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월스트리트저널을 놓아라 - 1
"비서실에서 나왔습니다."
조성환 일이다.
직급은 대리지만 차기 회장이 예정된 로열패밀리여서 음성적으로 의전담당이 있었다.
로열 중에 직급이 임원이라도 되면 대외적으로 수행비서가 붙겠지만, 아직은 보는 눈도 있고 하니 대놓고는 못 하고 이렇게 배후에서 서포트하는 거다.
최대한 퉁명스럽게 대답하기로 마음먹었다.
"네, 무슨 일이신데요?"
헉.
전혀 퉁명스럽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공손한 말투가 나갔다.
사람이 마음만 먹는다고 하루아침에 변하지는 않나 보다.
"의전 때문에 한가지 부탁드릴 게 있어서요."
"의전이요? 무슨……. 말씀하세요."
"조성환님께서 매일 월스트리트저널을 받아 보시는데요. 번거로우시겠지만 저희가 총무팀 통해서 신문을 과장님 자리에 아침마다 올려놓겠습니다. 오전에 출근하시면 신문을 조성환님 자리에 놓아주시면 됩니다."
말은 부탁인데 말투나 표정은 그냥 명령이다.
자기가 모신다고 남들도 당연히 모셔야 한다는 어거지를 부리는 거다.
사실 대부분은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예전의 나도 그랬었고.
그러고 보니 생각났다.
휴가때 월스트리트 저널 올려놓으라고 원모한테 시키고 갔는데 원모가 마침 아파서 결근했다.
그날 조성환이 내 자리에 그대로 놓인 신문을 보고 비서팀에 전화해서 지랄지랄하고.
비서팀은 휴가인데도 휴대폰으로 나한테 전화해서 지랄지랄하고.
나도 아파서 결근한 원모한테 전화해서 지랄지랄하고.
그때만 생각하면 원모한테 또 미안하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어차피 난 곧 그만둘 거고, 조성환 이놈도 유배 중이라 나를 자를 권한도 능력도 없다.
설령 잘린다고 해도 딴 데 가면 그만이다.
"신문을 놓으라뇨? 비서실에서 하면 되지 그걸 왜 저한테."
"아. 그게 의전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고 협업이 필요해서요. 제 시간에 확실하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맡아서 책임을 져주시는 분이 계셔야 합니다."
협업은 개뿔.
혹시 모를 불상사를 대비해서 책임 떠넘기려는 개수작이다.
"전 비서실 직원이 아닌데요? 업무기술서에도 없는 걸 하라 하시면 심히 곤란한데……. 책임은 비서팀에서 지시든지요."
생전 처음 들어보는 듯한 반응인 듯 한참을 머뭇머뭇하는데 옆에 놈이 거들었다.
"못하시겠다는 말씀이신 거죠? 재무팀장님께 협조 요청드려도 되겠습니까?"
허세는.
무슨 이런 일로 임원한테.
"그러시든지요. 하여간 전 나가는 길이라서."
할 말 다 하고 사무실 밖을 나서는데 귀를 기울이자 뒷담화 소리가 들려왔다.
"저놈 어떻게 할까요? 재무팀장한테 말할까요?"
"냅 둬. 그냥 내일 아침에 이 자식 책상에 놔. 별수 있겠어 지가?"
회전문 밖에선 사이렌 소리도 안 들릴 정돈데 들린다. 마치 또박또박 바로 옆에서 얘기하듯이.
헛것이 들린다고 하기엔 너무 대화 내용에 개연성도 높았다.
환청인 건지 정말 들리는 건지 테스트를 한번 해 봐야겠다.
사무실로 돌아와 두리번거리니 김부장이 임상무 방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상무님 조성환님 업무요. 결산은 너무 단조롭고 세무는 너무 전문적인 거 같아서요. 마침 전공도 경영이라고 하니 M&A건 검토시키는 게 어떨까요?"
"그런가? 우리 팀에선 지금 누가 마도 잡고 있지?"
"태평이요."
"그럼 태평이한테 말해 놔."
"네"
임상무 방을 나온 김부장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나에게 검지를 까딱거렸다.
"일로 와 봐!"
보고 받거나 부서 회의 때 사용하는 부장 뒷자리 테이블 위로 서류뭉치들을 툭 던져 놓으며 자리에 앉기도 전에 말을 꺼냈다.
"조성환님 업무 생각해 놓으라고 했지. 생각해 놓은 거 있어?"
항상 이런 식이다.
답은 정해져 있는데 그냥 말하면 될 걸 굳이 한번 떠 보고 자기가 원하는 답이 안 나오면 자근자근 깰 준비태세다.
"네. 너무 단순하거나 전문적이면 안 되니깐 결산이나 세무는 좀 그렇고요. 전공도 살리는 취지에서 M&A 재무검토시키면 어떨까 싶습니다."
"그럴까……? 알았어. 조성환님께 잘 말씀드려."
당황한 김부장이었다. 깰 준비 바싹하고 있다가 바로 나온 대답에 김빠진 모양이었다.
사무실 회의실에서나 퇴근하고 집으로 가는 길에서 이것저것 주위를 기울이며 테스트해 보니 정말 들리는 게 확실했다.
마치 목욕탕에 앉아 있으면 저 멀리 누군가가 말하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어렸을 때 일요일 저녁 부모님이 열심히 보시던 미드 600만불의 사나이였던가, 소머즈였던가?
엄청난 청력의 소유자.
아무튼 드라마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에 흥분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 * *
다음날 8시 30분.
너무 일찍 도착했다.
지하철 타고 다니니 안 막혀서 비슷한 시간에 나오는데도 훨씬 일찍 도착했다.
출근 시간까지는 아직도 30분이나 남았는데도 횡단보도가 켜지자 딱 봐도 우리 회사 직원인 듯한 사람들이 도로 쪽으로 나와서 일제히 뛰기 시작했다.
정말 이해 안 간다.
회사 가는 게 저리도 좋을까?
조금이라도 일찍 갈라고 위험까지 무릅쓰고?
사무실로 들어서는데 일찍 출근한 직원들이 일어나 인사를 건넸으나 사실 하나도 눈에 들어오질 않았다.
신경은 온통 내 책상 위에 꽂혀 있었다.
점점 다가오는 내 자리.
솔직히 출근길 지하철 속에서 내내 고민했었다.
분명히 내 자리에 월스트리트저널이 놓여 있을 거다.
그걸 무시하고 가만 있느냐? 아님 옆자리 책상에 놓느냐?
분명 어제는 호기롭게 무시하려고 마음 먹었으나, 막상 닥치니 후폭풍이 걱정되기도 했다.
두 번째 파티션을 돌아 드디어 내 자리.
책상 위에…….
있다. 월스트리트 저널.
저게 뭐라고 이렇게까지 신경이 쓰일까?
책상 한가운데에 떡하니 놓여진 신문.
가방이라도 풀려면 노트북이라도 펼치려면 손을 안 갖다 댈래야 안 댈 수가 없었다.
그래 결심했어.
월스트리트 저널을 조용히 들어서 복도 책장 위에 던져 놓았다.
제시간에 저절로 켜지는 TV, 평상시와 똑같은 아침체조.
대강대강 흐느적흐느적.
온통 신문 놓는 일 때문에 신경이 쓰여서인지 체조에 도무지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스마트미팅.
"자 오늘은……."
김병국 부장이 잔뜩 폼 잡고 훈화 말씀을 하려는 찰나, 재무팀장실 문이 열리고 임상무가 생전 처음 보는 듯한 굽신굽신한 포즈로 엉거주춤 두 손으로 안내하면서 나왔다.
그룹 내 별명은 미친개. 한번 물면 안 놓는다는.
그런데 오늘부터는 순한 개다.
임상무 뒤로 목을 바짝 세우고 사무실을 나서는 조성환.
정장도 아닌 것이 캐주얼도 아닌 것이 아무튼 위아래가 완전 따로 노는 크로스 오버 패션이라고 해야 하나?
회사 내에서 처음 보는 복장이었다.
누구도 시도해 볼 수 없는 마치 '이것이 재벌룩이다', '난 너희와 다르다'라고 하는 듯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미친개가 분명 "놀러 왔냐? 여기가 나이트냐?" 했을 거다.
게다가 성환의 표정은?
똥을 씹은 건지, 긴장한 건지 왠지 모르게 오묘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지난 십 년간의 경험을 비추어 볼 때 저건 귀찮은 거다.
어차피 언젠간 회장이 될 텐데 굳이 이런 것까지 해야 하나?
직원 코스프레 이런 거 백날 해봐야 직원들 마음 살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사실 그럴 필요조차 없는데 회장이 시키니까 어쩔 수 없이 한다는 티가 팍팍 났다.
나 건들지 마라. 특히 귀찮게는 더더욱 하지 마라.
대강 이런 마음일 것이다.
이런 놈을 내가 십 년 동안 모셨다.
정신적으로는 고통스러웠으나 그 당시 나에게는 분명 기회였었다.
고속 승진 하이패스권.
직장생활 중에 차기 회장을 부하직원으로, 멘티로 둘 수 있는 기회는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다라며 위풍당당했었다.
출세의 발판으로 삼아야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리고 극진히 모셨다. 대리님을.
임상무가 친히 진행하는 스마트미팅.
"네 여러분도 이미 들어서 알겠지만, 오늘 조성환님께서 우리 팀으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많이 도와드리세요."
그러고는 괜히 나를 쳐다봤다.
"천태평 과장이 멘토 맡기로 했으니깐 잘 좀 보필해 드리고. 불편함 없으시게."
"네? 아. 네"
내가 언제 맡는다고 했나? 그리고 멘토가 멘티를 보필하나? 이게 말이야 방구야.
여기 수발들 놈은 나이며 그 수발 똑바로 들라고 공표한 거다.
우리 팀에 있을 때는 어떠한 문제도 생기면 안 된다는 엄포를 겸해서.
조성환이 인사를 건넬 타이밍이다. 보나 마나다.
고개 한번 숙이기는커녕 목을 뒤로 빼고는 내려다보듯이 조용히 읊조렸다.
"조성환입니다."
끝이다. 심플.
더는 알 필요 없다는 끝맺음.
심지어 '안녕하십니까' 정도의 간단한 인사말조차도 없었다.
게다가 다른 어떤 누구도 조성환에게 질문하지 않았다.
궁금한 게 많을 법하지만, 누구 하나 감히 물을 엄두가 안 났을 거다.
아무튼 머쓱해진 임상무.
"자자 그럼 천과장이 조성환님 자리 안내해 드리고 오늘 하루도 파이팅합시다."
"성환님은 불편하시거나 궁금하신 거 있으시면 언제라도 찾아 주시거나 전화 주십시오."
심히 오버다.
사실 나라도 걱정됐을 거다.
잘해 줘 봐야 회장한테 좋은 말 한마디 해줄 거 같지도 않은데 괜히 사고라도 나면 책임은 몽땅 지게 되었으니 말이다.
임상무 딸 아이도 발레를 한다고 막 예고 들어가서 들어갈 돈도 만만치 않을 것이었다.
그러니 넙죽 엎드리는 것이 충분히 이해됐다.
* * *
"조대리! 자리 여기입니다."
"네."
말은 존댓말인데 눈을 치켜뜬 표정은 '대리? 어디서 이게'라고 써 있었다.
앉자마자 두리번두리번 뭔가를 찾았다.
드디어 올 게 왔다.
신문 찾는 게 틀림없었다.
그래 모른 척하자.
왜 이리 못 찾지? 잘 보이는 데 놓을 걸 그랬나?
근데 내가 왜 걱정을 하지?
이놈의 옛날 무수리 버릇 언제 고쳐질지 모르겠다.
바로 옆에 있는 걸 두고 한참을 찾다가 드디어 발견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월스트리트저널을 펼쳐 들었다.
남들은 업무 시작한다고 컴퓨터 켜기 바쁜데 이놈은 머리 위까지 받칠 수 있는 전용 의자에 기대어 두 다리를 책상에 올리고는 당당히 신문을 펼쳤다.
헤드라인만 한참을 보는 거 같더니 갑자기 신문을 책상 위로 던져 버렸다.
도무지 분이 안 풀렸는지 화풀이를 한 거였다.
그러고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더니 바로 통화버튼을 눌렀다.
조성환이 다 들으라는 듯이 소리를 빽 질렀다.
첫날부터 나왔다. 저 성깔.
"김부장님! 나 발령 난 거 몰라?"
"갖다 놓기 싫으면 싫다고 하지. 한참 찾았잖아 아침부터 피곤하게."
"똑바로 안 할 거야 김부장님?"
한참을 갈구더니 끝맺음도 없이 전화를 끊고 책상에 던져 버렸다.
최신 아이폰.
저놈한텐 일회용일 수 있다.
예전 같으면 오금 저려서 안절부절못했을 텐데 지금은 괜찮다.
'별거 없다 이놈. 점령군도 아니고 유배 생활 중인 죄인이다.'라고 되뇌였다.
지금 처지에 누구한테 일러서 나를 잘라라 마라 할 처지가 못 된다.
설령 잘린다 한들 이 회사에 목숨 걸 것도 아니고, 대세에 지장 없다.
어차피 오래 볼 사이도 아닌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