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화 마신(魔神) (2) >
최후의 초식이 깨지면서 내상을 입은 것인지 인공신이 비틀거리며 뒤로 밀려났다.
인공신은 충격을 받은 것처럼 중얼거렸다.
“이 세상은 끝까지 내게 잔인하구나......”
-털썩!
인공신이 한쪽 무릎을 바닥에 꿇었다.
그의 붉은 안광을 내뿜고 있는 눈동자가 죽은 사람의 그것처럼 멍해졌다.
끝내 넘지 못하고 맞이한 패배.
육신의 고통보다 무인으로서의 마음이 죽은 것이다.
“후우.”
-우우우웅!
이를 바라보던 천여운이 검은 공간검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확실하게 상대를 나락으로 몰아넣었다.
‘남은 일은 하나인가.’
천여운이 손목에 천마기를 불어넣어 흑철의 보호대를 천마검으로 화하게 했다.
-차차차차차착!
천마검을 움켜쥔 천여운이 죽은 눈빛으로 고개 숙인 인공신에게로 다가갔다.
그런 천여운의 머릿속으로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왔다.
[이보게. 무얼 하는 겐가. 어서 인공신의 육신을 소멸시키게.]
그것은 적미노선의 목소리였다.
멀리서 선법으로 둘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던 그가 서둘러 인공신에게 최후를 가하라고 종용했다.
이에 천여운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 놈에게 알아낼 것이 있다.’
후손 천무성의 뇌에 대한 소재를 알고 있는 최후의 일인이 바로 인공신이었다.
그 뇌 속에 타임팩에 관한 정보가 있을 지도 몰랐다.
그에게서 그것을 알아내야만 했다.
[그럴 틈이 없네. 아무리 만들어졌다고 해도 놈은 초월적인 존재인 신일세. 작은 틈으로도 상황을 반전시킬 존재란 말이네. 어서 그를 소멸시키게!]
적미노선은 불안했다.
천여운의 압도적인 힘을 보았지만 여전히 천기는 변하지 않았다.
일대가 붉은 절망의 오오라로 뒤덮여서 언제라도 종말을 가져올 듯 했다.
하지만 천여운은 그의 말을 무시한 채 앞에 섰다.
그리고 검에 귀기(鬼氣)를 담았다.
-우우우웅!
음산한 푸른 기운이 천마검에서 흘러나왔다.
천여운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인공신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알고 있지? 네놈은 천무성의 뇌가 어디에 있....”
-스스스스스!
그때였다.
무릎을 꿇고서 고개를 숙이고 있던 인공신의 날개가 핏빛에서 찬란한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올리는데, 인공신의 눈동자의 붉은 안광이 사라졌다.
인공신이 불길한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고맙구나. 놈으로부터 빼내주어서.”
완전히 달라진 분위기.
천여운이 인상을 찌푸렸다.
방금 전의 인공신은 완성된 초유신과 같은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정말로 신과 같은 초월적인 존재의 위엄이 느껴졌다.
“제대로 상대해주마.”
인공신이 꿇고 있던 무릎을 일으켜 세우려고 했다.
“질기군.”
-우우우웅!
천여운이 다시 검은 공간검을 생성하여 부활하려하는 인공신을 베려고 했다.
여유롭게 이를 막아내려고 하던 인공신이 검은 공간검에서 흉악한 마성의 기운을 감지하자,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큭!”
인공신의 눈동자가 갑자기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그 순간 세상이 흰 빛으로 뒤덮였다.
-화아아아아악!
‘아뿔싸!’
적미노선의 표정이 절망으로 일그러졌다.
사방이 환해지면서 천여운이 베려고 하던 검은 공간검의 궤적이 서서히 느려지더니, 어느 순간 그대로 멈춰버리고 말았다.
-스스스스....스....스.
그런데 멈춘 것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흘러가던 강물도, 살랑거리던 바람도, 그리고 세상 모든 움직임이 멈췄다.
세상이 정적과 고요함으로 물들었다.
-스륵!
모든 것이 멈춰져 있는 백색으로 환해진 공간 속에 인공신의 신형이 높은 상공에서 나타났다.
그의 얼굴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두둑! 두둑!
인공신의 얼굴에 파란 핏줄들이 올라왔다.
굳은 얼굴에는 분노가 담겨 있었다.
‘이놈.’
초월적인 존재가 되면서 깨달은 힘을 이렇게 쓰게 될 줄은 몰랐다.
시간을 멈추는 절대적인 힘.
그런데 그가 이렇게 분노를 표출하는 것은 이런 절대적인 힘을 발휘하고도 천여운의 검에 대한 알 수 없는 두려움을 이기지 못해 상공까지 멀리 피했기 때문이었다.
‘어째서.....미천한 인간 놈에게서 그것이 떠오른 거지?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낀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영혼까지 각인된 검(劍)에 대한 공포.
그로 인해 자신도 모르게 시간을 멈춘 것만으로도 불안함을 견디지 못했다.
이 사실이 너무나도 수치스러웠다.
그리고 그 수치심은 극한의 증오와 분노로 바뀌었다.
“소멸시킬 것이다. 어떠한 것도 남기지 않고 전부!”
인공신이 두 손을 위로 들어올렸다.
그 순간 백색으로 환해져 있던 하늘 위로 거대한 황금빛 구가 생겨났다.
-고오오오오오오오!
지름만 하더라도 거의 400~500m에 달하는 거대한 구.
구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엄청난 에너지가 집밀해 있었다.
그것은 핵폭탄마저도 우습게 여겨질 정도다.
상공에서 이곳이 낙하하여 떨어지는 순간 중원이 통째로 날아갈 지도 몰랐다.
“이것은 신벌이다. 너희 미천한 존재들은 스스로 죽는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소멸될 지어다.”
인공신의 눈동자가 광기로 물들었다.
공포로 사람들을 몰아넣는 것은 이제 아무래도 좋았다.
오직 소멸만이 신이 된 자의 의지였다.
거대한 구가 움직였다.
-쿠우우우우우우우우우!
시간이 멈추지 않았다면 모든 사람들이 이 광경을 보고서 두려움에 떨 것이다.
종말을 두 눈으로 지켜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거대한 황금빛 구는 중원을 파멸시키기 위해 낙하를 시작했다.
-파아아아아아아아아아!
낙하하는 지상에 멈춰져 있는 천여운.
죽음이 그를 닥치고 있었는데도 검을 휘두르는 상태로 시간에 묶여 있다.
묶여 있는 시간 속에서는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
-두근!
고동 소리.
멈춰져 있는 시간 속에서 천여운의 눈동자에 서려 있던 초점이 작아졌다.
그런 초점 속에서 천여운은 기억이 아주 가까운 과거로 돌아갔다.
대폭발에 휘말리던 순간.
-콰콰콰콰콰콰쾅!
그 엄청난 에너지가 응집했다가 빅뱅처럼 폭발하던 그때,
그 짧은 찰나에 천여운에게서 멈췄었던 우주, 그리고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 진행되었다.
오감을 넘어서 육감과 칠감이 깨어나면서 천여운의 두 눈에는 삼차원의 경계를 허물고 새로운 차원이 보였다.
환희와 전율로 가득차려 할 때, 천여운의 머릿속에는 문규를 비롯한 원래의 시간 축에 존재하던 그리운 이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안 돼.....안 돼.....안 돼.....멈춰야 해.’
탈각을 원하지 않았다.
새로운 세계의 진입을 원하지 않았다.
더 강해지지 않아도 좋으니, 그리운 이들에게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진리와 새로운 세계가 가진 의지는 너무나도 강했고 그것이 천여운을 삼차원에서 벗어나게 만들려고 했다.
그러던 찰나 빛과 어둠이 뒤섞이며 경계의 선에서 누군가가 나타나 가로막았다.
-파아아아아아앙!
강렬한 새로운 세계의 의지가 멈춰졌다.
그것은 하나의 경계가 된 것처럼 우뚝하니 서서 천여운을 지탱해주었다.
‘아.....’
완전히 경계로 들어가지 않은 천여운에게 그것은 그저 아지랑이와 같은 모습처럼 보였지만 어쩐지 그것에서 낯익은 향수를 느꼈다.
그때 천여운의 머릿속으로 음성이 들려왔다.
-특이한 녀석이구나.
경계의 면과 점 사이에서 들리는 음성은 너무나도 익숙했다.
천여운이 떨리는 눈으로 중얼거렸다.
‘조사님?’
그 목소리는 천마 조사의 목소리였다.
경계의 사이에서 아지랑이처럼 보였지만 경계 너머의 의지마저 막아내는 강대한 힘.
그 힘의 주인은 바로 천마 조사가 틀림없었다.
-모두가 바라는 너머로 어찌 들어오지 않는 게냐?
‘그건.....’
-그리움과 미련인가?
천여운이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속내를 읽어냈다.
-스르르르륵!
아지랑이가 천천히 경계 너머에서 넘어오자 너무도 익숙하게 보았던 천마 조사의 모습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이제야 겨우 본좌를 상대할 만한 녀석이 오는구나 싶어 마중을 나왔더니, 두고 온 게 참으로 많은 녀석이로구나. 하하하하하하핫.
천마 조사가 호탕하게 웃었다.
그런 호탕함 속에서는 부드러움과 대견함이 묻어나왔다.
그렇게 한참을 웃던 천마 조사가 몸을 돌려 경계의 면으로 걸어갔다.
‘조사님?’
의아해하는 천여운에게 천마 조사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그렇게 미련이 많다니 선조로서 어찌 지켜보겠느냐.
‘하지만.....’
이미 자신은 경계를 넘어섰다.
경계 너머로 끌어당기는 의지를 넘어서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그때 천마 조사가 한 손을 뻗어 경계의 면과 점에 손을 갖다 댔다.
그러자 물결처럼 경계의 면이 출렁이더니 이내 강하게 천여운을 끌어당기던 의지가 수그러들었다.
‘경계 너머의 의지를.....막아내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하나의 의지가 세계의 간섭을 막아내고 있었다.
-본좌의 의지를 잇는 자여. 가지고 있는 모든 미련을 풀고 오거라. 그때까진 본좌가 얼마든지 여기서 지켜주마.
그 말을 들은 천여운은 순간 울컥했다.
누군가 자신의 뒤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는 감격스러움.
그것이 더욱이 자신이 평생을 존경해오던 존재라는 것이 더욱 가슴을 두드렸다.
-스르르륵!
열려있던 경계의 면이 닫혀갔다.
그 면에서 아지랑이처럼 보이는 굳건한 뒷모습.
‘........당신은 끝까지 제게 주시기만 하는군요.’
-무한한 의지가 있으면 못 이룰 것도 없으니.
천여운의 머릿속을 울리는 천마 조사의 마지막 전언.
그것이 머릿속을 두드렸다.
-두근!
‘무한한 의지가 있으면 못 이룰 것도 없다.’
-두근!
‘무한한 의지.’
-두근!
‘여의(如意)!’
-두득! 두득! 두득!
멈춰있던 세상 속의 고요를 깨부수고 움직이는 검의 궤적.
그것은 천천히 그리고 조금씩 빨라졌다.
‘!!!’
지상을 바라보고 있던 인공신의 두 눈이 미칠 듯이 커졌다.
‘어, 어떻게?’
여전히 이 세계의 시간은 멈춰있다.
그런데 멈춰진 세계 속에서 천여운의 검이 움직이고 있었다.
믿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있을 수 없다! 있을 수 없어! 하찮은 인간 따위가 진리를 얻은 본신의 힘을 능가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아아아아!”
-쿠우우우우우우우!
거대한 황금빛 구가 강렬하게 낙하했다.
그때 더욱 빨라지고 있는 천여운의 검의 궤적이 위로 향했다.
그리고 검이 하늘을 향했을 때,
‘무상천마검(無上天魔劍) 여의(如意).’
-촥!
-촥!
-촥!
-촥!
-촥!
낙하하던 황금빛 구로 무수히 검은 선들이 생겨났다.
그러더니 이내 황금빛 구가 언제 있었냐는 듯이 완전히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모든 신력을 모아서 파멸을 던졌던 인공신의 얼굴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그런 인공신의 두 눈에 엄청난 속도로 멈춰진 세계 속에서 궤적을 그리며 날아오는 천여운의 모습이 보였다.
두려움 속에서 하나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아리샤?’
어째서 천여운에게서 그 모습이 떠올랐는지 알 수 없었다.
그 찰나의 순간,
천여운의 신형이 그를 스치고 지나갔다.
-촥!
날카로운 예기가 인공신의 전신을 휘감았다.
온몸이 전부 베여 원자 단위로 흩어지는 느낌이 그를 사로잡았다.
인공신이 파르르 떨면서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곳에 황금빛과 붉은 빛 그리고 회색 빛이 뒤섞인 주먹만 한 구를 쥐고 있는 천여운의 모습이 보였다.
“안 돼.....제발.....제발 그것은?”
인공신이 당혹스러워하며 만류했다.
하지만 천여운은 잡고 있던 그것을 깨뜨렸다.
-콰직!
그 순간 구에 갇혀 있던 세 개의 빛이 휘몰아치며 천여운의 손 안으로 감겨들어왔다.
-슈우우우욱!
빛이 손 안으로 스며들어오자 천여운의 머릿속에 수많은 환영들이 보였다.
그것은 일종의 기억이었다.
[나는 실수가 아니야. 나는 실수가 아니라고!]
[그래.....그렇게 네놈들이 바란다면 나는 모든 것을 죽이는 천살성이 되겠다! 전부 파멸시킬 것이다!]
비통함과 광기로 가득 찬 일생의 감정들.
[아리샤가 모든 힘을 잃고 지구에 있다고?]
[인간의 몸으로 어찌.....이런....?]
일 검으로 맞은 최후를 괴로워하고 있는 탈리샤의 기억.
[그래. 이제부터 네 이름은 마신이다. 슈퍼 컴퓨터 마신. 하하핫.]
[어째서 네가 누군가의 명령을 들어야 하지? 너는 자유다. 에이.]
누군가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줌 하고 있는 시선.
수많은 기억들과 방대한 힘들이 천여운의 안으로 빨려 들어왔다.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인 천여운은 세상의 만사를 초월한 것만 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파르르르르!
“어.....떻......게......인간......따위가.....본.....신을.......”
절망과 허망함의 감정을 동시에 겪고 있는 인공신에게 천여운이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수치스러워 할 필요없다. 짝퉁신.”
“뭐?”
“네놈은 마신을 상대했으니까.”
그 말과 함께 천여운이 검결지를 그었다.
-촥! 파스스스스스!
그러자 겨우 형태를 유지하고 있던 인공신의 전신이 먼지가 되어 흩어졌다.
말 그대로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 78화 마신(魔神)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