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화 아리샤의 갑주 (3) >
무의 수치화를 볼 수 있는 아이린 후작의 왼쪽 눈동자.
그녀의 눈동자에 비치는 천여운의 전투력 수치는 마지막으로 하나라는 숫자를 부르는 순간에 확 치솟았다.
[9,650,000]
자그마치 965만이라는 전투력.
거의 천만에 도달해갔다.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사실 그녀는 처음 이 능력을 발휘했을 때 가장 먼저 천여운을 봤었다.
그때는 분명 천여운의 수치는 이상할 정도로 낮았다.
평범한 인간들의 수치인 10 정도에 불과했다.
‘힘을 숨겼어......’
그녀가 첫 번째로 놀란 부분은 바로 이것이었다.
그녀의 능력은 굉장히 정확한 편이다.
기운을 갈무리 한다고 해도 어느 정도 상정 수준에서의 오차만 난다.
그런데 완전히 힘을 숨긴 것이다.
‘대체 이 힘은.....’
두 번째로 놀란 것은 인간을 완전히 상회하는 압도적인 힘이다.
마족에서도 고작 10명밖에 존재하지 않는 공작을 가볍게 상회하는 수치.
“아이린! 정말 제대로 본 게 맞느냐?”
베프만 공작이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의 눈이 잘못된 것이 아니냐고 묻고 싶은 심경이었다.
아이린 후작은 차마 이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이 수치라면 거의 대공 급에 필적할 지도 몰라.’
아버지인 베프만 공작의 주군인 칼리아프 대공을 알현한 적이 있는 그녀다.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그의 힘을 엿본 적이 있다.
도중에 칼리아프 대공에게 들킬 뻔해서 멈췄지만 그 짧은 찰나에 분명 999만을 넘어가려고 했었다.
무의 수치가 100만 단위를 넘어가면 단번에 측정되는 것이 아니다.
수치가 타이머처럼 순차적으로 올라간다.
“하압!”
-파팍!
베프만 공작이 기습적으로 거칠게 루드히 공작을 밀쳐냈다.
천여운의 힘에 놀라하고 있던 루드히 공작은 이를 미처 제지하지 못했다.
그렇게 그를 밀쳐낸 베프만 공작이 천여운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팟!
“무슨 수작을 부린 건지는 몰라도 인간 놈 따위가 그런 힘을 지녔을 리가 없다!”
베프만 공작은 절대로 인정할 수 없었다.
그들 일족에게 있어서 인간은 고대 시대부터 벌레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그런 벌레가 자신보다 강하다는 게 말이 되는가.
-휘리릭!
베프만 공작의 수도에 날카로운 바람이 회오리를 쳤다.
장소가 협소했지만 그는 천부적인 전투의 달인답게 자신의 수하들에게는 피해가 없고, 천여운의 수하들만 여파에 당할 수 있는 위치를 노렸다.
-콰콰콰쾅!
그가 수도를 휘두르는 것만으로 천장과 바닥이 갈라졌다.
그렇게 그의 수도가 천여운에게 닿으려던 찰나였다.
-야!
날카로운 외침성.
그와 함께 황금빛 거대한 무언가가 베프만 공작의 시야를 가렸다.
-휘리리리릭!
베프만 공작이 자신의 시야를 가리는 황금빛 무언가를 수도로 쳐내려고 했지만, 그것은 그의 회오리가 닿는 즉시 무력화시켜버렸다.
마치 주위 여파가 퍼져나가지 못하도록 말이다.
-파파파파팍!
그렇게 그의 공격을 무력화시킨 황금빛 무언가가 순식간에 그를 휘어 감았다.
너무 빨라서 어찌해볼 틈이 없었다.
“헉! 이, 이게 대체?”
베프만 공작의 몸을 그것이 밧줄처럼 완전히 휘감겨버렸다.
거칠게 감은 것과 달리 푹신한 느낌에 베프만 공작이 어처구니가 없어했다.
‘털?’
그를 휘감은 것은 털처럼 보였다.
당황해하는 베프만 공작의 귓가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 마음대로 천마에게 손을 대려하는 거냐.”
얼굴까지 가리고 있던 털이 스르륵 내려가며 목소리의 주인이 보였다.
그의 앞에 팔짱을 끼고 있는 황금빛 머리카락에 나신의 여인이 오만한 눈빛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는 바로 금모 구미호였다.
‘이년?’
요사스러운 기운은 인간의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금모 구미호가 황금빛 요안을 반짝이며 살벌한 경고를 했다.
“천마에게 굴복하지 않으면 내가 먹어버린다.”
-으득!
베프만 공작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수많은 마족들의 위를 군림하고 있는 그의 자존심을 제대로 긁은 것이었다.
화가 난 베프만 공작이 살기가 잔뜩 오른 목소리로 말했다.
“누구를 먹어? 감히 하등 종족 주제에 상위 종족이라 할 수 있는 본 공작을 능멸하려드는 것이냐!”
-고오오오오!
공작의 마력이 증폭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의 얼굴에 핏줄 같은 것이 징그럽게 올라왔다.
이 모습을 본 강제로 무릎을 꿇려 있던 마족들의 얼굴이 기대감으로 차올랐다.
“저분을 잘못 건드렸어.”
“공작 각하를 각성하게 만들다니. 멍청한 놈들.”
기본 상태만으로도 최강이라 할 수 있는 공작이다.
하지만 각성을 하게 되면 거의 두 배에 가까운 수치로 강해진다.
-쿠구구구!
각성을 하는 공작의 이마에서 두 개의 긴 뿔이 올라왔다.
먼 옛날부터 사람들이 마족 혹은 악마라 부르는 이유는 바로 이 각성에 있었다.
머리카락뿐만이 아니라 피부가 백색으로 변해가는 베프만 공작이 증폭한 자신의 힘에 취해 냉정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계집. 네년은 실수했다. 각성한 본 공작의 전투력은 470만. 너 같은 하등종족이 발버둥을 쳐봐야....”
-우드드드득!
“끄아아아아악!”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금모 구미호의 꼬리털이 베프만 공작의 전신이 으스러질 정도로 강한 힘으로 조여 왔다.
그 힘이 어찌나 강한지 그의 입에서 비명이 나올 정도였다.
‘이, 이게 대체?’
베프만 공작은 이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전 마력을 끌어올려서 꼬리를 찢어버리려고 했지만, 그럴수록 압박이 강해졌다.
“끄어어어.”
체면이 구겨질 만큼 그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아이린 후작의 표정은 가관이 아니었다.
그녀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대....대체 이게 뭐야? 저놈도 그렇고 어째서....”
무의 수치를 측정하는 그녀의 왼쪽 눈에 적혀 있는 수치.
그것은 금모 구미호의 전투력을 담고 있었다.
[6,830,000]
‘683만이라니.......’
공작의 전투력을 가볍게 상회하는 수치에 그녀는 할 말을 잃었다.
그런데 금모 구미호는 현재 전력이 아니었다.
인간화가 아닌 본체가 이보다 더 강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과연 그녀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스멀스멀!
비명을 지르는 베프만 공작의 입에서 검은 연기가 흘러나왔다.
조금만 더 압박을 가하면 소멸할 듯 했다.
“파....파파.”
아이린 후작이 무력하게 베프만 공작을 불렀다.
그녀는 몇 차례나 지구를 방문한 적이 있었지만 이런 괴물들을 본 적이 없었다.
지구의 태고시절부터 존재해온 대요괴 금모 구미호, 기존에 알려져 있던 무의 정점이라 불리는 자연경을 뛰어넘은 천여운.
그들이 전혀 상정하지 못한 존재들이었다.
“거기까지 해라.”
압박해서 죽이려드는 금모 구미호를 천여운이 만류했다.
“왜에? 아직 안 끝났어. 건방진데 가지고 놀다 죽여야지.”
“놈한테 들어야 할 정보가 있다.”
그런 천여운의 말에 금모 구미호가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운이 좋네. 이따 보자.”
-스르륵! 털썩!
“끄으으.”
꼬리를 풀자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바닥에 쓰러진 베프만 공작.
각성이 풀려져 원래대로 돌아온 그는 고통보다도 큰 충격을 받은 것처럼 멍한 눈을 하고 있었다.
전의를 완전히 상실한 상태였다.
“이제 네놈뿐이군.”
천여운이 루드히 공작을 쳐다보았다.
압박을 가하지 않은 샤케나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서있는 마족이었다.
샤케나가 난감한 표정으로 양측의 눈치를 보았다.
‘이를 어쩌지?’
한 쪽은 마왕을 보좌하는 일족의 권력자.
그리고 다른 한 쪽은 그녀가 충성을 맹세한 주인이었다.
누구의 편을 들기도 애매했다.
“주인...”
“가만히 있어라.”
천여운의 그 말에 샤케나가 입을 다물었다.
엄청난 위압감이 그녀로 하여금 지금은 절대로 끼어들 상황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었다.
경계심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는 루드히 공작이 입을 열었다.
“대단하군. 그놈 이외에도 인간 중에 이렇게 강한 자가 존재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인간?’
천여운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그럼 자신 이외에도 이 정도 강자를 보았다는 소리가 아닌가.
루드히 공작이 계속 말을 이어갔다.
“인간의 잠재력은 일족에 비해서 절대로 떨어지지 않는군. 고작 백 년도 살지 않는 존재가 이렇게 강해질 줄이야.”
그는 진심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그리고 천여운 말고도 금모 구미호의 힘을 경계했다.
그 강한 베프만 공작을 힘만으로 저렇게 만든 존재였으니 말이다.
“입에 바른 소리는 집어치워라.”
천여운이 그 말과 함께 오른 소매를 거두고서 들어올렸다.
-차차차차착!
팔목에 있던 흑철 보호대가 분해되더니, 이내 검의 형태로 바뀌었다.
그것은 천마검이었다.
이를 본 루드히 공작의 두 눈을 반짝이며 중얼거렸다.
“아리샤의 검!”
그가 이렇게 큰 관심을 보이는 이유는 간단했다.
일곱 개의 무구들 중에서 가장 으뜸이라 불리는 최강의 무구가 바로 아리샤의 검이었다.
저 검은 모든 마족들을 아우를 수 있는 힘을 지녔다.
“이 검을 알고 있겠지?”
“그렇다.”
“그럼 네가 알고 있는 것에 관해서 전부 말해라. 그렇다면 목숨은 구제해주지.”
천여운의 제안에 루드히 공작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그는 마족의 네 권력자 중의 한 명이었다.
당연히 그 자부심은 베프만 공작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높았다.
하지만 천여운의 힘이 보통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기에 냉철함을 잃지는 않았다.
“인간. 그것은 우리 일족의 보물이다.”
“그 정도는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이곳에 있을 물건이 아닌 것도 알겠지?”
“모르겠는데.”
“뭐?”
“내 수중에 들어온 물건이고.....그리고 이것은 네놈들이 말하는 아리샤의 검이 아니라 본교의 신물인 천마검이다.”
그 말에 루드히 공작이 어처구니가 없어했다.
“억지를 부리는군.”
“내 말이 억지로 보이나?”
대화가 언제라도 힘의 양상으로 바뀔 분위기였다.
이를 지켜보는 이들만 언제 터질지 모를 중압감에 마른 침을 삼키고 있었다.
루드히 공작이 금모 구미호와 천여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는 냉정히 분석하고 있었다.
천여운과 금모 구미호의 힘을 보았는데도 계산을 하고 있다는 것은 그에게 숨겨둔 비장의 수가 있음을 의미했다.
루드히 공작이 입을 열었다.
“인간 제안을 하겠다.”
“제안?”
“네가 만약 순순히 일족의 보물을 준다면 원하는 것을 들어주겠다. 가령 현재 지구상의 상공을 제어하고 있는 저것을 처리 한다던가 혹은 천만금에 달하는 재화. 아니면 수명을 연장하는 것? 어떤 것이 되었든 본 공작에게는 들어줄 힘이 있다.”
루드히 공작은 회유를 하려들었다.
비장의 수가 있다고 해도 가장 좋은 결과는 피를 흘리지 않는 것이었다.
이에 천여운이 피식하고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럼 네놈들이 전부 내게 충성을 맹세해라. 그렇다면 조금은 고려해보지.”
“뭐?”
도리어 한방 맞은 루드히 공작의 인상이 굳어졌다.
나름 평화적인 방법을 취해보려고 했는데, 얼토당토않은 말이 나오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눈빛에 살기가 오른 루드히 공작이 낮은 어조로 말했다.
“정녕 피를 보려는 것이냐?”
“피도 없는 것들이 별 말을 다하는군.”
-으득!
말을 하면 할수록 화만 치솟는 상황에 루드히 공작이 이를 갈았다.
최대한 부딪치는 것을 피하려고 했지만 별 수 없었다.
루드히 공작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스스로의 강함을 과신하는구나.”
“과신이 아니라 현실이다.”
“후우.”
침착함을 잃지 않기 위해 루드히 공작이 깊은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서 말했다.
“네놈이 강한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세상에는 하늘 위의 하늘이라는 말이 있지. 왜 본 공작이 마왕님을 보좌하는지 아느냐?”
“내가 알아야 할 이유가 있나?”
“.......알려주지. 후작급 이상의 마족들은 각성을 하게 된다. 그 각성은 자신의 힘을 두 배까지 끌어올릴 수 있게 된다.”
“그래서?”
“각성은 그게 끝이 아니다.”
그 말과 함께 루드히 공작이 손바닥을 펴서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대체 무슨 행동을 하려는지 알 수 없었다.
그 순간 그에게서 엄청난 풍압이 일어났다.
-콰드드득!
그 풍압이 어찌나 강했는지 건물 전체에 균열이 갔다.
마력이 오르는 정도를 넘어서 거의 폭증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네놈은 절대로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우리 네 공작들은 마왕께 2차 각성인 진각성을 할 수 있는 힘을 얻었다. 그 힘은....”
그가 얼굴을 가렸던 손을 뗐다.
그러자 그의 안면 전체가 전혀 다른 사람처럼 바뀌었다.
인간의 형태였던 본래의 모습과도 달랐고, 악마의 형태였던 각성체와도 달랐다.
붉은 색 안광을 내뿜고 있는 두 눈과 입 이외에는 코, 머리털, 눈썹 모든 것이 사라져서 이질적인 형태를 하고 있었다.
괴이하게 바뀐 루드히 공작이 입 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대공 급에 필적한다.”
-고오오오오!
건물 전체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단순히 뿜어져 나오는 마력만으로도 모든 것을 부숴버릴 기세였다.
“아아아.....”
아이린 후작이 떨리는 눈동자로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녀는 루드히 공작의 전투력에 할 말을 잃었다.
‘천.....이백만!’
루드히 공작의 전투력은 천이백만에 달하고 있었다.
마왕을 보좌하는 네 공작이라 하여 뭔가 다를 거라곤 생각했지만 이 정도로 강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 이래서 대공들도 저들을 함부로 건들지 못한 것인가.’
새삼 어째서 세력의 균형이 무너지지 않은지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후우.’
루드히 공작이 천여운을 똑바로 응시했다.
진각성을 한 이상 시간을 끌 수가 없었다.
일단 허세를 부리기는 했지만, 그는 대공들과 다르게 진정한 진각성이 아니기에 이 힘을 길게 통제할 수 없었다.
‘10분 내로 끝낸다.’
하지만 그 정도로 충분했다.
이 힘이라면 누구도 두렵지 않았다.
“인간. 전력을 다하는 게 좋을 거다. 본 공작조차 이 힘을 주체하지 못할....”
-오싹!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촥!
‘!?’
찰나에 뭔가가 그의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굉장히 날카로운 예기였는데, 너무도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인식조차 할 수 없었다.
루드히 공작의 목에 검은 선이 생겨났다.
“컥.....이, 이게....대체....”
당황한 공작이 흔들리는 자신의 목을 두 손으로 다급히 움켜잡았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그에게 천여운이 말했다.
“소원대로 전력으로 했다만.”
그때 찢어질 듯한 절규음이 들려왔다.
“꺄아아아아악!”
한쪽 편에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아이린 후작.
그녀의 멀쩡했던 왼쪽 안구가 터져 있었다.
< 63화 아리샤의 갑주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