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화 라릿샤 (2) >
마왕성 숨겨진 지하 공간.
에드휘 공작이 유리관을 쳐다보고 있었다.
유리관을 그가 손으로 터치하자, 아래 화살 표시의 빛이 새겨지며 딱딱한 음성이 들려왔다.
[재생 방해 수치 농도를 하향합니다.]
음성이 끝나자 유리관 속의 액체가 조금씩 옅어져갔다.
-보글보글! 꿈틀!
액체의 색이 옅어지자 안에서 변화가 생겨났다.
원래는 가슴과 머리를 제외한 모든 신체가 없던 유리관 속의 인물이 어느새 사람의 형상을 제대로 갖춰가고 있었다.
근육이 뭉쳐지면서 생성되고 있는데 재생하고 있는 듯 했다.
‘농도를 고작 5퍼센트 정도 더 낮췄는데, 회복 속도가 이렇게 빨라지다니.’
에드휘 공작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마음의 결정을 했지만 빠른 재생 속도가 그를 두렵게 만들었다.
‘근 이천 년이 지났는데도 괴물 같구나.’
보통 일족들이라면 재가 되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다.
지금이라도 멈춰야 하나 고민했지만 지금 그에게 유일한 희망은 오직 이 유리관 속의 존재를 통제하는 것뿐이었다.
-꿈틀!
유리관 속에 철사로 고정되어 있는 존재가 몸을 들썩였다.
‘너무 빠르다.’
기본 근육이 형태를 갖추자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기세라면 금방 정신을 차리는 것도 시간 문제였다.
‘안 되겠군. 지금 해야 겠어.’
어느 정도 재생을 시킨 후에 진행하려고 했던 에드휘 공작이 생각을 바꾸었다.
그가 유리관을 급히 터치했다.
[재생 방해 수치 농도를 정상화합니다.]
-우우웅!
음성과 함께 유리관의 위쪽 입구가 반으로 갈라지며 열렸다.
에드휘 공작이 위로 천천히 날아올랐다.
그리고 철사로 고정되어서 얼굴조차 보이지 않는 유리관 속의 존재를 내려다보았다.
-슥!
에드휘 공작이 하반신 갑주를 만졌다.
-차차차차차착!
그러자 하반신 갑주가 분해가 되면서 단검의 형태로 합쳐졌다.
단검의 개수는 12자루.
단검들은 이기어술을 펼친 것처럼 허공에 떠있었다.
-슉! 차착!
그 중에 가장 화려한 형태를 하고 있는 단검이 머리에 쓰는 관의 모양으로 바뀌어, 에드휘 공작의 머리에 착용되었다.
“후우.”
에드휘 공작이 긴장한 눈빛으로 유리관 속을 향해 손을 뻗었다.
단검들이 일제히 액체 속으로 들어갔다.
-퐁당! 퐁당!
액체로 들어간 단검들이 헤엄을 치듯이 이동하더니, 이내 유리관 속에 있던 존재의 각 부위에 박히기 시작했다.
-푸푸푸푹!
뒤통수, 목, 척추의 한가운데, 양 어깨, 양 팔꿈치, 양 무릎, 양 발목.
그렇게 전신으로 박힌 11자루가 구속구라도 된 것처럼 박힌 상태에서 손잡이 부분이 신체에 달라붙었다.
‘됐다.’
혹시나 하는 마음을 가졌던 에드휘 공작아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단검이 통하지 않을까 조마조마했었다.
-꿈틀꿈틀!
반사 작용 때문에 단검이 구속하자, 유리관 속 존재가 몸을 격하게 움직였다.
근육이 반 정도만 형성되어 앙상한데도 보통 힘이 아니었다.
“반항하는 것이냐.”
에드휘 공작이 머리의 관에 손을 얹고서 집중했다.
그러자 유리관 속의 존재에게 박혀 있던 단검들에서 흰빛이 흘러나왔다.
이윽고 꿈틀대던 존재가 움직임을 멈췄다.
‘됐어!’
에드휘 공작이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최대한 신중하게 접근한 것이 제어에 성공하게 만들었다.
에드휘 공작이 입 꼬리를 올리며 중얼거렸다.
“아픈가. 마왕이여.”
그의 입에서 놀라운 말이 나왔다.
액체 속에 코와 입술만 드러나 구속되어 있는 존재의 정체.
그것은 이천 년 동안이나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마왕이었다.
-착!
유리관 앞으로 내려온 에드휘 공작이 단검에 구속되어 가만히 있는 마왕을 바라보며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드디어 네놈을 본 공작의 뜻대로 움직일 수 있게 되었구나. 하하하하하핫.”
그가 가지고 있는 열두 자루의 단검으로 변한 하반신 갑주.
이것은 아리샤의 단검이라 불리는 보물이었다.
단검이 가진 능력은 통제.
완벽하게 상대를 구속하여 자신의 뜻대로 통제할 수 있게 만든다.
“하하하하하핫. 마왕이다. 마왕을 뜻대로 움직일 수 있게 되다니.”
에드휘 공작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일족에서도 최강이라 불리는 존재를 자신의 뜻대로 움직일 수 있게 된 이상 다른 전력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오직 마왕만으로 모든 것이 가능했다.
공개적으로 마왕이 모습을 드러낸다면 칼리아프 대공뿐만이 아니라 모든 마족들이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꿈에 부풀어 있던 찰나였다.
[구속체의 재생 수치가 급격히 향상되고 있습니다.]
유리관 속에서 들려오는 음성에 즐거워하던 에드휘 공작의 표정이 굳어졌다.
눈앞에서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재생 방해 액체 속에 들어있는 마왕의 신체가 갑자기 굉장한 속도로 재생을 하기 시작했다.
-타타탁!
에드휘 공작이 유리관을 터치하며 액체의 방해 수치를 높이려 했다.
그런데도 재생 속도는 멈춰지지 않았다.
‘대, 대체 이게....’
당황해하고 있는 순간이었다.
단검부터 시작해 철사에 고정되어 있던 마왕의 팔이 꿈틀거리며 움직였다.
에드휘 공작이 머리에 있는 관에 마력을 집중했다.
‘멈춰! 멈춰!’
단검에서 흰빛이 강하게 흘러나왔다.
그런데 마왕의 팔은 그것을 무시하고서 움직였다.
-파직!
구속하고 있던 철사가 끊겼다.
그러더니,
-와장창!
유리관을 뚫고서 마왕의 팔이 앞에 서있던 에드휘 공작의 목을 번개처럼 움켜잡았다.
-콱!
“크헉!”
에드휘 공작은 세 측근들 중에 가장 강한 힘을 가졌다.
그런 그조차 전혀 대응할 수 없을 만큼 마왕의 손은 너무도 빨랐고, 심지어 움켜쥔 손은 악마와도 같았다.
“비, 빌어먹을!”
에드휘 공작이 마력을 끌어올려 마왕의 팔을 자르려고 했다.
그 순간 그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끄아아아아악!”
에드휘 공작의 얼굴이 급격하게 홀쭉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얼굴뿐만이 아니었다.
마치 몸속의 수분이 빠져나가는 것 마냥 전신이 얇아지더니, 이내 몸이 수축되어가며 작아져갔다.
-푸슈슈슈슈슈!
“끄어어어.....”
어느 순간 에드휘 공작의 목소리는 끊겼다.
남은 것은 형태만 남은 가죽뿐이었는데, 그것도 핵의 소실로 인해 재로 흩어지고 말았다.
-콰득! 콰득!
마왕의 얼굴과 가슴을 감싸고 있던 철사가 끊어졌다.
은청색의 머리카락과 서리가 내릴 것처럼 차가운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몸을 구속하고 있던 나머지 철사를 거칠게 뜯어낸 마왕이 유리관을 부수고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런데 밖으로 나온 마왕의 눈빛이 이상했다.
살기와 분노로 넘쳐났다.
-부들부들!
몸을 떨어대던 마왕의 전신에서 엄청난 마력이 뿜어져 나왔다.
-파아아아앙!
상상을 초월하는 마력은 사방을 전부 부수고 먼지로 만들만큼 강력했다.
이런 엄청난 마력장이 빠르게 거대해져갔다.
-콰콰콰콰콰쾅! 쿠르르르르!
마왕의 성이 순식간에 마력의 여파로 인해 무너져 내렸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에 마왕성을 지키는 호위 마족들이 놀라서 전부 밖으로 뛰쳐나왔다.
“무, 무슨 일이야?”
“성이 갑자기?”
거대한 성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가운데 부근이 통으로 완전히 소멸되듯이 날아갔다.
“저, 저길 봐!”
난리 통에 겨우 살아남은 마족들이 폐허가 된 성에서 원의 형태로 깊게 함몰된 곳의 중심부를 바라보았다.
‘!!!’
그 한가운데에 있는 존재를 발견한 마족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저....저 분은!”
“폐하!”
그 존재는 바로 오랫동안 자취를 감췄던 마왕이었다.
마왕을 본 그들의 놀라움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주변을 잠식시키는 엄청난 살기와 마력을 내뿜고 있는 마왕의 모습에 모두가 영문을 몰라 했다.
그런 마왕의 입에서 분노의 일갈이 터져 나왔다.
“라릿샤아아아아아!!!”
* * *
타오르는 불꽃과도 같은 어둠.
그 화신과도 같이 변한 천여운의 모습에 공동 내 마족들이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손을 들어 올리는 그 모습은 분명 진각성이 틀림없었다.
‘이, 인간이 진각성을?’
‘우리 일족인가?’
혼란스러워하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야왕이 놀란 이유는 진각성을 해서가 아니었다.
변한 천여운의 모습 때문이었다.
“라릿샤!”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에 천여운은 확신할 수 있었다.
‘역시 알고 있군.’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진각성한 모습을 보였는데, 그의 입에서 칼리아프 대공이 말했던 아리샤의 옛 이름이 튀어나왔다.
그를 그렇게 부른 야왕이 다급히 그의 앞으로 달려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라릿샤이시여!”
야왕은 눈물을 흘리는지 흐느끼고 있었다.
감격에 겨운 목소리에 그의 휘하 마족들의 영문을 알 수 없어했다.
야왕이 계속 말을 이어갔다.
“신 조쉬프는 라릿샤께서 무사하실 거라 믿고 있었습니다!”
“조쉬프!”
그 말을 들은 칼리아프 대공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가 조쉬프라는 이름을 모를 리가 없었다.
“아는 자입니까? 전하.”
의아해하는 베프만 공작의 물음에 칼리아프 대공이 놀랍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알다마다.”
'아리샤의 최측근.'
그는 전대 마왕인 아리샤를 보좌하던 두 공작 중 한 명이다.
아리샤가 자취를 감추던 날에 같이 사라진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설마 바무트 지하 수감소에 저런 모습으로 살아있을 줄은 몰랐다.
‘그가 어떻게 이곳에 있는 거지?’
그 영문이 궁금해졌다.
-슥!
천여운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러자 그의 모습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천여운이 바닥에 엎드려서 감격을 만끽하고 있는 야왕을 내려다보았다.
‘흠.’
고민에 잠겨 있던 천여운이 입 꼬리를 올리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나를 알고 있는 자이더냐?”
‘!?’
그 말에 칼리아프 대공의 얼굴이 순간 벙 찌고 말았다.
천여운이 대체 무슨 말을 하려나 싶었는데, 설마 자신이 라릿샤가 아니라고 부정하지 않을 줄은 몰랐다.
야왕이 놀라서 얼굴을 들어올렸다.
“라, 라릿샤이시여! 신을 몰라보시는 것입니까?”
“기억이 나지 않는다.”
“기, 기억이?”
능청스러운 대답에 야왕이 당황해하더니, 그를 멍한 눈으로 쳐다보다 이내 탄식을 하면서 납득한 얼굴로 말했다.
“아아아, 이제야 알았습니다. 어찌하여 라릿샤께서 돌아오시지 않은 것인지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야왕은 천여운이 기억을 잃은 라릿샤라고 확신했다.
그저 운을 띄웠을 뿐인데 저 혼자 추측하고 착각하는 것이었다.
그 모습에 칼리아프 대공이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하!’
설마 이런 식으로 야왕, 아니 조쉬프 공작을 속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힘으로 억누를 줄 알았는데, 참으로 기발한 발상이었다.
-웅성웅성!
급변한 상황에 마족들은 포위한 상태로 어찌 해야 할지 눈치를 보았다.
그런 마족들에게 조쉬프 공작이 외쳤다.
“뭣들 하는 것이냐! 라릿샤, 아니 아리샤께서 납시었다! 예를 갖춰라.”
“아리샤?”
“아리샤라고?”
그의 외침에 마족들이 웅성거리며 당혹스러워했다.
아리샤라 함은 그들 일족에 있어서 전설적인 존재였다.
‘정말인가?’
마족들이 야왕인 조쉬프 공작의 명에도 불구하고 망설였다.
하지만 그것을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쿵! 쿵!
처음에는 눈치를 보던 마족들은 이내 무릎을 꿇고서 천여운을 향해 머리를 숙였다.
어차피 그가 아리샤이든 아니든 이미 자신들의 우두머리가 무릎을 꿇었고 천여운은 그들 전부를 아우를 역량을 지니고 있었다.
‘젠장.’
이를 절망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는 이가 있었다.
그는 아이린 후작의 머리채를 붙잡고서 겁박하던 외팔이 마족이었다.
그런 그에게 그녀가 표독스럽게 말했다.
“팔 건거 잊지 마요.”
당황한 외팔이 마족이 황급히 머리채에서 손을 떼며 변명했다.
“아, 아직 건다고 말하지 않았다!”
비굴하기 짝이 없었다.
* * *
공동 언덕의 움막 안.
석좌에 천여운이 앉아 있었고 조쉬프 공작이 앞에 무릎 꿇고 있었다.
조쉬프 공작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정말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으신 겁니까? 폐하.”
그의 물음에 천여운은 천연덕스럽게 표정하나 바꾸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를 믿은 조쉬프 공작이 분에 겨운 듯이 이를 갈며 말했다.
-으득!
“이 모든 것이 타우라 그놈이 왕좌를 탐내서 벌어진 일입니다! 놈의 야욕을 조금만 더 빨리 눈치 챘더라면 전하께서 지구와 같은 하찮은 행성으로 가실 일도 없었을 텐데.”
“타우라?”
“지구?”
천여운과 그 곁에 서있던 칼리아프 대공이 동시에 반문했다.
서로 다른 곳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칼리아프 대공이 관심을 보이는 이유는 타우라가 현 마왕의 이름이기 때문이었다.
< 67화 라릿샤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