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화 바무트 지하 수감소 (1) >
“아리샤의 초상화라고?”
천여운이 놀람과 동시에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초상화를 바라보았다.
활활 타오르는 검은 불꽃의 얼굴은 마치 그가 진각성을 했을 때의 모습과 흡사했다.
그런데 이게 아리샤의 초상화라는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리샤는 신적인 존재라고 하지 않았나?”
천여운도 한 사람의 천마신교의 교인이다.
그 역시도 성화와 마신을 숭배하지만 신은 말 그대로 절대적인 존재다.
인간이 닿을 수 없는 곳에 있기에 신이라 여겼다.
“신.....인간들이 말하는 초월적인 존재를 말하는구려.”
“그래.”
“흠......주인께서는 아리샤에 관한 이야기를 누구에게 들었소?”
“샤케나에게 들었다.”
“샤케나?.......혹시 심장 사냥꾼?”
잠시 기억을 되짚던 대공이 그녀가 누군지 떠올렸다.
사실 대공 급만 되어도 백작 작위 이하의 마족들은 특별히 기억하진 않지만, 그녀는 일족 내에서도 페이징이라는 특이한 능력으로 명성이 높았다.
“그 아이를 데리고 있었소?”
대공이 의외라는 표정으로 물었다.
자신을 비롯한 다른 대공들도 탐낸 인재였다.
그런데 마왕의 명이 아니면 누구도 따르지 않겠다고 거절하기에 포기했었다.
“주인께서는 참으로 인재 복이 있구려. 그 아이도 그렇고 본 대공을 휘하로 둘 수 있는 일은 드문 일이오.”
“.......”
담담하게 말을 하는데, 제 입으로 금칠을 했다.
생각 외로 칼리아프 대공은 위엄을 갖췄으면서도 가벼운 농담을 즐겨했다.
그래서 그런지 휘하 마족들이 잘 따랐다.
“누구한테 들었는지가 무슨 상관이지?”
“요즘 세대들은 아리샤의 존재를 그렇게 생각했구려.”
“그게 무슨 말이지?”
그런 천여운의 물음에 칼리아프 대공이 액자의 앞에 서서 초상화를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는 유독 지구라는 행성과 밀접한 관계가 많소. 아마도 우리가 처음 게이트를 열고서 연을 맺은 것이 지구라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오.”
“두서가 없군.”
아리샤의 이야기를 하다 지구가 나왔다.
천여운의 말에 칼리아프 대공이 액자 앞에서 서적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한 서적을 꺼내들었다.
서적은 마족들의 언어가 아닌 영문으로 적혀 있었다.
“의식이 있는 존재들은 표현 의사와 기록을 남기기 위해 언어, 문자라는 것을 형성하오. 그리고 그런 언어 체계는 하나의 문화를 형성하게 되고 크게는 집단, 사회로 커지오.”
“그래서?”
“우리 일족도 마찬가지요. 당연히 일족 고유의 문자와 언어를 가지고 있소.”
대공이 또 다른 서적을 꺼내들었다.
그것에는 전혀 알 수 없는 문장이 적혀 있었다.
아리샤의 갑주가 그려진 도면의 상단에 적혀 있는 것과 비슷했다.
“현 세대들은 언젠가부터 지구의 언어와 우리의 언어를 섞어 쓰기 시작하더구려. 그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었소.”
“그게 어쨌다는 거지?”
“아리샤......지금은 그 존재를 하나의 고유명사처럼 쓰는 듯 한데, 원래를 라릿샤오.”
“라릿샤?”
“어려운 발음이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아리샤라고 불리게 되더구려. 호전적인 우리 일족은 예전부터 어둠과 불을 숭상해왔소.”
“흠.”
그 말에 천여운이 묘한 공통점을 느꼈다.
천마신교 역시도 마(魔)와 성화를 숭상했다.
마라고 한다면 사악함을 이를 수도 있지만 어둠을 떠올리기도 한다.
“라릿샤가 어디에서 비롯된 것 같소?”
칼리아프 대공의 물음에 천여운은 문득 라릿샤라는 단어에서 익숙한 릿샤를 떠올렸다.
마족들이 천여운을 릿샤라고 떠받들었었다.
“릿샤라는 말은 너희들은 최고의 전사라고 칭한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소. 하지만 릿샤는 최고의 전사 이전에 불을 뜻하오.”
“불?”
“우리 일족은 최고의 전사를 뜨거운 불에 비유했소.”
그 말에 천여운이 다시 액자를 바라보았다.
아리샤의 검은 불꽃과도 같은 얼굴을 보면서 입을 열었다.
“라는 혹시 어둠을 의미하나?”
“전사로서만이 아니라 생각보다 영리하시구려. 맞소. 라는 어둠과 공포를 의미한 말이오.”
“그래서 라릿샤라고 부른 것이냐?”
“그렇소.”
말 그대로 라릿샤, 즉 아리샤는 검은 불꽃을 일족의 언어로 표현한 것이다.
천여운은 여기서 대공이 말한 의도를 하나 추측할 수 있었다.
아리샤라는 존재가 자신이 알고 있는 즉 초월적인 존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실존했던 누군가를 지칭하는 말일 수도 있다고 말이다.
“요즘 세대들은 모를 것이오. 라릿샤......아리샤는 우리 일족의 상징이 된 전설적인 존재요.”
칼리아프 대공이 추억에 잠긴 얼굴로 말했다.
“실존했었다....그 말인가?”
“그렇소. 그렇기에 본 대공이 의문을 풀고 싶어한 것이오.”
“의문이라.....”
사실 그것은 천여운이 더욱 궁금했다.
어째서 액자 속 아리샤의 모습이 자신이 진각성한 형태와 흡사한지 말이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비슷했다.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본 대공의 주인께서도 모르고 있었단 말이오?”
천여운이 그 말에 코웃음을 쳤다.
진각성을 하게 된 것도 고작 몇 시간 채도 되지 않았다.
“이번엔 내가 묻지. 아리샤라는 자가 실존했었다면 대체 누구였기에 전설이라고까지 부르는 것이냐?”
“......아리샤는 선대 마왕이오.”
“선대.....마왕?”
천여운이 의아함을 갖추지 못했다.
굉장히 오래된 과거처럼 이야기하더니 고작 선대에 불과했다.
그런데 천여운이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그들의 수명이었다.
“팔천 년 동안 일족을 다스렸던 분이시오.”
“팔천?”
이것은 천여운 또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인간이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엄청난 수명이라 할 수 있었다.
물론 불로불사의 생명을 얻은 천여운 역시도 특별한 문제가 없다면 그렇게까지 살 수 있었지만 참 경이로웠다.
“오래도 살았군.”
“후후후, 대공인 나조차 오천 년이 넘는 세월을 살았소. 당연한 일이오.”
“오천 년....하!”
마족들의 수명은 기이할 만큼 길었다.
그만큼 긴 세월을 살아가기에 인간보다 더욱 강한 것일지도 몰랐다.
칼리아프 대공.
그가 가장 유력한 마왕 후보로 거론되었던 이유는 자취를 감춘 마왕과 더불어 가장 오랜 세월을 살아온 마족이기 때문이었다.
그들에게 수명은 일종에 강함을 나타내는 징표가 되기도 한다.
“나의 주인께서는 내가 왜 이렇게 단 둘이 대화를 나누자고 했을 것 같소?”
천여운이 눈동자를 움직이며 주위를 살폈다.
그의 기감이나 청력 정도라면 성 전체를 느낄 수도 있을 법한데,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가 않았다.
그것은 이곳이 방음 처리가 확실하게 되었다는 의미였다.
“들어서 안 되는 이야기인가.”
이에 대공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리샤에 관한 일화는 현 세대의 마족들에게 그저 신화에 불과하오. 하지만 본 대공에게 있어서는 과거의 일이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아리샤께서는 어느날 갑자기 사라지셨소.”
“사라졌다고?”
“사실 이것은 현 마왕에게 들은 이야기요. 당시 그는 본 대공과 같은 위치였었소.”
자취를 감춘 현 마왕.
그는 원래 칼리아프 대공과 마찬가지로 대공의 작위를 가지고 있었다.
현 세대의 마족들은 그가 율법대로 전대 마왕에게 인정받아, 그것을 승계했다고 알고 있지만 진실은 모호했다.
“현 마왕이 이르길 더 이상 아리샤는 존재하지 않으며 자신이 그의 힘을 승계 받았다고 하였소.”
율법의 모든 절차를 무시한 결과였다.
당시에도 칼리아프 대공은 마왕의 후보였다.
율법대로라고 한다면 대공들 간에 사투를 벌여 최고의 전사가 마왕에게 도전한다.
그리고 그 힘을 인정받게 되면 승계가 이뤄진다.
“그래서 어떻게 했지?”
“보는 그대로요.”
“그냥 인정한 것이냐?”
“인정이고 불인정이고 할 상황이 아니었소.”
당시 그들 일족은 전쟁을 겪고 있었다.
이 넓은 행성에서 오직 그들만이 강자는 아니었다.
그들과 거의 동등한 힘을 지닌 일족이 있었다.
“우리는 탈리샤의 일족들과 기나긴 전쟁을 겪고 있었소. 그 균형이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어느 한쪽 무너질 만큼 치열했소.”
탈리샤의 일족.
그들은 백족, 혹은 신족이라 불리는 자들이었다.
행성의 패권을 다투는 그들 일족과의 전쟁 도중에 대공 중 한 명인 자신이 불복하여 현 마왕과 일전을 벌인다면 일족이 위험하다고 판단한 그는 결국 현 마왕의 승계를 인정하고 말았다.
“그리고 애초에 승부가 될 수 없었소. 진실 규명을 떠나서 아리샤의 마력을 물려받은 그는 이미 마왕 그 자체였으니 말이오.”
칼리아프 대공은 현명했다.
그의 판단 덕분에 기나긴 대전쟁 속에서 그들 일족은 살아남았다.
물론 수많은 희생을 치렀지만.
“그들 일족과의 긴 세 번째 대전쟁이 끝난 후에 본 대공은 그동안 미루었던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움직였소.”
“진실 규명이라....꽤 억울했나 보지?”
“아리샤는 본 대공이 진심으로 경외했던 존재. 그런 분이 말없이 사라진 것을 본 대공은 믿기 힘들었소.”
칼리아프 대공은 그의 흔적을 조사했다.
사라지기 전에 전대 마왕인 아리샤의 모든 행적들을 밟아, 그가 어째서 사라졌는지 규명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흔적을 찾기에는 이미 늦었다.
오랜 전쟁으로 전대 마왕을 보좌했던 자들도 전부 소멸했고, 마왕성에 있는 자들도 전부 현 마왕의 수족들로 교체되었다.
“이런 본 대공의 움직임을 알아차린 현 마왕이 경고를 했소.”
“더이상 분란을 조성하지 말라고 말이냐?”
“.....그렇소.”
칼리아프 대공은 이 경고를 무시하기 힘들었다.
전쟁이 끝났다고 하지만 너무 많은 일족의 소멸로 그들은 한참 재건해야 하는 시기였다.
그 와중에 끝까지 대립한다면 내부 전쟁으로 자멸하리라 판단했다.
‘우두머리의 자질이 있군.’
그런 그의 이야기에 천여운은 그렇게 생각했다.
만난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칼리아프 대공이 누군가와의 싸움이나 죽음이 두려워서 피할 성격은 절대 아니었다.
본인의 말대로 일족의 미래를 염려한 것이 틀림없었다.
“뭐, 어찌 되었든 아무 것도 알지 못한 것이군.”
“그런 것은 아니오.”
“그게 아니다?”
“그 당시에 한 가지 기묘한 소문이 돌았소.”
“소문?”
“전대 마왕의 측근이었다고 주장하는 자가 아리샤가 이곳을 버리고 다른 행성으로 떠났다는 소문이오.”
“다른 행성으로?”
그 소문을 접한 칼리아프 대공은 그 정보가 나온 당사자를 찾으려 했다.
그러나 은밀히 그 자를 수색했으나 그 길지도 않은 사이에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
심지어 마왕으로부터 허위 소문을 퍼뜨리는 자들은 율법으로 다스린다는 명이 나오면서 그것은 짧은 헤프닝으로 끝나고 말았다.
천여운이 그 말에 혀를 찼다.
“결국 제대로 아는게 없군.”
과정에 비해서 얻은 정보가 전혀 없었다.
이에 칼리아프 대공이 민망했는지 수염도 없는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크흠, 결과적으론 그렇소. 하나 그때 마왕의 반응이나 사라진 소문의 진상자를 생각하면 충분히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소.”
“아리샤가 다른 행성으로 떠났다는 소문 말이더냐?”
“그렇소.”
그 말에 천여운이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 내가 그 다른 행성으로 갔다는 아리샤일 거라고 혹시 생각하는 것이냐?”
“........”
그 물음에 칼리아프 대공이 아무 말도 없이 눈만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확신에 찬 그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일말의 의혹을 띠었다.
“안타깝지만 그럴 일은 없다. 나는 너희들이 말하는 지구에서 태어났고, 모친이나 부친 역시도 인간이다.”
“지구.....태생이란 말이오?”
“그래.”
그 말에 대공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는 천여운이 진각성한 모습을 보고서 그가 어떤 식으로든 아리샤와 관계가 있을 거라고 확신했었다.
그러나 지구 태생이라는 말에 당혹스러웠다.
‘허어. 그럴 리가.....’
혼자서 심각한 표정을 짓던 칼리아프 대공이 잠시 후 물었다.
“그렇다면 어찌해서 지구의 인간인 주인께서 아리샤의 무구들을 모으고 계신 것이오?”
칼리아프 대공이 확신한 두 번째 이유.
그것은 천여운이 가지고 있다는 아리샤의 무구들이었다.
처음에는 검과 륜만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천여운이 아리샤의 무구를 다섯 개나 가지고 있다는 말에 놀랐었다.
“흠.”
그런 그의 물음에 천여운이 생각에 잠겼다.
처음 하갈이 가지고 있던 도면을 본 후에 그는 본능적으로 이것을 모아야겠다고 판단했었다.
물론 천여운은 자신의 탐욕에 굉장히 충실한 편이었다.
그런데 그 탐욕으로 설명하기에는 확실히 아리샤의 무구들을 얻게 된 경로들이 생각 외로 의도적인 것이 적었다.
일부러 그가 이것을 얻기 위해 행방을 찾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전부 우연에 의해서 일어났다.
‘우연......’
우연과 우연이 겹쳐지면 필연이면서 운명이라고 했던가.
마치 아리샤의 무구들은 처음부터 천여운이 주인이었던 것처럼 하나씩 그의 손으로 들어왔다.
그 시작은 천마검이었다.
‘그건 이상하군.’
뭔가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느낌이었다.
당사자인 본인은 별 생각이 없었다.
한데 칼리아프 대공이 이런 식으로 의문을 제시하자 잔잔한 호수에 돌멩이를 던진 것 마냥 파문이 퍼진 느낌이다.
그러던 차였다.
-우웅!
방의 입구 쪽에서 붉은 빛이 감돌았다.
이에 칼리아프 대공이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후우, 이 이야기는 나중에 하도록 하지요. 손님이 온 것 같으니.”
대공이 문을 열자 그 앞에 베프만 공작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서있었다.
의아해진 대공이 물었다.
“베프만. 자네 바무트로 간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지 않아도 충성 맹세 후에 딸인 아이린 후작을 구하기 위해 일부 전력을 이끌고서 바무트 지하 수감소로 향했던 베프만 공작이었다.
그런데 간지 얼마 되지 않아서 다시 나타났다.
-쿵!
베프만 공작이 한쪽 무릎을 꿇으며 청했다.
“전하. 부디 도와주십시오.”
“무슨 일이기에 그러나?”
“바무트의 입구에 있는 역장이 열리지 않습니다.”
“역장이 열리지 않아?”
역장이란 바무트 지하 수감소로 들어갈 수 있는 입구가 있는 공간이었다.
그곳은 강제로 설치된 결계가 아니라 지하 감옥이 펼쳐진 협곡의 입구에서 벌어지는 자연 현상이었다.
본래 역장은 특수한 장치를 이용하면 열렸다.
“역장의 힘이 더 강해진 것 같습니다.”
“흐음.”
그 말에 칼리아프 대공이 난처함을 금치 못했다.
행성의 자연 현상으로 일어난 역장은 대공인 자신이라고 할지라도 강제로 뚫고 지나갈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에너지의 집합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통과할 수 없다면 안에서 나올 방법이 없었다.
이에 천여운이 말했다.
“게이트로 들어가면 되지 않나?”
그 말에 베프만 공작이 복잡한 목소리로 답했다.
“안으로 들어갈 때는 그게 가능하지만 밖으로 나올 때는 불가능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지?”
“......바무트 지하 수감소 안에서는 외부로 나갈 수 있는 게이트를 열 수 없도록 조치가 취해져 있습니다.”
이는 수감자들을 혹시나 탈출시키려는 자가 있다면 막기 위해서였다.
안으로 들어갈 수는 있어도 밖으로 빼낼 수는 없다는 의미였다.
베프만 공작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을 하면서 차마 천여운을 쳐다보지 못했다.
‘후우.’
자신들이 수작을 부리다가 딸이 갇힌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젠 충성맹세까지 해서 더욱 민망하기마저 했다.
그런 그에게 천여운이 말했다.
“그 역장을 뚫기만 하면 되는 것이냐?”
이에 착잡한 심경을 숨기지 못하고 있던 베프만 공작이 환해진 얼굴로 말했다.
“그, 그렇습니다!”
* * *
바무트 지하 수감소.
그곳의 유일한 입구는 역장으로 막혀 있다.
이 때문에 이곳은 그 누구도 탈출에 성공한 적이 없는 철옹의 감옥이었다.
이곳이 무서운 점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역장이 입구에 있다는 것은 그 안에는 바깥과는 다른 힘이 작용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그 다른 작용의 힘은 마족들을 굉장히 무력하게 만들었다.
-타타타타탁!
누군가 어두운 동굴을 전력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그 누군가는 바로 아이린 후작이었다.
“헉....헉....”
바깥보다도 훨씬 강한 중력으로 인해 그녀는 뛰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어지간해서는 체력 소모가 없을 텐데, 그런 강한 중력과 바깥에서는 없었던 유독한 공기는 그녀를 약하게 만들었다.
-우르르르!
그렇게 달리는 그녀의 많은 발걸음 소리들이 들려왔다.
그것이 그녀를 더욱 안달나게 만들었다.
아이린 후작의 물골은 말이 아니었다.
화려했던 그녀의 복색은 반쯤 찢겨져서 거의 누더기처럼 바뀌어 있었다.
“빌어먹을!”
달리는 그녀의 입에서 절로 거친 욕설이 튀어나왔다.
마족들 중에서도 금수저라 할 수 있는 자신이 처한 이 상황이 너무나도 끔찍했다.
이 안은 너무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다.
-우웅!
유일하게 그녀를 지금까지 저들에게서 도망치게 만들었던 것은 무의 수치화 능력 덕분이었다.
시야에서 잡히기만 하면 수치가 표기되면서 적들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녀가 달리면서 뒤를 힐끔 쳐다 보았다.
[284,000. 179,000. 234,000. 365,000. 220,000]
터무니없는 수치들에 당혹스러웠다.
하나 같이 자신에게 육박하거나 그 이상의 수치들.
척박한 지하 감옥에서 살아남은 자들이라서 그런 것인지, 흉악한 죄수들이라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들은 너무도 강했다.
‘붙잡히면 안 돼.’
여기서 붙잡히게 되면 자신은 노리개가 되어 죽을 지도 몰랐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
그 신념으로 무조건 달렸다.
그렇게 미친 듯이 앞으로 달리고 있던 차였다.
-쾅!
갑자기 바닥이 부숴지면서 뭔가가 튀어나와 그녀의 발목을 붙잡았다.
“헉!”
놀란 그녀가 그것을 뿌리치기 위해 마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렸다.
그런데 바닥에서 튀어나온 무언가는 뿌리쳐지기는커녕 오히려 그녀를 거꾸로 들어올렸다.
“아악!”
졸지에 거꾸로 붙잡힌 그녀가 소리를 질렀다.
어둠 속이라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의 두 눈에 인영 비슷한 것이 보였다.
거꾸로 보였지만 그것만큼은 잘 보였다.
“흐흐흐, 여자.”
혀를 날름거리며 입맛을 다시는 모습.
그녀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촥!
이에 기겁한 그녀가 손을 내밀어 거미줄 같은 강사실을 내뿜었는데, 그녀의 발목을 잡고 있는 존재는 그것을 가볍게 잡고서 뜯어버렸다.
[492,000]
그녀의 왼쪽 눈으로 보이는 무의 수치는 그녀를 절망스럽게 만들었다.
자신보다도 두 배는 강한 자였다.
힘으로 어찌할 수 없자 아이린 후작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너, 내, 내가 누군 줄 알아! 난...”
-찌이익!
그런 그녀의 상의를 그 야인이 거칠게 뜯어버렸다.
일순간에 상의가 찢겨지면서 가슴이 드러난 그녀가 두려움으로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래그래. 여자잖아.”
어둠 속의 커다란 야인이 침을 질질 흘리며 말했다.
이곳 바무트 지하 수감소 속에서 그녀는 더 이상 후작이 아닌 한 명의 여자일뿐이었다.
야인이 그녀의 봉긋한 가슴에 코를 갖다 대며 흥얼거렸다.
“흐음. 향긋한 냄새.”
-오싹!
공포감이 극에 달한 그녀가 소리를 질렀다.
“꺄아아아아아악!”
바로 그때였다.
어두운 공간 속에서 녹색 섬광이 광선처럼 쏘아져 나오며, 그녀를 붙잡고 있는 커다란 야인의 어깨를 꿰뚫었다.
“끄악!”
-쿵!
덕분에 거꾸로 붙잡혀 있던 그녀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어깨가 꿰뚫린 야인이 고통스러워하다가 이내 자신을 향해 날아온 녹색 광선이 쏘아진 곳을 쳐다보았다.
-고오오오오!
어둠 속에서 녹색 안광을 내뿜는 무언가가 보였다.
강렬한 위압감이 느껴졌다.
이를 본 야인이 갑자기 기겁을 하며 바닥에 머리를 조아리며 소리쳤다.
“야, 야왕이시여!”
야인은 녹색 안광을 내뿜는 존재를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녹색 안광의 존재에게서 기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하 세계에 있는 모든 것들은 오직 본 왕의 것이다.”
< 66화 바무트 지하 수감소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