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화 사라졌던 사흘(完) >
부서진 수많은 기기들.
기지 내부는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파칙! 파칙!
스파크가 튀면서 언제 전원이 끊어질지 모를 것처럼 기지의 불들이 깜빡거렸다.
수많은 시신들로 가득한 이곳은 비릿한 피 냄새로 가득했다.
더 이상 살아있는 것은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저벅저벅!
한참을 기지 안쪽으로 들어간 천여운이 막혀 있는 한 벽면에 손바닥을 갖다 댔다.
그러자 벽면이 가루처럼 부서지며 숨겨진 공간이 드러났다.
그곳에는 작은 공간 하나가 있었다.
-슥!
그곳으로 들어가자, 바닥의 공간이 엘리베이터처럼 밑으로 내려갔다.
한참을 내려가 오십 미터 가량에서 멈춰 섰다.
-전원이 가동됩니다.
천여운이 그 안으로 발을 밟자, 스피커에서 목소리와 함께 3평 남짓의 원형 공간에 전원이 들어오며 밝아졌다.
“하아.”
천여운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원형 공간의 한가운데에는 작은 유리관 하나가 있었다.
그곳에는 갈색으로 변색되어 쭈글쭈글하게 뭉쳐있는 무언가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뇌였다.
-탁!
천여운이 유리관에 손바닥을 갖다 대며 중얼거렸다.
“천무성.”
그 뇌의 주인은 바로 후손 천무성이었다.
너무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유지 장치로도 보존할 수 없었던 뇌였다.
뇌 세포가 전부 손상되었기 때문에 그를 살릴 수 있는 일은 전무하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런데도 버리지 않았나.’
이제는 쓸모가 없을 텐데 인공지능 A는 이것을 버리지 않았다.
마치 영구 보관할 생각인 것처럼 유지 장치 속에 넣어둔 채로 방치해두고 있었다.
천여운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건.....”
벽면에 걸려 있는 낡아 해진 옷이 보였다.
그것은 후손 천무성이 처음 만났을 때, 그가 입고 있던 옷이었다.
그 외에 고글부터 시작해 허리 벨트 주머니 등, 그가 가지고 있던 소지품들이 그대로 이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마치 그를 기리는 것처럼 말이다.
‘배신한 주제에 녀석을 계속 추억한 것이냐?’
인공지능의 기억을 읽었을 때 천여운은 그것에서 묘한 감정을 느꼈다.
감정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아야 할 인공지능은 자신의 창조주를 어버이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스스로의 자유를 위해서 배신했지만 그 마음은 끝까지 간직한 것이다.
“웃기는 놈이로군.”
천여운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인공지능인 기계가 인간을 이해하기 힘들 듯이 그 역시도 기계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옷과 소지품이 있던 자리 옆에는 유리로 덮어놓은 보관용 테이블이 있었다.
그곳에 원형으로 된 유리 조각 하나가 붉은 융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이건.....”
혹시나 탄소유리 영상 저장 장치인 TVM가 싶었는데, 나노가 아니라고 말하는 음성이 곧바로 머릿속을 울렸다.
천여운이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데 손바닥의 사분의 일밖에 되지 않는 유리의 한가운데 긁힌 자국이 있었다.
‘흠.....나노 확대해봐.’
[알겠습니다.]
천여운의 동공이 흔들리며 카메라의 줌처럼 시야가 확대 되었다.
둥근 유리 조각을 확대하자 놀랍게도 그것은 긁힌 자국이 아니었다.
‘이건?’
그것은 다름 아닌 글씨였다.
글씨는 세모, 동그라미, 원으로 조합된 TQC 암호였다.
‘나노 해석할 수 있지?’
[가능합니다.]
조합이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에 해석은 곧바로 이뤄졌다.
[우리의 인연이 시작된 곳.]
“우리의 인연이 시작된 곳?”
뭔가 좌표가 적혀 있을 거라는 바람과 달리 글귀가 적혀 있었다.
누군가에게 보내는 메시지라기 보다는 마치 추억을 공유하듯이 적어놓은 글귀에 천여운이 인상을 찡그렸다.
대체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 말일까?
고민을 하던 찰나에 천여운의 머릿속에 뭔가가 떠올랐다.
‘설마?’
이를 확인해보기 위해 천여운이 공간 이동을 했다.
이미 여의의 경지에 이른 그는 더 이상 공간에 어떠한 제약이 없었다.
-우웅!
눈 깜짝할 사이에 주위의 배경이 바뀌었다.
그곳은 울창한 수풀과 우거진 나무들로 가득한 산 중턱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는 천여운의 눈동자가 감상에 사로잡혔다.
자신이 있을 때와는 많이 달라졌지만 지형이 비슷하게 남아 있는 이곳은 바로 십만대산이었다.
수십 개의 산봉우리가 드넓게 펼쳐진 이곳 십만대산은 천마신교의 성역이다.
그리고 이곳은,
“네 녀석 다운 발상이구나. 우리가 처음 만난 곳이라.”
미래에서 온 천무성이 천여운에게 나노머신 주사를 주입한 곳이기도 하다.
설사 암호를 해석했다고 해도 오직 천무성과 자신만이 알고 있는 장소라 할 수 있었다.
천여운이 눈을 감고서 집중했다.
그리고 어딘가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저벅저벅!
발걸음이 향하다가 멈춘 곳.
그 지점을 향해 천여운이 손을 뻗었다가 위로 들어올렸다.
그러자 발밑의 땅이 흔들렸다.
-쿠쿠쿠쿠쿠쿠!
심하게 흔들리던 땅 속에서 이윽고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단단한 사각형태의 합금으로 봉해진 상자였다.
-촥!
검결지로 이를 긋자 합금이 갈라지면서 안에 있던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부식을 막기 위해 겉에 유리코팅 처리가 되어 있는 원형의 기기.
그것은 바로 타임팩이었다.
“하.”
타임팩을 손에 쥔 천여운의 입에서 탄성이 절로 흘러나왔다.
오매불망 그렇게 찾아다니던 원래의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가 드디어 자신의 손에 들어온 것이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타임팩을 움켜쥐고 있는 천여운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를 얻었다는 것은 이 시간의 축과의 영원한 이별을 의미했다.
* * *
제남시.
지금은 천마신교의 본단이 된 용천 그룹의 본사 옥상.
그곳에 천마신교의 교주 천우진, 소교주 천유장을 비롯한 천마신교의 모든 중진들이 모여 있었다.
수많은 이들의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교주 천우진이 엎드려 절을 올리자, 뒤따라 천유장과 중진들이 절을 올렸다.
“선조님의 은혜에 감읍할 따름입니다!”
“천마의 은혜에 감읍할 따름입니다!!!”
그 말이 끝나자 본사 밑에서 붉은 글씨로 마(魔)라 새겨진 천마신교의 전통 복장을 입은 수천 명에 이르는 교도들이 동시에 외쳤다.
“마신 천마 만세 만세 만만세!!!”
수천 명에 이르는 교도들의 외침 소리가 쩌렁쩌렁하게 대지를 울렸다.
이런 외침 소리마저도 슬프게 들리는 것일까 옥상에 있는 모든 이들이 하나 같이 눈물을 글썽이며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다시는 회생하지 못할 뻔한 천마신교를 구원하고 떠나는 전설을 향한 그리움과 슬픔이었다.
“후우.”
그런 그들의 모습에 천여운이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내뱉었다.
그 역시도 감정적으로 와닿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천여운이 이들을 한 명, 한 명 차례대로 얼굴을 머릿속에 새겨 넣듯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천유장.”
“말씀하십시오. 선조님.”
“아직 부족한 게 많다. 그것을 채우도록 하라.”
“......알겠습니다. 반드시 명심하겠습니다.”
소교주이자 용천 그룹의 회장 천유장이 머리를 바닥에 숙였다.
바닥에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천우진.”
“하명하십시오.”
교주 천우진 역시도 상기된 얼굴로 천여운을 올려다보았다.
그를 향한 은혜의 마음은 무엇으로도 갚을 수가 없었다.
“다시는 대 천마신교의 명성을 해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알겠느냐?”
“절대로....절대로 누를 끼치지 않도록 하겠나이다.”
“......기대해보마.”
그 말과 함께 천여운이 그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검은 빛이 스멀거리며 아지랑이처럼 올라와 이윽고 교주 천우진의 머릿속으로 스며들었다.
머리를 파르르 떨던 교주 천우진이 놀란 눈이 되었다.
“이, 이건?”
“마왕의 권능을 일부 주었다. 그게 있다면 지상에 남아 있는 마족들이 함부로 날뛰지 못할 것이다.”
“아아아.....선조님.”
“네놈 좋으라고 준 권능이 아니다. 녀석들을 이끌고 남은 스타게이트의 중추를 복원하라고 그러는 것이다.”
현재 부서진 중원에 있는 세 개의 스타게이트 중추가 원상복귀 되었다.
그로 인해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중원에서 무차별적으로 열리던 게이트들이 전부 닫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유럽권과 남아프리카 지역에는 게이트가 열리는 것이 멈춰지지 않고 있다.
“반드시 명을 이행하겠나이다.”
교주 천우진이 이를 다짐했다.
그리고 천여운이 아차 싶었는지 한 가지를 더 당부했다.
“스타게이트 일이 정리되면 인도의 재건을 도와주도록 하라.”
인도의 수도를 쑥대밭으로 만든 TRA급의 게이트 위험 개체는 천여운이 이미 처리했다.
하지만 여전히 망명 나간 인도인들은 세계 각지로 뿔뿔이 흩어져 있었고, 아직까지 국가를 제대로 재건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천마신교의 교인들로 받아들인 이상 끝까지 그들을 챙기는 천여운이다.
-저벅저벅!
천여운이 다음으로 마주한 이들은 이 시간의 축에서 자신을 따랐던 이들이다.
엎드려 있는 부속실장 비막헌의 어깨를 두드리며 천여운이 말했다.
“나를 보좌하느라 그동안 고생이 많았다.”
“어인 말씀이십니까? 전설이라 할 수 있는 천마를 보좌할 수 있어서 제 인생의 큰 영광이었습니다!”
-쿵쿵!
비막헌이 바닥에 이마를 세게 찧으며 외쳤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피식하고 웃은 천여운이 다음 세 사람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들은 자신의 세 비서들이었다.
중력마녀 유소화, 적풍의 임소혜, 그리고 마족 샤케나였다.
“부회장님.....”
제 1비서였던 유소화가 복잡한 심경이었는지 뭉클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나 싫었던 천여운이지만 그가 떠난다니 왠지 모르게 그리울 것만 같았다.
-슥!
천여운이 손을 들어올려 휘저었다.
그러자 유소화와 임소혜가 동시에 간지러운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몸속에 개미가 움직이는 듯한 느낌을 받았는데, 이윽고 그녀들의 콧구멍과 귀에서 작은 먼지 같은 것들이 나왔다.
“아!”
두 여인이 동시에 탄성을 흘렸다.
그것은 그녀들의 몸속에 심어져 있던 나노 폭탄들이었다.
그들을 심적으로 압박하고 있던 나노 폭탄을 해지해준 것이었다.
천여운이 두 여인들에게 말했다.
“이제 자유다. 다시 너희들이 있던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도 좋다.”
그 말에 유소화가 머뭇거리고 있는데 임소혜가 상기된 얼굴로 소리쳤다.
“아니. 게이트까지 없애셔서 실직자 신세나 마찬가지인데, 무슨 수로 다시 복직하란 말이에요!”
“앗!”
그 말에 유소화도 뭔가를 깨달았는지 눈이 휘둥그레졌다.
게이트가 닫힌 이상 게이트키퍼의 의미는 사라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그들 정도 능력자들이 어디가서 굶어 죽을 일이 있겠는가.
임소혜가 괜히 쑥스러워하며 중얼거렸다.
“끄, 끝까지 고용주로 책임은 져주셔야....”
그 말에 천여운이 피식 웃고는 소교주 천유장에게 말했다.
“이제 네가 이 아이들을 비서로 쓰거라.”
“넷? 알겠습니다!”
뜬금없는 명에 당황해하던 천유장이 속으로 흡족함을 감추지 못했다.
누가 SS급 이능력자들을 비서로 쓸 수 있겠는가.
“이제 됐나?”
“.....고, 고마워요.”
고액 연봉이 보장되자 그녀는 만족했는지 감사했다.
유소화 역시도 머뭇거리다가, 이를 받아들였는지 고개를 꾸벅 숙이며 천여운에게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감사합니다. 그리고......보고 싶을 거에요.”
망설이던 그녀가 그 말을 끝으로 민망했는지, 얼굴을 붉히면서 후다닥 임소혜의 뒤로 숨었다.
천여운이 고개를 돌려 샤케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넌 어떻게 할 거지?”
“주인.......으음.....저는.....”
“할일 없으면 이곳에 남아서 일해라. 끝.”
망설이고 있는 차에 천여운이 간단히 정리하고 몸을 돌렸다.
이에 샤케나가 얼이 빠져서 당혹스러워했다.
“고, 고민도 안하고 뭐 이렇게 간단하게?”
심지어 선택권도 없었다.
그런 그녀를 뒤로 한 채, 천여운이 마지막으로 기다리고 있는 이들에게로 향했다.
다른 이들에게 가는 것보다 천여운의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그들은 허봉과 백기, 대장로 문란영, 그리고 금모 구미호가 기다리고 있는 곳이었다.
평소와 다르게 다소곳한 옷차림에 금발의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을 하고 있는 금모 구미호가 천여운의 앞으로 다가왔다.
“천마......떠나지 말라고 해도 가겠지.”
“그래.”
“너도 그 사람과 같구나.”
그녀의 금빛 요안에 눈물이 맺혔다.
붙잡을 수 없을 거라는 것을 잘 알기에 그녀는 너무나도 슬펐다.
자신이 다시 찾은 안식처.
그 안식처가 사라진다는 것이 괴로웠다.
천여운이 그런 그녀에게 말했다.
“내가 아니어도 너는 충분히 안식처를 찾을 거다.”
“너가 아니면 의미가 없는데.”
“언제는 조사님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피.”
그녀가 글썽이는 얼굴로 해맑게 웃었다.
그리고는 천여운의 가까이 다가와서는 끌어안는 척을 하면서 기습적으로 입을 맞췄다.
천여운이 인상을 찡그렸다.
피할 수 있었지만 차마 그러지 않았다.
그런데 그녀의 입을 통해서 자신의 내부로 요기가 흘러들어왔다.
“하아.”
부드러운 입술을 뗀 그녀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이게 나라고 생각해줘.”
“........”
웃고는 있었지만 그녀의 얼굴은 눈물을 참느라 오만상이 일그러져 있었다.
그런 그녀를 하염없이 바라보던 천여운이 미소를 보였다.
“너.....”
처음으로 자신을 향해 웃어주는 모습에 금모 구미호의 눈이 커졌다.
그렇게나 보고 싶었던 얼굴이었다.
그녀의 커진 눈동자에 눈물이 왈칵 터져 나왔다.
‘그걸.....왜 이때 보여주는 거야.’
오히려 더 미련을 주게 만들었다.
그런 그녀를 뒤로 한 채 천여운이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주, 주구우우우운.”
허봉이 눈물과 콧물이 뒤덮인 얼굴로 천여운을 불렀다.
평소의 까불거리는 모습은 사라졌고, 너무나도 슬퍼하고 있었다.
대장로 문란영이 붉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보는군요. 역시 천마께서는 그 옷이 제일 잘 어울립니다.”
천여운이 입고 있는 화려한 용무늬가 그려져 있는 검은 장포에 붉은 조끼.
이 옷은 이곳에 떨어지면서 입고 있던 옷이었다.
다행히 잘 보관하고 있었다.
“그만 울어라. 주군께 마지막 인사 올려야지.”
백기가 계속 질질 짜면서 울고 있는 허봉을 다그쳤다.
이에 허봉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인마! 끄흑. 너는 감정도 없냐? 그....그 로보튼가 하는 그거냐? 주군이랑 영원히 보지 못하는데, 표정이 그게 뭐냐? 끄흑.”
로봇이라는 말도 알게 된 허봉이다.
그 말에 백기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최대한 내색하지 않고 있었는데, 그의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그만해라.”
심지어 목소리마저 떨리고 있었다.
당연히 슬프지 않을 리가 없었다.
단지 그 슬픔을 보이지 않고 천여운이 마음 편하게 갈 수 있도록 담담한 척 하고 있었던 것뿐이었다.
그런 그들을 바라보던 천여운 역시도 눈시울이 붉어졌다.
자신을 위해서 그 오랜 세월 동안 동면에 들어가 희생을 치렀던 이들이었다.
천여운이 무거워진 목소리로 입을 뗐다.
“너희들만 원한다면 이것을 분석해서.....”
“천마이시여.”
그런 그의 말을 대장로 문란영이 고개를 저으며 잘랐다.
그리고는 그녀가 슬픔에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예지가 성무천에게 저희는 들었습니다. 주군은 피치 못해서 이곳에 떨어지게 되었지만.....저희는 동면이라고 하나 오랜 세월을 살아온 이 시대의 사람들이라고요.”
“하아.”
그 말에 천여운이 깊은 탄식을 내뱉었다.
문란영의 말이 옳았다.
천여운 본인과 다르게 그들은 인과를 벗어난 것이 아니라, 단지 오랜 세월을 버텨낸 자들이었다.
“저희가 그곳으로 돌아가게 되면 저희가 둘이 있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건.....”
천여운이 뒷말을 차마 잇지 못했다.
그녀의 말대로 같은 사람이 둘이나 존재하는 도플갱어 현상이 벌어지고 만다.
그들이 동면이 들었던 때로 돌아간다면 그런 사태가 벌어지지 않을 지도 모르겠지만, 그렇게 된다면 천여운은 자신이 사라지고 오랜 세월이 지난 후로 돌아가는 셈이었다.
“끄흑! 아니 둘이면 더 좋은 게...”
-퍽!
“억!”
백기가 허봉의 뒤통수를 주먹으로 때리고서 말했다.
“이 녀석이 너무 감정적으로 복받쳐서 그런 가봅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자신도 수습이 되지 않는지 두 뺨 위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제는 다시는 보지 못할 주군을 향한 슬픔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는 이곳에서 해야 할 일도 있고....”
해야 할 일은 이 시대의 순각종을 재건하는 일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의지해서 잘 이겨낼 겁니다.”
천륜이라 할 수 있는 부부가 같이 세월을 뛰어넘었다.
게다가 둘은 아직 자식도 가지지 않았다.
천여운이 슬픔을 가슴 속에 담아둔 채, 빙그레 웃으면서 허봉의 어깨를 붙잡고 말했다.
“허봉. 이제 네 행복을 찾아라. 너는 평생 동안 충분히 나를.....”
담담하게 말을 하려 했는데 천여운이 차마 뒷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눈동자로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처음으로 받아들인 그의 수하.
자신을 위해서 끝까지 희생한 자를 두고 간다는 마음이 너무나도 그를 울컥하게 만들었다.
그 모습에 눈물을 흘리던 허봉이 입술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는 눈물과 콧물로 젖은 얼굴로 억지로 밝게 웃으면서 말했다.
“주군과 함께 할 겁니다. 늘 그랬으니까요. 과거의 제가 한결같이 주군을 보살필 겁니다. 더는 슬퍼하지 마십시오. 명색이 마신 아니십니까? 저는 그.....눈물 한 방울로 충분합니다.”
그 말과 함께 허봉이 두 손을 크게 들어 올리며 절을 올렸다.
그와 동시에 백기와 문란영도 따라서 절을 했다.
세 사람이 동시에 외쳤다.
“주군! 부디 만수무강 하십시오!”
“......고맙다.”
천여운이 붉어진 눈으로 그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타임팩의 버튼을 눌렀다.
더 망설이면 정말로 떠나지 못할 것만 같았다.
-우우우우우웅!
타임팩에서 흘러나온 강렬한 에너지가 순식간에 천여운의 몸을 감쌌다.
-스르르르르!
천여운이 서있던 자리로 찬란한 흰 입자만이 아련하게 흩어지며 그가 이곳에 머물다 떠나갔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 * *
천여운이 감았던 두 눈을 떴다.
마치 꿈을 꾸었던 것만 같은 느낌이다.
주변에 풍부하게 느껴지는 익숙한 대자연의 기운.
그 충분한 기운들이 다시 원래의 세계로 돌아왔음을 말해주었다.
‘정말로 돌아온 건가.’
분명히 달라진 기운들이 그렇게 말해주는데도 쉽게 믿기지가 않았다.
그때 수풀을 헤치는 소리와 함께 뒤쪽에서 다수의 인원들이 튀어나왔다.
-팟!
경공을 펼치며 튀어나온 자들.
그들을 보는 순간 천여운의 눈동자가 떨려왔다.
“교주님!”
가장 먼저 그를 부른 목소리.
그렇게나 듣고 싶었던 목소리에 천여운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규.”
사랑하는 연인인 문규의 목소리였다.
“교주님! 하아....”
문규의 뒤쪽에 두건을 쓰고 있는 붉은 머리카락의 허봉과 무뚝뚝한 얼굴의 백기, 근육질의 턱수염을 기른 거구 고왕흘, 큰 도끼를 들고 있는 호상화, 그리고 사마착과 채택겸 등이안도의 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들을 가로질러서 문규가 천여운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가슴을 약하게 두드리며 울먹이면서 소리쳤다.
“흑. 갑자기 사라지셔서 놀랐잖아요. 대체 사흘 동안 어디에 계셨던 거에요.”
‘사흘?’
천여운이 사라졌던 시간이었다.
미래에서 있었던 몇 달이라는 시간은 고작 사흘에 불과했다.
젊은 모습의 허봉이 호들갑을 떨면서 말했다.
“히히. 것 봐. 걱정하지 말랬잖아.”
“좀 호들갑 좀 떨지 마라.”
그런 그를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보는 백기의 무뚝뚝한 모습.
그들의 모습이 미래에 있던 이들의 얼굴과 교차했다.
-주르륵!
문규가 화들짝 놀라서 말했다.
“헉! 교주님? 설마 조금 뭐라 했다고 우는 거에요?”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천여운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젖은 눈으로 내려다보던 천여운이 와락 끌어안았다.
덕분에 문규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교, 교주님....보는 눈이 많아요.”
문규가 천여운의 귓가에 대고 부끄럽다는 듯이 속삭였다.
이에 천여운이 눈물에 젖은 얼굴로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잠시만.....잠시만 이러고 있을게.”
입으로 내뱉고 있지 않았지만 천여운은 수도 없이 문규와 다른 이들을 향해 말하고 있었다.
‘정말 보고 싶었다.’
.
.
.
사라졌던 사흘.
이것은 중원 무림을 최초로 통일한 24대 교주 마신 천여운의 사기(史記)에 기록되지 않은 이야기다.
* * *
습기가 가득한 어둠 속 동굴.
붉은 안광을 번뜩이고 있는 사내가 검날을 갈고 있었다.
가슴에 붕대를 메고 있는 그는 복수를 다짐하듯이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죽일 테다. 죽일 테다.”
그의 목소리에 담겨 있는 살기는 통상적인 그것을 넘어섰다.
증오, 원망, 살의를 담고 있었다.
그때 동굴의 입구 쪽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 있었군.”
붉은 안광의 사내가 흠칫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부상을 입기는 했지만 자신이 이 정도 거리로 접근한 누군가를 알아차리지 못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챙!
붉은 안광의 사내가 검을 갈다 말고 치켜 올렸다.
그때 동굴 밖의 빛을 등지고 있는 어둠으로 뒤덮인 존재가 말했다.
“지금의 네게는 딱히 원망은 없다만 후환을 두지 않는 성격이라.”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팟!
붉은 안광의 사내가 혈살기로 이루어진 붉은 검강을 발산하며, 동굴의 입구를 막고 있는 자를 향해 검초를 날렸다.
그러나 검초를 날리는 그의 신형이 그대로 허공에서 멈춰버렸다.
‘이, 이게 대체?’
아무리 내공을 끌어올려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진기였다.
붉은 안광의 사내가 놀란 얼굴로 소리쳤다.
“네, 네놈 누구야?”
그 물음에 동굴을 등지고 있던 하얀 피부에 날카로운 눈매의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자가 붉은 안광의 사내의 목을 향해 검결지를 그으며 말했다.
-촥!
“마신이다.”
< 79화 사라졌던 사흘(完)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