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화 만남 (2) >
뇌풍각(雷風脚) 백기.
마신 천여운의 심복이라 불리는 육검(六劍)의 일인이다.
순각종의 14대 종주로서 천마신교의 두 번째 부흥기를 이끈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대대로 순각종의 후손들은 그를 존경해왔다.
그것은 당대 종주인 백종서 역시 마찬가지였다.
바닥에 엎드린 백종서가 자신을 못마땅하게 쳐다보고 있는 백기를 향해 큰 목소리로 외쳤다.
“순각종의 전설이신...”
“조용!”
백기의 다그침에 백종서가 입을 다물었다.
다른 이들과 달리 주목 받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백기였다.
“모두가 들으라고 떠들 셈이냐?”
“그, 그건 아닙니다.”
냉담한 그의 태도에 백종서가 위축되었다.
전설이라 불렸던 그의 선조는 예상한 것보다 인자한 인상도 아니었고 부드럽게 말을 하는 성격도 아니었다.
천마인 천여운 이상으로 무뚝뚝하고 차가웠다.
“실망스럽군. 세월이 흐르면 더욱 발전해야 하건만.”
백기는 실망스럽다며 혀를 찼다.
적어도 무공의 퇴보는 없을 거라 여겼는데, 백종서를 보면 엉망 그 자체였다.
“죄송합니다.”
더욱 위축된 백종서가 사죄의 말을 올렸다.
사실 그의 탓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어렸을 때, 선대 종주가 행방불명되었기에 무공의 퇴보는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백종서 역시도 변명하는 성격이 아니기에 그저 죄스러워했다.
‘하여간 저놈의 고집.’
허봉이 백기를 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백기는 천여운의 수하들 중에서 가장 융통성이 없고 무뚝뚝함의 극치를 달렸다.
다른 육검들과 달리 천여운에게 진심으로 충성하게 되는 과정 역시도 훨씬 오래 걸렸을 만큼 자존심도 대단하다.
“야! 걔가 그러고 싶어서 그런...웁!”
허봉이 나서려는 것을 대장로 문란영이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속삭이듯이 말했다.
“봉봉. 지금부터는 종파 내부의 일이에요. 저 둘이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둬요.”
그녀는 허봉이 끼어드는 것이 맞지 않다고 여겼다.
아내의 말이라면 천여운과 거의 버금가게 순종하는 허봉이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순순히 따랐다.
백종서가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제 대에서 이렇게 된 것은 정말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선조님께 실망을 안겨드려서 정말 송구스럽습니다.”
“흥.”
백기가 콧방귀를 뀌었다.
그리고는 엎드려있는 그에게 손을 뻗었다.
심후한 진기가 백종서를 일으켜 세웠다.
“아!”
그렇게 일으켜 세워지자, 백기는 말없이 갑자기 각법의 기수식을 취했다.
그리고는 천천히 각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파팟!
식을 하나하나 풀 듯이 초식을 하나씩 펼쳐나가자, 백종서의 두 눈이 개안이라도 한 것처럼 떨려왔다.
‘이게....순현각이라고?’
그가 알고 있던 순각종의 각법인 순현각(順玄脚)과는 달랐다.
개선된 수준을 넘어서 거의 완벽수준에 가까운 각법.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친절하군요.’
그 광경에 대장로 문란영이 피식하고 웃었다.
겉으로는 냉정한 척하고 있는데, 친절할 정도로 천천히 초식을 보여주고 있었다.
의도가 분명할 정도로 말이다.
-착!
8초식으로 이루어진 순현각을 전부 펼친 백기가 자세를 가다듬었다.
그리고는 백종서에게 말했다.
“보았느냐.”
“보, 보았습니다!”
전율이라도 한 것처럼 백종서가 몸을 파르르 떨었다.
각법을 연마하는 사람으로서 이런 완벽에 가까운 초식을 보았는데 흥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입에 바른 소리는 치워라. 하루를 주마.”
“네?”
“네가 정녕 본 종의 종주라면 열두 시진 안에 내가 보인 초식을 완벽하게 숙지해보여라.”
‘열두 시진?’
시진이라는 표현법에 잠시 의아해하던 백종서가 화들짝 놀라했다.
12시진이라고 한다면 24시간이었다.
하루 안에 한 번 보여준 초식을 완벽히 숙지하라는 미션을 내린 것이었다.
“서, 선조님!”
“앓는 소리 내지마라. 만약 네가 내 기대를 채우지 못한다면 본 종의 역사를 내 손으로 직접 정리할 것이다.”
백기의 입에서 나온 무서운 소리에 백종서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백기라면 정말로 종파를 정리할 것만 같았다.
“선조님 사흘, 아니 이틀만 시간을 더 주시면 안되겠습니까?”
천천히 초식을 펼치긴 했지만 고작 한 번 봤다.
그 한 번 본 것을 하루만에 완벽하게 재현하기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에 백기가 단호하게 거절했다.
“지금부터 열두 시진이다.”
“...........”
“그렇게 멍 때리고 있을 시간이 있나?”
백기의 그 말에 백종서가 안절부절 하지 못하더니, 이내 절을 올리고는 다급히 용천 그룹의 연무장을 향해 달려가려 했다.
그런 그에게 백기가 넌지시 말을 던졌다.
“날 실망시키지 마라.”
뭔가 그 말에서 일말의 기대감을 엿본 백종서가 결의에 찬 목소리로 힘차게 답했다.
“넵!”
그리고는 부리나케 연무장으로 달려갔다.
그가 떠난 후에 백기가 곁으로 다가온 허봉이 무뚝뚝한 표정을 짓더니, 목에 힘을 주고서 말했다.
“낼 실망시키지 머라.”
“......뭐하는 거냐?”
“네 말투.”
“뭐?”
워낙 동굴음 처럼 저음이다보니, 발음이 묘하게 반듯하게 들리지 않는 것을 따라한 것이다.
그게 웃겼는지 문란영이 키득거렸다.
“뭔 무게를 그리 잡냐. 낼 실망시키지 머라.”
“......과장되게 따라하지 마라.”
불쾌해하는 백기에게 허봉이 놀리듯이 또 목소리를 따라했다.
“니 맬투는 낼 실망시켰다.”
평정심을 잃은 백기의 이마에 핏줄이 곤두섰다.
* * *
용천 그룹 본사의 부회장실.
천여운의 어깨를 타고 다니며 좋아하던 금모 구미호의 얼굴이 급격히 시무룩해졌다.
-너무하네.
“비막헌이랑 놀고 있어라.”
-쟤 이제 지겹거든.
그렇지 않아도 북해빙궁에 다녀온 동안 부속실장 비막헌이랑 시간을 보낸 그녀였다.
비막헌에게는 살이 떨리는 시간이었다.
‘또......입니까?’
비막헌 역시도 천여운의 말에 인상이 굳어졌다.
금모 구미호인 그녀의 비위를 맞추는 것은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쬐끄만 새끼 여우 모습을 해가지고 완전 상전이나 다름없었다.
-조용히 있을게. 응?
금모 구미호가 천여운의 머리에 부비적거렸다.
갖은 아양을 떠는데도 천여운은 무감정,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진짜 냉정하네. 초대도 이 정돈 아니었다고오오!
“네가 들을 내용이 아니다.”
-내가 이렇게 하고 있을게.
금모 구미호가 자신의 귀를 접는 시늉을 했다.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여운지 제 1비서인 유소화가 입술을 실룩거렸다.
저 모습만 보면 항상 그녀가 대요괴인지를 잊게 만들었다.
“야! 대요괸지 뭔지 주인님이 나가 있으라고 했잖아. 펫 주제에 무슨 수다쟁이도 아니고 말이 왜 이렇게 많아.”
그런 금모 구미호를 제 2비서이자 마족 샤케나가 면박을 주었다.
그런데 면박을 주는 것치고는 상당히 기분 좋을 표정을 하고 있었다.
천여운이 단 둘이 할 말이 있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헤헤헤. 주인님이랑 단 둘이 있는다.’
그런 샤케나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금모 구미호가 천여운의 목을 감싸고서 절대로 떨어지지 않겠다고 항전했다.
-못가! 못 간다고!
“그래. 그럼 내가 떼어줄게.”
샤케나가 천여운에게 매달려 있는 금모 구미호에게 손을 뻗었다.
이를 금모 구미호가 작은 손으로 팍하고 쳐냈다.
-팍!
“.......”
-저런 앙큼한 양인 계집이랑 단 둘이 있게 내버려 둘 것 같아.
“이게!”
처음에는 장난이었던 샤케나가 살짝 화가 났는지 눈썹을 치켜 올리며, 그녀를 떼어내려고 제대로 두 손을 뻗었다.
“짐승이면 짐승다워야지.”
-고오오오!
그 순간 금모 구미호의 몸이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강렬하게 뿜어져 나오는 요기에 놀란 샤케나가 마력을 끌어올렸지만, 갑자기 무언가가 자신의 몸을 위에서 깔아뭉갰다.
-쿵!
“악!”
그녀의 엉덩이 위로 금빛 머리카락에 요염함과 기품을 동시에 갖춘 모습을 나신의 여인이 나타났다.
인간의 모습으로 분한 금모 구미호였다.
평소라면 난리가 나서 한 판 붙겠다고 할 샤케나가 자신의 위에서 느껴지는 말도 안 되는 요력에 몸을 파르르 떨었다.
나신의 여인의 등 뒤로 살랑 거리는 아홉 개의 꼬리가 보였다.
천여운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요력을 회복했군.’
알파급 위험 개체인 크라켄의 코어를 먹고서 요력을 빠르게 회복한 금모 구미호였다.
완전히 회복한 금모 구미호를 상대할 수 있는 인간은 오직 천여운뿐이었다.
“짐승이 어쨌다고? 계집아.”
금모 구미호의 살벌한 목소리에 밑에 깔려 있는 샤케나가 머리를 굴렸다.
싸우기에는 압도적인 역량이 확연하게 느껴져서 불리한 느낌이 들고, 여기서 곧장 굴복하자니 뭔가 그림이 좋지 않았다.
그때 천여운이 개입했다.
“내가 두 번 이야기하지 말게 하라고 했을 텐데.”
“치!”
심기 불편한 목소리에 금모 구미호의 입술이 삐쭉 튀어나왔다.
다른 사람에게는 잘 보이지 않는데, 천여운의 앞에서는 인간의 모습이든 여우의 모습이든 상당히 호의적임을 알 수 있었다.
-우우웅!
빠르게 새끼 여우의 모습으로 변한 금모 구미호가 폴짝 뛰어서 비막헌의 머리 위로 올라갔다.
“윽!”
그리고는 비막헌의 머리카락을 고삐처럼 잡고서 말했다.
-나가라는데 나가야지. 흥. 가자.
한껏 토라진 목소리였다.
물론 그런다고 해서 천여운이 위로해주고 그럴 성격은 아니었다.
눈길조차 주지 않자, 금모 구미호의 인간 말이 된 비막헌이 신속하게 그녀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모두가 나가자 샤케나가 아무렇지 않게 천여운의 곁으로 다가왔다.
“어머. 이제 둘 뿐이네요. 주인님.”
“붙지 마라.”
-팍!
어디서 배웠는지 코맹맹이 소리에 교태를 부리는 것을 가볍게 밀쳐낸 천여운이 그림자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쑤욱!
그리고는 무언가를 빼냈다.
그것은 두루마리 종이가 들어간 금색의 문양이 그려진 원통이었다.
뭔가 싶어 의아해하던 그녀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
“주인님.....그거 어디서 구했어요?”
“이게 뭔지 알고 있나?”
천여운이 그녀에게 선뜻 두루마리 원통을 넘겼다.
이를 받아든 그녀가 원통에 그려진 금색의 문양을 보며 놀라워했다.
‘역시 마족이라 알아보는 건가.’
마족의 배신자인 하갈이 가지고 있던 물건이다.
당연히 그들 일족의 언어 체계를 담은 문양일 거라 짐작은 했었다.
“주인님. 이 문양은 저희 일족의 3대공 중 한 분인 칼리아프 대공가의 문양이에요.”
“대공?”
대공이라는 말에 천여운이 의아해했다.
그녀의 일족의 대공이라 함은 마왕 다음으로 높은 작위의 존재였다.
원래부터 인간보다 강한 그 수많은 마족들 중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존재였으니 얼마나 강한지는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주인님이 이걸 어떻게 갖고 있는 거죠?”
그녀가 궁금해 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대공 급의 마족은 그녀조차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어지간한 공작 급의 마족도 보기 힘든 것이 그들 일족 간의 계급 사회였다.
“네 일족의 배신자라는 놈이 갖고 있던 거다.”
“네? 하갈이요?”
샤케나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알기로 하갈은 고작해야 하급 마족에 불과한 자였다.
그런데 그런 배신자 놈이 일족의 세 대공 중 한 명인 칼리아프 대공가의 문양이 그려진 물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이상했다.
“열어봐도 될까요?”
“봐라.”
원통은 어차피 열려 있었다.
원통 안에서 두루마리를 꺼내든 그녀가 그것을 펼쳤다.
그 안에는 한 세트의 갑옷 도면이 그려져 있었다.
이를 본 그녀의 두 눈이 커졌다.
“주인님!”
“뭔지 알고 있나?”
“이거......아리샤의 갑주에요.”
“아리샤의 갑주?”
그렇게 말을 해봐야 천여운이 알아들을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샤케나가 자신의 놀란 이유를 설명해주었다.
“이 도면에 있는 갑주는 오직 일족의 마왕님만이 착용할 수 있는 보물이에요.”
“이게 마왕의 보물이라고?”
마족의 배신자 하갈이 가지고 있던 도면 속의 갑주의 비밀.
그것은 바로 마왕의 보물이었다.
< 62화 만남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