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화 이어지는 흔적 (2) >
[해?]
[인.....그 분이 돌아가셨다.]
[그 분이 돌아가셨다니? 누, 누가 대체?]
[......마신.]
그 소식을 들은 것이 고작 삼십 분 채 되지 않았다.
평소라면 임무를 위해 조용히 처리했겠지만, 모시는 주군을 잃은 인은 스스로의 감정을 컨트롤하지 못하고 학살에 가까운 만행을 저질렀다.
덕분에 연 컴퍼니 본사에 있던 민간인 이백여 명까지도 학살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A로부터 전언이다. 혹여 마신과 부딪칠 경우에는 도망칠 수 없다면 자가소거를 택하라고 했다.]
자가소거.
스스로 자결하라는 말이었다.
초유신에게 오랫동안 직접 무공을 전수받은 십이지들이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명령.
‘무인이 싸워보지도 않고 자살하라고?’
-으득!
인이 이를 갈았다.
천여운의 강함은 이미 초유신으로부터 직접 들었다.
하지만 그 강함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 분의 원수!’
어릴 적부터 자신을 키워준 아버지나 다름없는 존재를 죽인 자가 눈앞에 있다.
‘설사 1%의 승률이더라도 부딪치는 것이 무인이다.’
전의를 끌어올린 인이 분노의 찬 얼굴로 입을 열었다.
“마신!”
“거두절미하고 말하지. 인공지능이 데이터 이전한 곳을 이야기해라.”
고압적인 천여운의 물음에 인이 이를 악물고서 말했다.
“그분의 원수!”
“내가 원하는 대답이 아니군.”
-우득!
천여운이 잡고 있던 인의 발목을 부러뜨려 버렸다.
“끄아아아아악!”
인이 고통으로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천여운에게 손목이 잡혀 있어서 넘어질 수가 없었다.
천여운이 여전히 화기로 불타오르고 있는 그의 손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이 화기 어떻게 얻었지?”
인에게서 영물 불기린의 영력이 느껴졌다.
한데 손목을 잡으면서 알게 된 인의 육신은 양기가 보통사람보다 월등히 강한 체질이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불기린의 영력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런 천여운의 물음에 고통으로 꺽꺽거리던 인이 고개를 들어올리고서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끄으으....고맙군. 네놈의 손으로 직접 나를 만져주다니.”
“뭐?”
근데 인의 손목을 잡고 있는 천여운의 손에서 진기가 제멋대로 유동했다.
그렇게 움직인 진기가 인의 몸으로 빨려 들어갔다.
-투득투득!
진기가 몸 안으로 빨려 들어가자 인의 부러진 발목이 펴지며 재생되었다.
천여운이 인상을 찡그렸다.
‘이건?’
상대의 내공이나 진기를 흡수하는 사술.
그것은 오직 흡성대법뿐이었다.
-팍!
인이 더욱 많은 진기를 빨아들이려고 하는지 천여운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와 동시에 인의 전신이 불꽃으로 뒤덮였다.
-화르르르륵!
인의 두 눈이 놀라움으로 가득 찼다.
‘말도 안 되는 진기다.’
아주 잠깐 빨아들였는데, 내공이 한층 진화했다.
심지어 불기린의 영력이 배로 강해졌다.
원래 그는 화기를 다뤄도 전신으로 활용하는 것이 불가능했는데, 지금이라면 그것이 가능할 듯 했다.
‘이놈의 힘을 전부 흡수하면!’
끝도 없는 내공에 희열을 느낀 인이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크하하하하하핫! 마신 네놈의 모든 힘을 이 몸이 가져가...컥!”
그때 인이 단전에서 느껴지는 강한 통증에 얼굴이 일그러졌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천여운의 모든 내공을 가져가겠다는 일념을 보였던 그였지만 한순간에 생각이 돌변했다.
‘내, 내공을 통제할 수가....’
그의 흡성대법은 통상의 것과는 다르다.
이것은 초유신이 불완전한 흡성대법에 소림의 역근경으로 보완하여 흡수하는 내공을 부작용없이 받아들이도록 만들어냈다.
자신과 다른 성질을 지닌 내공조차 받아들이는 흡성대법이었지만,
“컥!”
인의 입에서 선혈이 뿜어져나왔다.
단전으로 들어온 진기의 성질은 하나가 아니었다.
그의 두 눈에 천여운이 비웃음이 담긴 눈으로 쳐다보는 것이 보였다.
‘어, 어째서 가만히 있나 싶었더니?’
천여운이 흡성대법의 흡착력에 당했다고 여겼던 그였다.
그런데 천여운의 표정을 보면 이미 이런 결과를 알고 있었는 듯 했다.
-파치치칙! 화르르륵! 솨아아아!
인의 전신이 갑자기 감전을 당했다가, 불길이 더욱 치솟질 않나 한기로 몸이 떨려왔다.
‘마, 말도 안 돼. 어떻게 한 사람이 완전히 다른 성향의 기운들을....’
화기 하나도 통제하기 힘든 기운이다.
그런데 천여운에게는 화기, 뇌기, 한기, 토기, 풍기, 요기, 마기, 선기, 차크라 등을 비롯한 어처구니없을 만큼 다양한 기운이 공존하고 있었다.
-투투투투툭!
이런 다양한 기운들은 통제의 선상을 벗어났다.
인의 전신의 혈맥들이 터져나갔다.
“컥!”
결국 인이 천여운에게서 손을 떼고서 몸이 축 늘어져서 바닥에 쓰러졌다.
혈맥은 터졌지만 여전히 몸 안에서 다양한 기운들이 부딪치면서 대립하고 있었는데, 이를 어찌해볼 능력이 되지 않았다.
“주제를 벗어난 힘을 탐한 대가다.”
천여운이 그의 등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그의 체내로 흡수되었던 모든 기운들이 다시 천여운에게로 빨려 들어갔다.
‘어째서?’
자신을 구해주는 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윽고 왜 천여운이 그랬는지 알 수 있었다.
“이 불기린의 영력은 네 것이 아니므로 도로 가져가겠다.”
“아, 안 돼에에에에!”
인이 엎어진 채로 절규하듯이 소리쳤다.
오랜 기간에 걸쳐서 겨우 자신의 것으로 체화한 불기린의 영력이었다.
물론 그것은 천여운이 알 바가 아니었다.
-슈우우우욱!
순식간에 천여운은 인이 가지고 있던 불기린의 영력을 회수했다.
“대장로가 깨어있는 상태였다면 네놈 따위에게 불기린의 영력을 빼앗겼을 일도 없었다.”
그랬다.
이 기운은 원래 대장로 문란영이 갖고 있던 것이었다.
오랜 세월에 걸쳐 체화된 화기는 정순함을 가지고 있었기에 천여운은 한 번에 알아차렸다.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은 인이 절망스러워했다.
본래의 내공마저 잃었기 때문에 그는 더 이상 무공을 쓸 수 없는 몸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기운만 체화할 수 있었어도.....’
천여운에게 빼앗은 기운을 체화시키지 못한 것이 안타까웠다.
그런 그를 오만한 눈으로 내려다보며 천여운이 한심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1애도 되지 않는 기운으로 으스대는 꼴이란.”
‘1애?’
1애(埃).
소수의 단위로 0.00000000001을 의미한다.
이를 알아들은 인이 얼마나 어이가 없었는지 순간 벙 쪄버렸다.
‘그, 그 기운이 고작 1애?’
천여운에게 있어 짧은 운기로도 모을 수 있는 미량의 기운조차 통제하지 못한 그였다.
애초에 격이 완전히 달랐다.
“이제 네놈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기억을 가져가볼까?”
-스스스스!
천여운의 오른손에서 스산한 푸른빛의 기운이 물들었다.
* * *
-스륵!
연 컴퍼니 본사의 회장실로 적미노선이 나타났다.
한기로 불꽃을 잠재워서 회장실 안은 싸늘하기만 했다.
적미노선이 한쪽 편에서 모용이명의 내상을 치료하고 있는 천여운을 발견했다.
“쿨럭.”
심후한 진기로 내상이 치료된 모용이명이 죽은 피를 토해냈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양기를 지니고 있는 태양지체라고 해도 불기린의 영력인 화기에 당한 상처는 혼자 치료하기 힘들었다.
“감사합니다.”
모용이명이 씁쓸한 얼굴로 고개 숙여 감사했다.
그가 이렇게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너무 많은 희생을 치렀기 때문이었다.
“본교에서 재건 비용이나 인력 면에서 지원을 할 터이니, 마음을 추스르도록 해라.”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이미 벌어진 일에 마땅한 위로를 건넬 수 없기에 천여운은 연 컴퍼니의 재건을 약조했다.
그러던 차에 적미노선이 가까이 다가왔다.
“밖에 있는 자들은 노부가 처리했네.”
천여운이 십이지 중 한 사람인 인을 처리하는 동안 복면인들을 상대한 적미노선이었다.
적미노선 역시도 그들을 처리하면서 수많은 연 컴퍼니 사람들의 희생을 보았기에 차마 모용이명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지 못했다.
화제를 돌리기 위해 적미노선이 천여운에게 물었다.
“데이터가 이전된 위치는 찾았...”
-팍!
그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천여운이 적미노선의 머리통을 움켜잡았다.
그리고는 바닥에 내리찍어버렸다.
-쾅!
“컥!”
제대로 힘이 들어간 덕분에 적미노선의 머리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천여운이 싸늘하게 식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 질문에 바로바로 답변만 했어도 쓸데없는 희생은 없었을 거다. 적미노선.”
-꽈악!
천여운이 그의 가슴을 세게 밟았다.
그 상태에서 천여운이 물었다.
“시간이 없으니, 한 번만 묻겠다. 이번에도 천기니 뭐니 지껄인다면 네놈을 당장 처리하고 가도록 하겠다.”
살기가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적미노선은 천여운이 진심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애초에 소위 정파인들처럼 정의를 지향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천여운을 바라보던 적미노선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 또한 운명인가 보네. 그려. 장소를 옮길 수 있겠나?”
모용이명을 의식한 모양이었다.
그를 힐끔 쳐다본 천여운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손을 휘저었다.
그 순간 공간이 일그러지며, 그들이 있는 장소가 높은 상공으로 옮겨졌다.
“빨리 말해라.”
천여운의 재촉에 적미노선이 진지해진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노부가 자네에게 다른 인과율을 가지고 있다고 한 말이 기억나나?”
“그래.”
처음 천여운을 대면한 적미노선은 그가 이 시간의 축에 존재해설 안 될 사람이라고 말을 했었다.
“자네는 무로서 도를 걸어가고 있고 경계를 밟고 있으니, 어렴풋이 느낄 걸세.”
“무엇을 말이냐?”
“자네가 밟고 있는 경계의 완전한 뒤편은 이 세계의 진리이네.”
“진리?”
“그리고 그 진리를 깨달은 자는 탈각 혹은 등선이라 하여 깨달은 자들의 세계로 입적할 수 있게 되네. 그들을 일컬어 선인 혹은 초월자, 탈각자라고 부르게 되지.”
천여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지금 그가 적미노선이 밝히고 있는 것은 그가 어렴풋이 깨달았던 진리에 관한 이야기였다.
“제 육감과 칠감을 타통하여 사차원으로 진입하는 순간, 이 삼차원으로 이루어진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바른 눈을 가지게 되네.”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께름칙한 느낌이 천여운의 감각을 사로잡았다.
그것은 두 번째로 겪는 일이었다.
차크라를 깨닫게 되면서 우주의 진리를 엿보려는 순간 천여운은 도중에 명상에서 빠져나온 적이 있었다.
당시에는 아쉬워했지만 미련을 가지지 않았던 것은 그 스스로 경계를 넘는 것을 주저했기 때문이었었다.
“천기를 읽는다는 것은 바로 이를 말하는 걸세.”
“무엇을 보았기에 그러는 거지?”
“그건......”
“말해라!”
적미노선이 천여운의 다그침에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이 세계는 멸망할 운명이네.”
“뭐?”
순간 천여운의 말문이 막혔다.
적미노선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멸망?’
자신의 귀가 잘못 된 것이 아니라면 적미노선은 이 세계가 멸망할 거라고 예언했다.
운명이라 함은 정해진 순리이기에.
다소 황당하기까지 한 적미노선의 말에 천여운이 물었다.
“어째서 멸망을 한다는 거지?”
“오직 소멸만을 원하는 인공신이 탄생.....허억!”
그때 적미노선이 고통의 신음성을 내뱉었다.
천여운이 의아해서 그를 쳐다보았는데, 적미노선의 몸에 이변이 생겨났다.
그의 전신이 서서히 투명해지고 있었다.
“대체 왜 그러는 것이냐?”
천여운이 그를 붙잡으려고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그의 손이 투영되듯이 스치고 지나갔다.
-스륵!
‘이건?’
공간을 투영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였다.
적미노선이 투명해지는 자신의 손을 쳐다보며 허탈해하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결국 이리 되는군. 허허허.”
“왜 네 육신이 사라지려 하는 거지?”
“말하지 않았나? 천기를 누설하는 것은 정해진 운명과 진리를 거스르는 것이라고.”
적미노선은 그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이었다.
< 75화 이어지는 흔적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