 갑작스럽게 TF팀을 소집하고는 이슈를 공유했다.

"세금 축소 신고는 로컬법인의 관행이고 한 번도 문제된 적 없었습니다. 또 기존 주주가 엑싯 하는 게 아니라 합작 운영할 것이므로 계약서에 잘 녹여내면 크게 문제 될 게 아닙니다."

관행이다라는 논리로 슬쩍 넘어가려는 게 너무 티 났다.

"법률적으로도 문제될 게 없나요?"

어느 참석자의 물음에 모두가 법무팀 이상현을 쳐다봤다.

"탈세 책임은 법인에게 귀속되나 주주 간 합의를 통해 인수 이전의 문제로 법인에게 끼치는 손해는 정 동사장이 책임지도록 하면 될 것입니다."

변호사가 괜찮다고 하니 참석자들 대부분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의사결정도 끝난 상황에서 향후 발생할지 확실치도 않은 세금 이슈 때문에 다 된 밥에 재 뿌릴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세금 문제는 재무팀 이슈이므로 나중에 문제 생겨도 똥은 재무팀이 치우고 자기들은 책임질 필요 없다고 생각해서 그냥 넘어가려는 거다.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이 없자 참석자들은 나와 성환을 번갈아 쳐다보기만 했다.

말은 직접적으로 안 해도 '가만있어라. 그냥 넘어가자'라고 강요하는 듯한 표정을 숨길 순 없었다.

미리 공유해서 생각할 시간도 주지 않고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분위기를 몰아가면서 슬쩍 넘어가려는 전형적인 개수작이다.

지난 생에서는 난 그냥 넘어갔었다.

중국 로컬기업이 이중장부를 쓰면서 이익을 축소 신고하고 법인세를 줄이는 건 관행이고 어떤 기업을 인수해도 마찬가지인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도 뇌물 준 게 걸려서 지분 몽땅 뺏기고 쫒겨날 때까지 세금 문제가 불거지지도 않았었다.

세무조사 할 때마다 지역 세무국과 꽌시로 풀어서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었다.

어차피 일이 년만 있으면 여길 뜰 건데, 그 사이 문제될 것도 아니고 괜히 들쑤시기도 귀찮고 그냥 넘어가자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나중에 세계적인 기업을 운영할 경영의 신이 될 내 명성에 혹여 오점이라도 될까 하는 걱정이 드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십 년 뒤의 나를 속으로 상상해봤다.

포브스지 표지에 경영의 신이라는 타이틀로 인터뷰한 기사가 포털뉴스에 깔린다.

그러나 기사 밑에 댓글 하나.

'경영의 신은 개뿔. 회사 다닐 때 온갖 사고는 지가 다 쳐 놓고는'이라고 써 있었다.

댓글 밑에는 '맞아요. 저도 같이 다녀서 알아요'라고 답글이 달렸다.

게다가 좋아요가 싫어요보다 훨씬 많다.

이건 내가 생각하던 미래의 그림이 아니다.

어찌 되었던 주목받는 삶을 살게 될 텐데 사소한 거 하나라도 조심해야 한다.

당장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힘이 드는 것도 아니니.

"이상현 과장님. 계약서에 기존 주주가 책임져야 한다고 어떻게 넣을 수 있죠?"

당황한 이상현.

예상치 못한 물음에 웃음기를 거두고 한번 째려보더니 뭘 이런 걸 물어보냐는 표정으로 답했다.

"부속 합의서에 인수전 문제로 회사에 손해를 끼칠 경우 그 책임을 정 동사장이 진다고 쓰면 되죠."

"돈 없다거나 못 낸다고 하면요?"

"그래서 정 동사장 지분 50%를 담보로 잡아야겠죠."

걸려들었다.

"과반지분 승인이 안 나서 5:5 합작하는 걸로 했는데 지분을 어떻게 넘겨받죠?"

장군이다.

여기까진 미처 생각 못 했는지 귀까지 빨개지고 안경을 만지는 척하는데 눈빛은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듯했다.

잠깐 동안 고민하더니 묘안이 떠올랐는지 금세 환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우리가 지명하는 제 3자에게 지분을 넘기도록 하되 그 법인을 우리가 차명으로 설립해놓으면 됩니다."

멍군이다.

역시 보통이 아니다.

편법이지만 그 짧은 순간에 방법을 찾았다.

이대로는 결론이 안 날 거 같아 불안한지 박승재 차장이 성환을 불렀다.

"조성환님 의견은 어떠신지요?"

현지에서 합작에 관한 의사결정을 했으니 이슈에 대해서도 의견을 달라는 말이다.

성환은 얼굴색이 붉으락푸르락하면서 몹시 못마땅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

"본 인수건 주목적은 시너지이므로 딜을 늦추지 않는 게 중요한 거 같습니다. 그럼 이쯤에서 회의 마무리 하시죠."

이놈이 이상현의 손을 들어줬다.

맞은편 이상현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내가 이겼다'라는 표정이었다.

일리가 있는 판단이긴 했다.

성환은 재무팀만의 시각이 아닌 회사 전체의 입장을 고려한 것이다.

회의가 끝나고 참석자들 엘리베이터에 오르는데 이상현이 괜시리 미안한 듯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이면서 한마디 건넸다.

"태평아. 합의서 잘 쓰면 돼. 안전장치는 어떻게든 마련해 놓을 테니깐 걱정 마."

지가 이긴 것 같아 신난 모양이다.

그래, 지금 승리감을 실컷 즐겨라.

언젠간 복수의 칼이 들어갈 때 고통은 곱절로 커질 것이다.

"그래. 상현아. 네가 전문간데 알아서 잘하겠지. 걱정 안 해, 난"

사무실로 들어오는 길에 성환도 아까 편 안 들어준 게 미안했는지 한마디 했다.

"죄송해요. 과장님 의견에 반대한 건 아니었습니다."

"그럼, 뭐? 찬성한 거야 그게?"

"아뇨. 제 말은 그게 아니라……."

"알아. 가끔은 그렇게 큰 그림으로 볼 필요도 있어. 이해해."

"아니 그게 아니라."

"아이씨 그럼 뭔데?"

"배가 아파서 죽겠는데 회의가 하도 안 끝나길래요. 아무튼 먼저 들어가십시오. 전 화장실 먼저 가겠습니다."

배를 부여잡고 화장실 안으로 사라졌다.

이런 개새.

그럼 그렇지. 큰 그림은 개뿔.

잠시 오해할 뻔했었다.

* * *

계약조건에 대한 협의가 모두 완료되었다.

드디어 지분양수도계약서에 사인하는 세리머니 날이 다가왔다.

한 달 만에 다시 방문한 청도 J사.

정문 위에는 지난번 방문 때 걸어둔 걸 아직 걷지 않았는지 빨간색 플래카드가 그대로 걸려 있었다.

우리 일행이 탄 차량이 본사 문에 진입하자 역시나 정 동사장을 필두로 주요 간부들이 도열하여 박수로 맞이해주었다.

식품 부문장 등 몇몇 임원과 성환, 내가 차량에서 내려 J사 임직원 등과 차례차례 악수를 나누었다.

그리고 상대측 맨 끝자리에서 손을 내밀던 사람은 바로 하대리였다.

"아 깜짝이야! 아니 하대리님 여긴 어떻게."

성환이 하대리를 알아봤다.

지난주에 하대리가 회사 그만두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이 자리에 나타나자 크게 놀란 듯 좀처럼 입을 다물지를 못했다.

정 동사장이 옆으로 와서 반갑게 소개해줬다.

"이번에 새로 입사한 재무경리 하수만님입니다."

성환은 반가운 마음 반, 놀라운 마음 반에 악수하면서도 연신 나와 하대리를 번갈아 가며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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