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곱창회식 - 2
20층 대회의실 U자형 테이블에는 대표이사, 경영지원실장, 사업부문장 등 최고위층 임원들이 모여 앉아있었다.
임상혁상무, 최고재무책임자(CFO)라고는 해도 직급이 상무라 테이블 끄트머리로 슬그머니 들어가려 했다.
그런데 임상무가 성환과 같이 들어오는 걸 본 경영지원실장이 우리 일행을 대표이사 맞은편 가운데로 자리하게 했다.
큰 테이블에 임원이 아닌 사람은 나와 성환뿐이었다.
다른 부서 실무진들은 테이블 뒤쪽 의자에 빼곡히 앉아 대기 중이었다.
자기 부서장 발언 때 백데이터를 준비해주거나 갑작스런 질문에 부서장들이 대답할 수 있도록 자료를 바로 건네주기 위함이다.
회귀 전 상무였던 나와 부대표였던 성환은 항상 이 정도 위치에 앉곤 해서 였는지 별다른 감흥은 느껴지지 않았다.
식품 부문에서 인수구조에 대해 종전안과 달라진 배경에 대한 설명을 하자 자세한 내막을 몰랐던 대표이사가 질문을 쏟아 냈다.
"50% 지분의 합작회사여도 연결재무제표상 우리 매출로 다 끌어올 수 있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기다렸다는 듯이 식품 부문장이 답변했다.
"지배력이 없으므로 매출은 끌어오진 못 하나 이익은 지분비율대로 끌어올 수 있습니다."
"매출도 못 끌어오는데 뭐하러 인수하지?"
역시 전문경영인은 매출 같은 외형적인 단기성과가 최우선이다.
당장 보여줄 수 있는 지표가 좋아야지만 내년 임기연장을 기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작년에 대표이사가 회장 업무보고 때 5년 안에 그룹 매출을 2배로 끌어올리겠다고 호언장담했었다는 소문도 있었다.
현재 비즈니스만으로는 5년 내 2배로 성장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며, 상당 부분 기업인수합병을 통해야만 겨우 목표 달성이 가능할까 말까한 수준이었다.
따라서 그룹 매출에 합산도 안 되는 합작법인은 대표이사의 관심 밖의 사항이었다.
그래서 이 회의에서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출하고 있는 것이었다.
"지분 전부를 인수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보기라도 했나? 혹시 좋은 게 좋은 거지 하면서 중국 측에 막 끌려다닌 거 아닌가?"
실무진들의 그간의 노력을 깡그리 뭉개버리는 발언이었다.
그러나 방법을 찾으라는데 '방법이 전혀 없습니다'라고 선뜻 말하기는 어려웠는지 참석자들은 모두 꿀 먹은 벙어리마냥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한껏 기세가 오른 대표이사는 한참 동안 임원진들을 한 명씩 돌아가면서 까고 있었다.
드디어 임상무 차례가 되었다.
"재무팀도 그래. 매출과 이익을 끌어올 수 있는 구조를 짜내야지. 마냥 안된다고만 하면 어떡하나? 때 돼서 결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건가?"
조성환 눈치 보느라고 그나마 나름 수위 조절한 발언이었다.
그런데도 여러 사람들 앞에서 면박 받았다는 생각에 쪽팔렸는지 고개를 숙인 임상무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성환 이놈은 지가 현장에서 의사결정권자인양 협의는 다 해놓고 이제 와서 한 발 빼는 건지 한마디를 거들지 않았다.
이대로 들어가면 나만 깨진다.
더러운 기분으로 곱창 먹으러 갈 순 없다.
사실은 조성환 이놈이 다 결정한 거다 라고 까발릴 수도 없고 난처하기 이를 데 없지만 어떻게든 이 분위기를 돌려야 했다.
"재무팀 천태평과장입니다. 조성환대리와 함께 현지 출장을 다녀왔으며, 제가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평소 같으면 바로 과장 나부랭이, 실무진은 빠지라고 바로 제지했을 테지만 일단 성환을 끼워 넣으니 발언권을 뺐는 자가 없었다.
"중국에 진출한 지 10년도 넘었으나 아직도 북경 부근에서나 그것도 매우 큰 마트에나 가야 구석에서 겨우 우리 제품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J사는 최근 몇 년 사이 중국 전역에 자기들 제품을 다 깔아놨습니다."
"이는 오너쉽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너쉽 없이 주어진 일만, 단기성과에만 급급해선 절대 성공할 수 없음을 지난 10년이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우리 중 누가 정 동사장처럼 오너쉽을 가지고 자기 일처럼 일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단순히 당장 J사 매출을 합산한다기보다는 합작을 하면서 중국 내 유통망 확장 노하우를 배울 수 있다는 생각으로 접근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당연한 말이어서 그런지 아니면 내 말이 조성환의 의중을 담은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인지 반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표이사를 포함한 모든 참석자들은 발언한 내가 아니라 성환의 표정만을 살피고 있었다.
성환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푹 숙이고 끄덕끄덕거리고만 있었다.
십 년 넘게 봐온 바로는 이놈은 졸고 있는 거다.
아니, 어떻게 이 순간에 졸다니!
이 분위기에 설마 졸고 있다는 생각은 누구도 할 수 없기에 참석자들 모두가 성환이 고개를 끄덕이는 게 동의 표시라고 생각한 듯했다.
어느 누구 하나 반박 없이 합작안에 대해 동의하는 분위기로 바뀌었고 향후 일정과 파견인력에 대한 논의로 이어졌다.
통상 합작법인의 경우 대표를 상대측에서 하면 최고재무책임자(CFO)를 우리 측에서 맡거나 그 반대로 하는 등 상호 간의 균형과 견제 장치를 마련한다.
J사 건의 경우 정동사장의 경영 능력을 활용해야 하므로 당연히 대표는 정 동사장이 맡고 CFO를 우리 측에서 보내야 했다.
그룹사 재무 인력 수급을 고려하여 지주사 재무팀에서 결정해야 했다.
이는 사실상 내가 결정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하는 사안이다.
미주, 유럽 등 선호하는 지역이 아닐뿐더러 대도시인 청도이긴 해도 시내에서 두 시간 정도 떨어져 있는 등 입지 조건이 안 좋아 반기는 자리는 아닐 게 분명하다.
이런 자리엔 주로 승진에서 밀려나 언제 그만둬야 하나, 눈치만 보는 직원 중에서 회사지원으로 국제학교를 보낼 수 있는 학생 자녀를 둔 말년 과차장급이 적절하다.
회의가 끝나고 임상무 나한테 한마디 건네고는 자기 집무실로 들어 갔다.
"파견 누구 보낼지 생각해 놔. 뻔하긴 하겠지만, 아무튼 생각해 보고 얘기해줘."
"네."
우리 팀 송지환 과장을 딱 집은 것이다.
나보다 한참 선배이나 몇 년 전 내가 중국사무소에서 재무팀으로 복귀하는 바람에 주무과장 자리도 넘겨주고 그 뒤로 승진에서도 매년 누락되고 있었다.
주위에서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뺐다고 수군거리는 걸 알면서도 가족들 생각에 선뜻 그만둘 형편도 아니어서 꿋꿋이 버티고 있는 것이다.
좁아진 입지에 좌불안석하는 모습이 안쓰럽지만 여기는 회사고 사사로운 인정에 휘둘릴 수는 없는 법이며 또 마땅히 내가 도와줄 방법도 없다.
그냥 모른 척하고 서로 안 불편하게 적당히 거리 두면서 지내면 된다.
게다가 송과장은 동네북 역할을 해줘서 사실 유용한 존재였다.
매주 금요일 오후 간부들 업무보고할 때 임상무의 타겟이 되어 줬다.
미친개한테 매주 영혼까지 탈탈 털리면서도 잘 버틴다.
멘탈 갑이다.
어떨 땐 인간 대 인간으로서 저렇게까지 해도 되나 할 정도였다.
그 자리에서 바로 창문으로 안 뛰어내리는 게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혼신의 힘을 다해서 송지환과장을 깨느라고 진이 빠져서인지 보통 다른 사람들한테는 대강대강 넘어간다.
덕분에 내 차례도 비교적 스무스하게 넘어가서 금요일마다 영혼을 붙잡은 채 퇴근할 수 있었다.
"과장님. 뻔하다는 게 무슨 말이죠?"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 감이 없는 성환이 궁금하다는 듯 물어 봤다.
"아. 송지환과장 얘기하는 거야."
"송지환과장이 왜요?"
"그 자리에 딱이거든. 임상무가 꼴보기 싫어할 뿐 아니라, 말년 과장에 어차피 여기 있어 봐야 후배들 눈치만 보고 견디기 힘들겠지. 거기다 애가 중학생이라 국제학교 보낼 수 있으니 딱이고."
"그런데 인력투입을 왜 그런 걸로 결정하지?"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한 번도 거기에 의문을 가지거나 제기하지 못했었다.
업무를 명확히 하고 그 업무에 필요한 인력을 투입해야 하는데 이제까지는 그때마다 그냥 상황에 맞는 인력을 찾아서 보냈던 것이었다.
대답하기에 적당한 말이 떠오르질 않아 그냥 딴 얘기로 돌렸다.
"어? 벌써 7시네. 빨리 가자. 애들 기다리겠다."
* * *
회의 시간이 생각보다 늦게 끝나는 거 같아 원모에게 전화해서 미리 식당에 가 있으라고 메시지를 남겨 놓았었다.
회사 후문으로 나와 골목길을 굽이굽이 돌아 곱창집에 다다르는데 멀리서부터 왁자지껄한 분위기의 소음이 들려왔다.
성환이와 둘이서 삐걱대는 좁은 계단 사이로 올라가는데 흥에 겨운 듯 떠드는 수진이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나 다를까.
곱창 못 먹는다던 수진이는 물론이고, 여자친구 만난다던 학형이, 간이 안 좋다던 동구와 친구 병문안 간다던 송지환과장을 포함한 우리 파트 전원이 한 명도 빠짐없이 들어차 있었다.
처음에 두 테이블만 예약해 놓아서, 좁은 자리에 두 줄로 다닥다닥 붙어 있다가 성환과 내가 들어가니 모두 기립해서 가운데 자리를 비워줬다.
이 자식들 내가 가자고 할 때는 아무도 안 간다더니 성환이 온다니까 다 온 모양이다.
헐!
김부장도 있었다.
김병국 부장 끝자리에 서서 어색한 듯 웃으며 맞이했다.
"부장님 약속 있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갑자기 취소돼서. 우리 파트 회식인데 내가 빠질 순 없지."
"아. 네."
앉자마자 곱창을 구겨 넣고 소주 한잔을 비운 채 학형이를 노려봤다.
"너 여자친구 생겼다고 약속 있다매."
"네, 그렇지 않아도 좀 아까 깨졌습니다."
"어떻게 하루 만에 깨지냐?"
"하루가 뭐에요? 한 시간 만에도 깨질 수 있죠. 사랑은 움직이는 거니깐요."
젊은 친구들이 쿨하다고만 하기엔 변명 참 궁색하다.
곱창 못 먹는다던 수진이는 불량식품 아폴로 먹듯이 곱 안쪽을 쪽쪽거리며 빨아대고 있었고 간이 안 좋다던 동구는 성환이 잔을 채워주기 무섭게 연거푸 원샷 때리고 있었다.
"수진아, 곱창 못 먹는다고 하지 않았어?"
"소곱창은 먹어요. 전 돼지곱창 먹으러 가는지 알았죠."
"비주얼 때문이라매. 곱창이 다 똑같지 않나?"
"에이 과장님도. 소 돼지가 어떻게 똑같아요? 돼지곱창은 징그럽잖아요."
니 핑계가 더 징그럽다.
"동구야 너 몸 안 좋다고 하지 않았냐?"
"네 그래서 위장약 두 개 챙겨 먹었습니다."
"간 안 좋다고 한 거 아니었나?"
"아 네. 간이나 위나 다 같은 장기인데요. 위장약 먹으면 간도 좋아지죠."
온통 사기꾼 새끼들이다.
그나저나 성환이는 진짜 곱창을 잘 먹었다.
예전 생에서는 나 포함해서 모두가 알아서 기고 받들기만 하느라 이런 편한 회식 자리에 못 끼었던 거였나보다.
함께 어울릴 기회 자체를 안 주었으니.
모두들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서 주거니 받거니 한참 술과 흥이 오르는데 송지환과장 풀죽은 모습이 역력했다.
아무리 멘탈 갑이라고는 하지만 오늘 업무회의 때에는 심해도 너무 심했다.
'야이 새끼야'라고 욕설과 함께 고함치듯이 깨는 바람에 저 멀리 마케팅팀에서도 무슨 일 났냐면서 구경 왔을 정도였다.
자기가 월급 주는 것도 아니면서 너무 심했다.
회사가 주는 월급에는 상사의 폭언으로 받는 모멸감과 수치심을 참는 데 대한 대가는 조금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직원들은 동료가 받는 수치심에 대해 같이 분노하고 시정을 요구하기보다는 자기가 타깃이 안되었다는 것에 대해 안도할 뿐이었다.
그런 야만의 시대를 보내 왔었다.
물론 내가 임원을 맡을 시기쯤에는 이런 꼰대들은 사라지고 분위기도 많이 바뀌었지만, 이 시절만 해도 그런 게 어느 정도 용인되는 분위기였다.
예전엔 그냥 송지환 과장이 '불쌍하다. 욕받이 하느라 고생하겠네.' 이 정도 뿐이었다.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경험이 더해지니 이제는 예전에 방관만 하던 나도 가해자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술잔을 들고 자리를 옮기다 송지환과장과 마주 앉게 되었다.
"과장님. 어디 불편하세요? 몸 안 좋으시면 일찍 들어가시죠."
"아니 괜찮아."
"네."
대화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나이도 많고 한참 선배인데 부서 내 역할은 그 반대이니 서로 말을 섞기가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송지환 과장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나야?"
기승전 없이 바로 결이었다.
"네? 뭐가요?"
"인사팀 동기한테 들었어. 이번 합작법인 파견인력 우리 팀에서 빨리 결정하라고 했다며?"
회의 내용을 전해 들어서 대충 돌아가는 판도 알뿐더러 본능적으로 그 대상이 자기라는 것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될 거 같아요. 죄송해요. 좋은 자리도 아닌데."
"아냐. 괜찮아 그렇지 않아도 너한테 얘기하려고 했어. 나 보내달라고"
"아니 왜요?"
대답 없이 술만 넘길 뿐이지만 표정은 정말 몰라서 묻냐고 말하는 듯했다.
옆자리에서 딴짓하는 척하며 듣고 있었는지 뜬금없이 성환이 끼어들었다.
"과장님 그 자리의 역할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심각한 표정의 송지환과장.
한참 동안 생각한 후 대답했다.
"단순히 중국 측에서 자금 빼돌리고 딴 주머니 차는 걸 감시하는 역할만이 아니라 CEO의 전략적 파트너가 되어서 기업의 비전에 대한 큰 그림을 같이 그리고 그 안에 발생하는 문제를 같이 해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도 재무팀 십오 년 짬밥은 헛되지 않은 듯하다.
성환은 '내가 어떻게 이런 멋진 질문을 할 수 있지?'라며 스스로 놀래서인지 아님 송지환과장의 대답이 맘에 들어서인지 아무튼 상당히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과장님 혹시 파견 가실 때 필요한 거 없으세요?"
"밑으로 한 명만 더 붙여줘."
예의상 그냥 물어본 건데 마치 준비해놓은 듯이 바로 대답했다.
"아시다시피 주재원 한 명 더 보낼 여력은 없습니다."
"그래도 방법을 한번 찾아주면 안 될까?"
거듭된 부탁과 함께 성환을 같이 쳐다봤다.
이럴 때의 답은 이거밖에 없다.
"네 그럼 제가 한번 고민해보겠습니다."
안 하겠다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