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화 대공 (1) >
-나는 짙은 어둠.
나의 이 어둠은 혼돈과도 같을 지어다.
나는 불꽃.
그것은 너희들을 어둠으로 인도하는 찬란한 불꽃일지어다.
나의 인도는 너희로 하여금 길이 될 것이다.
이 글귀는 성전에 있는 아리샤의 석판에 적혀 있는 문구이다.
공작의 작위 이상만이 출입할 수 있는 아리샤의 성전.
그곳에서 베프만 공작은 이 글귀를 수천, 수만 번을 보았다.
대공 이상의 존재만이 할 수 있다는 진각성을 한 천여운의 모습을 본 그는 문득 성전에 있던 그 글귀를 떠올렸다.
‘왜 떠오른 거지?’
천여운은 일족과 전혀 연관이 없다.
하찮은 인간에 불과하다.
그런데 어둠과 불이 섞인 듯한 모습을 보는 순간 불연 듯 떠올랐다.
‘검은 불꽃.’
그것은 위대한 아리샤를 상징한다.
어째서 그가 그런 모습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아리샤? 뜬금없군.”
샤케나에게 아리샤가 그들에게 신적인 존재라고 들은 천여운이다.
그렇기에 그가 그저 자신의 힘에 눌려서 그런 말을 하는 거라 치부했다.
“대체 그대는 누구요? 인간이 이런 힘을 지녔다는 얘기는 듣지도 본 적도 없소.”
“우습군. 네놈들이 세상의 중심이라 여기나.”
“그대가 아리샤의 현신이 아니라면 어째서 그런...”
차마 뒷말은 잇지 못했다.
그런 그에게 천여운이 천천히 다가와 베프만 공작의 머리를 움켜쥐고서 말했다.
-꽈악!
“큭!”
“여기저기 갖다 붙이지 마라. 나는 대 천마신교의 천마. 네놈들이 두려워하고 경외해야 할 마신이다.”
“마......신?”
마신(魔神)
천여운의 별호이자 이제는 상징이 된 호칭이다.
베프만 공작이 눈동자가 떨려왔다.
천여운이 아리샤가 그들이 모시는 신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알 듯이 오랜 세월 동안 지구를 수차례나 방문해온 그 역시 신의 의미를 잘 알았다.
“.......그대가 정녕 마신이....아니, 입니까?”
갑자기 베프만 공작의 태도가 공손해졌다.
천여운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털썩!
그러자 갑자기 베프만 공작이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서, 오른손을 자신의 가슴에 갖다 댔다.
“파, 파파!”
아이린 후작이 그의 태도에 놀라서 소리쳤다.
이 같은 반응은 다른 마족들이나 카울 후작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을 저 자세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어, 어째서?’
‘저건 왕을 대하는 자세가 아닌가!’
놀랍게도 베프만 공작이 취한 자세는 그들의 왕, 즉 마왕에게 취하는 경건한 자세였다.
물론 마왕에게만 취하는 자세는 아니었다.
성전에서도 이 자세를 취한다.
“공작 베프만이 위대하신 존재에게 예를 갖추어 인사드립니다.”
“파파!”
아이린 후작이 결국 참지 못하고 그를 다그치듯이 소리쳤다.
저것은 예를 갖추는 정도가 아니다.
오직 충성을 맹세한 마왕이나 칼리아프 대공에게나 취해야 할 예를 지금 보이고 있는 것이었다.
-슥!
베프만 공작이 그녀에게 손을 내밀어 입을 다물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대체 왜 그러는지 영문을 알 수 없어하는 그녀의 머릿속에 베프만 공작이 목소리가 울렸다.
[가만히 있어라.]
이는 전음처럼 마족들이 몰래 대화를 나누기 위한 텔레파시였다.
머릿속을 울리는 텔레파시에 그녀가 황당해하며 물었다.
[파파. 지금 뭐 하는 거에요? 저 자는 적이에요. 고작 인간따위에게 이런 짓을 한 걸 칼리아프 대공께서 아신다면 절대로 용서하지 않으실 거에요!]
그런 그녀에게 베프만 공작이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텔레파시를 보냈다.
[인간이 아니다.]
[네?]
그녀가 인상을 찡그렸다.
괴물 같기는 하지만 인간이 아니라니 무슨 말인가?
[무슨 소리를 하시는....]
[이 분은 지구의 마신이다.]
[네?]
[하긴 지구에 몇 번 오지 않은 네가 알 리가 없겠지.]
[......무슨 말씀이시죠?]
[우리 일족의 위대하신 아리샤와 같은 존재란 말이다.]
[아, 아리샤!]
[우리 일족에 아리샤.....그리고 ‘놈들’에게 ‘탈리샤’가 있듯이 이분은 이 지구의 마(魔)를 상징하는 신이다.]
[이럴 수가.....]
그녀의 표정이 완전히 바뀌었다.
마치 불경을 저지른 신도마냥 경외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천여운을 바라보았다.
‘뭐지?’
천여운의 한 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지금 서로 눈을 마주치고 있는 그들을 보면 분명 그들이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나노.....저들이 나누는 대화를 도청할 수 있나?’
[전 주파수를 검색해보겠습니다.]
나노가 주변의 주파수를 탐색했다.
그러나 소리의 개념이 아닌 텔레파시는 엿들을 수 있진 않았다.
[도청을 할 수 없습니다.]
안타까운 결과에 천여운이 베프만 공작과 아이린 후작을 번갈아 쳐다보면서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뭐하는 거지?”
그 말에 베프만 공작이 화들짝 놀라했다.
그저 묻는 말에 불과했지만 그는 지레짐작을 하고 말았다.
‘이럴 수가 우리들이 텔레파시를 하고 있는 것을 눈치 챘단 말인가.’
참으로 우스운 일이었다.
한 번 시작된 오해가 점점 커져가고 있었다.
베프만 공작이 머리를 숙이며 죄를 청하는 죄수마냥 말했다.
“송구스럽습니다. 위대하신 존재의 앞에서 딸을 타이르는 텔레파시를 썼습니다. 함부로 불경을 저지른 것을 용서하소서.”
“흠.”
천여운이 뭔가 이상했는지 자신의 턱을 쓰다듬었다.
뭔가 이 자의 태도가 달랐다.
보통 마족들이 충성 맹세한 것과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라는 것 정도는 이 자의 태도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차라리 잘 된 건가.’
어찌 되었든 놈이 자신을 두려워하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렇다면 정보를 캐내기 좋은 상태였다.
마족들은 고스트화를 시킬 수 없기 때문에 직접 입을 벌리는 것 외에는 답이 없으니 말이다.
“지금부터 내가 묻는 말에 답해라.”
“하문하소서.”
“거짓은 죽음뿐이다.”
“어찌 위대하신 존재에게 거짓을 고하겠나이까?”
‘음.......’
뭔가 천여운은 베프만 공작이 굉장한 오해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굳이 이를 해명할 필요도 없다고 여겼다.
“네놈들 어째서 이 검을 비롯한 무구들을 노리는 것이지?”
이 이유는 사실 알고 있었다.
샤케나를 통해서 들었기 때문이었다.
혹여 다른 이유가 있는지 알아보기 위한 질문이었다.
“아리샤의 갑주는 일족의 신물입니다. 그것이 상징하는 것은 왕을 의미합니다.”
“왕?”
“오직 왕만이 갑주를 가질 수 있고, 입을 수 있습니다.”
“네놈들의 왕이 부재 중이거나 문제가 있다고 들었다. 그럼 네놈들이 그 자리를 취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더냐?”
“아......”
천여운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이에 잠시 입을 다물었던 베프만 공작이 이내 말했다.
“왕은 일족에서도 중요한 위치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 왕이 오랜 세월 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고, 최측근이라는 작자들이 일족의 국정을 농단하고 있습니다.”
“문고리 사인방.”
천여운의 그 말에 베프만 공작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세간에 떠도는 그들 일족이 쓰는 은어를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렇게도 불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몰아내기 위해서냐?”
“한 일족을 다스리는 수장이 없이 어찌 적들과 맞서 싸울 수 있겠습니까?”
“적? 네놈들에게도 적이 있나?”
그 물음에 베프만 공작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저희 행성의 크기는 이 행성의 열 배에 달합니다. 당연히 저희 일족 이외에도 대립하는 존재들이 있습니다.”
“흠.”
그의 말에 천여운이 달리 생각되었다.
최측근이라 불리는 네 공작 중 한 사람의 명을 받고 온 샤케나의 입장은 아무래도 그들 쪽에 좀 더 치우쳐 있었다.
그런데 이 대답들만으로도 그들도 나름의 명분을 가지고 있었다.
“네놈이 모시는 자가 칼리아프 대공이냐?”
“그렇습니다.”
“그럼 놈이 지금 그 왕의 자리에 도전하고 싶은 것이냐?”
“그렇습니다. 칼리아프 대공께서는 왕이 되어 다시 일족을 부흥시키려고 합니다.”
베프만 공작이 충성심이 담긴 목소리로 답했다.
그는 자신의 주인이 왕이 되게 하는 것이 목표였다.
“아리샤의 갑주란 것은 왕을 상징하는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군.”
“그것만이 아닙니다.”
베프만 공작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그것만이 아니다?”
“아리샤의 갑주를 입은 자는 아리샤의 권능과 그 힘을 가질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아리샤의 권능을 가질 수 있다고?”
“아리샤의 갑주는 그 자체만으로도 강대한 병기입니다. 이것이 문고리 사인방의 손에 넘어가게 되면 저들의 농단은 더욱 커질 겁니다.”
-팍!
베프만 공작이 고개를 숙이고서 정중하게 청했다.
“부디 저희 일족을 헤아려 아리샤의 갑주를 칼리아프 대공께서 가질 수 있도록 위대하신 존재께서 윤허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꼭 필요했다.
그런 그의 청에 천여운은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샤케나의 말대로라고 하면 저들 문고리 사인방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아리샤의 갑주를 찾지 못하게 방해를 한다고 했다.
‘그게 아니지 않나?’
베프만 공작의 말대로라고 한다면 최측근들 역시도 아리샤의 갑주를 찾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것을 찾기만 하면 그들 중 한 사람이 오히려 마왕을 대신할 수 있다.
오히려 안정적으로 일족을 다스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저들이 숨긴 것이 아닌가?’
처음 천여운은 문고리 사인방이 지구에 아리샤의 갑주를 숨겼다고 여겼다.
그런데 양측의 사정을 들어보면 그게 아닌 듯 했다.
“어이.”
“네?”
“이 검과 아리샤의 갑주라 불리는 것들이 언제 어떻게 이곳에 흘러들어온 건지 알고 있나?”
기록이나 심상에서 본 대로라고 하면 오래 전 운석처럼 무구들이 떨어졌다.
아마도 이들은 좀 더 어떻게 된 상황인지 알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모릅니다.”
“모른다고? 네놈들의 신물이 어째서 이곳에 있는 것인지 모른다는 게 말이 되나?”
“어찌 제가 위대하신 존재께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베프만 공작이 믿어달라는 눈빛으로 고개를 올려 쳐다보았다.
한 점의 흔들림 없는 눈동자.
이것만 봤을 때는 고의적으로 속이는 느낌은 아니었다.
“칼리아프 대공도 모르나?”
그 물음에 그의 눈동자가 떨렸다.
“뭔가 알고 있나 보군.”
“......그건 부정할 수 없습니다.”
베프만 공작은 그 사실을 속이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라면 칼리아프 대공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속을 도무지 짐작할 수 없는 천여운의 무표정한 얼굴에 베프만 공작이 다시 머리를 숙이며 청했다.
“위대하신 존재여. 부디 저희들에게 아리샤의 무구를 주실 수 없겠습니까?”
“없다면.”
‘!?’
단호한 천여운의 거절에 베프만 공작이 난처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에게는 반드시 아리샤의 갑주가 필요했다.
베프만 공작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칼리아프 대공은 절대로 갑주를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다른 문고리 삼인방들 역시도요.”
말인즉 그것을 주지 않으면 계속 마족들이 지구로 넘어올 거란 소리였다.
협박을 하기 위한 말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아리샤의 갑주는 그들 내부에서 벌어지는 전쟁을 종결시킬 수 있는 신물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천여운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가능하다면 그래보라고 해라.”
‘!!!’
오만함으로 깃든 그 말에 베프만 공작이 당혹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만약 이 말을 칼리아프 대공이 전해 듣게 된다면 대노하여 직접 모든 전력을 이끌고 지구로 넘어올지도 몰랐다.
“......정녕 괜찮으시겠습니까?”
베프만 공작이 주위를 둘러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것은 천여운이 아닌 다른 자들의 안위도 괜찮겠느냐는 의미였다.
그를 자극하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괜찮냐라......하!”
기가 차다는 듯이 내뱉는 천여운의 말투.
날이 제대로 서있었다.
베프만 공작이 긴장한 눈빛이 되었다.
그런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천여운이 이내 가까이 다가와 말했다.
“그래. 네놈 말도 일리가 있군.”
“아!”
혹여 천여운이 분노로 자신들을 죽이고 일이 더 커질 것을 우려했던 베프만 공작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베프만 공작이 다행이라는 듯이 말했다.
“힘든 결정을 하셨습니다. 제가 대공께 말씀드려 절대로 지구로 오지 못하도록 조치를....”
-꽉!
“억!”
천여운이 갑자기 그의 머리채를 움켜잡았다.
갑작스러운 그의 태도에 당황한 베프만 공작이 영문을 몰라 했다.
“가, 갑자기 왜 그러시는지?”
“착각하는 것 같군.”
“네?”
“내가 여기 앉아서 잠자코 놈을 기다린다고 했나?”
그 말에 베프만 공작이 떨리는 목소리로 반문했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그런 그를 바라보며 천여운이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직접 가주지.”
‘!?’
베프만 공작이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설마 그의 입에서 직접 자신들의 행성으로 간다는 말이 나올 줄은 전혀 몰랐다.
이런 반응은 다른 마족들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행성으로 가겠다고?'
'지금 설마.....우릴 공격하겠다고 말한 거야?'
역침공.
지금껏 그들이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발상이었다.
천여운이 당혹스러워하고 있는 베프만 공작에게 말했다.
“당장 게이트 열어라.”
< 64화 대공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