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손안의 재벌-10화 (10/191)

10화 청도출장 - 2

5시간을 꼬박 달려 도착한 청도역.

하늘에서 잔뜩 내려앉은 어둠이 아직 걷히지 않은 이른 새벽 시간.

정 동사장 내외와 딸 친구, 부모까지 모두 나와 있었으며, 그들은 역사를 빠져나오는 딸들을 발견하고는 달려왔다.

큰 사고 없이 돌아온 것에 안도하여 단 이틀만의 재회에도 굵은 눈물을 쏟아냈다.

"괜찮아?"

"……."

별다른 말은 없었다.

흐느낌만이 있었을 뿐.

무슨 말이 필요한가. 부모 자식들 간에.

"감사합니다.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감격 어린 표정으로 나와 성환, 그리고 하대리의 손을 한 번씩 꼭 붙잡는 정 동사장.

진심 어린 마음이 손길을 통해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성환이나 하대리도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날을 샜는데도 피곤한 기색 하나 없이 다들 편안한 표정이었다.

"아닙니다. 그저 인간적인 도리를 했을 뿐 다행히 그 계통에 저희와 연이 닿는 분들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습니다. 따님 너무 야단치지 마시고 위로 잘 부탁드립니다."

호텔로 돌아온 우리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비록 힘은 들었지만,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게 이렇게 기분 좋은 일이라는 건 지난 생에서는 미처 몰랐었다.

기분 좋은 피곤함에 눕자마자 곯아떨어졌다.

알람도 맞추지 못한 채 잠이 들었는지 눈을 떠보니 어느덧 오후 네 시.

출장자들 TF 회의 시간이 지나도 한참 지났다.

부재중 전화는 15통.

박승재차장, 이상현 등 한국 출장자들이 돌아가면서 몇 번씩 전화했었다.

그냥 무시하자.

어차피 답도 없는 회의 백날 해 봐야 무슨 소용인가.

다시 울리는 벨 소리.

이번에는 모르는 번호였다.

"천태평입니다."

"안녕하세요. 정 동사장입니다. 묵고 계신 호텔 근처에 가족들과 함께 나와 있습니다. 저녁 함께하시겠습니까?"

도움을 받았는데 도무지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나 보다.

성환과 하대리, 통역사를 데리고 식당에 들어서자 맨 안쪽 룸으로 안내받았다.

20명은 넘게 앉을 수 있을 만한 큰 원형 테이블에 온통 빨간 장식에 금색으로 포인트를 살린 초호화룸.

가장 비싼 곳으로 대접한다는 인상을 강력히 풍기고 있었다.

식사 시작과 동시에 바로 본론을 꺼내는 정 동사장.

"도움에 대한 사례를 하고 싶은데. 승인 이슈는 저의 인맥까지 동원해서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자기가 총대를 메고 해결하겠다고 하는 것이긴 하나 아직 본질을 파악하지는 못한 듯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불법적인 일은 저희의 대안이 될 수 없습니다. 사례는 괜찮습니다. 다만 한 가지만 주제넘게 조언드리면 따님의 꿈을 포기하지 않게 지원해 주시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아니 무슨……."

무슨 영문인지 몰라 정 동사장은 눈만 멀뚱멀뚱한 채 쳐다보고만 있다.

갑자기 양양의 눈에 동그란 눈물이 맺혀 흘렀다.

"저희 천하제일 그룹은 한국에서 엔터테인먼트 사업도 하고 있습니다. 따님만 괜찮으시면 한국으로 보내서 가수 준비해 보시는걸 추천드립니다. 물론 저희가 성공을 보장해드릴 순 없지만 좋아하는 일에 도전하는 거 그 자체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사실 식당에 오기 전 성환이 엔터테인먼트 계열사 담당자 등 여러 군데 전화를 돌렸다.

마침 K-pop의 세계화를 위해 중국 출신 연습생을 발굴하고 있다고 해서 양양을 참여시켜도 된다는 확답을 얻어 놨었다.

내 제안을 이해했는지 양양이 한 소매로 눈물을 훔치고는 아빠를 간절하게 쳐다봤다.

이를 본 정 동사장의 눈빛이 흔들렸다.

어떤 아빠가 이런 딸의 간절한 표정을 외면할 수 있을까.

한참을 고민하다 결심한 듯 말했다.

"저도 사업을 계속하고 싶긴 했으나 딸의 성악가로서의 성공을 위해서 매각하고 유학 뒷바라지하려고 했었는데, 서로에게 득 될 게 없었네요."

"저도 사업가로서의 꿈을 지키겠습니다. 양양은 한국에 보내서 가수를 시키고 전 다수지분이 아닌 50%만 천하제일에 넘기고 같이 힘을 합쳐 세계적인 기업으로 키우는 데 노력하겠습니다. 제 제안을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월급쟁이 실무자들인 우리는 의사결정권이 없었다.

의사결정은 보고를 통해 위로 올리고 또 올리고, 여러 부서의 합의를 거쳐 어렵게 받아낼 수 있다.

그래도 좋은 분위기를 깰까 봐하는 걱정에 결정은 유보하면서도 긍정적인 뉘앙스를 줄 만한 대답을 궁리하던 그때.

성환이 답했다.

"좋습니다. 같이 한번 세계적인 기업으로 만들어 보시죠."

뭐지.

이놈이 갑자기 의사결정을 해 버렸다.

내 의중을 알아들었는지 아니면 자기 생각으로 결정한 건지 아무튼 결론을 내버렸다.

비록 대리급이고 실무자 중에서도 낮은 급이지만 확실한 건 언젠간 회장이 될 사람이다.

일단 결정한 거에 대해서는 누구도 토를 달 수 없을 거다.

세상 불공평하지만 어떠하리.

성환의 권력을 잘만 이용하면 남은 회사 생활 조금이라도 더 편하게 보낼 수 있겠다.

게다가 재미는 덤이고.

* * *

다음 날 오전.

클로징 미팅하자는 나의 문자에 뭔 영문인지 몰라 다들 회의실로 일찍 모였다.

"중국 사업의 큰 성공을 위해서는 정 동사장의 사업 수완을 활용해야 하므로 합작투자가 더 나을 거라는 판단입니다. 게다가 뇌물로 전체 지분을 인수해 봐야 엑싯(exit) 할 때까지 늘 리스크를 안고 가는 것이므로 불확실성이 너무 커서 안 되고요."

나의 일방적인 통보 같은 말에 다들 어이없다는 듯 반응이었다.

"전체 지분 인수는 이미 의사결정된 사항이고 지금은 그 방법을 찾자고 한 건데 그건 출발점 자체가 잘못되었습니다."

이제껏 듣고만 있던 이상현이 반론을 제기했다.

비록 미안한 표정을 짓고 있긴 해도 역시 이놈은 나한테 도움이 안 된다.

이상현의 말에 하대리가 대답했다.

"어차피 J사 인수목적은 단순히 돈 잘 버는 자회사 하나 늘리는 것보다는 우리 제품을 J사 유통망에 태워 전국으로 넓히자는 건데 정 동사장이 함께 해야지 더 유리하지 않을까요?"

틀을 깰 생각을 못 하는 직원들의 반대가 계속 이어지자 성환에게 눈짓으로 신호를 줬다.

눈빛을 읽은 성환.

드디어 한마디 거들었다.

"본 인수목적은 유통망 활용을 위한 시너지에 있습니다. 더군다나 천하제일은 불법적인 일로 향후에 약점 잡힐 만한 방법을 사용하진 않을 겁니다."

회의 끝났다.

성환의 말 한마디에 이어지는 참석자들의 태도가 급변했다.

'지난 실패를 교훈 삼자', '꼼수를 찾지 말고 정석대로 가자', '윤리경영이 대세다' 등 서로서로 말을 거들기 바빴다.

그 와중에 이상현의 얼굴에는 찰나의 순간에 썩은 미소를 내보이는 게 포착됐다.

오늘도 나의 적으로서 한 걸음을 내디딘 것이다.

* * *

출장 마지막 날 저녁.

모처럼 홀가분한 마음으로 성환과 하대리와 함께 식사 자리를 가졌다.

언제일지 모를 하대리와의 다음 만남을 기약하며 쫑파티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한국인의 입맛에도 잘 맞는 하이디라오 훠궈와 청도맥주.

실패하기 힘든 초이스다.

마지막 밤이라는 생각에 반주 삼은 술이 술술 넘어갔다.

도중에 급한 전화인 듯 심각한 어조로 통화를 하던 하대리.

"과장님 식사 맛있게 하십시오."

"응? 왜 그래?"

"일이 생겨서 지금 북경으로 돌아 가봐야 할 거 같아요."

식사하다 말고 주섬주섬 옷가지를 챙겼다.

"무슨 일이야? 밥 먹다 말고 가게."

"내일 중국지역 전략회의가 있는데 갑자기 지주사 전략기획실장님까지 참석한다고 해서 급하게 준비해야 해서요. 지금 가야지 막비행기 탈 수 있어요"

지주사 전략기획실장이면.

바로 조윤경 전무다.

분기마다 하는 통상적인 회의로 각 지역별 주재원들이 모여 현안 논의하는 자리에 뜬금없이 조윤경이 참석한다는 얘기였다.

북경 관리 담당 주재원으로서 의전을 책임져야 하는 수만이 빠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누나는 왜 갑자기 온다고 하지? 그냥 오늘 저녁 한잔하시고 내일 가시면 안 돼요?"

성환이 만류했으나 하대리만 곤란해질 뿐 달라질 건 없다.

주재원은 일을 못 하는 건 상관없지만 의전에서 실패하면 그걸로 끝이다.

아무래도 변방이다 보니 그만큼 주목받지 못하므로 일을 잘한다고 해도 티 하나 안 나지만 의전에서 실패하는 것은 존재 이유에 대한 부정과 같은 말이다.

식사 도중 자리를 나서는 하대리를 붙잡는 성환.

"하대리님 방금 누나랑 통화했는데 저희도 중국 온 김에 분위기도 볼 겸 내일 전략회의 참석하기로 했습니다. 저희는 내일 오전 비행기 타고 합류할 거니깐 오후 회의 때 봐요."

황당하다.

나한텐 물어보지도 않고 지 맘대로.

"나 내일 출근해야 되는데? 부장님한테도 오후에 출근한다고 했고."

"임상무한테는 아까 문자했어요. 그러라던데요? 혼자 먼저 가면 임상무가 안 좋아할 거 같은데."

수발만 안 들 뿐 끌려다니긴 이전과 매한가지였다.

"네. 그럼 오늘 못다 한 저녁은 내일 북경에서 다시 하시죠."

하대리가 아쉬운 마음을 다잡고 택시에 올랐다.

* * *

다음 날 오전.

북경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성환과 난 국내선으로 향하고 다른 한국 출장자 무리들은 인천공항으로 돌아가기 위해 국제선으로 향했다.

"같이 가자. 태평아."

갑자기 이상현이 출장자들 무리에서 벗어나 우리 쪽으로 합류했다.

'뭐지'라고 표정에 써 있었는지 묻지도 않았는데 특유의 사람 좋은 얼굴로 웃으면서 답했다.

"조전무님이 법무 이슈 있다고 전략회의 참석하라고 하셔서, 같이 가시죠. 조성환님."

"그러죠."

선한 인상과 조금은 모자란 듯한 헤픈 웃음.

누구나 무장해제 시키는 친근함이 묻어나는 놈이다. 수십 년을 나도 속아 왔었고.

이놈은 이때부터 이미 조윤경 사람이었구나.

왜 몰랐었지?

예전에는 막연히 나보다 못 나가는 놈이라고 스스로 우월의식에 빠져서 제대로 상대를 보질 못했던 게 분명했다.

북경 공항에 안개가 끼었는지 4시간이나 연착한 비행기.

오후에야 비로소 간신히 이륙할 수 있었다.

북경 공항을 빠져나오자마자 대기하고 있던 차를 타고 한걸음에 중국사무소에 도착했지만, 회의 시간은 이미 두어 시간이나 훌쩍 지나 있었다.

그래도 성환이 참석한다고 했는데 설마 시작했으려고.

"좀 늦는 거 알 텐데 혹시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누나 성격에 안 그럴걸요. 더군다나 우리가 공식적으로 참석한다고 한 것도 아니고."

성환 말대로 회의실 안으로 들어가자 이미 회의는 끝난 듯 한창 다과회 중이었다.

조윤경이 성환을 보고 책망하는 듯 따졌다.

"몇 신데 인제 와?"

"북경 공항 때문에 연착돼서. 미안 누나."

어쩔 수 없었다는 듯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하긴. 나도 한 시간 정도 늦긴 했는데. 아무튼 여기 사람들 잘 익혀 놔. 언제 어디서 급하게 필요하거나 써먹어야 할 때가 생길 수도 있을 테니까."

주위 사람들이 듣건 말건 상관없는 듯 언변이 거침없다.

스스로도 전혀 이상하다고 여기지 않을 게 분명했다.

분명히 행사 준비한다고 하대리가 어딘가 있을 텐데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질 않았다.

두리번두리번 하면서 귀를 기울이니 다과회 테이블 바깥에서 몇 무리가 하대리 얘기를 하는 게 들렸다.

"담당자가 어떤 놈이야?"

"하수만 대리라고 합니다."

"야. 너네 그놈한테 엘리베이터 잡아 놓으라고 얘기한 거 맞아?"

"네. 어제도 얘기했고 오늘 아침에 또 확인했습니다. 건물 관리인들과도 협의 다 끝냈다고 했고요."

수행비서들 같긴 한데, 대화만 들어선 자세한 내막까진 모르겠다.

우선 하대리를 찾아봐서 들어볼 생각에 오랜만에 북경사무소 예전 사무실에 들어섰다.

예전에 근무하던 때와 바뀐 게 거의 없었다.

한껏 가라앉은 듯한 적막한 분위기는 그대로인데 직원들은 대부분 모르는 사람이었다.

중국 직원들의 근속연수가 짧은 것도 있지만, 천하제일의 실적도 저조하고 성장 속도도 느린 게 주요인일 것이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입니다."

"과장님 안녕하세요. 오신다는 말씀 들었어요."

같이 근무했던 직원 중 몇 안 남아있던 중국인 직원이 반갑게 인사했다.

"하대리는요?"

"모르겠는데요. 아까 담배 피러 가시는 거 같던데 아마 옥상에 계시지 않을까 싶어요."

분명 담배 끊었다고 청도에서 한 대도 안 피던 놈이 웬일이지?

무슨 일이 생긴 거다.

옥상 문을 열자 햇빛이 쏟아지는데 햇빛을 피해 구석에 쪼그리고 담배를 물고 있는 하대리가 보였다.

발밑에는 이미 대여섯 개의 꽁초가 널브러져 있었다.

나를 보더니 다짜고짜 신세 한탄하듯 억울하다는 듯이 한숨을 늘어놓았다.

"과장님. 어떡하죠? 저 짐 싸야 할 거 같은데요."

"누가? 무슨 말이야, 알아듣게 좀 얘기해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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