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필로그 >
에필로그 1.
수많은 부적들이 붙여져 있는 동굴.
선법의 결계로 뒤덮여 있는 단단한 입구를 얼굴까지 휘감은 채찍의 틈새로 그녀는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언제까지 이곳에 갇혀 있어야 하는 걸까?
나는 영원히 고통 속에서 살아야 하는 것일까?
수많은 물음 속에서도 누구 하나 이 해답을 주지 않았다.
유일한 안식처를 잃은 마음의 상처는 수천 년, 아니 수만 년이 흘러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열리지 않는 문을 바라보고 있던 차였다.
-촥!
부적으로 가득 붙여져 있던 석문이 반으로 갈라졌다.
‘석문이?’
갈라진 석문을 본 그녀의 요안이 날카로워졌다.
과연 누구일까?
자신을 가둔 선인의 후예일까?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지긋지긋한 결계로부터 탈출시켜주기를 바랐다.
-쿵!
갈라진 석문으로 누군가 걸어 들어왔다.
느긋한 발걸음으로 들어온 자의 얼굴이 보였다.
‘선인의 후예가 아닌가?’
새하얀 얼굴에 날카로운 눈매는 자신이 기억하던 선인의 모습과는 달랐다.
오히려 선기보다는 어둠 쪽에 가까운 자였다.
‘위험해.’
그녀는 저 존재에게서 강한 불길함을 느꼈다.
상고 시대부터 존재해왔지만 이런 위압감을 가진 자는 처음이었다.
심지어 자신의 위안처였던 그 남자조차도 저 정도는 아니었다.
-슥!
위험해 보이는 남자가 손을 뻗었다.
-화르륵!
그러자 그녀를 봉하고 있던 바닥의 결계에 있던 부적들과 전부 불타올랐다.
불타오른 재가 사방을 흩날릴 무렵, 그녀의 몸을 단단히 묶고 있던 선인의 채찍이 저절로 풀려났다.
'강하다.'
그녀는 순간 고민했다.
자신을 풀어준 자를 공격해야 하는 것일까?
하지만 요력도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러기에는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면 저 자를 유혹해서 자신을 완전히 풀어주게 하는 것이 어떨까?
결국 그녀는 마음을 정했다.
-우우우웅!
황금빛이 몸을 감싸면서 그녀의 몸이 줄어들었다.
나신의 아름다운 여인이 된 그녀가 뒷짐을 지고 있는 사내에게 다가가 요염한 자세를 취하면서 유혹하려 했다.
“나으리는 어쩌다 이곳에....”
“가관도 아니군.”
“네?”
그때 사내가 피식 웃더니, 그녀의 이마로 손을 짚었다.
“엇?”
-고오오오오오!
그 순간 방대한 요기가 그녀의 이마를 타고서 전신으로 들어왔다.
놀라서 이것을 뿌리치려고 하던 그녀는 너무도 낯익은 요기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바로 자신의 요기였다.
그런데 요기가 전신을 휘감는 순간 그녀의 머릿속으로 수많은 환영들이 물밀려 들어왔다.
‘이건?’
눈앞에 있는 사내의 모습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마치 처음 그를 만났을 때처럼 그 모습들이 아련하게 그려졌다.
[천마......떠나지 말라고 해도 가겠지.]
[그래.]
[너도 그 사람과 같구나.]
[내가 아니어도 너는 충분히 안식처를 찾을 거다.]
[너가 아니면 의미가 없는데.]
망설이던 그녀가 입술을 맞추는 모습이 머릿속을 강렬하게 휘감았다.
부드럽게 입술을 뗀 자신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이게 나라고 생각해줘.]
물밀 듯이 밀려 들어오는 슬픔.
그 속에 눈앞에 서있는 남자가 미소를 짓는 모습이 환영으로 보였다.
가슴이 벅차오를 만큼 아련함이 느껴졌다.
-스륵!
사내의 손에서 들어오던 요기가 완전히 그녀의 몸에 자리 잡았다.
비틀거리던 그녀가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눈물을 왈칵 터뜨리며 사내에게 안겼다.
“천마아아아아아!”
사내는 바로 천여운이었다.
그렇게나 바라왔던 자신의 두 번째 안식처.
그 따뜻한 안식처가 눈앞에 나타났다.
천여운이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이렇게 되리라고 알고 있었군."
요기에 기억이 담겨있으리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그였다.
그런 천여운에게 금모 구미호가 글썽이는 얼굴이 아름다워 보일 만큼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너라면 찾아올 거라고 생각했어."
끝없는 어둠 속에서 자신의 빛을 찾은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했다.
에필로그 2.
수많은 세월이 흘러갔다.
세월의 풍파 속에서도 여전히 건재한 십만대산의 천마신교.
-사락!
마지막 책장을 넘기는 소리.
[사라졌던 사흘.
이것은 중원 무림을 최초로 통일한 24대 교주 마신 천여운의 사기(史記)에 기록되지 않은 이야기다.]
글씨 위로 물방울 하나가 떨어졌다.
-뚝!
“앗!”
상복(喪服)을 입고 있는 소년이 놀라서 서적에 떨어진 눈물을 소매로 닦았다.
혹시나 닦다가 종이가 찢어지진 않았을까 걱정되어서 살폈다.
다행히 서적은 괜찮았다.
소년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대체 이런 서적이 어째서 이곳에 있던 거지?”
소년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곳은 천마신교 마도관의 끝 층 서재였다.
정말 우연하게 이 서적을 발견한 소년은 날이 어두워지도록 삼매경에 빠져 전부 읽었다.
“왜 할아버지께선 이런 이야기를 한 번도 해주시지 않은 거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이야기였다.
얼마 전에 돌아가신 증조 할아버지가 그리운 마음에 종종 같이 왔었던 마도관 서재에 들린 소년이다.
"미래? 자동차? 상상이 가지 않는걸."
글로만 읽으니까 이런 세상이 실제로 있는지 궁금해졌다.
어째서 증조 할아버지가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는지 이해가 될 것 같았다.
과연 누가 이것을 믿겠는가.
자신조차도 읽는 내내 처음에는 뭐지? 하고 인상을 쓰면서 읽었다.
'아무도 이걸 발견하지 못하다니.'
생각해보면 그것도 신기했다.
발견되었다면 난리가 났을 지도 모른다.
뭔가 말이 안 되는 이야기 같았지만 이걸 보고 난 후, 증조 할아버지가 더욱 보고 싶어졌다.
“할아버지.....”
불로불사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분이 병사로 돌아갈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천마신교의 교인들 누구하나 이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슥!
책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소년이 고민했다.
'챙겨갈까?'
규칙에는 어긋났지만 증조 할아버지에 관한 이야기가 적힌 책을 이곳에 두고가기에는 너무도 아까웠다.
그때 누군가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천 공자님.”
“아!”
여인의 목소리에 놀란 소년이 화들짝 서적을 뒤로 숨겼다.
뒤를 돌아보니, 서재 관리자의 복장을 하고 있는 아름다운 여인이 서있었다.
여인이 눈살을 찌푸리고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눈앞에서 그걸 숨긴다고 안 보이나요.”
“하, 하지만.....”
“마도관에 있는 서재는 그 안에서만 볼 수 있다. 이 규칙은 잘 알고 계시죠? 예전이었다면 전부 외워서 나갔어야 했어요.”
그녀의 훈계에 당황해하던 소년이 머뭇거리다 이내 숨겼던 책을 보였다.
책을 주자니, 못내 아쉬운 표정이 역력했다.
"천 공자님."
마침 입구에서 기다리던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독특한 문양의 가면을 쓰고 있는 그는 대호법 마라성이었다.
"대호법?"
"교주님께서 찾으십니다."
"아아...."
책을 들고 가는 것을 비밀로 해주면 안되겠냐고 부탁하려고 했는데, 그것도 물건너 갔다. 교주를 호위하는 대호법이 눈앞에서 떡하니 지키고 있으니 말이다.
여인이 빙그레 웃으면서 소년에게 말했다.
“저도 이제 퇴근해야 하니까. 천 공자님도 어서 교주님께 가보세요.”
“으으으, 알겠어.”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당장에 들고가지 못하지만 어쨌거나 서적이 있던 위치는 정확하게 기억했다.
"또 올게."
"네에."
소년의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증조 할아버지의 몰랐던 비밀을 자신만 알게 된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문득 이상한 것을 알아차렸다.
‘마도관 끝 층 서재에 근무하는 여자 교도도 있었나?’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쿵!
그러는 사이에 끝 층 서재의 입구 문이 굳게 닫혔다.
혼자서 갸우뚱거리며 의아해하던 소년은 결국 대호법을 따라 계단을 내려갔다.
-트특! 트트트특!
뭔가가 긁히는 소리가 들린다.
굳게 닫힌 서재의 한 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는 청옥석으로 만들어진 비석.
그곳에 누군가 한 손으로 뒷짐을 서고서, 검지 손가락으로 글씨를 새기고 있었다.
강기에 버금가는 기운이 아니면 새기기 힘든 청옥석이었지만, 그 자는 맨손으로 그저 힘만으로 가볍게 이를 해냈다.
-트트트특!
신기한 것은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있었던 소년이나 이곳을 방문한 대호법조차 이 자가 있었는지조차 눈치채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런 그의 뒤로 소년을 내보낸 여인이 다가왔다.
아름다운 여인이 쥐고 있던 서적에 힘을 주자, 그 순간 뜨거운 불이 일어나며 그것을 불태워버렸다.
-화르륵!
소년이 다시 찾아와서 찾을 거라고 했던 보물은 그렇게 재가 되었다.
“증손주를 생각하는 마음이 지극한데. 천마.”
그녀가 앞으로 한 발자국 걸어가자, 다소곳하게 묶고 있던 검은 머리카락이 금빛으로 변하며 풀렸다.
찰랑거리는 금발의 머리카락 이외에도 금빛으로 물들어 있는 눈동자.
그녀는 바로 대요괴 금모 구미호였다.
-트트트특!
청옥석으로 만들어진 비석을 글귀로 가득 메운 자가 그것에서 손을 뗐다.
그 자는 바로 천여운이었다.
금모 구미호가 베시시 웃으며 다가가 말했다.
“아무한테도 이야기 하지 않을 거라 하더니. 누군가는 기억해주길 바랐구나.”
그런 그녀의 말에 천여운이 뒷짐을 지고서 말했다.
“그게 진정으로 영원히 살아가는 거니까.”
천여운의 그 말에 금모 구미호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입 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역시 너는 많이 닮았어.”
“그 소리만 백 년 째 하는군.”
“헷. 계속 할 거거든.”
천여운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녀의 몸이 황금빛으로 물들더니, 이내 아기 여우의 모습으로 변했다.
여우가 된 그녀가 천여운의 어깨에 올라탔다.
“공식적으로 죽은 사람도 되었겠다. 이제 어디로 갈 거야?”
그런 그녀의 물음에 천여운이 막혀 있는 어딘가를 바라보며 씨익하고 웃더니 답했다.
“경계의 너머.”
“경계의 너머?”
“그분이 기다리고 있다.”
그 말에 금모 구미호의 동그랗고 귀여운 두 눈이 커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천여운이 손을 휘젓자, 그들의 모습이 흩어지듯이 입자를 날리며 마도관의 서재 속에서 사라져갔다.
사라져가는 그곳에서 속삭이듯이 목소리가 들렸다.
“천마. 그곳에 네 선대가 있는 거야?”
“왜 새삼 좋아진 거냐?”
“어머나. 어떡하지? 두 남자 사이에서 너무 갈등되네. 헤헤.”
"헛물 켜는 것도 백년 째로군."
"너무해!"
앙칼진 외침을 마지막으로 마도관의 서재는 고요로 물들었다.
< 에필로그 > 끝
ⓒ 한중월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