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화 이어지는 흔적 (1) >
수많은 기기들로 가득한 공간.
그곳에 전원이 들어와 있지 않던 거대한 컴퓨터 본체 하나가 있었다.
그 본체의 컴퓨터에 붙어있던 붉고 푸른 LED 불들이 들어오면서, 부착되어 있던 모니터들도 켜졌다.
-차르르르륵!
모니터 화면에 흰 색의 글씨들이 가득 메워졌다.
그러자 모니터의 앞으로 흰 연구복을 입은 중년의 여성이 다가와 인상을 쓰고서 입을 열었다.
“에이?”
A라는 물음에 스피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해(亥) 박사. 데이터 이전이 끝났다.
그 말에 해 박사라고 불린 중년의 여성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네? 설마 이쪽으로 완전히 옮기신 겁니까?”
데이터 이전이라 하면 원래의 본체에서 옮겼다는 소리였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무슨 문제라도 생긴 겁니까?”
-기지를 습격당했다.
“기지를요? 그곳엔 초 노사와 B가 있지 않습니까?”
최강의 무인과 최강의 이능력자가 지키고 있는 본진 기지다.
누구라도 그곳에 발을 들이면 처참한 죽음을 맞이할 거라고 확신하는 그녀였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둘 다 당했다.
“네에? 그, 그럴 리가요? 초 노사가 당하다뇨?”
-마신 천무성이 움직였다.
“......이럴 수가.”
해 박사가 충격을 받았는지 말을 잇지 못했다.
믿을 수 없었지만 이것은 현실이었다.
-시간이 없다. 프로젝트를 서두른다.
스피커에서 들리는 A의 말에 그녀가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직 인(寅)과 신(辰)이 데이터 회수를 마치지 못했고 묘(卯)는 막 도착해서 데이터를 추출하고 있습니다.”
-인과 신의 데이터는?
“태양지체, 극뇌지체입니다.”
-초유신이 말했던 오행 중 두 가지로군.
“그렇습니다. 일단 신은 데이터와 접촉을 시도하는 것 같고, 인도 심양시에 들어갔습니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 같은데 기다리시겠습니까?”
해 박사의 물음에 스피커로 A가 답변했다.
-아니. 지금부터 전뇌화 업로드를 시작한다.
“아직 그분께서 당부한 상태가 아니라 완전하지 않을 텐데요?”
-시간이 촉박하다.
인공지능 A 역시도 시간이 촉박하다고 느끼는 건 마찬가지였다.
천여운이라는 미지의 변수는 수많은 연산을 통해 만들어지는 예측마저 벗어났다.
수많은 변수를 고려했을 때, 프로젝트를 빨리 완성하는 것만이 현 상황을 반등시킬 수 있는 유일한 활로였다.
-위잉!
기지 내에 있는 카메라가 움직이며 어딘가로 초점이 맞춰졌다.
그곳에는 수많은 유리관들이 존재했고, 그 한 가운데에는 여타의 것들과는 완전히 다른 구조로 이루어진 유리관이 있었다.
그 유리관 속에 황금색 날개로 몸을 가리고 있는 정체불명의 존재가 전신에 수만 가닥의 선이 꽂혀서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위이잉!
그런 정체불명의 존재의 머리로 특이한 형태의 헬멧 같은 것이 착용되었다.
유리관의 모니터로 흰 글씨의 타이핑이 쳐졌다.
[전뇌화 업로드 시작.]
* * *
-스륵!
공간이 휘어지며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바로 적미노선이었다.
“하아.....”
천여운의 앞에 나타난 적미노선이 격하게 숨을 내뱉었다.
고문을 당한 상처들로 가득한 그의 상태는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무리해서까지 뭔가를 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찾았나?”
천여운의 물음에 적미노선이 고개를 저었다.
“보이지 않더군. 죽은 자들 중에 십이지는 없는 것 같네.”
적미노선이 찾고 있던 자들은 초유신의 직속 심복들인 십이지였다.
초유신이 직접 키운 자들로 뛰어난 무공 실력을 지녔다고 한다.
한시가 시급한 상황에 아무런 성과가 없자 천여운이 심기가 불편한 목소리로 물었다.
“따로 움직여도 될 것 같은데, 왜 기다리라고 한 거지?”
“아까 말하지 않았나. 십이지는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는 위치를 알고 있네.”
천여운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기지 내에 살아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고 하지 않았나.”
이미 그것을 몇 차례 이야기한 천여운이다.
한데 적미노선은 자신에게 부디 기다려달라고 요청했다.
천여운의 생각으로는 시간 낭비에 불과했다.
“적미노선. 대체 그 프로젝트가 뭐기에 그렇게 호들갑을 떠는 거지?”
깨어났을 때부터 막아야 한다며 한바탕 난리를 친 적미노선이다.
처음에는 약물이나 고문의 영향으로 정신이 혼미하여서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적미노선의 경각심은 극에 달해 있었다.
그런 천여운의 의구심이 담긴 물음에 적미노선이 진중한 얼굴로 답했다.
“놈들은 위험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네.”
“그러니까. 그 위험한 프로젝트가 뭐냐고 묻는 거다.”
“.......초월적인 존재를 탄생시키려고 하고 있네.”
“초월적인 존재?”
“그들은 그것을 갓 프로젝트라고 하네.”
갓 프로젝트(God project).
이를 들은 천여운이 인상을 찡그렸다.
그때 MS 그룹의 목적이 신을 만드는 것이라고 들었던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혹시 신을 만든다는 그 허무맹랑한 소리를 말하는 것이냐?”
“허어. 자네도 알고 있었군.”
천여운이 이것을 모를 거라고 여겼던 적미노선이었다.
이를 알고 있자 적미노선이 묘한 눈빛으로 천여운을 바라보았다.
‘역시 운명인 것인가.’
“왜 그렇게 쳐다보는 거지?”
“아무 것도 아닐세.”
“뭐가 아니라는 거냐? 확실하게 말해라.”
천여운이 강한 위압감을 내뿜으며 말했다.
대놓고 뭔가를 숨기고 있는데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다.
위압하는 천여운의 태도에 적미노선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후우. 이 또한 천기일세. 노부가 어찌 모든 것을 밝힐 수....”
-콱!
천여운의 손이 번개처럼 적미노선의 목을 움켜잡았다.
그의 부상 상태가 심하든 그렇지 않든 천여운은 개의치 않았다.
“혹시나 나를 정파 나부랭이들로 착각했다면 크게 잘못되었다고 지금 말해두지.”
“큭!”
뜻이 가는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천여운이다.
그가 흥분했다는 생각에 적미노선이 공간을 틀어서 거리를 벌리려고 했다.
-우우웅!
그러나,
‘아닛?’
공간이 비틀리지 않았다.
단단하게 고정시킨 것처럼 공간이 붙들려 있었다.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나?”
‘허어.’
적미노선이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얼마 전만 하더라도 천여운의 공간에 대한 이해도는 자신보다 조금 부족했다.
그런데 그 짧은 사이에 자신이 꼼짝할 수 없을 만큼 더 강해졌다.
‘말도 안 되는 발전 속도로구나.’
이제는 천여운의 손에서 벗어나는 일은 무리인 듯 했다.
“말해라.”
이렇게 된다면 더 숨기는 것은 힘들 것 같았다.
“알겠네. 그렇다면 일단 에이의 행방을 찾는 일이 먼저이지 않겠나? 그들을 찾은 후에 노부가 알고 있는 것을 알려주겠네.”
“........”
적미노선의 그 말에 천여운이 인상을 쓰고서 쳐다보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그가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했지만 당장에는 인공지능이 데이터를 이전한 곳을 찾는 게 우선무였다.
“십이지가 이곳에 없는데 무슨 수로 그들의 행방을 찾지?”
천여운의 목을 잡고 있던 손을 놓으며 물었다.
그 물음에 적미노선이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아니 오히려 잘 된 일일세. 그들이 살아있어야 추적할 수 있으니까 말일세.”
“......놈들에게 추적기라도 달아놓았나?”
“그건 아닐세.”
천여운이 다소 차가워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뭘 어쩌자는 거지?”
“그들이 오랫동안 공을 들인 것 중 하나에 노부가 손을 써뒀지.”
“그게 뭐지?”
“심양시로 가게 되면 그 답을 알게 될 걸세.”
“심양시?”
천여운의 한 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곳은 그가 처음으로 이 시간의 축으로 떨어진 곳이었다.
“노부의 예상이 맞다면 그들은 그 성과물을 찾기 위해 헤매고 있을 걸세. 노부가 그들이 찾는 것에 손을 써뒀으니 말일세. 허허허.”
“그럼 어디로 가면 되는 거지?”
공간 이동으로 가면 금방 도착한다.
“노부가 그 아이의 행방을 마지막으로 확인했을 때가 심양시 공안국의 강력반 팀장으로 일을 하고 있었으니, 그곳에 가면 될 걸세.”
“.......심양시 공안국?”
천여운이 그 말에 뭔가 이상하다 싶어서 물었다.
“강력반 팀장이라고 했는데, 혹시 놈들이 찾고 있는 게 물건이 아니라 사람인가?”
“그렇다네.”
“혹시 그 강력반 팀장의 이름이 뭐지?”
“자네는 무림인이니까 그 가문을 잘 알 수도 있겠군. 지금은 연 컴퍼니라고 불리지만 한때는 모용세가로 명성이 높았네. 아마 그 아이의 이름이....”
“모용이명이냐?”
그 말에 적미노선이 놀라서 물었다.
“아니. 그걸 자네가 어떻게 알고 있나?”
혹시나 했었는데 예상이 들어맞자 천여운이 어처구니가 없어했다.
이런 식으로 인연이라는 것이 연결될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하! 혹시 모용이명의 태양절맥이 폭주하지 못하도록 혈맥 자체를 봉해둔 것이 너였나?”
적미노선의 두 눈이 커졌다.
사람을 아는 것은 둘째치고 천여운이 모용이명의 몸 속에 숨겨져 있던 비밀마저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걸 어찌?”
처음 모용이명을 만났을 때 그는 모용세가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무공을 할 수 없는 몸을 지니고 있었다.
그 비밀에는 누군가에 의해 혈맥이 닫혔기 때문이었는데, 그것을 행한 자는 다름 아닌 적미노선이었다.
“왜 혈맥을 막아둔 거지?”
놀라는 것도 잠시였고 적미노선이 말했다.
“자네도 알지 않나? 태양절맥에 걸린 자는 스무 해를 넘기기가 힘드네. 그 아이를 살릴 수 있고 그들의 행방을 알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네.”
적미노선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설사 MS 그룹에서 어떠한 조치를 취했을 지는 모르겠지만 태양절맥이나 구음절맥의 경우는 너무나도 위험했다.
목숨을 잃을 지도 모르는 체질이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그 아이의 몸 속에 들어있던 추적 칩을 제거하고 노부가 손을 써뒀으니, 그들도 아마 혈맥의 제약을 풀려고 헤매고 있을.....잠깐 자네 그 표정은 뭔가?”
당황해하며 묻는 적미노선의 물음에 천여운이 그의 손목을 붙잡으며 말했다.
“서둘러야 겠다.”
안타깝게도 추적칩은 모르겠지만 천여운이 그의 혈맥을 다시 원상복귀 시켜놓았다.
태양절맥에서 완벽한 태양지체로 탈바꿈한 모용이명이었다.
* * *
심양시.
연 컴퍼니의 본사 사옥 부지.
이곳은 현재 피비린내로 사방이 진동을 하고 있었다.
수많은 시신들이 부지 이곳저곳에 비참하게 널브러져 있었고, 얼굴을 가린 수많은 복면인들이 메인 사옥 건물을 둘러싸고 있었다.
회장실이 있는 사옥의 27층.
그곳이 뜨거운 불길로 뒤덮여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하아....하아....”
불꽃 속에서 입가에 피를 흘리고 있는 누군가가 비틀거리며 걸어 나왔다.
그는 바로 모용이명이었다.
몸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모용이명이 부들부들 떨면서 기수식을 취했다.
-화르르륵!
모용이명의 검이 불꽃으로 타올랐다.
이를 바라보며 혀를 차고 있는 존재가 있었다.
“쯧쯧, 네 불꽃으로는 이 몸에게 생채기조차 내기 힘들다고 했을 텐데. 그만 반항해라.”
붉은 스포츠 머리를 하고 있는 선글라스의 중년인이었다.
사방이 불꽃으로 뒤덮여 있었는데도 방염 소재의 코트를 입고 있었는지, 그의 옷은 멀쩡하기만 했다.
“하아.....헛소리. 아직 끝나지 않았다!”
-팟!
모용이명이 그를 향해 화기를 담은 검초를 펼쳤다.
“기개는 살아있군.”
붉은 스포츠 머리의 사내가 이를 가볍게 피하더니, 불꽃이 담긴 검을 가볍게 잡아버렸다.
불꽃을 맨손으로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손이 전혀 타지 않았다.
-파르르르!
심지어 내공마저도 밀려서 검을 빼낼 수가 없었다.
스포츠 머리의 사내가 입 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다만 상성이 좋지 않군. 내 불꽃은 네놈보다 훨씬 강하다.”
-화르르르륵!
스포츠 머리의 사내의 손에서 불꽃이 치솟았다.
그 열기가 어찌나 강한지 같은 화기를 사용하는데도 모용이명이 뜨거워할 정도였다.
-치이이이!
“끄아아아아악!”
고통스러워하는 모용이명에게 사내가 이죽거렸다.
“이제 그만 버티고 가자꾸나. 애송아.”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스포츠 머리의 사내는 더욱 화기를 끌어올렸다.
모용이명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에서 희열을 느끼는 듯 했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 당장 그 손 놓고 무릎을 꿇는 것을 권고하지.”
‘!?’
스포츠 머리의 사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뭐지?’
방금 전까지 이곳에는 자신과 모용이명 외에는 누구도 없었다.
심지어 지금도 뒤에서 아무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고통스러워하고 있던 모용이명이 죽다가 살아난 얼굴로 중얼거렸다.
“주군.”
“주군?”
스포츠 머리의 사내가 침을 꿀꺽 삼켰다.
기척이 느낄 수 없다는 것은 자신보다 고수일 확률이 매우 높았다.
그렇다면 뒤를 잡힌 상태에서 이 상황을 타파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한 가지였다.
'일단 이놈을 방패로 삼는다.'
스포츠 머리의 사내가 다급히 모용이명의 목을 움켜쥐려고 했다.
그때 그의 팔을 누군가 붙잡았다.
-꽉!
'헛?'
손이 묶인 것마냥 묵직한 느낌에 스포츠 머리의 사내가 당혹스러워했다.
여기서 멈춘다면 자신이 당할 지도 몰랐다.
스포츠 머리의 사내가 화기를 끌어올려 손이 보이는 방향을 향해 뒷발차기를 날렸다.
-화르르륵!
그런데 그 발차기를 그 자가 가볍게 잡아버렸다.
'이럴 수가 강철마저도 녹일 수 있는 내 화기를?'
당혹스러웠다.
태양지체인 모용이명마저도 자신의 화기를 버티지 못했다.
그런데 뒤에 있는 상대는 뜨거워하기는 커녕 아무렇지도 않는 듯 했다.
"경고를 무시하는군."
차갑게 식은 목소리.
스포츠 머리의 사내가 두려움에 찬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새하얀 얼굴에 검은 슈트를 입은 사내가 그를 위압적인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마, 마신?”
< 75화 이어지는 흔적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