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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안의 재벌-5화 (5/191)

5화 월스트리트저널을 놓아라 - 2

3분 정도 지났을까.

비서팀 직원 둘이 계단으로 뛰어 올라온 듯 헉헉대며 숨도 고르지 못한 채 성환 앞에 각 잡고 도열했다.

한참 나이 많이 보이는 부장급 되는 직원이 눈에 한껏 힘주고는 날 노려보더니 떠넘기기 시전이었다.

"어제 천태평 과장한테 협조 부탁드리고 확답까지 받았습니다."

성환은 대답 없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부장한테 혼나 봐라 라는 거다.

마음대로 까라라는 무언의 승낙이었다.

나도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몇 년만 버티면 되는데, 편하게 버티려면 비서팀과 관계 정립을 초장에 확실히 해 놔야 하기 때문이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짐짓 모르는 척한 내 대답에 화가 더 치밀었는지 부장이 대뜸 달려들었다.

"우리 애들이 당신한테 조성환님 책상에 놓아드리라고 한 거 못 들었어?"

반말 짓거리에 똑같이 반말로 응수했다.

"말이 짧네. 목소리 좀 낮추지? 여기 다들 바쁘게 일하는 거 안 보여?"

"뭐라고?"

부장은 예기치 않은 반응에 당황했는지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반대편 쪽 마케팅팀을 포함한 모두가 일어나서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보고 있었다.

완전히 관전 모드다.

아무도 중재에 나설 생각은 없어 보였다.

김병국부장은 괜히 자기까지 불똥이 튈까 보고 들어가는 척 자리를 피했다.

그래 차라리 빠져라. 훼방이나 놓지 말고.

"분명 내 일 아니라고 말했는데? 그건 못 들었나 보지?"

"뭐라고?"

잔뜩 찌푸린 미간이 여간 당황한 게 아닌 듯했다.

옆자리 성환 표정 역시 처음 당해보는 듯한 상황에 안절부절못하는 듯했다.

"업무시간에 누가 신문을 처봐? 그것도 대리가? 여기가 무슨 홍보팀인 줄 아나. 보고 싶으면 조용히 쉬는 시간에 회의실에 짱 박혀서 보든지. 여기가 어디라고!"

화내면 알아서 내가 알아서 깨갱할 줄 알았나 보다.

아니 매번 그래왔었겠지. 그런데 난 사뭇 결이 다르다는 걸 느낀 듯했다.

내가 세게 나오는 데다 틀린 말도 하나 없으니 심히 난감한 표정이었다.

그래도 보는 눈도 많고 쪽팔리는지 한 번 더 버럭했다.

"아니 이게 어디서? 너 직급이 뭐야? 어디서 이런 말버릇이야?"

"과장이다. 왜. 당신이 월급 주냐? 어디서 직급 갖고? 하여간……."

일이 점점 커졌다.

더 놔둬 봐야 쪽팔리는 건 자기라는 걸 아는지 성환이 나섰다.

"부장님. 뭔가 오해가 있으셨나 본데요."

"아닙니다. 제가 해결하겠……."

"아니요."

중간에 말을 끊는 성환.

불안하게 흔들리는 미소를 띠고는 있지만, 마치 보라는 듯이 손에 쥔 종이컵을 구겨 버렸다.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만 좀 하지?'라는 특유의 재벌 스타일 제스처였다.

대놓고 말하는 건 모양이 빠지는지 불편한 심기를 꼭 이렇게 작은 행동으로 살짝 내비친다.

이제야 성환의 의중을 눈치챈 듯한 비서팀 직원들이 가볍게 목례를 한 후 사무실을 나갔다.

쇠뿔도 단김에 빼야 한다. 여세를 몰아 쐐기를 박아야 한다.

"조대리님, 이리로 와 보세요!"

대답도 기척도 없다.

우리 부서에는 조대리가 조성환 하나다.

설마 자기 부르는지 몰랐나 보다.

"조성환 대리! 와 보라니까!"

목소리가 좀 컸나? 아님 못 들을 말을 들은 건가?

자금파트, IR파트 사람들이 모두 딴짓하는 척하며 다시 온 신경을 내 자리에 집중하는 게 느껴졌다.

곧 시작될 구경거리를 놓치지 않으려 함이었다.

상상도 못 해봐서 어떤 식으로 결과가 나올지 너무 궁금한, 그런 구경거리.

이제야 자기 부른지 알게 된 조성환은 걸음도 당당하게 내 앞으로 다가왔다.

"네 무슨 일이시죠?"

고개를 빳빳이 들고는 있으나 허리는 꾸부정한 어정쩡한 자세.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해서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마음의 준비가 안 되어 있는 상태였다.

준비가 안 된 상황에서 얼떨결에 한 방 맞으면 누구나 그렇게 된다.

시간이 지나 상황 파악이 되면 그제야 왜 그냥 넘어갔지? 후회하는.

아무튼 그런 준비 안 된 벙찐 상태.

십 년을 가까이에서 보아온 바로는 이놈은 사자 자리에 앉아 있는 고양이다.

약자한테 혹은 강자라도 알아서 기는 자에게는 더욱더 가혹하게 대하는.

예전엔 맹목적으로 충성을 다하여 모셨지만, 지금은 아니다.

더군다나 지금은 직장 내에서 나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지도 않았다.

갖고 있다고 한들 달라질 건 없겠지만.

여기서 물러서면 안 된다.

성환에게 앉으라는 말 없이 계속 세워놓은 채 말을 이어갔다.

"우리 팀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아시나요?"

"네. 대충 알고 있습니다."

"대충은 안 되고 잘 알고 있어야죠."

"아. 네."

"우리 팀이 무슨 파트가 있는지는 압니까?"

"네?"

"재무팀이 무슨 무슨 파트가 있냐고."

대답도 없고 표정을 보아하니 역시 이놈은 자기가 발령받은 팀이 어떤 팀인지 무슨 파트가 있는지 팀원은 몇 명인지 아무것도 모르는 게 확실했다.

갈구는 소리가 들리는지 방금 전 사무실로 돌아온 김부장 뒷모습이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우리팀은 조성환님이 발령받은 경리파트랑 자금파트 그리고 IR파트가 있으니깐 내일까지 파트별로 무슨 일을 하는지 파악해 봐요. 내일 물어볼 테니깐."

사실 나도 재무팀장이 되고 나서야 파트별로 무슨 일을 하는지 제대로 알 수 있었지만, 그래도 발령받았는데 대충이라도 알고 있어야 하는 게 맞으니 내가 트집 잡아 갈군 건 아니다.

내가 있는 경리파트는 결산을 통해 기업 실적을 산출해서 보고하고 얼마를 벌었다고 세금 신고하고 납부하는 등 재무와 세무 관련 일을 하고 있다.

자금파트는 자금수지계획을 짜서 어떻게 조달하고 언제 어디에 쓰는지를 결정하는 일을 했다.

IR파트는 기업설명회, 컨퍼런스 등을 통해 기업의 경영활동 정보를 공유하고 홍보함으로써 기업가치를 높이는 일을 한다.

결국 CFO가 해야 하는 일을 나눠서 하는 거다.

뭔 말인지 못 알아들은 건지, 아니면 태어나서 처음 숙제 같은 걸 하라고 해서였는지 한동안 그저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었다.

"조대리님 내 말 못 알아들었어요?"

이제야 상황 파악이 된 듯 대답했다.

"아……. 네. 알겠습니다."

못마땅한 표정이긴 하나 그래도 대답을 하긴 했다.

연이은 기선제압. 우선 성공이었다.

뜻밖에도 성환이 반격을 안 했다.

반격하면 어떡할지 잠시 동안 걱정했었다.

그냥 깨갱해야 하나 아님 연이어서 깨부숴야 하나 순간순간 고민했었는데.

다행이었다.

앞으로 조금은 편해지겠다.

오전에 한바탕하고 나니 사무실에서 종일 아무도 나에게 말을 걸어오질 않았다.

하는 일 없이 시간은 잘만 갔다.

긴 하루가 지나고 퇴근하는 길 사원 카드를 대고 출입구를 나서자마자 뒤에서 부르는 다정한 소리.

이상현이었다.

다정한 표정과 목소리 뒤에 감춰진 잔인함이 생각났다.

은혜도 모르는 죽일 놈의 자식!

언젠간 갚아줄 복수를 위해선 때를 기다려야 한다는 생각에 또다시 끓어오르는 분노를 가까스로 참았다.

"태평아! 벌써 가게?"

어깨를 두르며 다정한 척.

역겹지만 참았다.

내색해 봐야 좋을 게 하나도 없으니.

"벌써라니 6신데"

"아까 한따까리 했다매?"

소문이 빠르기도 하다. 이미 퍼질 대로 퍼져서 왜곡 확대 재생산 중일 게 뻔하다.

"뭔 소리야?"

"네가 조성환님 앞에서 비서실 김부장 깠다매? 어쩌려고 그랬어. 김부장도 그렇지만 조성환님인데 괜찮겠어? 아무튼 정말 조심해라."

"알게 뭐야. 다짜고짜 반말 씨불이던데."

이놈이 엄지와 검지를 둥그렇게 모아 꺾으며 윙크를 날렸다.

"불금인데 소주 한잔해야지?"

"그럴……. 아 미안. 나 가볼 데가 있다. 먼저 갈게!"

나도 모르게 예스라고 할 뻔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는 한 번도 뺀 적이 없었다.

밤 12시 넘어서 전화와도 슬리퍼 차림에 나가곤 했었는데.

거기다 주말에 혼자 있는 집에 들어가기 싫어 다짜고짜 불러내 술 마시다 보니 으레 주말엔 상현이와 소주 한잔하는 것이 고정 스케줄이었다.

상현은 예상 못한 뺀찌에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어깨동무한 팔을 내려놓았다.

힘 빠진 목소리로.

"그래? 그럼 월요일에 점심이나 먹자."

"그래. 잘 들어가."

이제 회사에서는 마음 줄 친구가 없다.

어렸을 적 친구들은 바쁘다는 핑계로 하나둘씩 멀어지거나, 혹은 친하다는 이유로 아무렇지도 않게 서로 가슴에 생채기를 내더니 이제는 대부분 만나기 불편한 관계가 되었다.

그나마 회사에 친구라고 하나 남은 것도 알고 보니 적이었다.

그것도 죽음으로 몰고 간 철천지원수였다.

연락할 곳도 그렇다고 갈 곳도 마땅치 않았다.

* * *

마트에서 20% 세일하는 삼겹살 한 근을 사다가 부엌에서 소맥을 말았다.

내가 왜 이렇게 친구가 없어졌을까?

그렇게까지 치열하게 살았던 이유는 뭘까?

매달 25일에 찍히는 월급 몇백만 원이 나의 인생 그리고 인간관계와 바꿀 수 있을 만큼 소중한 것이었을까?

몇백만 원이 아니라 몇천, 몇억이었다면 그만한 가치가 있는 걸까?

치열하게 살아온 수십 년이 아무 의미가 없었다는 걸 삶이 한번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제부터는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살아야 한다.

게다가 나에겐 무기가 있다.

마치 고딩 때 하던 우주 전략게임에서 'Show me the money'를 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돈을 많이 벌어서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고, 하기 싫은 일은 손 하나 까딱대지 말자.

그리고 잊지 말자. 처절한 복수를

우선은 종잣돈 1억을 모으자.

1억을 가지고 주식투자? 배트코인?

1억으로 불리기엔 주식은 너무 느리다. 배트코인 이거는 떡상하려면 몇 년도 더 남았다.

우선은 선물, 옵션으로 자산을 마구마구 늘려서 천억을 넘기면 헤지펀드를 만드는 거다.

레버리지를 일으켜 지난 생에 이미 검증된 소스로 위험자산에 투자한다면 이건 돈 인쇄기나 다름없을 것이다.

어쩌면 조 단위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조 단위가 된다면 그다음부터는 기업사냥이다.

별스타그램의 주인은 피이스북이 아닌 내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냥감으로 천하제일을 삼켜 조윤경, 이상현 이 자들을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거다.

낭떠러지로 몰아 한 손으로 간신히 버티고 있을 때 그 손을 밟아줄 것이다.

절대 자비는 없다.

이를 위해선 천하제일에 있는 동안 조성환을 내 편으로 만들어놔야 한다. 낭떠러지를 붙잡고 있는 조윤경의 손을 이놈이 밟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 * *

다음날 오전 7시.

빠빠빠 빠빠 빠빠빠빠!

핸드폰 알람은 제일 듣기 싫은 소리로 해놔야 듣기 싫어서라도 침대에서 일어날 수 있다.

대강 씻는 둥 마는 둥 하고 만원 지하철에서 몸을 부대끼며 사람 냄새 맡아가며 회사 앞에서 내리니 마치 퇴근 시간이라도 된 것마냥 몸이 축 늘어졌다.

18층에 도착하여 회전문을 통과하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출납 여직원이 몸을 일으켜 90도로 숙이고 마주친 직원들은 하나같이 경직된 자세로 몸을 구부려 두 손 모아 인사했다.

대놓고 한따까리 한 이후 확실히 달라지긴 달라졌다.

그런데 직원들의 태도 이런 건 사실 눈에 잘 안 들어왔다. 걸리적거리기만 할 뿐.

오늘도 신경은 온통 내 자리에 쏠렸다.

파티션을 돌아 드디어 보이는 내 책상!

그런데.

없다! 월스트리트 저널.

'휴'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내쉬어졌다.

사실 오늘 신문이 내 자리에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주말 내내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조성환 책상에 던져둬야 할지, 지난번처럼 옆에다 치울지, 아니면 쓰레기통에 처 박을지.

사실 막 나가도 크게 상관은 없다만.

내 인생에 별 상관도 없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관계와의 불필요한 다툼으로 감정만 과잉소모하면 나만 손해다.

중요하지 않은 관계와 척질 필요까진 없었는데 이렇게 넘어가서 일단은 잘 됐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뭔가가 이상하다.

조성환의 책상 쪽을 둘러보니 거기에도 월스트리트저널이 없었다.

오만가지 짜증과 걱정이 밀려오는데 멀리서 회의실 문이 열리더니 성환이 쓱 나왔다.

한 손에는 다 마신 듯한 커피를 들고 다른 손엔 접힌 신문을 들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과장님."

"안녕하십니까."

다행이다. 그래도 아주 생각 없는 놈은 아닌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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