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손안의 재벌-8화 (8/191)

8화 전세역전

다음 날 오전 8시 50분.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켜는데 성환이 기어들어 왔다.

마치 매일 아침 미리 와놓고선 CCTV로 사무실 보고 있다가 체조랑 스마트미팅이 끝나는 거 확인하고는 사무실로 들어오는 것처럼 하더니.

오늘은 웬일로 체조도 하기 전에 출근했다.

게다다 어제 일은 하나도 기억 안 난다는 듯한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절도있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과장님."

"괜찮아? 속도 안 좋을 텐데"

원모는 자기가 어제 고자질한 거 같아 찔리는지 고개를 푹 숙이고 못 들은 척 외면했다.

"안녕하십니까?"

역시나 천연덕스럽게 웃는 얼굴로 뒷자리 원모한테도 인사했다.

'진짜 하나도 기억 못 하는 건가? 자기한테 불리한 건 그냥 잊어버리는 스타일인가?'

하여간 이놈은 종잡을 수가 없다.

항상 예상했던 것에서 벗어난 반응을 보인다.

9시 땡하자 어김없이 TV가 켜지더니 체조가 시작되었다.

전 층 직원들이 모두 일어나 체조를 시작하는데 성환은 아랑곳하지 않고 월스트리트저널을 폈다.

맞은 편 김병국부장.

체조하려 일어났으니 분명히 봤을 텐데 못 본 척한다. 연기 쩐다, 진짜.

'그래. 보고도 가만있을 바엔 차라리 못 본 척하는 게 낫다.'

그렇다면 나도 오늘부터 체조 안 한다.

역시나 김부장은 나한테만 뭐라할 수 없으니 아예 TV 화면만 뚫어지게 쳐다보며 나까지도 못 본 척했다.

오늘부터는 나도 체조 면제다.

성환이 진짜 기억 못 하는지 확인해 봐야겠다.

"조대리. 어제는……."

"네? 어제요? 어제 친구들이랑 술 먹고 뻗었습니다.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그래 모른 척하겠다 이거지? 모른 척하면 그냥 넘어갈 줄 알고?'

대답 없이 조용히 통화목록을 뒤져서 통화버튼을 꾹 눌렀다.

띠리리링 띠리리링!

"내 번호야. 친구 추가되어 있을 거야. 보면 이제 기억날 거야, 아마"

"네, 과장님."

얼굴엔 썩은 표정으로 '실패다'라고 써 있었다.

언젠간 이 동영상이 분명 유용하게 쓰일 일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조대리."

"네."

아직 안 끝났냐는 표정이다.

"신문 보는 김에 하나 더 시켜봐."

"아무리 그래도 과장님 신문 보내 달라고 하긴 쪼금."

"참 나. 그냥 조대리가 본다고 하면 되잖아. 스포츠신문으로다가"

"아……. 네, 그러면 되겠네요."

그래 내일부턴 체조 시간에 신문이나 보자.

* * *

점심시간이 지나고 세 시쯤.

졸릴 때가 되었다. 슬슬 짱 박힐 데를 찾아 어슬렁거리고 있는 와중 울리는 전화벨 소리.

임상무 번호다.

"중국 청도 J사 인수건 들었지?"

그래 이맘때쯤이었다.

가슴 한쪽에 후회로 남아있는.

"네. 지금 식품사업부에서 사업성 검토 중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뭔가 잘 안 풀리는 게 있긴 하나 봐. 무조건 우리보고 합의하라고 하는데 좀 찜찜해. 네가 TF팀 가서 무슨 이슈인지 정리해서 보고해 봐."

"네."

"그리고 성환님 M&A 건 담당하기로 했으니깐 회의 때마다 모시고 다녀."

"네."

모시긴 개뿔.

그래 보고서라도 쓰라고 시키자.

귀찮아 죽겠는데 오히려 잘됐다.

게다가 나중에 조윤경과 이상현을 짓밟기 위해선 이놈의 도움이 필요할 수 있으니, 예전 생에서처럼 오냐오냐 모시지만 말고 업무적으로 단련을 시켜야 할 필요도 있다.

중국 청도 소재 J사.

두반장, 굴소스 등 장류 생산업체로서 한창 중국 전역으로 유통망을 넓혀가고 있는 회사다.

농민공 출신 정성룡 동사장(董事長, 대표이사)이 혈혈단신으로 도시로 상경하여 20년 만에 전국구 규모의 회사로 일구어 냈다.

회사가 급성장하다 보니 정 동사장은 우리 같은 외국계 회사에 비싸게 팔아 거부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종전 중국 진출사업마다 실패했던 천하제일에게도 이번 기회에 검증된 회사를 인수해서 그 유통망을 활용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이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그런 상황이었다.

그러나 J사의 제품이 중국 전통 장류 상품으로서 국가 저명상표에 등록되어 외국계 자본이 다수지분을 차지하지 못하도록 정부에서 제한하고 있다는 게 걸림돌이었다.

전생에서는 꽌시를 동원해서 상무위 공무원에게 뇌물을 주고 승인을 얻어서 인수했었다.

그로부터 수년 뒤 그 공무원이 부패혐의로 날아가면서 뇌물 준 게 적발되고 지분을 중국기업에 헐값에 빼앗기고 쫓겨나게 됐었다.

나도 리스크 관리를 제대로 못 했다고 해서 커리어에 흠집이 나 임원승진도 한 해 누락될 뻔했고.

어차피 일이 년만 있을 건데 아무렴 어떻긴 하다만.

나중에 사고 수습으로 고생할 애들도 걱정이고 훗날 내 명성에 흠이 갈 수도 있으니 이번엔 그냥 안 넘어갈 거라 다짐했다.

"조대리. 청도 J사 인수건 인수인계받았지?"

"네. 금액까지 협의 끝났는데 승인 이슈 있다고요."

"그래서 재무팀 입장은 뭐라고 생각해?"

갑작스런 질문에 말문이 턱 막힌 듯 답을 못했다.

"재무팀이 뭐 하는 부서지?"

"자금 조달해서 관리하고 집행하고 하는……."

성환이 자신이 없는 듯 말끝을 흐렸다.

"재무팀은 최후의 보루야. 사업부서는 누구도 리스크를 고려하지 않아 자기들 실적만 챙기지. 우리는 거기에 제동을 걸 줄 알아야 해. 뒷다리 잡냐고 욕을 먹더라도 리스크를 챙겨야 해. 그것만 생각하고 들어가 회의에."

"네."

알아듣기나 한 건지 쇠귀에 경 읽기인지 판단이 안 섰다.

냅 두자 무슨 기대냐 너한테.

"4시에 TF팀 회의 있다니깐 같이 들어가서 들어나 보자고. 그리고 어차피 회의는 오늘로 안 끝날 거야. 백날 책상에 앉아서 짱구 굴려 봐야 답이 없거든."

"네."

역시 단답형이었다.

성환이 꼼지락거리는 탓에 TF팀 회의실에 도착하니 이미 15분이나 지났다.

그래도 조금은 미안한 마음에 우선 사과부터 했다.

"죄송합니다. 엘리베이터가 막혀서 좀 늦었습니다."

회의실 안은 식품 본부는 물론 지주사 사업팀, 경영관리, 법무팀 및 인사팀 등 주요 부서 에이스들이 자리해 있었다.

"엘베가 막혀? 참나. 일찍 좀 다니시죠?"

인사팀 성과장이다. 내 얼굴 보자마자 쏘아붙였다.

뒤따라온 성환이 고개 빳빳이 들고 건성으로 사과를 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이제야 누가 같이 온 건지 알았는지, 모두 헐레벌떡 일어나 공손히 인사하기 바빴다.

어떤 놈들은 앞을 막지 않으려고 한쪽으로 비켜서 길을 터주고 있었고 창을 등지고 가운데에 앉아 있던 사업팀 박승재차장은 벌떡 일어나더니 마치 자기가 자리 맡아 두었다는 양 두 손으로 안내했다.

내가 자연스럽게 털썩 그 자리에 앉자 눈꼬리를 치켜떴다.

왼쪽에 각 잡고 있던 인사팀 성과장을 슬쩍 보고 '휘' 손짓 한번 하니 주섬주섬 노트를 챙기고는 알아서 맨 말석으로 비켰다.

"조대리 여기 앉아."

"네 과장님."

예전에 수행비서처럼 모시고 다녔을 때랑은 다르고 재밌다.

매번 회의 때마다 데리고 다녀도 되겠다.

회의는 시작했지만 어색한 침묵만이 있을 뿐이었다.

필경 성환을 재무팀 직원으로 대해야 하는지 차기회장으로 대해야 하는지 분위기 파악이 안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교통정리가 필요하다.

"재무팀에서는 저와 조성환 대리가 TF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뵙는 분도 있을 텐데 인사드리지 조대리."

성환을 몸을 일으켜 세우고는 인사를 건넸다.

"조성환입니다."

역시나 심플한 인사를 건네자 참석자들이 모두 일어나 흡사 머리를 조아리듯이 숙였다.

본격적인 회의가 시작되었다.

사업추진부서와 합의부서들 사이에서는 날 선 대립이 오갔다.

사업부는 사업을 추진해야 하고 합의부서는 리스크 관리를 해야 하므로 항상 입장 차가 어느 정도는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번 건은 다소 불법적인 일이 포함되어 있어 입장 차가 더 클 수밖에 없었다.

사업부는 백오피스가 지원만 할 것이지 발목을 잡는다고 불만이고 지원부서는 사업부가 밀어붙여 놓고 나중에 사고 나면 나몰라라 할 거라며 서로 불만이다.

"식품 사업이 중국에 진출한 지 1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전국 유통망을 깔지 못했습니다. 북경과 동북 3성 정도 큰 마트에나 가야 겨우 우리 제품을 찾아볼 수 있죠. 이번 J사만 인수하면 전국 유통망에 우리 제품들 깔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10년간 한 게 없다는 게 자랑이에요? 그리고 인수하면 된다는 걸 누가 몰라요? 국가 저명상표라 상무위 승인이 안 난다니까 그러죠."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아죠. 중국말로 '후문을 찾자'라는 말이 있죠. 즉, 빽을 쓰자는 건데 북경사무소 대표가 상무위 고위공무원하고 연이 있다고 하니 꽌시를 써보자는 겁니다."

"지금 불법적인 일을 하자는 건데 말이 된다고 생각합니까?"

"불법이라뇨? 그냥 관행이라고 생각하면 안 될까요?"

서로서로 자기 부서의 입장을 내세우는 공방이 이어지고 있었다.

성환에게도 저마다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픈 마음에 상대를 깎아내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여러 부서의 회의란 이런 식이다.

상대를 깎아내려야만 자기가 돋보일 수 있다.

한편 회의는 누군가 총대를 메지 않는 한 결론은 날 리가 없고 시간만 흐르기 십상이다.

회의 시간이 끝날 때쯤 되면 몇 가지 확인해보고 나중에 다시 모이자고 할 게 뻔하다.

결론이 나지 않자 누군가 맺어주기를 바라듯 다들 자연스럽게 성환과 나를 번갈아 쳐다본다.

그중에서 자기가 가장 선임이라고 생각한 듯 박승재차장이 날 불렀다.

"재무팀 의견은 어떻습니까?"

난 턱짓으로 성환에게 얘기해보라고 신호를 줬다.

"매번 회의한다고 답이 나올 거 같진 않고 현지에 한번 가서 직접 살펴보고 논의하는 게 어떨까요?"

이놈이 회의 전에 내가 한 말을 알아들은 건지, 아님 그냥 결정을 미룬 건지 판단이 안 선다.

그래도 합리적이기도 했지만, 감히 어느 누구 하나 토다는 사람이 없었다.

"알겠습니다. 리갈(legal) 이슈가 크니깐 법무팀도 가고 인수구조 협의해야 하니 재무팀, 그리고 사업부랑 관리팀도 같이 가는 걸로 하시죠."

박승재차장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정리했다.

숟가락 제대로 얹힐 줄 아는 놈이다.

법무팀 이상현이 날 보고 눈짓을 보냈다.

'같이 가자, 잘해보자'라고 하는 듯.

죽일 놈의 자식.

미래를 아는 마당에 도무지 표정 관리가 안 되었다.

그저 잘됐다는 듯 어색한 썩소를 날려줄 뿐.

그렇게 성환의 한 마디에 출장 일정이 일사천리로 잡혔다.

* * *

출장 당일.

한 시간 남짓한 비행으로 청도공항에 도착했다.

청도는 한국과 지리적으로 비슷해서, 토양, 기후 등이 유사하여 배추 같은 식재료가 한국과 비슷한 수준의 품질과 맛을 낸다.

그래서 한국계 식품회사들이 많이 진출해있기도 하고.

북경 파견 갔을 때 이후 실로 오랜만의 방문이었다.

올 때마다 중국은 변하는 게 눈에 확 뜨일 정도다.

그런 걸 보면 기회가 널려있는 것 같은데 막상 성공하기는 어려운 나라다.

일행들이 공항 터미널을 빠져나오는데 멀리서 하대리 달려와 반갑게 맞았다.

"안녕하세요. 천과장님. 어서 오십시오 조성환님."

"수만아. 여기까지 웬일이야? 너 북경 있는 거 아니야?"

"어제 도착했습니다. 고속열차 타면 금방 와요."

주재원의 업무 중 가장 큰 건 뭐니뭐니해도 의전이다.

북경, LA 등 주요 도시에는 워낙에 방문하는 사람도 많고 중요한 일도 많아서 본업을 제대로 못 할 정도다.

더군다나 회장 아들까지 온다고 하니 북경사무소에서 영접을 안 보낼 수 없었을 것이다.

"오늘은 쉬시고 내일 출발할 때 뵙겠습니다."

버스를 기다리는 다른 팀의 출장자들에게 인사하고 비서실에서 따로 섭외한 차량에 몸을 실었다.

다들 부러운 눈빛으로 애처롭게 쳐다보고 있었다.

설령 차에 자리가 남아 있어도 그들이 앉을 자리는 없다.

로열패밀리를 데리고 출장 다니면 이런 게 편하다.

버스에 타거나, 짐을 끌고 다니거나, 호텔에 줄 서서 체크인할 필요도 없고.

심지어 묵는 호텔도 다르다.

회사 규정상 직원들은 5성급 호텔을 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차 안에서 막간을 이용한 하수만 대리의 브리핑이 이어졌다.

"J사 정 동사장은 지분 전부를 팔고 싶은데 중국회사에 팔자니, 제값을 못 받을 거 같고 천하제일에 팔자니, 값은 쳐줘도 승인을 못 받아서 난감한 거 같습니다. 우리가 나서서 꽌시 찾아서 승인받아주길 바라고 있고요."

하대리가 나와 성환을 차례대로 본 후 말했다.

"그래서 우리가 꽌시 찾으면 승인은 받을 수 있고?"

"네. 승인은 받을 수 있을 텐데, 나중에 그걸로 계속 협박당하면서 끌려다닐 수도 있어요. 아무래도 뾰족한 방법이 없습니다."

듣기만 하던 성환이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임시방편으로 위기를 넘겨봐야 일시적일 뿐 평안함이 지속되진 않을 거 같습니다. 더군다나 우리 재무팀은 리스크를 우선적으로 챙겨야 하고요."

하대리와 내가 한 말을 섞어서 마치 자기가 생각한 것처럼 말하는 재주를 부렸다.

지원한 MBA에서 다다는 소문은 사실이 아니었는지 아무튼 학부 때 주워들은 게 있긴 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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