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화 아리샤의 갑주 (4) >
인간은 상처가 나면 피가 흐른다.
하지만 마족들은 상처가 나면 마력의 소실로 인한 검은 연기가 흘러나온다.
아이린 후작의 왼쪽 눈에서 검은 연기가 나왔다.
“아흑.....”
갑자기 그녀의 눈동자가 터진 이유는 간단했다.
여전히 무의 수치화 능력을 쓰고 있던 도중에 갑작스러운 과부하로 인해 안구가 터져버린 것이었다.
‘마, 말도 안 돼.’
고통도 잠시였고 그녀는 사색이 되었다.
천여운이 검을 휘둘렀다.
바로 그 짧은 찰나에 눈으로 보이는 수치가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갔다.
측정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게 인간이라고?’
인간치고 강하다.
인간이 이렇게 강하다.
그런 수준을 완전히 넘어섰다.
‘........저건 그냥 괴물이야.’
그녀는 자신들이 감당할 수 없는 존재를 건드렸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그것은 다른 마족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굳이 무의 수치화를 보지 않더라도 천여운이 괴물이라는 사실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진각성한 마족이.....고작 일검에?’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마족들에게 있어서 각성이나 진각성은 꿈같은 일이었다.
고위 작위의 마족들만이 할 수 있는 힘의 상징이 무참히 깨진 상황이다.
그들의 시선은 루드히 공작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끄극!”
두 손으로 위태롭게 자신의 목을 붙잡고 있었다.
저 정도 고위 마족이라면 핵이 손상이 가지 않는다면 저렇게 목을 붙잡고 있는 것만으로도 회복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데,
‘회, 회복이 되지 않아.’
루드히 공작은 전혀 회복할 수 없었다.
날카로운 예기뿐만이 아니라 흉폭한 기운이 재생을 방해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천마기였다.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에 사로잡힌 루드히 공작이 절규하듯이 소리쳤다.
“끄으으....네놈.....무, 무슨 짓을 한 거냐?”
천여운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멍청한 짓 하지 마라. 네놈은 이미 죽어있다.”
‘!?’
천여운은 그가 전혀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듯 했다.
당황해하는데 그의 앞으로 천여운이 다가왔다.
“아! 깜빡할 뻔했군.”
“뭐?”
-푹!
“크억!”
아차 하는 순간에 천여운이 그의 가슴 정중앙에 천마검을 꽂았다.
천마검에서 푸른빛이 감돌며 음산한 기운이 일렁였다.
“네, 네놈?”
루드히 공작의 두 눈이 커졌다.
마왕을 보좌하는 네 측근 중 한 명인 그는 아리샤의 무구들이 가진 능력을 잘 알았다.
아리샤의 검이 으뜸이라 불리는 이유.
그것은 동족 포식 따위는 하지 않더라도 적들의 능력을 흡수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내 힘을? 내 힘을.....’
“고맙군. 하마터면 못 가져갈 뻔했는데, 버텨줘서.”
“이노오오오옴!”
천여운의 감사 인사에 루드히 공작은 분노했다.
하지만 그 분노는 오래가지 못했다.
"끄거거거걱!"
핵에서 마력이 빠져나가는 무력감과 함께 어느새 그의 몸은 재처럼 흩어져 내렸다.
-파스스스스!
그것과 비슷하게 천여운이 머리가 파르르 흔들렸다.
핵을 흡수하면서 그가 가진 능력의 정보들이 머릿속으로 전이되는 과정이었다.
이를 받아들일 때마다 어지러움이 수반되었다.
‘.......말도 안 되는 강함이야.’
샤케나는 넋이 나간 얼굴로 천여운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가 강한 줄은 알았지만 상상을 초월했다.
설마 마왕의 네 측근 중 한 사람이 일검에 목숨을 잃을 줄은 몰랐다.
-꿀꺽!
침이 절로 삼켜졌다.
새삼 그녀는 자신의 선택이 잘못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그때 허봉이 마족들을 향해 소리쳤다.
“어이. 뭣들 하는 거냐? 네놈들의 수장들이 전부 저 꼴이 되었는데 그냥 넋 놓고 있을 참이냐? 당장 투항해라!”
이미 천여운이 압박하던 기운은 해소되었다.
그들은 그저 압도적인 역량에 놀라서 일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웅성웅성!
마족들이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그때 한 마족이 소리쳤다.
“보, 본 일족의 율법에 따라 백작 노린이 패배를 인정하겠습니다! 모든 것은 승자의 처분에 따르겠습니다. 목숨을 거두시든 노예로 삼으시든 뜻대로 하소서!”
패배 선언.
전의를 상실한 백작 급 마족 노린이 항복했다.
이미 눈앞에서 압도적인 힘을 확인했고, 허봉의 말처럼 수장들마저 저 꼴이 된 마당에 무엇을 하겠는가.
충성심이 깊은 다른 백작 급 마족 치카란이 그를 질책했다.
“네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본 일족의 율법에 따라 백작 올가가 패배를 인정하겠습니다! 모든 것은 승자의 처분에 따르겠습니다. 목숨을 거두시든 노예로 삼으시든 뜻대로 하소서!”
그 질책이 끝나기도 전에 다른 백작 급 마족이 항복을 했다.
“이, 이놈들이....”
두 명의 마족이 항복을 하자, 그것은 우수수 터졌다.
마족들이 일어나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정식으로 항복 선언을 했다.
“네놈들 이게 무슨 짓이냐? 어떻게 주군이 저리 계신데....”
“그럼 그냥 죽을 셈이냐? 진각성을 한 공작 급 일족을 저리 만든 괴물을 상대로 무슨 수로 항전할 거냐?”
“그, 그건....”
반박할 여지가 없었다.
주군인 베프만 공작은 전의를 상실했기에 더 이상 승산은 없었다.
그를 제외한 모든 마족들이 항복 선언을 하고서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단 세 마족들을 제외하면 말이다.
-스스스!
조금씩 터진 눈이 회복되어가고 있는 아이린 후작.
넋을 놓은 얼굴로 천여운을 쳐다보고 있는 베프만 공작.
그리고 루드히 공작의 충실한 수하인 카울 후작.
다른 마족들과 달리 혈연에 오래전부터 충성으로 묶여 있는 그들은 힘에 눌리는 것만으로 항복할 상황이 아니었다.
-으득!
‘이.....이놈!’
주인을 잃은 카울 후작이 분노로 이를 갈았다.
눈앞에서 주인이 죽는데, 그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가 천여운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천여운은 두 눈을 감고서 머리를 파르르 떨고 있었다.
‘지금이 기회다!’
그는 유일하게 천여운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이것뿐이라고 여겼다.
이 같은 생각을 한 것은 그만이 아니었다.
‘핵의 기운을 흡수하고 있어.’
아이린 후작 역시도 이게 마지막 기회라고 여겼다.
천여운이 보일 빈틈.
지금이 아니면 그들은 절대로 천여운의 털 끝 하나 건드릴 수 없었다.
-팟!
참으로 공교로운 일이었다.
같은 생각을 한 두 후작이 동시에 움직였다.
-팟! 콰드드드득!
그들은 움직임과 동시에 각성을 하면서 모든 전력을 다했다.
‘죽인다!’
‘놈을 죽여야 해!‘
그러나,
-휘리리리릭!
“흐헉!”
“아흑!”
신형을 날리는 그들의 몸을 황금빛 꼬리가 휘어 감았다.
‘이년은?’
그들을 막은 것은 바로 금모 구미호였다.
천여운 하나에게만 신경 쓴다고 또 하나의 괴물이 막을 것을 전혀 상정하지 못한 두 후작들이었다.
“뭐하는 거냐? 니들 진짜 죽고 싶은가 보네.”
금모 구미호의 황금빛 요안에 살기가 서렸다.
“빌어먹을!”
“파....파파.”
두 마족들은 이 상황을 절망했다.
결국 그들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무력하게 죽어야 하는 처지였다.
그때 천여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재밌군.”
“천마?”
그들을 꼬리로 압사시키려던 금모 구미호가 천여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천여운이 묘한 표정을 지으며 웃고 있었다.
왜 저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의아해하고 있는데, 천여운이 입을 열었다.
“마왕에게서 받았다는 게 이런 뜻이었나.”
천여운이 자신의 얼굴을 향해 손을 들어올렸다.
얼굴을 손바닥으로 가리자, 갑자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쿠구구구구구구!
사방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루드히 공작이 진각성을 할 때의 전조와 닮아 있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 기운이 더욱 강했다.
-콰득! 콰득!
주변의 공간이 일그러질 정도로 말이다.
-콰아아앙!
너무 강한 힘을 버티지 못한 건물이 이내 무너져 내리려 했다.
-슈슈슈슉!
금모 구미호의 꼬리들이 거대해지며 무너져 내리려고 하는 건물을 받쳐 세웠다.
그녀가 조금만 늦게 움직였어도 윗층이 그대로 내려앉았을 것이다.
“천마!”
힘을 주체하지 못하는 그에게 금모 구미호가 소리쳤다.
그런데 이내 일그러지던 공간이 다시 원상태로 돌아가며, 사방을 위협하던 엄청난 기운이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한 점으로 모였다는 것이 옳았다.
“뭐, 뭐야? 천마?”
“주군?”
금모 구미호와 천여운의 수하들이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천여운의 전신이 마치 활활 타오르는 불꽃마냥 무언가에 휩싸여 있었다.
그것은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어둠이 불처럼 타오르는 형태를 하는 것이 참으로 기이했다.
-슥!
천여운이 손을 내리자 얼굴이 드러났다.
그런데 천여운의 얼굴 역시 칠흑 같은 어둠이 되어 있었다.
그 기운은 진기와는 차원이 달랐다.
어둠 그 자체였다.
천여운이라는 사실만 몰랐다면 마치 신화나 전설 속에 말하는 신적인 존재, 마신(魔神)을 보는 듯 했다.
“지, 진각성?”
금모 구미호의 꼬리에 묶여 있는 아이린 후작이 어처구니가 없어했다.
그녀는 확신했다.
천여운이 진각성을 했다고 말이다.
“어떻게.....이런 일이.....”
카울 후작 역시도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는 루드히 공작을 항상 곁에서 모셔왔다.
그렇기에 그를 비롯한 네 측근들이 어떻게 진각성을 하는지 가까이서 지켜봤었다.
분명 진각성이 틀림없었다.
그때 불꽃처럼 일렁이는 어둠의 얼굴 쪽이 흔들렸다.
-좋은걸 배웠...
-파차차차차창!
“우와악!”
“푸, 풍압이!”
소리가 울리는 순간 폭풍이라도 몰아치는 것처럼 엄청난 풍압이 일어났다.
덕분에 엎드려 있던 마족들부터 천여운의 수하들까지 뒤로 밀려나가는 사태마저 벌어졌다.
‘이런.’
천여운이 난감해했다.
그저 말을 하는 것만으로 힘이 흘러나올 만큼 통제가 되지 않았다.
천여운이 다급히 손을 위로 들어 올려 얼굴을 가렸다.
그리고 내리자,
-파스스스스!
그의 전신을 휘감고 있던 검은 어둠이 흩어지듯이 사라졌다.
증폭되었던 기운이 사라지자 천여운의 손이 떨려왔다.
천여운이 떨리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진각성을 쓰는 순간, 천마기가 폭발적으로 변했어.’
다른 진기가 늘어난 게 아니었다.
천마기가 고도로 압축되다가 갑자기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그로 인해 천여운 자신이 마치 혼돈과 어둠 그 자체로 바뀌는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오래 쓸 수는 없겠군.’
잠시 썼을 뿐이었는데, 피로감이 보통이 아니었다.
격렬하게 체력을 소진했을 때와 같았다.
“천마......방금 전에 너 완전히 탈각한 것 같았어.”
금모 구미호가 놀랍다는 듯이 말했다.
탈각(脫覺).
그것은 말 그대로 깨달아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우화등선을 하는 도인에게 쓰는 단어이기도 했지만 그녀가 한 말은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
일순간 인간이 아닌 존재가 되었다는 말이었다.
“뭐.....그럴 지도.”
천여운도 이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 역시도 방금 전의 그 이질적인 감각이 인간에서 벗어났다고 여겼다.
그때 누군가 천여운의 앞으로 걸어왔다.
꼬리털에 묶여 있는 아이린 후작이 놀라서 소리쳤다.
“파파!”
걸어오고 있는 그는 베프만 공작이었다.
베프만 공작이 떨리는 눈으로 천여운을 쳐다보며 물었다.
“그대는.....그대는 대체 뭐요? 아리샤의 현신이오?”
< 63화 아리샤의 갑주 (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