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손안의 재벌-14화 (14/191)

14화 물음표를 찾아라

J사와의 합작에 대한 그룹 내 의사결정이 완료되고 조회장에게까지 보고가 들어갔다.

인수가액이 한화 300억 원 정도로 매우 작아 회장까지 자세히 보고될 사항은 아니었고, 그룹 기획조정실에서 작성하는 주간업무보고서에 딸랑 두 줄 기재된 게 전부였다.

한 달 이상의 TF팀의 고민과 노력, 현지 출장까지 가면서 협상을 이끌었던 고생 등은 보고서상 겨우 이 두 줄에 불과했다.

그룹 내 주간 이슈 10여 건 중의 하나일 뿐이었다.

한편 어떠한 전결규정에도 회장이 직접 결제해야 하는 항목은 없다.

대내외적으로 그룹의 회장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을 뿐 직접 사인은 각 법인마다 등기된 대표이사가 하게 되어 있다.

사실상 중요한 의사결정을 모두 회장이 보고받고 결정하고 있으나 직접 사인만 하지 않을 뿐이다.

전문경영인을 두어 소유와 경영을 분리한 것처럼 보이게 하여 향후 발생할 수도 있는 각종 사건 등에서 책임을 지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한마디로 눈 가리고 아웅이다.

따라서 불법적인 일을 자행하고 그것이 적발되었을 때 회장은 피해 나갈 수 있다.

전자결제 등 어디에서도 사인한 흔적은 없고 보고만 받아서 구두로 지시했기 때문이다.

사인은 월급쟁이 대표이사가 한다.

넓은 사무실과 비서, 좋은 차량과 기사, 많은 급여와 충분한 한도의 법인카드를 쥐여 주고 대단한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띄어주며 사인을 하게 만든다.

성취감에 도취되어 최종결재란에 멋있게 사인하고 나서 나중에 사건이 터지면 책임은 뒤집어쓴다.

사인할 때는 모른다.

그게 나중에 독이 되어 돌아 온다는 것을.

자신의 호화로운 생활은 사실 오너들의 보험료였다라는 것을.

나도 이전 생에서는 몰랐었다.

깨달았을 때는 이미 동작대교에서 뛰어내리고 난 뒤였다.

J사 인수건은 결제가 완료되고 이제 계약체결 등 후속 절차만 남은 상태여서 비교적 홀가분한 시기였다.

별다른 이슈가 없으니 당분간 적당히 놀면서 지내면 된다.

이른 점심을 마치고 화장실 다녀온 사이, 아직 점심시간 끝나려면 30분이나 남았는데도 벌써 부재중 전화가 5통이 와 있다.

임상무 전화였다.

자리로 찾아가자 얼굴엔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태평아. 뭐 들은 거 없어? 갑자기 기획조정실에서 들쑤시는 게 문제라도 생긴 거 같은데 네가 TF팀 가보고 알아봐 봐."

"네."

어떻게 된 게 회사라는 게 적당히 놀만 하면 꼭 이렇게 이슈가 터진다.

오랜만에 모인 TF팀 회의실.

사업팀 박승재차장이 심각한 표정으로 보고서인지 회의자료인지 뭔가를 골똘히 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죠? 갑자기 급하게 부르고 뭔 사고라도 터졌나요?"

불안한 마음에 여기저기에서 물어보는데 통 대답을 하지 않았다.

TF팀 인원이 다 모이자 프로젝트 빔으로 노트북을 연결하니 화면에 한 장짜리 문서가 떴다.

회장 주간업무 보고 자료의 복사본이었다.

모두 무슨 일인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는데, 박차장이 심각하게 말을 꺼냈다.

"다들 보이시죠? 내일까지 해결해야 합니다."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지 인사팀 성과장이 물었다.

"뭘 말씀하시는 건지요?"

박승재차장이 대답 대신 빨간색 포인터로 가리킨 화면에는 물음표 "?"가 적혀 있었다.

답답한 마음에 성과장이 다시 물었다.

"그러니까 그게 뭔데요?"

"이 물음표에 대해서 알아보고 내일 회장님께 대답해드려야 합니다."

한층 더 답답해진 마음에 목소리 톤이 올라갔다.

"그러니깐 물음표가 뭐냐니깐요?"

"그걸 모르니깐 우리가 모인 거 아니야!"

방뀌 낀 놈이 성낸다고 황당하다.

보고서에는 이렇게 딸랑 두 줄이 적혀 있었다.

'중국청도 소재 J사 정 동사장 지분 50% 인수.

유통망 등 기존 식품 사업과의 시너지 향상 목표'

그리고 그 옆에 비스듬히 '?' 표시

도무지 어느 글자 옆에 표시했는지 명확하지가 않았다.

기획조정실장이 주간보고할 때 조회장이 궁금하다고 '?' 표시하고 알아보라고 지시했다는데, 그때 실장이나 비서팀에서는 따로 적어놓질 않아서 놓쳤다는 거였다.

당연히 보고 시간이 지나 회장한테 다시 물어볼 수는 없었다.

기조실장은 바로 식품 부문장을 호출해 다짜고짜 보고 자료를 들이밀며 뭘 궁금해 하신 건지 알아내서 대응자료를 준비하라고 한 것이었다.

지가 제대로 안 들어 놓고 문제와 답을 찾아내라는 것이다.

뭘 물어봤는지 모르니 두 줄에 대한 모든 걸 준비해서 실장 손에 쥐여 줘야 한다.

그래서 식품 부문장이 급하게 TF팀을 소집한 것이었다.

중국 청도에 대한 개요는 인사팀이, J사와 정동사장에 대한 정보는 사업팀에서, 지분 50%에 따른 효과는 재무팀이 그리고 유통망과 시너지에 대해서는 식품사업부에서 대응자료를 만들라는 업무할당이 떨어졌다.

설마 중국 청도에 관해 물어 봤을까마는 어찌 되었던 조금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모든 걸 준비해야 했다.

갑자기 짱돌 맞았다.

그래도 이것 때문에 야근할 수는 없는 법, 조용히 부드러운 말투로 성환을 찾았다.

야근시키기에는 조금 미안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할 수는 없다.

조금은 부드럽게 불렀다.

"조대리님~"

"네. 아까 그거 말이죠? 내가 준비 하겠습니다."

몇 달 되니 눈치가 제법 늘었다.

일 시켜놓고 먼저 가기는 살짝 미안한 마음에 인터넷을 켜고 서핑을 시작하려는데 옆자리 성환이 6시가 되자마자 주섬주섬 가방을 챙기고 있었다.

"벌써 다했어?"

"대강 생각해놨고 내일 아침에 써서 보여 드릴게요."

"별로 안 걸릴 텐데 그냥 써놓고 가는 게 낫지 않을까?"

"아뇨. 오늘 가족회의 있어서 일찍 들어가야 해서요."

이 자식 분명 내일 아침되면 오후에 보여준다고 할 거다.

오후되면 뭔가 핑계 대고 못 했다고 미안하다고 할 게 뻔하다.

할 수 없다.

차라리 그냥 내가 하고 맘 편하게 퇴근하는 게 낫다.

정시 퇴근을 포기하고 워드파일을 열어 보고서를 써 내려갔다.

전생에 임원되고 나서 한 번도 보고서를 써본 적이 없었으니 실로 오랜만이었다.

표를 넣고 행과 열을 맞추고 수정의 수정을 거듭하니 어느덧 시간은 10시를 향해 갔다.

그놈 자식 때문에 내 소중한 여가 시간이 날아갔다.

그런데 뒷자리 원모 아직까지 퇴근 안 하고 일하는 척하고 있었다.

보아하니 내가 퇴근 안 해서 지도 못 하는 중인 듯.

이 시절만 해도 윗사람한테 먼저 퇴근하겠다고 인사하는 게 참 어려운 시기였다.

차라리 내가 늦게 가고 말 지라고 포기하는 것이다.

"원모야? 아직 있었어? 왜 퇴근 안 해?"

"과장님 야근하시는 거 같아서요. 뭐 시키실 없으십니까?"

라고 답하며 초롱초롱한 눈빛을 쐈다.

'딸랑딸랑 널 위해 이렇게 희생하고 있으니 나 좀 끌어 주세요'라고 하는 거다.

"아, 새끼 그럼 진작 물어보던가. 실컷 다 해 놓으니깐 이제 와서."

"죄송합니다. 지금이라도 괜찮으시면 뭐 도와 드릴 거라도?"

"농담이야 이놈아. 빨리 가라. 그리고 앞으론 쓸데없는 짓 하지 마라."

"네? 무슨 말씀이신지."

"기다리지 말라고. 내가 니 월급 주는 사람도 아니고 설령 준다고 해도 월급은 업무와 역할에 대한 보상이지 상사 눈치 보는 대가까지 포함된 건 아니다."

"아 네 알겠습니다."

참 수긍이 빠르다.

대답과 동시에 바로 컴퓨터를 끄고 가방을 챙겼다.

"야 그렇다고 바로 가냐?"

원모가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답했다.

"월급 주는 분도 아니신데 제가 꼭 대답해야 하나요?"

"이 자식이. 내가 월급은 안 줘도 성과평가는 준다. 올해 D야. 지금 가방 싸는 김에 그냥 짐도 빼지."

원모가 두 손으로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에이. 과장님. 농담입니다. 다 끝나신 거 같아서 같이 나가면서 한잔하려고 한 거죠. 아시면서."

자발적으로 술자리 참여하겠다는 말이다.

기특한 놈. 올해는 A다.

오랜만의 야근도 하고 술 한잔도 해서인지 집에 돌아오자마자 뻗어서 잠이 들었다.

* * *

다음 날 9시 정각.

체조와 함께 또 하루 업무가 시작되었다.

내가 써놓긴 했지만 그렇다고 이놈한테 내가 했다고 넌 안 해도 된다고 알리긴 싫었다.

이놈도 고생 좀 해봐야 한다.

그런데 11시가 넘도록 워드 파일은 열 생각도 하지 않고 여전히 웹서핑질이었다.

이 자식 도대체 언제 쓸라고.

아무튼 솔직히 부럽기도 하다.

이놈은 업무시간에 대놓고 인터넷 쇼핑을 해도 누구 하나 뭐라 하는 놈이 없다.

도무지 보고 자료 만들 생각을 안 하니 슬슬 짜증이 올라왔다.

참다못해 인상 쓸 수밖에 없었다.

"조대리. 다 했어?"

"뭘요?"

이 자식이. 뭐냐니.

뚫린 입이라고 튀어나온 말이 사람 환장하게 만든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천 냥 빚을 질 놈이다.

"몰라서 물어? 어제 TF에서 알아보라고 한 거."

"아. 50% 효과 그거요. 해결했는데요."

"뭔 소리야? 해결하다니 보고서 쓴 거 보여주지도 않더만."

"보고서는 왜요? 어제 가족 회의하면서 회장님께 살짝 여쭤보고 바로 실장님한테 전화드렸는데."

아하, 그런 방법이 있었구나.

밥상머리에서 물어볼 수도 있고 밤에 실장한테 전화할 수도 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나만 괜히 헛고생했다.

짜증 섞인 목소리로 따져 물었다.

"그럼 미리 얘기라도 해주지."

"왜요? 어차피 오늘 보여 드리겠다고 한 거 아닌가?"

"아니 그냥. 저녁 약속 시간 좀 남아서 한 이삼십 분 작업했거든."

3시간 야근했다고 하기엔 모양 빠졌다.

"난 또. 과장님이 하실지 몰랐죠. 하실 거면 미리 말씀이라도 주지. 괜히"

그냥 내가 참자.

듣고 보니 틀린 말도 아니지 않는가.

"그건 그렇고, 뭐였는데? 궁금하셨던 게?"

"인수건 말고 그 밑에 엔터사 이슈 말씀하신 거 같아요. 그러고 보니 다른 부서에도 얘기해 줘야겠네. 해결됐다고."

황당하다.

아무것도 아닌 거 가지고 알아서 긴다고 해야 하나.

의미 없는 물음표 하나에 전 그룹이 움직이다니 정말 비효율의 극치다.

그래도 나만 당할 순 없다.

"그냥 냅 둬. 딴 팀도 이 기회에 공부 좀 하라고."

따르르릉

그때 울리는 전화벨 소리, 임상무 방 번호다.

왜 아직 무슨 이슈인지 보고 안 하냐고 따지려나 보다.

"네 상무님. 들어가서 말씀드릴게요."

임상무 책상 앞에 앉아 있는 표정이 다그치려고 하는 건 아닌 듯하다.

"네. 어제 이슈 그거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해결됐다고 합니다."

"아, 그 건은 들었어."

이런. 나만 모르고 나만 개고생했다.

"그거 말고. 북경에 하대리 말이야."

아 하대리. 올 게 왔다.

근데 생각보다 빠르다. 며칠이나 됐다고.

"북경에서 무슨 일 있었어? 감사팀도 그렇고 왜 여기저기서 난리지?"

"왜요? 복귀시키래요?"

"아니. 그 자리에서 바로 날리려나 본데? 너 하대리랑 친하잖아. 무슨 일 있었어?"

지난주에 있었던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아무리 미친개라고 해도 과거 자기 부서 직원 일이라고 걱정은 되는지 매우 안타까운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상무님이 도와주셔야죠."

그러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바로 표정이 싹 바뀌었다.

"방법 없는 거 알잖아. 내가 무슨 힘이 있다고. 조전무한테 찍힐 일 있어?"

그렇다. 방법이 없다.

전화로나마 위로의 말을 건넬 수밖에.

"하대리. 잘 지내고 있어?"

"네, 물론이죠. 과장님도 잘 지내시죠?"

축 처진 듯한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얘기 들었어. 그래도 방법이 있을 수 있으니깐 일단 버텨봐."

"아니에요. 과장님. 털어서 안 나올 게 있겠어요? 착복이다 뭐다 불명예스럽게 잘리느니 그냥 먼저 그만둔다고 하려고요."

그렇다. 법카사용내역이나 거래처와의 식사 등을 다 뒤진다면 개인적유용이라든지 향흥제공이라든지 어떠한 명분의 꼬투리도 다 잡힐 수 있다.

차라리 자발적으로 그만두어 관련 업계에서 안 좋은 소문이라도 안 나게 하는 게 다른 직장 구할 때 더 나을 수 있다.

위로 전화를 하고 나서도 무거운 마음이 영 가시질 않았다.

자기는 괜찮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에도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다는 생각에 더 미안해지기만 할 뿐이었다.

몇 시간 후 다시 울리는 핸드폰, 모르는 번호이긴 해도 81로 시작하는 게 중국에서 걸려온 국제전화다.

이 시절에도 보이스피싱이 있었나.

"여보세요"

조선족의 어설픈 한국말을 기대했으나, 상대방이 중국말로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정 동사장입니다. 계약 건에 대해서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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