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청도출장 - 1
출장 이틀째 아침.
우리 일행을 실은 밴이 J사 정문에 도착할 때, 다른 출장자들은 이미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J사 정문 위에는 중국어로 빨간색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환영합니다(欢迎光临) 천하제일그룹 영도자들."
쉬운 한자라 알아본 모양인지 출장자들은 우월감에 마치 국빈대접이라도 받은 양 우쭐해 했다.
이자들은 중국이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음을 아직까지 모르고 있다.
이러니 10년간 꼴아박기만 하고 제대로 정착 한번 못했지.
본사 문에 진입하자 회사 관계자들이 도열하여 박수로 맞이해주었다.
무리 가운데 위압적인 큰 키에 짙은 눈썹의 정 동사장이 앞으로 나와 두 손을 모아 합장하는 듯한 제스처를 취했다.
최고의 환영 표시다.
"어서 오십시오. 환영합니다. 총경리님."
중국인은 협상에 앞서 우선 최대한 환대해주고 일부러 상대방의 직급도 격상시켜서 불러준다.
이는 의례적이고 형식적인 응대이자 협상 전략일 뿐인데 한국 출장자들은 정말 큰 환대를 받는 것마냥 한껏 들뜬 모습이었다.
회의에 앞서 보이차를 내오고 동영상을 틑어 줬다.
정 동사장이 걸어온 길. 태어나서 자라온 세월, 창업 후 지금까지의 회사 성장과정 등.
아예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도무지 이런 걸 왜 보여주는 건지.
아무튼 정 동사장은 자신의 일대기의 드라마를 감동의 눈빛으로 지켜봤다.
이어서 공장의 제조시설을 둘러보는 시간.
실내 목욕탕 같은 수많은 구덩이에 고추 등을 염지해놓은 곳과 수만 평은 돼 보일 듯한 맨바닥에 수천 개의 항아리가 도열해 있는 숙성 시설이 전부였다.
"뭐야 이게. 여기 공장 별거 없는데요? 크기만 했지."
실망스러운 듯한 성환 말에 하대리가 답했다.
"장류 회산데 별 게 있으려고요. 그냥 재료 발효하는 게 전부죠. 게다가 저희는 신규사업 진출보다는 여기 전국 영업망을 활용하는 게 주요 인수목적이기도 하고요."
북경 주재원 후임으로 띨띨한 게 와서 걱정했었는데, 몇 년 만에 보는 눈이 생긴 것 같아 대견스러운 눈빛으로 하대리를 쳐다봤다.
"하대리 말이 맞아. 이 단순한 생산라인보다는 중국 전역에 깔려 있는 이 회사 제품을 보는 게 맞아. 우리는 10년을 돈을 쏟아부었어도 여기의 1/10도 못 하고 있으니깐."
공장견학을 마친 후의 저녁 환영만찬.
의사결정권이 없는 자들이 모여서 백날 회의한다고 앉아 있어 봐야 답이 없다.
오히려 이런 만찬 때 의사결정권자들이 식사 겸 반주 겸해서 취한 척 서로의 의중을 떠보고 자기 뜻도 언뜻 내비치는 게 서로에게 더 득이 된다.
영도자급 만찬 테이블에는 나와 성환, 박승재차장, 정 동사장과 식구들, J사 총경리 그리고 통역사가 자리했다.
식탁 가운데에는 마오타이주가 여러 병 놓여 있었다.
코를 찌르는 듯한 매운 향을 머금은 최고급 고량주.
일체의 향신료 없이 오랜 숙성으로만 맛과 향을 내어서인지 마시고 한참을 지나서도 향이 남아있을 만큼 강렬하다.
계속해서 산해진미를 앞접시에 옮겨주는데 아무래도 한국인의 입맛과는 맞지는 않아 쳐다만 볼 뿐이었다.
난 중국 주재원 경력이 있어 중국어를 알아들을 수는 있었지만, 일부러 아는 척하지 않았다. 아는 척하면 아무래도 상대측이 조심할 테니 모르는 척해서 그들만의 대화를 엿들을까해서였다.
정 동사장이 성환과 나에게 계속 잔을 권하며 첨잔해주다 어느덧 취기가 오르고 분위기가 무르익자 슬슬 일 얘기를 꺼냈다.
"저는 돈이 목적이 아닙니다. 평생을 일군 회사가 더 크게 발전하고 싶은 걸 보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천하제일 같은 글로벌 대기업이 잘 이끌어주셨으면 하나 비준 때문에 고민입니다."
지난 생에서의 기억에 이자는 분명 매각대금을 받자마자 성악하는 딸 유학 핑계로 이태리로 떠나서 아예 정착해 버렸다.
뇌물로 딜을 성사시켰으니 나중에 탄로날 게 두려웠을 것이다.
"저희도 중국 사업을 크게 확대하여 글로벌 No.1이 되기 위함이지 단순히 그룹사 매출만 늘리기 위함은 아닙니다."
"그럼 꽌시로 해결해보시죠. 제가 전면에 나설 수는 없는 입장을 이해해 주십시요."
정 동사장의 선 긋기였다.
목마른 놈이 우물을 파라는 뜻.
난 불법적인 건 못하겠고 너희가 하면 못 본 척은 해주겠다는 거다.
그러나 순순히 넘어갈 수는 없는 법.
"저희는 합법적인 범위 내에서의 해결을 원합니다. 이 원칙은 바뀔 수 없음을 이해해 주십시오."
주위를 둘러보며 제법 강한 어조로 말을 하니 정 동사장은 짐짓 놀라는 표정이었다.
자기들끼리 내가 못 알아듣는지 알고 조용히 말을 나누었다.
'그럴 줄 알았다, 돈 조금 받더라도 차라리 중국회사에 넘기자, 이자들에게 인수가액을 더 높이자, 아니다 더 지켜보자' 등 의견이 분분했다.
한참을 생각하는 듯하더니 정 동사장이 결심한 듯 최후통첩을 했다.
"저는 전체 지분을 매각해야 하나 그렇게는 상무위에서 승인해주지 않으니 천하제일과는 어려울 거 같습니다. 다른 중국업체를 찾아서 매각 진행하겠습니다."
자기는 급한 거 없고 플랜비(Plan B)도 있으니 급한 너희들이 빨리 결정하라는.
중국에서의 협상에서는 이런 장면을 종종 목격하게 된다.
상대를 조급하게 해서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협상을 가져가려는 벼랑 끝 전술이다.
"네 그렇다면 할 수 없죠. 저희도 아쉽게 될 수 있겠네요."
이놈들 전략에 순순히 넘어갈 순 없지.
나까지 제법 세게 나가니 통역을 통해 들은 정 동사장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한참 동안의 침묵이 이어지고 협상은 소득 없이 끝이 날 분위기였다.
식사 시간 내내 어두운 표정으로 한마디도 꺼내지 않던 정 동사장 딸 양양이 휴대전화가 울리자 슬쩍 자리를 피했다.
옆방으로 가 조용히 전화 통화를 하는 데 조금 집중하니 다 들려왔다.
"유학 안 간다니까. 정말이야. 아빠한테 얘기는 해놨어."
"북경 기차 언제야? 거기랑 약속 시간은 잡았어?"
"믿을 만해? 천룡 거기는?"
전화 상대방의 목소리까지는 들리지 않으나, 뭔가를 위해 조만간 친구와 북경으로 가출이라도 하려는 게 분명했다.
괜히 가정사에 문제가 생기면 될만한 일도 안될 법,
간단히 귀띔이라도 해주려는데 지금 이렇게 파토난 협상 분위기에는 도저히 안 되겠다.
다음 협상 때 기회 봐서 살짝 귀띔을 해 줘야겠다.
* * *
만찬을 마치고 돌아온 호텔. 입에 안 맞아서 몇 개 안 집어 먹어서였는지 꽤나 출출했다.
성환, 하대리,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발길이 자연스럽게 호텔바로 향했다.
다행히 먹을 게 있었다.
하와이안 피자와 햄버거가 나오자마자 서로 우걱우걱 입속에 넣기 바빴다.
배가 불러오자 성환이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근데 아까 정 동사장 말 그거 협상을 깨자는 말인가요?"
대리이긴 해도 언젠간 회장이 될 텐데 중국에서의 첫 번째 협상이니 어떡하든 성공하고 싶은 마음에 걱정이 앞서긴 하나 보다.
안도의 표정으로 안심시키려는 듯 답하는 하대리.
"아니에요. 중국에 말랑말랑한 감만 골라 만진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딱딱한 감은 떫어서 안 건드리는데 익어 보이는 감은 누구나 건드려본다는 거예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노골적으로 고압적으로 한번 뱉어서 상대가 말랑말랑한지 딱딱한지 떠본 겁니다. 과장님께서 안 넘어가신 거고요."
"그랬군. 난 또 아까 협상 깨진 건지 알았어요."
"아닙니다. 내일 점심 약속 있으니깐 그때 다시 얘기 나올 거예요."
주재원 후임이 제법 잘 큰 거 같아 뿌듯했다.
"중국 생활 2년 만에 중국 사람 다 됐네."
"에이 설마 과장님만하려고요."
띨띨이가 사회생활도 제법 늘었다.
* * *
다음 날 점심시간.
약속 시간이 20분이나 지났는데도 정 동사장이 나타날 기미가 없었다.
정말 협상을 깨려는 건지 걱정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J사 총경리의 계속된 전화에도 받질 않다가 열 번 정도 만에 드디어 연결됐다.
한참 동안의 통화 후 양해의 말을 구하는 총경리.
"동사장님은 오늘 못 오십니다. 죄송하다고 꼭 말씀 전해 달라고 하십니다."
"아니 왜요?"
"따님이 갑자기 안 보이신다고 해서 여기저기 찾으러 다니시는 거 같습니다."
아이고야. 오늘 당장 실행하다니.
어제 그냥 말해줄 걸 하는 후회가 들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식사가 파토나고 한국 출장자들은 계속해서 답도 없는 대책 회의 중이었다.
회의 도중 성환을 조용히 불러서 설명해줬다.
"사실 어제 동사장 딸이 통화하는 거 들었는데 아무래도 북경 간 거 같아."
"네? 북경이요? 왜 갑자기?"
"천룡이라는 연예기획사를 찾아간다고 한 거 같은데 자세한 건 못 들었어."
성환은 기획사라는 말에 그나마 다행이라는 듯한 표정이었다.
"제 대학 동창이 북경에서 대형 기획사를 하는데 제가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이어 전화 몇 통화 돌리다 한참 통화하던 성환이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정 동사장 딸이 말한 천룡인가 하는 그 기획사 질이 안 좋기로 유명하다는데 아무래도 당한 거 같아요. 그래도 백방으로 찾아본다고 하니 곧 소식이 있을 겁니다."
"그러지 말고 우리 북경 가자. 조대리는 친구도 볼 겸. 또 딜을 위해서도 정 동사장에게도 우리가 직접 해결해 주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괜찮고."
"좋은 생각인데요."
그러나 곤란한 표정의 경호원들.
그래도 성환이 가자고 결정했는데 차마 막을 수는 없고 여러 군데 전화해서 일정을 조율했다.
성환, 하대리, 경호원 한 명과 함께 고속열차에 몸을 싣고 5시간을 달려 북경 남역에 도착했다.
역을 나오자 북경사무소의 대표 등 임원진이 나와서 맞이했다.
그들을 보고 하대리가 설명해 주었다.
"제가 미리 말씀드렸습니다."
그래. 성환이 온다고 하니 사무실에 앉아만 있을 수는 없었겠지. 맘이 불편해서라도.
간단히 인사만 나누고 비서실에서 준비한 차량을 타고 CBD 중심업무지구의 휘황찬란한 건물들 사이를 유영했다.
드디어 도착한 대륙풍의 건물, 2년 만에 만난다는 성환의 친구는 중국 재벌 2세로 C-pop의 세계화를 꿈꾸며 엔터테인먼트사를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왓츠업 브로."
서로 팔과 어깨를 부딪치고 손을 맞잡아 흔들어 당겼다.
20대 학생 티를 벗어버리지 못한 모습이다.
아니 어쩌면 저게 성환의 진짜 모습일 것이다.
한참의 요란한 인사 후 이제야 나와 하대리가 같이 있다고 의식했는지 헛기침 한 번과 함께 점잔 모드로 빠르게 변했다.
"북경 오자마자 전속계약 사인했나 봐. 위약금도 위약금이지만 그것보단 딴 데서도 데뷔 못 하게 풀어줄 생각을 안 하는 거 같아. 아주 독종한테 걸렸어."
"방법을 찾아줄 거잖아. 안 그래 친구야?"
다정하게 부탁하는 투로 말하고 긍정적인 대답을 갈구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 해결했지 내가 누구냐. 빚졌어 넌. 언젠가 내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할 거야."
방금 전 우리가 북경 오는 기차 안에 있는 동안 그 문제의 기획사와 만나서 담판을 지었다는 얘기였다.
"오케이. 고맙다 친구야."
옆에서 듣던 하대리가 허탈한 표정으로 말했다.
"뭐야. 괜히 왔잖아요. 이렇게 싱겁게 될 거면. 그냥 청도 있어도 됐겠네요."
"아직 멀었다 수만아. 얼마나 힘들게 해결한 지 모르겠어? 저 표정이랑 제스처로도? 중국말은 있는 그대로 들으면 안 돼. 그리고 정동사장한테도 크게 베푼 게 됐잖아."
"아……. 네, 과장님 죄송합니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골치 아픈 문제 하나를 해결해 주는 조건으로 딜을 쳤다고 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더더군다나 중국에서는.
언젠가는 북경 친구한테서 제법 묵직한 청구서가 날아올 것이다.
북경 남역.
늦은 시각에도 역시 또 나와 있던 북경사무소 임원들의 배웅을 받고 기차에 올랐다.
일등석 기차 칸 맞은편 양양과 친구가 푹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없이 앉아 있었고 시간만 흐르고 있었다.
기차는 어느덧 청도역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회귀 전이었다면 딸 또래뻘인 아이들.
그 어렵다는 금수저로 태어나 부모가 깔아주는 꽃길만 가도 되는데 이게 웬 고생인지 통 이해가 안 갔다.
안쓰러운 마음인지 오지랖인지 모르겠다만 어색한 분위기를 깨보려 말을 꺼내 봤다.
"전공이 성악이라고 했지? 성악가가 꿈이야?"
내가 중국말을 하는 게 놀랐는지 양양은 한참을 머뭇거렸다.
이어 굳은 표정으로 다짐하듯 대답했다.
"성악가는 아빠가 바라는 거고, 전 가수가 될 거예요."
"그래도 어려서부터 성악을 꽤 잘한다고 들었는데."
"노래를 잘하는 거죠. 가수를 할 만큼"
중국도 마찬가지구나. 아니 한국보다 더 심할지도 모른다.
한 자녀 정책으로 친가와 외가 모두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소황제처럼 자라기는 하지만 정작 자기의 꿈은 잃어버리고 마는.
꿈을 봉인 당한 채 어른들의 기대에만 맞춰 살다가 어른이 되어서도 한번 펼치지도 못하고 정해진 대로만 살아가는.
그래도 이 친구는 꽃길만 걸어도 될걸, 부모의 기대를 등지고 자기의 꿈을 찾으려는 노력을 할 줄 아는 청년이다.
이런 친구라면 분명 크게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