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손안의 재벌-3화 (3/191)

3화 황태자의 전입

"조성환님이 오신다고요?"

"얼마나 계시는데요?"

호기심 반, 걱정 반 여기저기 직원들 질문 세례에 김병국 부장은 태연한 척 똥폼을 잡았다.

"누가 오든 달라질 건 없습니다. 그냥 각자 맡은 일 열심히 해주시고요. 그분은 그냥 직급대로 대해주시면 됩니다."

막상 오면 지가 젤 굽신굽신할 거면서 허세 작렬이다.

그래 이맘때쯤이었다.

유학 도중에 경영수업한다고 갑자기 입사해서 주요 부서별로 서너 달씩 돌아다니다가 우리 팀으로 온 게.

처음엔 그냥 3개월 정도만 고생하자 했었는데.

점점 늘어나더니 2년을 꼬박 옆자리에 같이 붙어 있었다.

아니 주군으로 모셨다. 대리님을.

조인철 회장 또한 후계자 수업 때 재무팀에서 대리부터 과장까지 2년간 있었다고 들었다.

선대회장이 금고지기가 중요하다며 최소한 두 사이클은 돌아야 한다고 했다나 뭐라나.

그 당시 애초에 2년을 꼬박 있을 줄 알았다면 막연한 고통은 줄어들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때는 곧 끝나겠지하는 희망 고문의 연속이긴 했으나, 또 그걸 견뎌내서 승승장구한 것도 사실이었다.

물론 결론은 참담하게도 동작대교 번지였지만.

어쨌든 지금 이 전입은 표면상으로 경영수업의 일환이었다.

하지만 나중에 우연히 알게 된 사실은 미국에서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회장 눈 밖에 날 짓을 해서 급히 귀국시킨 것이었다.

내키지는 않아도 하나뿐인 아들이라, 어쩔 수 없이 차기 회장 자리를 넘기긴 해야겠고 일단은 계열사 돌아다니면서 자중하고 업무라도 익히라는. 사실상의 유배생활이었다.

'어차피 이놈은 지금 누굴 짤라라말아라 할 처지도 못 될 텐데 그냥 조용히 일이 년만 있다가 뜨자. 그냥 직급대로 대리로 대해주면 되지 뭐.'

부담감을 떨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근데 조성환.

이놈이 좀 문제긴 하다.

날 때부터 천하제일 그룹의 차기 회장으로 미래가 정해져 있는 놈이다.

태어난 집안, 배경도 자기의 능력이라 생각하는 놈.

어떤 사람은 태어났는데 3루에 서 있다.

그런데 자기가 3루타를 친 줄 아는 놈이 있다.

이놈이 그런 놈이다.

야구에선 타석에 서서 1루를 밟을 확률이 3할만 되도 강타자다.

보통의 소시민은 태어나보니 홈플레이트 타석에 서 있다. 그마저도 어떤 흙수저는 막 태어났는데 볼카운트는 이미 투스트라이크 노볼에 투수마저 토론토의 99번 미스터 류다.

희망이 없다. 행여 아등바등해서 뜬공이라도 치면 3루에 있던 놈은 홈에 들어온다. 물론 본인은 1루도 밟지 못하고 죽어 버린다. 이런 게 흙수저의 인생이다.

혹은 운이 좋아 안타를 친다 해도 다음 타자는 1할 3푼의 9번 타자다.

물론 흙수저도 홈런을 칠 수 있다. 그렇다 해도 3루에 있는 놈이 먼저 들어온다.

인생은 야구 그 자체다. 서로 출발점이 다른.

엄청나게 스마트한 미팅이 끝나고 자리에 앉았다.

이맘때 나는 무슨 일을 했었지?

도무지 기억이 안 난다.

더군다나 오랜만에 엑셀 파일을 여니 머리까지 지끈지끈해 왔다.

"원모야!"

"네. 과장님."

휙 돌아 뒷자리 원모를 부르자 전광석화처럼 푸드득거리는 것이, 나쁜 짓하다 걸린 것같았다.

그래도 컴퓨터 화면은 워드 파일이다.

치밀한 놈. 저놈은 뒤통수에 눈이 달려서 내가 아무리 빨리 돌아봐도 그보다 먼저 Alt+Tab을 누를 수 있는 놈이다.

일하는 척하면서 야구 게시판만 주구장창 보는 놈인데, 그래도 맨날 술 먹으러 같이 가주니깐 용서해 준다.

"요즘 무슨 일하고 있었냐?"

"네?"

"무슨 일하냐니깐!"

두 번 말하게 하는 놈들 꼭 있다.

"아 네. 분기결산 준비하고 자회사 실적 취합하고, 중국 식품회사 인수 건도 검토하는데요."

"너 말고 나."

주어를 빼지 말고 말하라고 맨날 애들 깨 왔었는데 막상 내가 그러고 있었다.

"네? 아 과장님은 어……. 음……. 보고하시잖아요."

주저주저 말꼬리를 흐렸다.

난처한 건지 황당한 건지 아무튼 벙찐 표정이 역력했다.

그러고 보니 기억난다. 난 보고만 했었다. 게다가 스틸의 달인이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애들한테 다 떠넘겨놓고 들들 볶다가 윗사람들한테 보고만 하는, 손 안 대고 코 푸는 상사.

물론 잘되면 모두 내 덕이었다. 안 되면 밑에 애들 탓이었고.

임기응변 능력은 있어서 예상하지 못한 어떤 질문에도 아는 척 답변할 수 있었다.

어차피 물어보는 사람이 검증할 것도 아니지 않나.

보고받는 상사가 질문을 했을 때 답이 바로 안 나오고 3초 이상 우물댄다는 건, '시키시니깐 일은 했지만, 능력이 없어서 잘 모르겠어요. 맘대로 깨세요.'라고 단두대에 목을 걸어 놓는 것과 같았다.

설사 틀릴지언정 늦지는 말아야 한다.

상사의 인내심은 딱 3초가 한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직원들은 틀릴까 봐 걱정해서, 자신이 없어서 우물쭈물한다.

대부분의 상사들이 그거 때문에 화가 나는 거고.

짜장면 배달을 시켰는데 설령 단무지를 빼먹거나 볶음 짜장으로 잘못 오는 것은 용서가 돼도 늦게 와서 불어 터지고 떡 진 건 용서가 안 되는 거랑 같은 이치다.

"중국 식품이라니? 청도 장류 회사 J사?"

"네. 사업팀에서는 리스크 없다고 밀어붙이는데 나중에 뒤치다꺼리는 우리가 할거잖아요."

아 그때 그 회사.

무리하게 인수했다가 몇 년 뒤 큰 곤욕을 치른 일이 떠올랐다.

11시 30분.

"밥 먹으러 가자. 원모야."

"네? 벌써요? 아직 부장님도 안 오셨는데. 전화해 볼까요?"

김 부장은 어디 짱 박혀서 처자는지 한 시간 째 통 자리에 오질 않고 있었다.

이때까진 밥시간이면 꼭 윗사람들에게 '식사하러 가시죠'라고 챙기는 문화가 있었다.

혹시라도 윗사람한테 당연히 점심 약속이 있겠거니 하고 안 챙기고 갔다가는 상사가 혼자 식사하는 사달이 벌어진다.

부하직원 없이 덩그러니 혼자 식사하다가, 행여 다른 팀 사람들이 보기라도 한다면 이건 단순히 혼밥한 게 아닌 팀 내 리더로서의 자질이 없다고 자백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렇게되면 특히 선임 과장을 어떻게든 응징하여 본인의 팀 내 위상을 되찾으려고 할 것이다.

"그러든지. 아무튼 난 배고파서 먼저 간다."

"네? 아, 네……."

원모는 황당한 표정으로 남았다.

막 준비를 마친 구내식당.

1등이다.

30분 빨리 가면 좀 어떤가.

어차피 여기서 승진하면서 계속 다닐 것도 아니고 대충 몇 년 슬렁슬렁하다가 빠이빠이 할 건데 눈치 볼 필요가 전혀 없다.

그러나 원모는 눈치 보느라 같이 가자는데도 나서지 못했다.

뭐, 보통 그렇지.

그것보다 구내식당 밥은 오랜만인데 정말 맛있다.

몸이 과거로 돌아오니 입맛까지 저렴하게 과거로 돌아온 듯했다.

고향의 맛이 나는 걸 보니 미원이 아닌 다시다가 분명하다.

점심을 다 먹었는데도 12시가 채 안 됐다.

한 시간 풀로 잘 수 있겠다.

구내식당 밥은 배가 빨리 꺼지니까 움직임을 최소화해야 했다.

직원 의자는 불편하다. 짧아서 머리를 기대려면 허리를 앞으로 쭉 빼야 해서 직급 낮으면 잠도 불편하게 자야 했다.

아무튼 힘겹게 잠에 든 지 몇 분 지나지 않았는데 전화벨이 요란스럽게 울려댔다.

'어떤 개새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네."

내가 누군지 밝히기도 귀찮다. 어차피 알고 전화했을 텐데.

"네. 사업팀 박승재입니다. 통화 가능?"

말이 짧다.

처음부터 끝까지 반말로 하던지. 아무튼 존대를 섞으면서 매너있는 척하고 반말하면서 내가 네 위다, 라고 서열을 정리하는 것이다.

지주사 사업팀.

건설, 증권, 식품, 화학, 엔터 등 여러 계열사의 사업관리를 담당한다. 신규사업을 하거나 철수하거나 대규모 투자 등 주요 의사를 결정할 때는 사업팀의 합의가 반드시 필요했다.

그래서인지 지네들이 계열사 대표라도 되는 줄 안다.

"내일부로 조성환님 재무팀으로 발령 나시는 거 아시죠?"

"네, 아침에 들었습니다."

"몇 명 보내주세요. 의자랑 모니터도 크고 책도 많으시고 아무튼 좀 짐이 많아."

이삿짐센터 하라는 건데.

애들 보내면 그만인데 창고 정리한다고 오후에 다들 나가서 지금 내 밑으로 아무도 없다.

"우리 애들 지금 다들 외근 갔는데요. 그냥 사업팀 애들 시키시죠."

"뭐라고요? 우리는 뭐 노는지 아나? 아무튼 난 얘기했어."

부서 힘으로 누르려는 거다.

'너네가 와서 가져가라'고.

자기 애들한테 모양 빠지는 일은 안 시키겠다는 강력한 의사표시.

누가 좀 들면 어쩐다고 참 한심하다.

그러고 보니 옛날에도 있었다, 이런 일이.

똑같구나.

* * *

"뭐라고요? 우리는 뭐 노는지 아나? 아무튼 난 얘기했어."

조성환님 성격 뭐 같다고 소문났던데.

출근했을 때 자기 짐 세팅 안 되어 있는 거 보면 난 X된다.

모레부터는 출근 못 할 수도 있다.

애들은 다 외근 중이고 부장한테 얘기하면 지가 도와준다고 그냥 우리가 하자고 할 거다.

물론 도와주긴 할 거다. 말로만.

시간은 흘러 5시 40분.

내가 졌다.

"왜 인제 왔어요? 쩌어기요."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자리에는 짐이 한 무더기 쌓여 있었다. 사무실에 살림이라도 차렸나. 로션에 면도기까지 널브러져 있는데 딱 이삿짐센터를 불러야 할 사이즈였다.

쪽팔리지만 어떠하리. 생계가 달려있는데.

그래도 명색이 재무팀 주무과장인데 대리 짐 옮기러 왔다 갔다 왕복 세 번.

사업팀 사원, 대리 놈들 도와주는 새끼 하나 없이 꼴좋다는 표정으로 쳐다만 봤다.

"과장님 이게 다 뭐예요? 무거우실 텐데. 도와드릴까요?"

짐을 한가득 올린 의자를 낑낑대며 끌고 들어올 때 마침 아람이와 마주쳤다.

걱정스런 표정이 한가득이었다.

"괜찮아. 그냥 운동 삼아 하는 거야."

괜찮다는 데도 아람이는 부득부득 같이 들어줬다.

"과장님. 진짜 이게 다 뭐예요?"

"조성환님 내일 오신다고 해서."

"조성환님 짐요? 참나, 그분은 손이 없나 발이 없나?"

"아서라. 그러다 큰일 난다."

"어떤 분인데요?"

"몰라. 아무튼 소문은 별로야. 가능하면 마주치지 마."

"네 별걱정을 다. 과장님이나 조심하세요."

* * *

4시, 5시, 5시 30분,

아직 별일 없다.

5시 50분 드디어 전화벨 소리.

그놈들 똥줄이 타긴 탔나보다.

"네."

"박승잰데. 정말 짐 안 가져갈 거야?"

"네 우리 애들 외근 중이라니까요."

"천과장은?"

"전 노는지 아십니까? 일하느라고 정신없습니다. 일 끝나면 바로 퇴근할 거고요."

대답도 없이 뚝. 그냥 끊었다.

내가 이겼다.

이게 뭐 대수냐마는 적어도 귀찮지는 않게 됐다.

6시 10분.

사업팀 대리, 과장 몇 명이 짐을 바리바리 싸 들고 내려왔다.

뒤에 박승재 차장을 대동한 채.

"여기요."

퇴근짐을 챙기며 나는 무심한 듯 옆자리를 가리켰다.

그들은 투덜투덜 짐을 내려놓았다.

박승재 차장은 내가 퇴근 준비하는 걸 보고 어이가 없다는 듯이 한마디를 붙였다.

"저기 천과장!"

"네."

"이럴 거야? 협조도 안 하고. 조성환님을 잘 보좌해야 할 거 아냐?"

"보좌요? 우리 팀장으로 옵니까? 이상하네. 난 대린지 알았는데. 조 대리는 손이 없어요. 발이 없어요?"

"뭐라고?"

황당한 표정의 박승재 차장.

더 이상 할 말이 없는지, 어떤 말도 안 통할 걸 알았는지, 투덜투덜대면서 사업팀 사람들을 이끌고 사무실을 나갔다.

귀를 쫑끗 세우니 벌써 엘리베이터 앞인 듯 뒷담화 시작이다.

"뭐지 저 새끼? 얼마 전에 병원 갔다 왔다더니 돌았나 갑자기?"

"로또라도 맞았나 보죠, 뭐."

"아 저 재수 없는 새끼 어떻게 밟지."

이 새끼 저 새끼 욕하고 난리 났다.

유치하기 그지없다.

'본때를 보여줄까? 아니다. 귀찮다. 돈도 벌고 복수도 해야 하는데 저런 것들까지 일일이 신경 쓸 겨를 없다.'

맘 편히 다잡고 퇴근 준비나 마저 하려는데 뭔가 이상했다.

방금 뭐지? 왜 들렸지?

분명히 사무실 나가서 복도에서 말한 거 같은데, 그게 여기서 얼마나 떨어져 있는데? 벽은 또 어쩌고?

무슨 일이었는지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그냥 헛것이 들릴 수도 있나?

아무튼 엄청 이상하다.

막 사무실을 나가려는 찰나.

검정색 넥타이에 검정색 양복에 사원증도 없는 직원 두 명이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시죠?"

"네 혹시 천태평님이세요? 조성환님 옆자리 맞으시죠?"

"네 그런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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