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손안의 재벌-6화 (6/191)

6화 등장

오전 7시.

알람을 맞추지 않았는데도 저절로 눈이 떠졌다.

수십 년의 직장생활 패턴이 아예 몸에 새겨졌다.

특별히 할 일도 없어 일찍 출근해서 시간도 때울 겸 회사 앞 분식집에 들렀다.

곧이어 낯익은 여직원이 한 명 들어왔다.

아람이었다.

"안녕. 아람아 식사 안 했으면 같이 먹자. 다 시켜"

"마침 계시네요. 아침값 굳었네요. 크크."

아람이의 표정을 보니 당한 게 분명하다.

지하철역에서부터 나를 봤지만 인사하기는 귀찮고 해서 멀찌감치 따라오다 마침 내가 분식집 들어가는 걸 보고 부리나케 따라 들어왔을 거다.

"누가 사준데?"

"헉. 이럴 수가. 저 갈게요."

"아니야 생명의 은인인데 다 먹어. 메뉴판 처음부터 끝까지도 괜찮아."

"에게. 분식집에서 끝내려고요? 담에 한우로 쏘시죠. 고마우시면."

밝아서 좋다.

한결 친해진 기분에 이것저것 묻고 싶은 거 보니 나도 꼰대인가 보다.

"근데 왜 여기서 아침을 먹어? 부모님하고 산다고 안 했나?"

"엄마도 출근하시고 바쁘세요. 먹고살기 힘든 세상인데 모두가 나가서 벌어야죠."

일가족이 모두 일해야만 근근이 먹고 살아갈 수 있는 서울 생활.

참 고달프다.

* * *

일주일 뒤 8시 30분.

출근 시간까지 30분이 남아 또 회사 앞 분식집에 들어섰다.

"안녕하세요. 과장님 또 만났네요."

일주일째다.

하루 이틀 지나더니 이제 아예 대놓고 기다린다.

기다리는 걸 아니깐 안 들를 수도 없고.

"누가 보면 우연히 만난 줄 알겠다."

"어머! 그럼 일부러 과장님이 저 쫓아온 거예요?"

"내가 졌다. 그래 우연히다 그냥. 아무튼 다 시켜 먹어"

"잘 먹겠습니다."

어제 저녁부터 안 먹은 게 확실하다.

스무 살 여자아이가 김밥 세 줄에 라면 두 개, 삶은 계란 4개와 토스트까지 먹을 수 있을까?

"쭈양이냐?"

"쭈양이라뇨? 신메뉴에요?"

"아니다. 먹어 그냥. 많이 먹어."

좀 단련만 시키면 먹방 유튜버로 떡상할 인재가 될 게 틀림없다.

11시 30분

점심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마침 김병국부장은 약속 있다고 먼저 나갔고 직원들은 다들 컴퓨터 화면만 멍하니 보며 12시가 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성환은 매번 점심시간 한참 전에 사라지더니 오늘은 통 자리 뜰 생각을 안 하고 있었다.

습관이 무섭긴하다.

다짐과는 다르게 내 몸은 아직 이놈 눈치를 보고 있나 보다.

'정신 차리자. 괜찮아, 이제 달라졌잖아.'

노예근성이 스멀스멀 나오는 나 자신을 다시 다 잡았다.

점심시간이라도 여러 사람과 부대낄 순 없다.

"나 밥 먹으러 갈게."

뒷자리 원모한테 말하고 일어나는데 성환이 기다렸다는 듯이 같이 일어난다.

"같이 가시죠. 과장님."

"구내식당 갈 건데?"

"네. 구내식당이요. 다른 분들도 같이 가시죠."

이놈이 갑자기 왜 그러지?

평사원 코스프레인가? 아님 서민체험?

성환이 온 뒤로 웹툰도 맘대로 못 보고 빈 엑셀 파일만 노려보던 원모가 기지개를 켜더니 말 끝나기 무섭게 제일 먼저 일어났다.

"네, 알겠습니다."

주위 직원들 하나둘 주섬주섬 옷을 챙겨입고 구내식당을 향했다.

성환은 구내식당이 처음인지, 아님 다른 팀에 있을 땐 직원들이 식판도 들어줬는지 자기 차례가 되었는데도 통 식판을 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를 눈치챈 원모가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가 식판 두 개를 집었다.

내가 손짓으로 땅을 가리키며 내려 놓으라고 하자 못 이기는 척 내려 놓았다.

"성환님 식판 여기요."

원모가 식판을 가리키자 그제야 "아 네" 하며 식판을 집었다.

깜박했다는 건지, 아니면 들 생각이 없었다는 건지 도무지 모르겠다.

메뉴는 주꾸미 볶음에 된장찌개, 짝퉁 스팸 같은 햄 한 조각에 김치가 전부였다.

주꾸미는 지난 봄에 다이어트 살벌하게 했는지 크기가 꼭 꼴뚜기만 했다.

그나마 몇 마리 없어 메뉴판에 안 적혀있었으면 그냥 야채볶음인 줄 알았을 거다.

점심이라도 편하게 혼자 먹으면 좋겠는데, 괜스레 따라 나와서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더군다나 여기저기에서 성환을 알아보고는 수군대는 데 신경 쓰였다.

신경 쓰지 말자. 저런 자잘한 소리까지 다 들을 필요는 없잖아.

"맛 드럽게 없네. 그쵸? 입에는 잘 안 맞으시죠?"

담부턴 그냥 좋은 식당가서 따로 먹으라고 타일렀으나 이놈은 못 알아듣는 듯했다.

"아뇨. 먹을 만 한데요? 제 입에는."

밥집 아들한테 한 말도 아닌데 괜히 원모가 눈을 둥그렇게 뜨며 역성을 들었다.

"에이 과장님. 바깥 식당보단 못해도 우리 회사가 구내식당에선 최고라고 소문났어요. 블로그에도 많이 올라오고."

성환은 오물오물 씹는 둥 마는 둥 하다가 덧붙였다.

"회장님께서 공장 근무하실 때 근로자분들이랑 같이 식사하셨다면서 저한테도 웬만하면 구내식당에서 직원분들하고 같이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표정을 보아하니 체험 삶의 현장에서 하루 일하고 일당 일도 받은 양 한결 뿌듯해하는 거 같았다.

말은 그렇게 해도 식판의 반을 넘게 남겼다.

맛없다면서도 핥아먹은 나랑 원모는 어떡하라고.

점심시간이 끝나는 한시.

한 시간 동안 꺼져있던 불이 켜지고 직원들은 하나둘 오후 업무를 준비했다.

인터넷을 켜고 회사 메일을 열자 새 편지가 도착했다.

제목은 급여명세서.

25일 오늘은 월급날이었다.

어젯밤 혼술 때의 다짐은 어디로 갔는지 일단 월급을 받고 보니 기분이 급 좋아졌다.

상무에서 과장으로 돌아온 후 맞은 첫 월급.

두근두근한 마음에 메일을 열었다.

'이럴 수가.'

입금액이 상무 때 월급의 반의반도 안 된다.

그래도 과장인데 월급이 이 정도밖에 안 됐나?

어렴풋이 기억은 했었으나 며칠 전과 그 간극이 너무나도 컸다.

한 푼을 안 써도 1억을 모으려면 몇 년이 걸릴지 모른다.

그나마 혼자 산다고 생활비는 많이 안 들지만 지금 살고 있는 오피스텔 월세는 내야 했다.

게다가 왕복 교통비에 점심도 먹어야 하고 매일 아침 뜨아(뜨거운 아메리카노) 한 잔도 해야 하는데.

답이 없다.

쓰는 돈까지 생각하면 몇 년이 아니라 10년은 있어야지 1억을 모을 수 있을 거 같다.

다른 길을 찾아야 한다.

우선 네이버 증권에 접속해 주식시세를 찾았다.

별성전자, 현재차, 파스코 이전 생에서의 가격보다는 매우 저렴했으나 그래도 크게 오르려면 한참 남았다.

직접투자든 간접투자든 주식을 사는 건 몇 년간 패스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 '빅숏'

공포 즉 하락장에 배팅하면 된다.

개인 투자자가 공매도를 할 수는 없는 시절이고 선물 옵션은 지금 돈으로는 증거금도 못 낼 정도다.

그러나 적은 돈으로도 시작할 수 있는 간접상품이 있으니 하락장이 오기 전에 투자하자.

어떤 주식을 100원에 판다고 미리 정해놓고 주가가 떨어져서 50원이 되면 그 차액 50원만큼 벌 수 있다.

서브프라임 사태보단 덜하지만 그래도 한동안 휘청거릴만한 유로존 재정위기가 곧 닥칠 테니 이 기회를 놓쳐선 안 된다.

과거를 대략 알고 있는 마당에 마땅히 준비해야 한다.

안 쓰고 모아서 위기 때 베팅하자.

내일부턴 점심은 구내식당만, 커피는 탕비실 믹스 커피에 택시는 안 타리라.

시간은 한참 지나 바늘이 세 시를 가리키고 배꼽시계는 꼬르륵 소리를 냈다.

내일부터는 얄짤 없으니 오늘 마지막 간식타임을 가질까 하고 아람이를 찾는데 자리에 없다.

그런데 갑자기 임상무가 방에서 헐레벌떡 나와 부동자세로 섰다.

양복 겉옷은 걸쳤지만, 발가락은 삐죽 나온 슬리퍼를 신고 있는 걸 보니 급하게 나온 게 틀림없었다.

이어서 검은색 정장에 넥타이 갖추고 어깨에 뽕 넣은 듯 각 잡힌 남자 두어 명이 사무실로 뛰어 들어왔다.

"전무님이십니다."

일어나 맞으라는 얘기.

예고 없는 방문이다.

회장이나 대표이사도 아닌 겨우 전무가 이 정도면 그냥 월급쟁이는 아닐 테고.

바로 조윤경이다.

날 동작대교에서 뛰어내리게 만든, 잘근잘근 씹어먹어도 도저히 화가 풀릴 거 같지 않은 철천지원수가 시야에 들어왔다.

하얗게 분칠한 얼굴에 닭을 잡아먹었는지 입술은 온통 피칠을 한 듯했다.

가까이 그녀가 다가오자 내 분노는 더욱더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참아야 하느니라. 지금 달려 들어봐야 기회만 날리는 꼴이다.

언젠가 기회가 반드시 올 것이다.

그때까지 참고 기다려야 한다.

홍보팀에서의 작업 덕인지 언론에서는 그녀가 능력과 미모, 패션 센스를 겸비한 셀럽들의 셀럽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실제로 가까이서 본다면 왜 '걸그룹 센터 미모', '아이돌 스타일'이라는 말이 나오는지 그 이유를 쉽게 알 수 있을 정도의 미모를 갖춘 건 사실이다.

저렇게 환하게 웃는 얼굴 뒤로 온갖 악랄한 심성을 숨기고 있는 것도 모르고.

외모는 물론 과감한 경영 스타일도 아버지와 판박이라는 '리틀 조회장'

아들이었다면 성환을 제치고 전부를 물려받았을 테지만, 딸이라서 그룹 내 반의 반도 안 되는 일부 계열사만 물려받기로 암묵적인 합의가 되어 있었다.

물론 머지않은 미래엔 합의를 깨고 천하제일을 독차지하려 할 테지만.

조윤경을 영접하는 임상무.

두 손을 뻗고 앞장서서 성환 자리로 안내하는데 조윤경은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이미 수행비서들이 가는 길을 닦아 놓았는지 한 번에 찾아갔다.

"누나 왔어?"

반가운 표정으로 맞이하는 성환.

언젠간 뒤통수 제대로 맞는지도 모르고 다정하기 그지없었다.

"누나라니! 여긴 회산데 호칭은 조심해야지! 아무튼 조대리 잘 적응하나 보러 왔어."

눈에서 부글부글 레이저를 쏘는 듯 쳐다보는 내 표정이 티가 났는지 수행비서가 노려봤다.

왜 눈 안 깔지 않냐는 신호였다.

답이 없다 이놈들.

자기가 모시는 분이 남도 똑같이 모셔야 하는지 안다.

18층의 전 직원이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서 있는 거 뻔히 알면서도 조윤경은 주위 직원들한테 앉아서 일보라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자존심은 상하지만 괜한 분란 일으키지 말자 생각하고 서서 남매의 담소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5분도 족히 넘게 쓸데없는 말만 늘어놓다가 간식 꾸러미를 던져 놓고는 사라졌다.

다시 찾은 평온한 사무실.

갑자기 누가 울면서 사무실로 뛰쳐 들어왔다.

아람이었다.

울먹이며 사무실로 뛰쳐 들어온 아람이는 그대로 자리에 엎드려 훌쩍거렸다.

"아람아! 무슨 일이야?"

아무 대답이 없다.

"왜 그래 아람아?"

고개를 파묻은 어깨 사이로 울음 섞인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계약 해지하겠대요."

경리 여직원들이 하나둘 모여 엎드려 울고 있는 아람이를 둘러쌌다.

아람이가 한참을 울고 난 후.

고참 여직원이 일찍 들어가 마음 좀 추스르라며 아람이를 퇴근시켰다.

아람이를 보내고 자리로 돌아온 대리를 불러세웠다.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갑자기 당황스럽게? 계약해지는 또 뭐고?"

"아까 부장님한테 근로계약 종료된다고 통보받았대요. 지난주에는 분명 1년 더 연장하고 내년에 정규직 전환시켜 주겠다고 했다는데."

"그런데 갑자기 왜요?"

"몰라요. TO가 줄었다면서 미안하다고 했나 봐요."

걱정하는 말투이지만 백대리의 표정에는 안도의 빛도 얼핏 겹쳐졌다.

하는 일은 같지만, 정규직에다 연차가 가장 많아 높은 급여를 받고 있는 자기를 그만두게 하는 게 회사로서는 이익일 텐데, 다행히 자신은 칼날을 피해 갔다는 생각에서일 것이다.

어쩌면 그런 피해는 정규직이 아닌 계약직이 받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자기도 계약직에서 정규직 전환되었으면서 과거는 이미 잊었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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