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손안의 재벌-1화 (1/191)

1화 천태평

나 천태평.

천하제일 그룹 지주사 재무팀장이자 상무다.

몇 년 안 되는 결혼에서 돌아와 10년이 넘도록 홀로 생활하고 있다.

그렇다고 흔히들 생각하는 홀아비처럼 구멍 난 난닝구 차림에 온 집안에 술병을 던져 놓는 너저분한 스타일은 아니다.

제법 큰 키에 깨끗한 피부, 머리부터 발끝까지 구김 하나 없이 완벽한 정장 핏.

나는 그래도 전형적인 젊은 엘리트 임원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30대 후반에 최연소 임원으로 발탁된 후 승승장구 중으로, 직급만 상무일 뿐 사실상 계열사 CEO보다 급이 높다고 볼 수 있다.

그룹사 전반의 자금과 회계를 담당하는 것은 기본.

음지에서 회장 일가의 재산을 관리하고 자녀들의 경영권 승계구조를 짜는 등 천하제일 그룹 조씨 집안의 직속 가신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진정한 실세 오브 실세다.

50년 천하제일 그룹 역사상 이 보직에 외부 출신 경력직 인사가 앉은 건 처음이었다.

물론 여기까지 오기가 평탄치만은 않았다.

과장 시절 막 대학 졸업한 회장의 철없는 아들 황태자 조성환의 멘토가 되어 선배, 스승 노릇에 모지리 똥기저귀까지 갈아주는 유모 노릇까지 다 해주고 꿰찬 자리다.

지금은 충직한 부하가 되어 회장 일가의 충견으로 충실히 기고 짖는 중이다.

그렇게 난 나름 성공한 인생을 살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헤드라인 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총 1,000억여 원의 조세포탈 혐의를 받고 있는 조인철 천하제일 그룹 회장이 검찰청에 출두했습니다."

"새벽까지 밤샘 조사를 받고 돌아간 조인철 회장에 대해 검찰이 곧바로 구속영장을 청구했습니다. 탈세와 횡령, 배임 혐의로……."

'X됐다. 어제까지만 해도 아무 전조도 없었는데.'

불길한 예감에 바로 19층 조성환 부대표실로 뛰어 들어가자, 집무실 소파엔 먼저 온 손님이 앉아 있다.

조성환의 누나 조윤경이었다.

고개 숙여 인사를 건넸지만 받아 주기는커녕 고갯짓이나 눈짓 한 번 보이지 않았다.

이런 싹수 노란 대접이 10년도 더 넘긴 했으나, '재벌 딸들이 다 그렇지 뭐' 하고 그냥 넘기기에는 아직도 적응 안 되고 기분이 더럽다.

그것도 꽤나.

'조금만 참자. 승계작업 끝나면 회사엔 얼씬도 못 하게 할 거니까.'

조윤경의 존재가 거슬려도 급한 게 우선이었다.

다급한 목소리로 성환을 불렀다.

"부대표님! 어떻게 된 겁니까?"

"티비로 봐서 알겠지만 아침에 출석하셨어. 언론에 알리지 않는다는 조건이라 우리도 조용히 있었는데, 완전히 속았어. 듣보잡 신문사까지 한 몇백 명은 온 거 같던데 완전 개망신당했지 뭐야. 홍보팀 월급루팡하는 새끼들 때문에."

"그럼 우리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글쎄……."

조성환이 머뭇거리자 조윤경이 대신 답했다.

"우리라니? 일단 기다려."

'감히 로열패밀리랑 한데 묶이려는 거냐.'

'너한테 말해 줄 건 없다.'

라는 뜻이다.

다급한 조성환과는 달리 조윤경은 의외로 담담한 듯 여유 있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소득 없이 부대표실을 나서 엘리베이터에 들어서는데 누군가 같이 뛰어 들어왔다.

"태평아! 같이 가자."

특유의 서글서글한 처진 눈매에 웃음기를 잔뜩 머금은 표정이 말했다.

이상현.

내 제일 친한 친구이자 현 천하제일 그룹 법무팀장이다.

늦은 나이에 사시 합격했으나 임관은커녕, 로펌의 어쏘변호사 자리도 잡지 못하고 방황하던 중 내 추천으로 사내변호사로 입사했다.

"태평아, 넌 언제 오라디?"

"참고인 조사? 내일 아침에 오라던데? 네가 도와줄 거지?"

"피의자도 아닌데 뭘. 부담 없이 그냥 갔다 와. 혹시 이상한 거 물어보며 그냥 잘 모르겠다, 기억 안 난다고 하고."

상현의 말을 들으니 출석 요청 땜에 불안한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았다.

* * *

태어나서 처음 들어가 보는 검찰청.

코끝에 맞닿은 공기는 차갑고 무겁기만 했다.

사람을 불러 놓고는 창문도 없고 의자도 삐걱거리는 대기실에서 한 시간을 꼬박 앉혀 놓았다.

대기실 옆으로 카키색 수의 차림에 수갑을 찬 사람이 지나는 걸 보자, 나도 모르게 덜컥 겁이 났다.

"거기 들어가면 일단 겁부터 주고 시작할 거야. 쫄지 마. 얄팍한 수법이니깐."

어제 상현이가 해준 충고가 떠올랐지만 겁나는 건 겁나는 거다.

"천태평씨 맞으시죠? 따라오세요."

수사관으로부터 내 이름을 듣자 저절로 다리가 후들거렸다.

정신도 못 차린 채 비틀비틀 따라 들어가 수사관 책상 앞에 앉혀졌다.

"네? 피의자로 전환된다고요?"

"피의자 맞습니다. 곧 사전구속영장이 청구될 겁니다."

"피의자라뇨? 참고인 조사로 소환된 거 아닌가요?"

"이것들 당신이 사인한 거 아냐? 당신 사인 맞잖아!"

검사가 던진 전표 뭉치의 결재란에는 온통 천태평 세 글자만 빽빽했다.

천하제일에서 모든 자금거래에는 자신의 사인이 필요하다. 물론 오너 일가와 비서실 극히 일부 임원의 거래만 제외하면 자신의 사인이 있어야만 출금이 가능했다.

하루에도 수백 건씩 자금이 나가지만, 일억 이상 전표에만 사인한다고 하더라도 일 년에 수백 건이다. 일일이 볼 시간도 마음도 없었다.

의미 없이 끄적대던 사인.

내가 승인해야지만 돈이 나갈 수 있었기에 그 사인이 권력의 증표인 양 여겼다.

결국 그 사인이 내 목을 감은 올가미가 되었음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너무 늦었다.

* * *

사전구속영장 실질심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차 안.

사내변호사 상현은 역시 유능했다.

이미 자료 다 털린 마당에 인멸할 증거도 없을뿐더러 도주할 위험도 없다고 한 게 먹혔는지 다행히 영장 청구가 기각되었다.

"고맙다 상현아. 너 아니었으면 꼼짝없이 수갑 찰 뻔했어."

"내가 한 게 뭐가 있다고. 아무튼 다행이다. 일단 풀려났는데 두부에 소주라도 한잔해야지!"

구속만 안 되었을 뿐 범죄 혐의가 풀리건 아니었다.

불안한 마음에 도저히 그냥 집으로 갈 수 없었는데, 때마침 상현의 제안이 고마웠다.

내 맘을 아는 듯 상현은 매주 금요일마다 같이 소주를 기울이던 포장마차로 차를 돌렸다.

안주도 나오기도 전 처음처럼 한 병을 까서 맥주잔에 붓기 시작했다.

콸콸콸콸.

소주 한 병에 딱 두 잔 나온다.

"태평아. 일단 마셔. 오늘은 일단 취하고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해. 원샷!"

"고맙다. 옛날 생각난다."

"그래. 쏘야 시켜서 소세지 하나에 소주 두 잔, 양파에 한 잔씩 하던 게 엊그젠데."

"이제는 쏘야에 육전, 두부김치까지 시키고 아무튼 성공했다 우리."

"이게 다 네 덕분이지 뭐."

평상시 술자리랑은 달랐다. 매번 회사 얘기, 주식이나 부동산 얘기였는데.

오늘은 분위기가 분위기인 만큼 별말 없이 술잔만 부딪쳤다.

온종일 조사를 받아서 피곤해서인지, 아니면 안주도 몇 개 집어먹지 않고 급하게 깡소주를 마셔댄 탓인지 빠른 취기가 돌아 살짝 잠이 들었다.

잠깐 정신을 차렸더니 상현이가 어딘가 통화 중이었다.

"누구 오기로 했어?"

"대리기사 불렀어. 금방 올 거야, 어차피 가는 길인데 태워 줄게."

너그러운 웃음을 지으며 안심시키려는 듯 애쓰는 게 느껴졌다.

취직시켜줬다는 핑계로 십 년이 넘도록 뜯어먹는데도 싫다는 내색 한번 비치지 않는 고마운 친구다.

또다시 쪽잠 뒤 눈을 떠보니 차 뒷자리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런데 차는 멈춰 있었다.

창문 밖을 보자 상현이 검은색 정장의 짧은 머리 남자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었다.

'뭐지? 저 새끼들은? 자는 척할까? 도와주러 나가?'

잠시 고민했다.

그래도 위기에 빠진 친구를 모른척할 순 없다는 생각에 주먹을 불끈 쥔 채, 차 문을 나섰다.

차 밖은 아주 익숙한 곳이었다.

동작대교 남단 공영주차장에서 조금 못 미친 곳.

매일 퇴근 후 운동 삼아 걸어 다니는 그곳이었다.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인적 하나 없었다.

게다가 오늘따라 바람은 유난히 매서웠다.

강바람에 눈이 말라 쩍쩍 갈라지는 느낌이 들어 실눈조차 뜨기 힘들었다.

"뭐야 이 사람들은? 괜찮아 상현아?"

"우리 직원들이야 걱정하지 마. 잠깐 얘기 좀 할까?"

대답과 함께 내민 손에는 음주측정기가 들려있었다.

"이거 불어 봐."

"이게 뭐야? 나보고 운전하라고?"

도대체 뭔 상황인지 모르겠어서 벙찐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런데.

이상현이 갑작스럽게 돌변했다.

"불으라니까! 새끼야. 하여간 이 새낀 한 번에 말을 들어 처먹은 적이 없어."

대학 시절 이래 처음 들어보는 욕지거리와 싸늘한 눈빛.

금세 술기운이 달아났다.

"뭐라고? 이 새끼가!"

나도 흥분하여 멱살을 잡을 듯 덤벼들었다.

그러자 상현이 옆에 있던 깍두기 아저씨한테 눈짓하더니 이내 주먹이 배에 꽂혔다.

고통 속에 고개를 숙이고 헉헉대자 상현이 내 입에 음주측정기를 갖다 댔다.

"0.18, 완전 만취 수준이구만."

상현이 다짐한 듯 노려보며 거칠게 말했다.

"됐다. 이제 갈 시간이다."

"뭔 소리야! 알아듣게 말해 새끼야!"

"마지막으로 한 잔 더할래?"

상현이 소주병을 내게 건넸다.

그러면서 약간은 다정해진 말투로 말을 했다.

"그래도 한때 친구였으니깐 이유라도 알려 줄게. 오늘 너는 수사망이 좁혀 오자, 신변을 비관해 만취 상태에서 극단적 선택을 하는 거야."

"뭔 개소리야?"

"네가 회장님 지시인 척 비자금을 조성해서 해외로 빼돌리고, 개인적으로 뽑아먹다가 걸린 거지. 어차피 너한테 지시한 증거는 없고 모든 서류엔 네가 사인한 걸로 나오잖아. 똑똑한 척하더니 멍청한 새끼였구만! 와꾸 나오는 거 안 보이냐? 목에 깁스하고 다니다가 이 꼴 나니까 어떠냐?"

내가 욱해서 다시 달려들 태세를 보이자 깍두기들이 두 팔을 잡아서 눌러 버렸다.

"누구야? 누구 작품이야?"

"아직 모르겠냐? 조윤경 부대표지."

조윤경이라고?

어쩐지 며칠 전에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하더니 이런 계획이 있었다니.

"조성환이 가만히 있겠어?"

"그 멍청한 새끼가 뭘 알겠냐? 지 앞가림도 못하는 게. 네가 그렇게 키웠잖아. 어차피 그놈도 조만간 날아갈 거야. 쪼그만 계열사라도 하나 건지면 다행이지."

"이런 개자식!"

"네가 그놈이랑 싸바싸바 해서 회삿돈 다 빼돌리고 회장님 뒤통수를 쳤다는데 아무리 하나뿐인 아들이라도 회장님이 가만 놔두시겠냐?"

최소한 발버둥이라도 한번 쳐볼까 하는 생각에 말했다.

"내가 내일 검찰청 가서 다 불 거다."

상현이 어쩔 수 없다는 표정과 함께 마치 기다렸다는 듯 말을 꺼냈다.

"어머님 아직 횡성에 계시나? 작년에 같이 찾아 뵀잖아."

'이 개새끼!'

어머니의 이름을 듣자 모든 게 무너지는 듯했다.

상현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감정 하나 실리지 않은 말투로 말을 이었다.

"노인네 한 명 사라진다고 누가 찾을 거 같아? 특히 강원도가 딱이지. 첩첩산중에 골짜기도 많고. 아름다운 우리 강산이지."

노골적인 협박에 멘탈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냐?"

"왜? 내가 평생 네 시다바리나 할 줄 알았냐?"

바락바락 욕을 늘어놓고 사정을 해봐도 상현은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도무지 피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안 뛰어든다고 해도 결국 이놈들이 던질 테고.

용케 도망친다 한들 결국 구속되고 말 거다.

어머니에게 전화해서 숨으라고 한들 언젠가는…….

상상하기도 싫었다.

어느새 자포자기한 상태가 되었다. 그래도 하나는 확실히 하고 싶었다.

"어떻게 믿지? 어머니는 안 건드리겠다는 거?"

"그래도 아들처럼 대해주셨는데. 만수무강하실 때까지 돌봐 주는 걸로 얘기 끝났어. 힘들었다 안 된다는 거 설득하느라고."

비틀비틀 동작대교 중간지점까지 걸어 나갔다.

난간을 뛰어넘어 수면에 닿을 때까지 칠팔 초.

40여 년의 세월 동안 살아온 인생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조윤경! 악랄한 년! 사람의 탈을 쓰고 어떻게, 내가 이 집안에 개처럼 얼마나 충성했는데.'

'지 앞가림도 못하는 멍청한 성환 새끼, 지 누나가 어떤지도 모르고'

몸은 점점 아래로 가라앉고 정신은 몽롱해지면서 잠이 스르륵 왔다.

그래, 이렇게 끝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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