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손안의 재벌-12화 (12/191)

12화 곱창회식 -1

급하게 출장 보고를 마무리하고 칼퇴를 하긴 했으나 마땅히 갈 데가 없었다.

회귀 전에는 주말에 홀로 오피스텔에 짱 박혀 TV만 보고 있는 게 싫어서 매주 이상현을 꼬드겨 새벽까지 달렸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수 없다.

원수와 마주 보고 술잔을 기울일만한 멘탈은 아직 안 된다.

그렇다고 그 자식을 대놓고 적대적으로 대할 수는 없었다.

눈치 빠른 그놈이 어떤 대응을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적당히 눈치채지 못하도록 적당한 관계는 유지해야 했다.

그렇게 하는 건 내일부터고, 일단 오늘은 혼술이다.

그렇다고 또 돈 아낀다고 궁상맞게 삼겹살 한 근 사다가 오피스텔에서 사방에 기름 튀어가며 구워 먹긴 싫다.

배가 고파 왔다.

갑자기 지난 생에서 이 시절 돈 아낀다고 들어갈까 말까 고민만 하다가 결국 발길을 돌리던 장어덮밥 집이 떠올랐다.

집 앞이라 법인카드를 쓸 수도 없고 개인카드로 사 먹기에는 엄청 부담되던 가격대의 히즈마부시 전문점.

집이 코앞이었지만, 한 번을 못 갔었다.

임원 되고 나서야 비로소 보복심리에서인지 몰라도 일주일에 한두 번씩을 꼬박 들르던 생각이 났다.

계산대에서 카드를 내밀 때 나 스스로 이 정도면 성공했다는 마음을 들게 해주던 그러한 음식이었다.

비록 이번 달 월급은 몽땅 증권계좌로 털어 넣었지만, 다음 달에도 어김없이 월급은 들어올 거고, 이번엔 해외출장비까지 나올 거다.

오늘은 돈 몇 푼으로 고민하지 말고 나를 위로하는 시간을 갖자.

"몇 분이세요?"

"혼자요."

뻔히 혼자인지 보이면서도 꼭 그렇게 물어본다.

아직 이 시절에는 혼밥은 외로움과 궁상의 상징이었다.

회귀할 때쯤 되어서야 비로소 1인 가구가 급증하면서 혼밥이 자연스러운 사회 분위기가 조성되었지만.

혼밥 레벨테스트라는 것도 떠돌았는데, 물론 난 삼겹살도 구워먹는 최상위레벨이었다.

금요일 저녁 피크타임에 혼자 오는 손님을 반기는 식당 주인은 극히 드물다.

게다가 이 식당은 지난 생에서나 단골이었지 지금은 난 처음 보는 손님일 테다.

다른 손님들도 '저 왕따 아저씨'라는 듯한 시선으로 쳐다봤다.

다행히 카운터 옆에 한명 자리가 비어서 그 자리에 앉았다.

"장어덮밥이요. 아, 생맥주도 한 잔 주세요."

주위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생맥주까지 시켜 음식을 탐미하며 오로지 나만의 행복한 고독을 즐기자.

스스로를 그렇게 위로했다.

그러나 자꾸 들려 왔다.

아무래도 자꾸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져서인지 여기저기에서 사람들 말하는 게 들렸다.

"어머 저 아저씨 주말에 웬 궁상이야?"

"쉿 조용해! 들리겠다."

"괜찮아 졸라 멀어. 하나도 안 들려."

다 들린다.

하지만 들려도 괜찮다.

밥맛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혼자 살던 십수 년이 시간과 공간에 얽매이지 않고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누구도 신경 안 쓰며 밥맛을 즐길 수 있는 경지에 이르게 해주었다.

이 집 덮밥은 입에서 살살 녹는 맛이 아닌 생선구이 겉면 특유의 바삭한 맛이 있다.

심지어 먹는 방법도 써놨다.

사람이 먹는데 정해진 방법이 있겠냐만은 못 이긴 척 따라 해보니 확실히 낫긴 했다.

종업원이 가져온 맥주는 거품이 1/3은 될만한 높이에 입자가 고운 것이 생크림이 넘어가는 것마냥 목 넘김이 부드러웠다.

예전 같았으면 술 쪼금 따라주었다고 불평했을 테지만, 나이 들고 나니 거품이 더 맛있다.

무리했다.

만원 가까운 생맥주를 세 잔이나 연거푸 마셨다.

장어덮밥에 맥주 3잔까지 6만 원이 훌쩍 넘었다.

이 시절 랍스터까지 나오는 국내 최고급 호텔의 뷔페 가격과 비슷한 수준일 것이다.

이 돈이면 차라리 사케를 시킬 걸 그랬나.

쓸쓸한 오피스텔에 들어오자 그제야 후회가 밀려왔다.

내가 미쳤지.

이래서 어느 세월에 종잣돈 모아서 회사 때려 치나.

그래도 좋게 생각하자.

한 끼에 6만원 썼다고 1억 모으는 게 한 달 밀리는 건 아닐 거다.

다음 주부터는 저녁도 구내식당에서 해결하면 된다.

* * *

어머니와 통화도 하고 나름 편한 주말을 보내고 다시 월요일 아침 해가 떠올랐다.

어김없이 회사 근처에서 아침을 하려는데 아무래도 분식집을 가기는 좀 그랬다.

분식집에서의 아침만큼은 편하게 아람이와 얘기하면서 해야만 할 것 같은 생각에 도통 발걸음이 옮겨지지 않았다.

간단히 샌드위치를 포장하고 자리에 도착하니 책상 위에 뭔가가 놓여 있었다.

오늘 자 스포츠 신문이었다.

"안녕하십니까"

먼저 출근해 있던 성환 고개 돌리며 인사하고는 신문을 쳐다봤다.

'내가 해줬다'라며 뭔가 보답의 말을 바라는 듯한 눈빛이었다.

"네. 안녕하십니까."

그래 오늘은 존댓말로 인사해 주마.

9시 정각 아침 체조시간.

18층 모든 직원들이 일어나서 체조를 시작했지만.

성환은 월스트리트저널, 나는 스포츠신문을 펼쳤다.

이 뻘쭘한 몇 분을 견뎌야 한다.

하루, 이틀이 지나고 일주일 정도 계속된다면 루틴으로 바뀔 것이다.

'쟤는 원래 이 시간에 체조 안 하고 신문 보지'라며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저 멀리 맞은편 IR파트의 손과장과 이과장이 씹는 소리가 들려 왔다.

몇 년 전에 내가 과장 1년 빨리 달았다고 자격지심 쩌는 놈들이다.

"천과장 저 자식, 조성환님 옆에 붙어서 딸랑거리는 거 같더니 아주 지가 임원된 줄 아나 봐. 체조시간에 신문이나 쳐보고"

"냅 둬. 몇 달 있으면 조성환님 딴 부서 갈 텐데. 그때도 계속 저 지랄 하는지 지켜보자고."

2년이다. 그때 이놈이 딴 데 갈 것이다.

물론 그전에 내가 먼저 나갈 테고.

* * *

지난주 바쁜 분기 결산이 마무리되었다.

한참을 정신없던 부서가 이제 평상시 모드로 돌아가는 분위기였다.

이때가 바로 회식 타이밍이다.

"부장님. 결산도 끝났는데 회식 한번 해야겠죠?"

고개 들어 김병국 부장을 찾자, 파티션 밑으로 고개를 숙이고 코를 파고 딱지를 돌돌 말고 있다.

더러운 놈.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는 양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래야지. 근데 언제?"

"다음 주는 연휴도 끼었고 아무래도 오늘밖에 시간 없는 거 같은데요."

머리를 갸웃거리며 곤란한 표정을 짓는 김부장.

"오늘 약속있는데. 그냥 나 있으면 불편하니깐 애들하고 맛있는 거 먹어. 결제해 줄 테니깐"

내가 재무팀 선임과장인데 결제는 무슨, 그냥 내가 공용카드 쓰면 땡이지.

하여간 인심 쓰는 척 생색은 오지게 낸다.

어쨌든 잘 됐다.

오늘은 내가 왕고다.

과거의 회식이라고 함은 바쁜 동안의 느슨해졌던 위계질서를 다시 잡는 서열정리의 시간이었다.

술의 힘을 빌려 형동생하며 한층 더 친밀한 관계가 된 듯한 분위기를 만들 수 있었다.

상사는 부하직원의 충성을 다짐받고 부하직원은 상사의 눈에 들 수도 있고 상부상조가 아닌가.

그런데 좀 신경 쓰인다.

성환 이놈한테도 같이 가자고 해야 하는지.

그래, 어차피 가지도 않을 텐데.

나중에 그냥 지나가듯 한번 물어 봐야겠다.

의자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니 다들 머리를 처박고 있었다.

부장이랑 하는 얘길 뻔히 들었을 텐데 어느 놈 하나 먼저 나서는 놈이 없었다.

나라면 먼저 일어나서 '인원파악하고 장소섭외 하겠습니다.' 라고 했을텐데 답답하다.

"원모야."

"네 과장님."

"결산 끝났는데 회식 한 번 해야지. 오늘 어때? 번개로다가 시간되는 사람들끼리"

한 손으로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머뭇머뭇.

느려 터진 놈. 아직 핑곗거리를 못 찾았나.

이런 놈한텐 시간을 주면 안 된다.

"메뉴는 곱창이고 넌 인원 파악이나 해!"

"네."

초록색 창을 열고 을지로 곱창 맛집을 열심히 검색해 봤다.

누가 봐도 광고가 확실한 블로그, 지식검색 등 도무지 믿을게 별로 없었다.

무슨 미식회 같은 프로에 나온 덴 당일 예약이 힘들고.

그래, 그냥 회사 앞에 있는 황소곱창 집이나 가야겠다.

언젠가 TV에서 걸그룹 멤버가 머리 꼬아 묶고 곱창 흡입하던 게 인상 깊었다.

다른 애들이 좋아할지는 잘 모르겠다만 뭐 내가 알 바인가.

한참 뒤.

원모가 한 손엔 뭔가를 적어놓은 듯한 종이를 들고 왔다.

"대부분 선약 있다고 해서요. 저랑 과장님, 해규님, 대권이 이렇게 4명입니다. 어디다 예약할까요?"

본인, 나 빼고 두 명인데 그걸 굳이 적어서 주다니.

대단한 놈이다. 이놈은.

아무튼 우리 팀 같은 백오피스가 외부 사람과의 술자리가 많은 것도 아니고 이렇게 공식적으로 그것도 맛있는 것도 먹고 술도 마시고 노래도 할 수 있는 걸 거부하다니.

접대처럼 억지로 마시고 분위기 띄우라는 사람도 없을뿐더러 하물며 자기 돈은 땡전 한 푼 안 드는데.

물론 회사가 사는 거지 내가 사는 것도 아니면서 생색은 내가 다 낼 테지만.

애들도 잘 먹었다고 회사가 아닌 나한테 인사할 테고.

아무튼 회삿돈으로 왕고 노릇 한 번 하려고 했더니 잘 안 도와준다.

"수진야!"

"네 과장님."

올 게 왔다는 표정.

그러나 준비가 되어 있다는 단호함도 언뜻 엿보였다.

최대한 다정하게 얘기하자.

난 꼰대가 아니잖아.

"오늘 왜 안 되니?"

"네. 전 곱창 못 먹어서요. 다음에 하겠습니다."

"아니 왜 곱창을?"

"비주얼 때문에요."

할 말이 없다. 다른 놈.

다른 타겟을 찾으러 두리번거리자 키만 멀대 같이 커 가지고 실속 하나 없는 놈이 보였다.

"학형아 너는?"

"전 오늘 여자친구 만나기로 선약이 되어 있습니다."

"너 여자친구 없다고 하지 않았나?"

"네. 썸 타다가 어제부터 사귀기로 했습니다."

하나같이 핑계 대기 바쁘다.

나 같으면 곱창 말고 다른 메뉴 시켜서 먹겠다거나 여자친구는 내일 만나겠다고 했을 텐데.

사무실 한 바퀴를 다 돌았다.

어떤 놈은 간이 안 좋다. 어떤 놈은 친구 병문안 가야 한다.

이유도 가지가지다.

간이 안 좋으면 술을 안 마시면 되고 친구는 나중에 죽거든 장례식장 찾아가 봐도 될 걸 뭐 중요한 일들이라고 저러는지.

수진이, 학형이가 살살 눈치 보더니 탕비실로 들어가는데 나름 조심한다고 소곤소곤이다.

"과장님 왜 그래 집착 쩌네. 완전 꼰대."

"그러니깐 요즘 되게 꼰꼰거리네. 젊은 사람이 더해 요즘은."

아. 이런 소리까지 들린다.

들었으니 넘어갈 수도 없고 차라리 안 들렸으면 좋았을 텐데.

몸은 30대로 돌아갔지만, 마음까지 돌아간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드니 살짝 화가 누그러지긴 했다.

'그래 오늘은 번개인데 그냥 조촐히 먹자.'

점심이 지나고 세 시쯤.

졸릴 때가 되었다. 슬슬 짱박힐 곳을 찾는데 울리는 전화벨 소리.

임상무였다.

청도 출장에 돌아온 후 기안부서와 합의부서의 실무진들은 각자 부서장들에게 보고를 마치고 부서별로 본 건에 대한 최종의견을 정했다.

이제는 각 부서별 임원들이 모여 대표이사를 포함한 최고 경영진에게 보고하고 설명하는 최종 의사결정 시간이 남았다.

재무팀장 임상무는 김부장이 건넨 한 장짜리 보고서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지 우릴 찾은 거였다.

"조성환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럼 우리 팀 의견은 뭐라고……."

성환이 머뭇머뭇하자 답답한 마음에 대답을 가로챘다.

"네 상무님. 지분 전체 인수는 합법적으로 불가하므로 5:5로 합작법인 형태로 하되 우리 천하제일 계열사들이 J사 유통망을 활용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으로 최종 합의하였습니다. 맞죠 성환님?"

"네."

다시 성환에게 질문하는 임상무.

"다른 부서 의견은 어떻죠? 실무진들은 동의했나요?"

아무래도 우리만 다른 의견 냈다가 거센 질문 공세를 받을 게 걱정됐나 보다.

성환이 역시 머뭇거리자 그냥 내가 대답해 버렸다.

"네 다들 천하제일이 불법을 저지를 순 없다는 데 의견을 모았습니다. 맞죠 성환님?"

"네."

역시 단답형이다. 차라리 그게 낫다. 임상무가 더는 질문을 못 하니까.

"이따 5시에 경영진 회의 있는데 조성환님 실무진이시니까 같이 가시죠. 태평이 너도."

"저희도요?"

"당연히 같이 가야지."

임상무 입장에서도 든든한 방패를 챙기고 가려는 거다.

임상무 방에서 나와 자리에 앉으면서 성환이 머뭇머뭇하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 할 말 있는데 할지 말지 고민하는 듯.

"근데 과장님. 오늘 회식 있는 거 같던데, 저도 오늘 시간되는데요."

워딩은 하오체인데 말투는 해라체였다.

같이 가자고 사정하는 건지, 시간되니 내가 가 주마 인 건지.

5명이면 테이블도 두 개 잡아야 하고.

띄엄띄엄 앉으면 내 말에 애들이 집중 안 할 수도 있다.

시선도 분산되고 별로다.

아무튼 이놈이 오면 분위기상 내가 대장 노릇 못할 게 틀림없다.

"오늘 곱창 먹을 건데. 괜찮으려나 모르겠네. 입맛이 완전 미국 스타일일 거 같은데"

완곡하게 에둘러서 표현했지만, 이 정도면 빠지라는 뉘앙스를 분명히 전달했다.

"곱창이요? 나 곱창 완전 애정하는데? LA 곱창집에서 먹은 곱창이 소 백 마리분은 될 거에요."

한국말을 잘 못 알아듣는 게 미국 스타일이 확실하다.

더 이상 명분이 없다.

"원모야. 조성환대리도 가니깐 테이블 두 개 잡아 놓으라고 전화해 놔."

"네? 정말요? 조성환님도 같이 가세요?"

"같이 가시죠. 저도 곱창 좋아합니다."

"네. 그럼 예약 변경해 놓겠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