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손안의 재벌-7화 (7/191)

7화 갑질

절대갑인 조직은 직원들을 편을 갈라 을과 을끼리 전쟁을 부추기길 좋아한다.

그러면서 직원들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는 것이다.

을들은 무한 경쟁에 내몰리면서 자신들이 이용당하는지도 모른 채 결과에 따른 불평등을 수용하게 되는 것이다.

"나도 어쩔 수 없어. 상부 지시야."

씩씩대며 김부장을 찾아 다짜고짜 따져 물으니 내뱉는 첫마디.

책상 등받이를 눕히고 등을 완전히 기대어서 다리를 꼬았다.

더 이상 할 말이 남았냐고 물어보는 투였다.

"무슨 계약직 직원 하나 자른다고 위에서 지시해요. 참나. 말이라고"

상사한테 좀 심했나?

그래도 선은 안 넘었다.

"진짜라니까. 아까 임상무님이 전화 받았대."

평소 친분 있는 인사팀 직원에게도 물어보니 별말 없이 그저 따르라고 답했다.

뒤늦게 여직원들로부터 들은 자초지종은 이랬다.

* * *

'오늘따라 왜 이렇게 많아?'

법인카드 명세서 날아오는 날이라 그런지 오늘따라 우편물이 한 무더기다.

아람은 우편물 짐을 바리바리 들고 사무실로 돌아오고 있었다.

18층 복도를 꺽자 마자.

쿵!

누군가와 부딪쳤다.

"죄송합니다."

떨어뜨린 우편물을 줍느라 간단히 죄송하다는 인사만 하고 회전문으로 들어서려는 찰나.

"잠시만요"

검은 정장의 남자 직원이 뛰어오더니 팔을 붙잡고는 홱 돌려세웠다.

그리고는 목에 걸려 있는 출입 카드를 뒤집어 깐다.

"이아람씨?"

"네. 그런데요. 무슨 일로?"

"전무님 안 보이세요?"

바로 조윤경 전무였다.

"전무님이요? 아. 정말 죄송합니다."

아람이 거듭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니 그제야 남자 직원이 팔을 놔주었다.

"앞으로는 조심하세요."

"네. 죄송합니다."

아람이는 급한 마음에 다시 사무실로 향하려 했다.

그러나 조윤경이 멀리서 가만있으라는 손짓을 하더니 서서히 다가왔다.

들고 있던 커피를 살짝 엎질렀는지 블라우스 옆구리 쪽이 검게 물들어 있었다.

갑자기 조윤경이 아람이의 머리에 커피를 부어 버렸다.

"앗 뜨거!"

아람은 순간 당황해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짝!

감기는 소리와 함께 아람의 고개가 뒤로 완전히 젖혀졌다.

따귀 맞은 거였다.

아람이는 당황했다.

'뭐야……? 나 맞은 거야……? 부모님한테도 꿀밤 한 번 안 맞아봤는데?'

옆에 있던 수행원들 모두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표정이었다.

한참을 지나니 뒤늦게 고통이 올라왔다.

커피 때문에 뜨거워서 아픈 게 안 느껴졌나?

억울한 마음에 눈물이 아람의 빰을 타고 내렸다.

윤경은 아직 분이 안 풀렸는지 들고 있던 서류뭉치마저 아람이의 머리에 내리꽂았다.

퍽!

소리와 함께 아람이는 그대로 힘없이 옆으로 주저앉고 말았다.

이제야 좀 분이 풀렸는지 조윤경이 한마디했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내뱉는 싸늘한 한 마디.

"눈깔 제대로 안 뜨고 다녀? 이게 누구 작품인지나 알아?"

아람은 울면서도 연신 죄송한 듯 고개를 숙였다.

조윤경은 다시 또 화가 치솟았는지 아람이 머리채를 잡고는 바닥으로 던져 버렸다.

또다시 내팽개쳐지며 쓰러진 아람이를 뒤로하고 조윤경이 자리를 떠났다.

* * *

불과 일이 분 사이에 벌어진 게 이 사건의 전부였다.

폭행까지 당한 피해자가 보상은커녕 직장마저 잘리게 된 상황이 발생했다.

더군다나 어디 하나 하소연할 데도 없었다.

아람이는 정보고등학교 3학년 때 현장실습생으로 작년에 계약직으로 채용되어 1년간 열심히 배웠다.

매일 매일 증빙을 철하고 전표를 치면서도 버틴 건 조금만 있으면 정규직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희망 덕분이었다.

누구한텐 당연한 것이 다른 이에게는 절박한 것일 수도 있다.

이런 소박한 희망을 꿈꾸던 어린 소녀가 복도에서 어깨 한번 부딪쳤다고, 그래서 죽을죄를 지었다며 읍소하지 않았다고 폭행까지 당한 후 해고되는 것이다.

그 짧은 일이 분이 일 년간의 고생을 헛되이 만들었고 희망을 송두리째 뽑게 되었다.

예전 기억을 떠올렸으나 도무지 떠오르는 게 별로 없다.

그냥 잠깐 같이 근무하다가 퇴사한 직원으로만 기억하고 있었는데.

과거에 분명 대략적인 이유는 들었겠지만, 그 정도면 잘리는 게 맞다고 생각했었는지 대수롭지 않게 여겨 지금 기억이 나질 않는 게 분명하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나도 나쁜 놈이었다.

남의 고통 관심도 없고 내 성공만 좇으며 살아온 그런 나쁜 놈.

* * *

다음 날 아침, 그리고 다다음 날 아침.

여전히 8시 30분 분식집 구석 테이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둘러보았지만 역시 아람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출근해서는 한마디도 안 한 채 점심은 조용히 혼자 도시락을 먹고 6시에 칼퇴했다.

도무지 무슨 위로의 말을 건네야 할지도 모르겠고 위로의 말이라고 해 봐야 도움이 안 될 게 뻔해 냅 뒀다.

무슨 수를 써서 퇴사를 막을까 고민해보지만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냥 지켜볼 수밖에.

그러던 어느 날 아침.

8시 30분 분식집에 들어서자 아람이가 앉아 있었다.

"과장님 왜 인제 오세요?"

웃는 얼굴을 한 게 전보다 한결 나아진 듯 보였다.

한참 어린 나이에 벌써 사회의 어두운 면을 온몸으로 겪었다.

"안녕. 요즘 며칠 통 안 보이더니."

"아침 먹기 싫어서요. 요즘."

"근데 오늘은?"

"오늘 마지막 출근날이에요. 결국 한우는 못 얻어먹겠네요."

풀 죽은 듯 잔뜩 가라앉은 어조로 답했다.

"얘기 들었어. 당한 건 넌데 네가 왜 그만둬? 남아서 복수해야지. 내가 한번 방법을 찾아볼 테니깐 쪼금만 기다려 봐."

"아니에요. 여기 있으면 복수도 못 하는 거 아시잖아요. 그리고 저 대학 가려고요."

"대학? 갑자기 왜?"

"미팅도 해보고 싶고. 나중에 괜찮은 회사 정규직으로 입사하려고요."

할 말이 없고 부끄럽다. 기성세대로서 어린 친구들에게 이런 시대를 물려줬다는 게.

아람이가 소리 없이 흐느꼈다.

그런데 왼쪽 주먹으로 눈물을 훔치면서도 오른손으로는 젓가락질을 쉬지 않았다.

난 이제 겨우 꼬투리 한 개 먹었는데 김밥 두 줄은 온데간데없고 라면 그릇은 설거지해놓은 것마냥 고춧가루 하나 안 보였다.

"아람아. 대학도 좋은데. 먼저 적성이 뭔지 한번 찾아봐."

아람이는 그렇게 회사를 그만두었다.

씩씩한 모습을 보니 다음 행보도 나름 잘 헤쳐나갈 거라는 생각이 들어 조금은 안심이었다.

* * *

며칠 후 오랜만에 모두 야근 모드다.

1월초 결산 시즌이 되자 50개가 넘는 국내외 전 계열사 실적 취합이 한참이었다.

자기 일을 끝낸 직원들도 야근하는 직원에게 미안한 마음이 드는지 차마 퇴근하지 못하고 눈치만 보고 있었다.

물론 성환이는 자리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점심때 약속 있다고 나갔는데 그냥 퇴근한 모양이었다.

'그래 안 보이는 게 도와주는 거다. 신경 끄자.'

어차피 어디냐고 물어볼 수도 없고.

그러고 보니 전화번호도 모른다.

조직도에는 사진이나 휴대전화 번호는커녕 회사 자리 번호도 안 뜬다.

연결되지 않을 권리.

부럽긴 하다.

밤 10시 30분.

수진이가 파일 하나에 전체 자회사 실적 취합해 놓은 자료를 건넸다.

건네받은 파일을 살짝 보고 덮은 뒤 자리를 돌아보니 원모가 불안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실수라도 하면 인수인계 잘못한 자기가 깨질 것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아는 거다.

"원모야, 네가 봐줘."

임원이 된 후 최종 요약보고만 받아서인지 도무지 이런 방대한 양의 보고서를 쳐다볼 수가 없었다.

두 장만 넘어가면 신경질이 솟구친다.

원모와 수진이가 한 시간 동안 씨름을 하더니 다시 보고서를 건네는데, 한 번만 쓱 열었는데도 양식과 분량이 그대로였다.

"도대체 뭘 바꾼 거냐? 이거 나한테 보여 주려고 만든 거지?"

"네. 과장님."

"내가 보고 나서 부장님한테는 뭘로 보고하지?"

"네. 부장님께는 보고 양식이 따로 있습니다."

"상무님은?"

"상무님께는 한 장짜리 요약보고서로 다시 만들고요."

똑같은 일을 세 번이나 하다니.

그렇다. 실무진일 때는 쓸데없는 보고서 쓴다고 고생만 하다가 자기가 상사가 되면 뻔히 알면서도 고치려 들질 않는다.

밑에서는 원래 다 고생하는 거다.

나도 그러고 컸다. 이런 맘이었을 것이다.

수많은 회의를 하는 것은 회의의 주최자인 상급자가 자기의 상사에게 보고하기 위한 정보를 얻기 위함일뿐더러 혹시 모를 질문에 대한 답변을 준비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준비한 데서가 아닌 엉뚱한 곳에서 질문이 나오고, 어버버 대답도 제대로 못 한 상사는 화풀이를 보고서 준비한 부하직원들에게 푼다.

보고의 본질적인 목적은 구성원과 리더 간의 의사소통인데 본질은 흐려지고 보고를 위한 보고만 남는 것이다.

그래, 같이 종살이하는 처지에 불필요한 건 없애는 게 맞다.

"됐으니깐. 상무님 보고서 양식으로 만들고 나머지는 양식 무시하고 백데이터로 들고 있어. 혹시 질문하면 대답은 해야 하니깐"

"네……. 그럼 부장님은요?"

"냅 둬. 같은 자료로 내가 그냥 설명하면 되니깐."

한 장짜리 보고서로 간추린다고 끙끙대던 원모가 전화 한 통을 받더니 급하게 짐을 챙겼다.

"과장님 급한 일이 있어서 먼저 가 보겠습니다. 보고서는 수진이가 수정해서 보여드릴 겁니다."

"뭔데? 갑자기?"

"별거 아닙니다."

원모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말을 내뱉다 거두었다.

"뭐냐니깐 확 그냥!"

한 손을 올리고 뭔 개소리를 지껄이냐는 듯한 눈빛으로 쏘아보니 그제야 실토했다.

요즈음 며칠째 성환이 밤마다 전화해서 강남 술집으로 불러낸다고.

처음에는 따로 술 한잔 같이하자는지 알고 기분 좋게 나갔으나.

그럴 리가.

알고 보니 팀 공용 법카 가지고 와서 계산하라는 거였다.

예전 생에서 주로 내 담당이었었다.

허구한 날 불러내는 바람에 한참 자다가도 혹은 술 취해서 헤롱헤롱 하는데도 억지로 일어나서 주섬주섬 걸치고 나가 법카로 긁고 차로 집까지 모셔다 주고는 했었다.

근신 중이라 자기카드 쓰기 곤란했던 것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친구들 앞에서 직원들 종 부리듯이 유세 한번 떨어 보기 위함이 더 컸을 것이다.

룸 가운데 자리에 두 팔을 걸치고 떡하니 다리 꼬고 앉아서 손짓으로 이래라저래라.

그 모멸감을 그 당시에는 당연히 받아야 하는 줄 알고 꾹 참았었다.

지금 원모가 그러고 있을 게 분명하다.

곧 결혼도 해야 하고 앞으로 들어갈 돈이 많을 테니.

"전화 줘 봐. 이 번호야?"

"네. 근데 많이 취하신 거 같은데요?"

일단 내 핸드폰에 번호를 저장하고 통화버튼을 눌렀다.

"누구. 쉐에요?"

"죄송합니다. 잘못 걸었습니다."

뚜뚜뚜뚜.

만취각이다.

이미 혀가 꼬일 대로 꼬여서 발음도 제대로 못 했다.

* * *

원모를 앞세우고 간 곳은 역삼역 사거리 뒷골목.

순백의 간판에 검은색 명조체 글씨로 적혀 있다.

'일기장'

간판만 봐서는 무슨 업종인지 전혀 분간이 안 가는데 한때 룸살롱 간판이 대부분 이러했다.

간판 보고 들어오는 뜨내기 워킹 손님은 없으니 상관없다.

오히려 눈에 안 띄고 심플한 게 알고 오는 손님들한테만 보이면 그만이다.

복도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자욱한 담배 연기를 뚫고 원모가 앞장섰다.

안면을 튼 모양인지 누구인지, 어디 가는지 잡고 물어보는 웨이터가 하나도 없었다.

미로 같은 골목길을 굽이굽이 잘도 가는데.

"뭐야. 어디 방인지 알아?"

"네 저 방이요. 매일 같은 방이에요."

"그래 이제 넌 들어가 봐."

"그래도 조성환님이 부르셨는데."

잔뜩 찌푸린 눈빛으로 노려보니 원모가 조용히 계단을 총총 내려갔다.

3층 구석 방 이 방 빼고는 다른 손님은 전혀 없었다.

방 안에서는 밴드 연주에 맞추어 한데 뒤엉켜서 고성방가 난리부르스다.

그냥 넘어갈 순 없지.

휴대폰을 열고 녹화 버튼을 누른 채 와이셔츠 주머니에 넣고 방에 들어가는데, 다 취해서인지 아무도 찍고 있는 줄 모르는 듯했다.

노래가 끝나고 이제야 나를 발견한 성환.

"어? 천과장이네? 일로 와 봐."

술기운에서인지 친구들 앞에서 폼을 잡으려는지 안 하던 반말을 다 한다.

성환은 내 어깨에 팔을 올리고는 사람들한테 소개했다.

"애들아, 인사해! 우리 팀 천태평과장! 태평이래, 태평이. 푸하하."

성환이 꽤 취했는지 이름 갖고 놀려댔다.

어렸을 때부터 쭉 이름 때문에 놀림받아왔지만, 그런 건 잘 단련이 안 되는지 어른이 된 지금까지도 놀림 받으면 기분이 몹시 나쁘다.

어깨에서 손을 뿌리치고는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푹 쉬었다.

"좆대리 취했네. 그만 들어가지."

"뭐 조대리?"

"아니 조대리 말고 좆대리."

성환이 취기에 잘 못 알아들은 모양이다.

문쪽에 앉은 오른팔 장미 문신을 한 양아치 같은 놈이 알아들었는지 찡그린 표정 속에 굳게 입술을 다물고 노려보고 있었다.

"법카가 개인적으로 술 먹으라고 쓰는 건 아니니 계산은 알아서들 하시고. 그럼 이만."

문을 쾅 닫고 나가는데 몇 초 뒤 성환이 욕하면서 따라 나왔다.

'깨톡'

난 뒤돌아서 핸드폰 보라며 조용히 손짓해 주었다.

톡을 확인한 성환은 술이 확 깬 표정이었다.

제정신이 아닌 듯 한껏 풀린 눈과 흐느적거리는 몸짓으로 도우미들과 뒤엉켜 춤추는 동영상과 함께 한 줄이 적혀 있다.

'회장님이 자랑스러워하실 듯? 벌써 풍류를 알 나이가 되셨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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