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손안의 재벌-11화 (11/191)

11화 의전실패

조회장을 포함한 오너 일가가 방문하는 코드원 상황.

이른바 비상 상황에서는 며칠 전부터 예행 연습이 이루어진다.

가장 기본은 조회장이 기다리는 시간을 만들지 않는 것이다.

첫 번째.

우선 차가 막히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차량이 회사 정문에 도착했을 땐 다른 차가 입구를 가로막고 있지 않아야 한다.

두 번째.

건물 출입구를 개방해 놓아야 한다. 조회장이 출입 카드를 대거나 열리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쭉 통과할 수 있도록.

세 번째.

미리 기다리고 있던 엘리베이터에 바로 올라타 목적 층에 바로 도착해야 한다.

중간에 누가 타거나 내리는 사람이 없이 바로 도착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세 가지가 의전의 기본 중의 기본이다.

문제는 북경 중국사무소가 있는 건물이 천하제일 소유가 아니라는 점이다.

천하제일은 그저 임차인일 뿐이었다.

그것도 전체 건물에서 달랑 두 개 층만 쓰는 그저 그런 임차인 수십 개 회사 중 하나다.

서울 본사야 건물 자체가 천하제일 소유이니 건물을 통제하는 게 하등 문제될 게 없다.

건물에 대한 모든 시설을 조절할 수 있고 잠시 동안의 불편은 천하제일 임직원 모두가 기꺼이 감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임차인인 북경사무소는 사정이 달랐다.

하대리는 건물 관리자를 만나 협의해서 굳은 약속을 받아 냈고, 예행 연습도 여러 번 했다.

그러나 모든 게 뜻대로 되라는 법은 없는 법.

오늘 오전엔 예정 시간이 지나도록 조윤경 일행이 도착하지 않았다.

당연히 한참 동안을 엘리베이터를 대기시켜 놓느라고 다른 입주사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관리자 측은 더는 다른 입주사들의 불편을 감수시킬 수 없다며 엘리베이터를 운행시키겠다고 난리였다.

하대리는 사정사정했다.

그는 도착 십 분 전이 되면 엘리베이터를 잡아주겠다는 합의를 관리자 측으로부터 이끌어 냈다.

그리고는 수행비서 측에 연락하여 도착 십 분 전에 알려달라고 신신당부했다.

하지만 수행비서 측은 하대리의 사정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아무런 연락 없이 도착해버린 것이었다.

들어오는 차를 보고 부랴부랴 관리자를 찾아 준비태세를 갖추려 했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정문 앞에는 다른 입주사 차량이 주차를 하고 있는 바람에 입구에서 먼 쪽에 차를 세워서 조윤경은 한참을 걸어서 들어갔다.

로비 출입구가 닫혀있어 하대리가 자기 출입카드를 대주고 들어가게 했으나 조윤경이 느리게 진입하는 탓에, 문이 닫히면서 문에 어깨를 부딪치고야 말았다.

"에이 썅."

조윤경은 반사적으로 자기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었다.

하대리는 조윤경의 잔뜩 찌푸린 미간과 잡아먹을 듯이 부라리는 눈동자를 차마 쳐다볼 수 없었다.

물론 엘리베이터도 일 층에서 대기하고 있지 않았다.

하대리는 올라가는 버튼을 누르고 엘리베이터가 오기를 기다리던 그 일 분가량이 마치 영겁의 세월처럼 길게 느껴졌을 것이다.

회장은 아니지만, 비서팀에서 코드원이라고 이미 통보한 이상 어떠한 일이 있어도 지켰어야 했다.

하지만 결과는 의전실패였다.

잘못을 제대로 따지자면 도착 십 분 전에 연락을 안 한 수행비서의 잘못이었다.

그러나 이 사실을 비서실에서 제대로 알렸을 리 없다.

중국사무소에 의전 책임을 모두 떠넘길 것이고, 중국사무소에서도 하대리를 희생양 삼을 것이 분명했다.

티타임의 시간이 길어지고 행사장 옆 회의실에서는 수행비서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회의실 문 뒤에서 스마트폰 보는 척 귀를 기울이니 수행팀 책임자인듯한 자가 부하직원들을 문책 중이었다.

"이 자식들아! 똑바로 못해? 내가 이 짬밥에 욕 처먹어야겠어! 아까 그 새끼 누구라고 했지?"

"네. 중국사무소 사업관리팀 하수만 대리입니다."

심각한 분위기로 봐서는 그냥 안 넘어갈 모양이다.

"그 새끼 어떻게든 날려. 감사팀에도 연락해 놓고."

"네, 벌써 감사팀에 문의해보긴 했는데 미리 확보해 놓은 건 없고 법카 사용처까지 샅샅이 뒤져본다고 했습니다."

부당한 해고지만 최대한 절차는 지키는 척을 해야 했다.

불법 해고 등 소송으로 이어질 수도 있으니까.

평상시 모아두었던 작은 비리 자료들을 찾는 게 최선이었다.

그런 것도 없으면 법인카드 개인 사용분을 추적해서라도 어떻게든 명분을 세워 잘라야 했다.

감사팀은 주로 투서 등에 의한 사후 조사가 주업무지만, 음성적으로는 사전에 자료를 취합하면서 나중에 필요할 때 써먹을 수 있도록 준비를 해두기도 한다.

털어서 먼지 하나 안 나올 사람은 없다.

아니, 차라리 먼지가 나오는 게 나을 수도 있다.

자를 핑계가 없다면 그다음 조치는 참을 수 없는 멸시와 고통을 줘서 스스로 나가게 하는 방법뿐이니까.

컴퓨터도 없이 벽을 마주 보게 앉히거나, 화장실 복도에 책상을 놓아 주위 사람의 멸시를 받게 하는 등 스스로 나가게 하는 방법은 얼마든지 많다.

며칠 전 청도호텔 바에서의 늦은 식사 자리가 생각났다.

어린 딸이 회사의 지원으로 국제유치원에 입학한 지 일 년 만에 영어를 유창하게 한다며 자랑하던 하대리의 환한 표정과 함께.

그래, 조성환 이놈도 로열패밀리였지.

이놈한테 아쉬운 소리 하긴 싫지만 하대리를 생각하면 어쩔 수 없다.

조용히 연회실 밖으로 성환을 불러내어 자초지종을 얘기하고 극존칭을 써가며 도움을 청해 봤다.

"조성환님 하대리 도와줄 수 있겠죠?"

한동안의 침묵.

성환의 곤란한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이전 생에서 익히 보아오던 이 표정은 '듣기 불편하니 더는 말 꺼내지 말라'라는 거다.

"누나 성격에 내가 괜히 얘기 꺼내봤자 바뀌는 건 없을 거 같은데요."

겨우 직원 한 명 자르는 거 가지고 누나한테 아쉬운 말 하기 싫다는 건가.

"하대리는 어떡하라고, 조대리는 아무렇지도 않아?"

"안타깝기는 하죠. 출장 와서 좀 친해진 거 같기도 하고."

"아니, 비서실에서 잘못한 걸 왜 하대리가 뒤집어쓰냐고. 말이 안 되잖아!"

윽박질러 봐야 소용없었다.

"비서팀에서는 자기들 실수라고 인정 안 할 거예요. 더군다나 내 담당팀도 아닌데 나서서 막아줄 수 있는 형편도 아니고."

성환은 확실히 선을 그어버렸다.

친해졌다고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 오너와 직원 상하 관계하에서의 익숙함을 뜻하는 것일 뿐이다.

회장 일가를 보좌하는 수행비서팀에서는 해외지사의 의전 실수가 곧 자신들의 실수로 비춰질 수 있기에 가만히 넘어갈 수는 없는 상황이다.

게다가 자기들이 모시는 주군은 조윤경이니, 성환이 아무리 차기 회장이라고 해도 성환이 말에 뽑은 칼을 도로 집어넣을 수도 없을 것이다.

사실 주재원은 일을 잘하면야 좋겠지만, 설령 못한다고 하더라도 크게 문제될 건 없다.

어차피 관심에서 멀어져 있으며 성과에 대한 기대치가 낮고 목표 달성을 못 했을 경우에도 외부환경 등 핑계 댈 여지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전의 경우에는 얘기가 다르다.

의전은 누가 알아주지도 않으니 잘해봐야 본전이지만, 실패할 경우에는 그걸로 끝이다.

현지에서 바로 양복 옷깃에 달린 회사 배지를 빼거나, 아니더라도 조만간 본국에 소환되어 자발적으로 퇴사하거나 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짱구를 굴려 봐도 방법이 없었다.

전략회의 등 모든 행사가 종료되고 성환, 하대리와 함께 어제의 쫑파티를 이어갔다.

어제는 다음 만남을 기약하는 자리였으나 오늘은 마지막 회식이 될 거라는 생각에 분위기가 완전히 다운됐다.

아쉬움의 술잔만이 부딪쳤다.

"하대리 너무 걱정하지 마. 방법이 있을 거야. 내가 한국 가서 해결해볼게."

"말씀만이라도 감사합니다, 과장님. 근데 해결 안 될 거 아시잖아요. 예전에 인수인계해 주실 때 일보다도 의전이 먼저라고 그러셨잖아요. 내일부터 슬슬 정리하려고요."

'넌 뭔 말 안 하냐'라고 책망하듯 성환을 째려보니 그제야 알아채고는 위로의 말을 던졌다.

"하대리님. 걱정하지 마시죠. 오히려 더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지 않나? 잘 찾아보면 우리 회사보다 더 좋은 회사도 있을 거예요."

풉!

마시던 맥주를 뿜었다.

이놈이 그걸 위로라고.

빵 대신 케이크 먹으라는 소리를 지껄이는 걸 보니 전생에 마리앙투아네트였나.

하지만 표정을 보아하니 찐이다.

성환의 얼굴에선 자기의 진정한 위로에 하대리 맘이 한결 편해졌을 거라는 강한 확신이 묻어 있었다.

* * *

예상보다 이틀이나 길어진 중국 출장길.

아무리 일이지만 공항 가서 비행기에 올라탈 때는 해외여행을 하는 설렘이 느껴진다.

다만 복귀해서 출장보고서를 쓸 때면 여행이 아니라 일이었구나라고 현타가 오긴 하지만.

그만큼 출장보고서는 스트레스다.

어떨 땐 이 보고서를 쓰기 싫어서라도 출장가기 싫을 정도다.

그러나 이번 출장은 꿀이다. 내가 보고서 안 써도 되니.

게다가 차기 회장에게 출장보고서를 지시할 수 있다니.

왠지 모를 통쾌함이 느껴졌다.

"조대리. 오늘 부장님한테 보고해야 하니깐 출장보고서 써 봐."

"네 보고서요? 뭘 써야 하죠?"

"출장 가서 한 것들을 써야지. 양식은 따로 없어. 그냥 학교 다닐 때 레포트 쓰듯이 쓰면 돼."

"근데 과장님은 쓰셨나요?"

"같이 갔는데 한 명만 쓰면 되지. 그리고 난 하대리 건 해결해야 하잖아."

"네."

알았다고 대답은 했지만, 말투는 영 툴툴거리는 투였다.

감사팀, 인사팀 친한 직원들에게 전화를 걸어 하대리 처분에 대해 들은 거 있냐고 물어 봤지만, 어디 하나 시원하게 답해 주는 데가 없었다.

성환 담당 비서실에서도 통화를 해보았으나 역시 모른다는 답뿐이었다.

정말 모른다기보다는 너는 몰라도 된다는 거였을 거다.

하대리한테 걱정하지 말라고 말은 뱉었어도 통 해결 방법이 떠오르질 않았다.

한편, 옆자리 성환은 화장실 한번 안 가고 두어 시간을 끙끙 신음 소리 비슷한 걸 내가며 끄적이고 있었다.

그런데 일 초에 자판 하나나 누를까 하는 걸 보니 독수리 타법이다.

"조대리 독수리야?"

"아뇨. 사잔데요."

"뭔 소리야?"

"컬럼비아 상징이 사잡니다. 학교 어디 나왔냐고 물어보신 거 아닌가?"

바로 옆자리인데도 의사소통에 심각한 장애물이 있다.

"아니 독수리 타법이냐고. 타자 칠 줄 몰라?"

"한글 타자는 아직 익숙치가 않아서."

말을 말자. 네가 쓰지 내가 쓰냐.

"알았으니까 빨리 쓰세요. 일찍 퇴근하게요."

쓰으으윽.

한 시간은 족히 더 지나고 나서 드디어 인쇄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용지가 떨어졌는지 달랑 한 장 뽑는 소리였다.

"과장님 여기요."

성환은 해내고 말았다는 환희에 찬 표정을 지으며 종이 쪼가리 한 장을 건넸다.

글씨 크기는 13pt 정도에 표나 기호 같은 건 일절 없고 오로지 검은색 글씨뿐이었다.

심지어 제목도 없다.

내용은 시간순서 별로 무슨 일을 했는지 나열만 되어 있을 뿐 초등학생 일기장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아주 날씨라도 같이 적어놓지 그냥.

아무튼 압축한 분량을 볼 때 이것은 내용이라기보다는 제목이나 주제와 더 가깝다.

꼼짝없이 야근하게 생겼다.

'차라리 내가 하고 말지'라고 잠깐 생각하였으나 시간은 이미 5시를 넘고 있었다.

이 따위 일로 야근까지 할 수는 없다.

"조대리. 이게 최선인가?"

"네. 있던 일은 모두 담았습니다."

보고를 위한 보고서가 아닐 뿐 사실상 담을 건 담았다.

미사여구를 붙여봐야 허세일 뿐 내용만 본다면 큰 문제될 건 없다.

다만 상사들은 형식이 내용을 지배한다라고 생각하는 게 문제일 뿐.

"담기는 했지. 아무튼 제목이라도 써놔. 제목은 16pt에 본문은 11pt로 바꾸고"

"네."

제목 쓰는데 또 20분이다.

'그냥 제목 정도는 내가 써줄걸'하고 후회해 봤자 이미 늦었다.

보고서 제목은 더도말고 덜도말고.

그냥 '출장보고서'였다.

그 5글자에선 20분여간의 창작의 고통이 고스란히 전해오는 듯했다.

이놈이 고의로 이러는 것이 아닐까?

군대에서도 처음에 이발 한번 시켰는데 잘하면 바로 위 고참이 제대할 때까지 2년 동안 바리깡을 손에서 놓지 못한다.

군대도 안 갔다 온 놈이 이런 걸 어떻게 다 파악해 놓은 건지.

똑똑한데 일부러 어리바리한 척하는 건지 진짜 어리바리한 지 아무튼 분간이 안 간다.

불금에 절대 야근을 할 수는 없었다. 특히 이딴 보고서로.

김병국 부장이 갑자기 약속 있다고 6시 전에 나갈 수도 있으니 지금 바로 보고를 끝내야 한다.

"부장님. 출장 보고드리겠습니다."

성환을 앞세우고 보고하겠다고 하니 뒷자리 큰 테이블에 원래 자기가 앉아서 보고받는 상석으로 성환을 안내했다.

성환이 괜찮다며 양보하니 그제야 어쩔 수 없다는 듯 상석에 앉았다.

내가 제목이 그냥 '출장보고서'라고 적혀 있는 한 장짜리 보고서를 들이밀자 한번 휙 보고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노려봤다.

"이게 뭐야?"

조대리가 옆에 있어서인지 육두문자는 안 날라왔다.

표정이 대신 말해 줬다. '이런 씨. 장난하냐?'

"조성환님이 보고서를 꼭 직접 써보겠다고 해서요. 세 시간 넘게 최선의 노력을 다한 거 제가 옆에서 똑똑히 지켜봤습니다."

자기가 말실수했다는 걸 깨달았는지 얼굴에 당황한 빛이 역력했다.

이내 딸랑딸랑 태세 전환이다.

"그렇지. 내용이 중요하지, 형식이야 뭐. 한번 쓱 보니깐 무슨 내용인지 다 알겠네. 수고하셨습니다. 조성환님."

성환은 자기가 진짜로 잘했다고 칭찬 받은 거라 여겼는지, 으쓱한 표정이었다.

"부장님. 혹시 궁금하신 거 있으면 질문하세요."

질문하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궁금하긴요. 여기 다 써 있는데요. 이슈 사항이랑 해결된 거요. 그리고 TF팀 의견 모이면 그땐 천과장이 정리해서 알려줘."

"궁금한 거 없으면 이제 상무님한테 보고할게요."

이놈 우쭈쭈하니 진짜 잘한 줄 아는 듯 적당히 멈출 줄 모른다.

"음……. 괜찮습니다. 상무님께는 제가 따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보고 끝났다.

이제부터 보고서 전담은 조성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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