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화 만남 (1) >
용천 그룹 본사 앞.
갑작스럽게 나타난 천오백여 명의 두꺼운 털옷을 입은 자들로 인해 용천 그룹은 잠시 동안 비상사태를 겪어야만 했다.
적습인가 싶어 놀라서 그룹 내 모든 전력이 긴급 출동을 하는 사태였다.
하지만 그들은 적이 아니었다.
다름 아닌 북해빙궁과 북해빙종의 사람들이었다.
“허어.”
용천 그룹의 회장이자 소교주인 천유장은 용천 그룹 앞 광장을 가득 메운 인파에 할 말을 잃었다.
'이리도 많다니.'
단순히 북해빙궁과 북해빙종의 전투 인력만이 아닌 그들 일가 전체가 왔기 때문에 인파라할 만큼 많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인파들이 조용히 한 곳을 지켜보고 있었다.
“오오오. 교주이시여!”
북해빙종의 종주인 단초진과 소종주 단초자가 눈물을 글썽이며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이를 교주 천우진이 감격스러운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이렇게 강녕하신지도 모르고 고향으로 도망친 신을 벌하여 주시옵소서. 끄흐흑.”
모시던 주군을 다시 보게 된 단초진은 눈물로 사죄했다.
그것은 소종주인 단초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런 두 사람의 어깨를 붙잡고 천우진이 무거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본인의 부덕함으로 벌어진 일인데, 어찌 그대들을 탓하겠는가. 이렇게라도 다시 본교에 합류해주어서 기쁜 마음일세.”
“교주!”
이 광경을 모든 중진들이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이로써 흩어져 있던 천마신교의 모든 중역들이 한 자리에 모이게 된 것이다.
27년 동안 이런 순간만이 오기를 모두가 바라왔다.
‘이게 뭐라고 나도 눈물이 나네.’
처음에는 그저 지켜만 보던 단소영 역시도 나오는 눈물을 훔치느라, 괜히 고개를 푹 숙이며 소매로 얼굴을 가렸다.
“정말 잘된 것 같습니다. 천마이시여.”
다시 하나가 된 후손들의 모습에 대장로 문란영이 흡족해했다.
동면에서 깨어났을 때, 천마신교가 해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많은 염려를 했는데, 이렇게 부활하게 되었으니 기쁘지 않을 수
가 없었다.
“진즉에 이런 모습을 보여줬으면 오죽 좋아. 히히.”
허봉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어찌 되었든 저들 역시도 수많은 역경 끝에 이런 순간을 맞이했다.
이 순간의 기쁨은 현재의 천마신교에 있어서 또 다른 역사의 기점이라 할 수 있었다.
“흥.”
뒷짐을 지고서 콧방귀를 뀌고 있는 천여운.
무표정하게 보고 있었지만 그 역시도 자신들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세 수하들이었다.
‘그럭저럭 정리가 된 건가.’
천여운은 하나의 일을 마무리한 느낌을 받았다.
의도치 않게 이 시간대로 떨어지게 된 것이 어쩌면 운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화(聖火)가 자신을 이끌었을 지도 몰랐다.
‘이제 남은 문제는 MS 그룹인가.’
그것은 현 천마신교의 문제라고만은 볼 수 없었다.
자신을 원래 시간대로 되돌리기 위해 먼 미래의 후손 천무성이 벌인 일과 연관이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를 해결해야만 돌아갈 수 있는 해답을 얻을 수 있다.
어느 정도 해후의 여운이 가시자 천여운이 나섰다.
“환명오.”
“하명하십쇼.”
천여운의 부름에 비환귀종의 종주이자 이사 환명오가 답했다.
이에 천여운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북해빙궁과 북해빙종의 사람들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이들이 살 수 있는 거처를 마련해라.”
환명오가 어느 정도 각오가 되어 있었는지 호흡을 길게 들이쉬고는 답했다.
“천마의 명을 받듭니다.”
그의 대답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북해빙궁과 북해빙종의 사람들이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다.
“와아아아아아!!!”
그들뿐만 아니라 두 진영이 중진들이 무릎을 꿇고서 감사를 표했다.
“천마의 은덕에 감사드리옵니다.”
“이렇게 배려해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급하게 이곳으로 와서 그 부분을 가장 우려했던 이들이었다.
러시아 방위부의 군인들이 죽었기 때문에 급하게 몸만 이곳으로 왔기에 주거나 향후 살아가는 문제가 이들에게는 시급했었다.
그런 환호 속에서 환명오가 조심스럽게 천여운에게 물었다.
“저....천마이시여. 한데 이들의 신분이나 국적 문제 등은 잘 처리가 되어 있는 것인지.”
“아.....그래. 그것도 처리하라.”
“쿨럭.”
환명오가 헛기침을 터뜨렸다.
한 사람도 아니고 근 천오백 명이나 되는 이들의 새로운 신분을 만들고, 국적을 새로이 바꾸는 세탁 문제까지 걸리자 피를 토할
것 같았다.
‘아직 합병도 못 끝냈는데.’
당분간은 절대로 야근을 벗어나지 못할 듯 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명이 아니더라도 천마신교의 교인인 이상 끝까지 책임을 져야 했다.
“모두 조용.”
짧은 말이었지만 귓가에 울리는 목소리에 북해빙궁과 북해빙종의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던 것을 멈췄다.
장내가 조용해지자 천여운이 말을 이어갔다.
“들어보니 오랫동안 북해빙궁이 둘로 나뉘어져서 여러 문제가 있었던 것 같더구나.”
그 말에 단초진과 단초자, 그리고 북해빙궁의 장로들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북해빙궁의 궁주와 소궁주가 대가를 치르고 목숨을 잃었기 때문에 분명 이 문제가 거론될 거라고는 모두가 짐작했었다.
천여운이 이것에 대해서 해답을 내려주었다.
“지금부터 북해빙궁과 북해빙종은 하나로 통합된다. 정확하게는 본교의 종파제에 맞춰서 북해빙궁을 빙종에 편입토록 한다.”
‘아아아.’
이런 천여운의 명에 북해빙궁의 장로들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어느 정도 예견은 했지만 이로써 오랜 북해빙궁의 역사가 마무리되고 그들은 완전히 천마신교에 귀속되는 순간이기 때문이었다.
‘조사이시여.’
그저 개파 조사에게 죄스러울 뿐이었다.
그런데 천여운의 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단초자.”
“네. 천마이시여.”
갑자기 자신을 부르자 단초자가 의아해하면서 앞으로 나섰다.
“너를 통합된 북해빙종의 종주로 임명한다.”
‘!!!’
그 말을 듣는 순간 모두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당연히 이들은 현 북해빙종의 종주인 단초진이 그대로 종주를 이어갈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천여운은 예상 밖에도 그 아들을 종주로 임명했다.
“제, 제가 어찌....”
놀람도 잠시였고 단초자가 아버지를 의식했는지 난감하다는 기색을 보였다.
손녀인 단소영 역시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단초진을 바라보았다.
‘이러다 또 두 분이 싸우시는 거 아닐까?’
하지만 그런 우려와 달리 천여운의 다음 말은 이를 해소시켰다.
“단초진은 종주로서의 역할은 그 동안 수고했으니, 이제 대장로와 본교의 중역으로서의 역할에 책임을 다해라.”
“아!”
원래 종주와 대장로 직은 겸임이었다.
하지만 천여운은 단초진이 가진 경험은 많으나 잔정이 많기 때문에 종주로서는 맞지 않다고 판단했다.
오히려 한 종파를 이끌어가는 능력은 이성적인 판단력을 가진 소종주 단초진이 부합하다고 여겼다.
“왜 대답이 없지?”
-팍!
두 부자가 동시에 무릎을 꿇고서 두 손을 모으며 큰 소리로 외쳤다.
“천마의 명을 따릅니다!”
이렇게 답한 종주 단초진이 아들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전음을 보냈다.
[초자야.]
[.....아버님.]
[이제 네 시대다. 애비는 본교의 일에 집중할 터이니, 괜히 마음 쓰거나 불편해하지 말 거라.]
난색을 표하던 단초자는 한결 마음이 편해졌는지 안도했다.
그리고 자신의 진가를 알아준 천여운에게 진심으로 감사함을 느꼈다.
* * *
다시 천마신교로 귀환한 북해빙종의 해후와 후처리가 끝난 후, 집회처럼 모였던 모든 천마신교의 교인들이 해산했다.
그렇게 해산했을 때, 천여운을 따라가려고 하던 수하들이 발걸음을 멈췄다.
누군가 본사로 들어가려 하던 그들에게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그는 바로 순각종의 현 종주인 백종서였다.
“호오. 때를 잘 맞췄는걸.”
그를 발견한 허봉이 잘됐다며 불렀다.
“종서.”
“스승님!”
천여운의 명으로 백종서의 스승이 되어 무공을 가르쳤던 허봉이다.
백기가 의외라는 듯이 말했다.
“네가 누굴 가르쳐?”
대놓고 놀리는 말에 허봉이 인상을 찡그리면서 툴툴거렸다.
“뭐? 내가 얼마나 잘 가르치는데.”
이에 대장로 문란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에휴, 또 시작이네.’
물론 허봉이 평소에 까불거리는 성격이기는 했지만, 환영검종의 비막헌을 가르치는 것을 보면 스승으로서의 재목이 떨어진다고
보기는 힘들었다.
그만큼 비막헌의 검술 실력이 상당히 진보했기 때문이었다.
다만 같은 무공이라는 점에서 가르치기 수월했기에 그랬지만 백종서의 경우는 달랐다.
허봉은 각법에 있어서 거의 초보였기에 스승으로서 부적합했다.
“잘됐군요. 백기 공.”
“네?”
“그렇지 않아도 당신께 소개드리고 싶었어요.”
문란영의 말에 백기가 의아한 눈빛으로 백종서를 바라보았다.
그런 그에게 문란영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이 친구의 이름은 백종서. 현 순각종의 종주에요.”
“순각종?”
그 말에 별다른 감흥이 없던 백기의 표정이 뒤바뀌었다.
그렇지 않아도 이 시대의 순각종의 종주를 만나보고 싶었던 그였다.
백기의 정체를 모르고 있는 백종서가 자신을 소개하는 자리인가 싶어 포권을 취하며 고개숙여 인사했다.
“순각종의 종주인 백종서입니다.”
“네가 종주라고?”
백종서가 인상을 찌푸렸다.
대장로 문란영이 공대를 해주고 천여운의 곁에 있는 것을 보면 분명 높은 직위의 누군가가 틀림없었는데, 느닷없이 하대를 하자
조금 기분이 언짢았다.
‘대체 누구지?’
의아해하고 있는데 갑자기 백기가 그를 향해 발을 휘둘렀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백종서가 두 손을 교차하면서 백기의 발차기를 막았다.
-팍!
“헉!”
-부웅!
가벼운 발차기처럼 보였는데, 막는 순간 그의 몸이 10미터 가까이나 날아가 버렸다.
욱씬 거리는 팔목의 고통에 백종서가 곧바로 움직이지 못했다.
‘강하다.’
일격에 불과했지만 확연한 격차를 느꼈다.
눈앞에 있는 저 자는 자신과 비교도 할 수 없는 절대고수였다.
백종서가 겨우 진기를 해소하며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갑자기 왜 제게 일각을 날리시는...”
-스륵!
그 순간 멀리 있던 백기의 신형이 흐릿해지더니, 이내 그의 앞으로 당도했다.
백기가 그의 머리 위로 내려찍기를 했다.
정말 기본에 불과한 각법이었지만 단순한 찍어내리기에 실린 중압감은 엄청났다.
“큭!”
당황한 백종서가 다급히 몸을 회전시키면서 발을 위로 들어올렸다.
두 사람의 발차기가 부딪치자 파공음이 흘러나왔다.
-파앙!
내공에서 현저히 밀리는 백종서의 지탱하던 발이 바닥을 파고들었다.
-콰드득!
“크윽!”
백종서의 입에서 절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천근으로 짓누르는 듯 하여 조금만 긴장을 풀면 압사당할 것 같았다.
백기가 오만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제야 발을 사용하는 구나.”
“저, 정말 왜 이러시는 겁...흐헉!”
그때 백기의 내리찍던 발차기가 회전을 하며 기묘한 각도로 백종서의 가슴을 노려왔다.
너무나도 자유자재의 발차기에 백종서는 그대로 일격을 당하고 말았다.
또 다시 그의 몸이 뒤로 튕겨나갔다.
이번에는 자세조차 제대로 잡지 못하고 거의 뒹굴다시피 했다.
-쿠당탕!
“으억!”
낙법을 치다시피 하여 몇 바퀴를 굴러서야 겨우 멈출 수 있었다.
처음에는 느닷없이 공격한다고 당황해했던 백종서였지만 어느새 전혀 예상할 수 없는 방향에서 날아오는 발차기에 놀라워했다.
‘놀라운 각법이다. 본교에 우리 순각종 이외에도 이런 각법이 존재했나?’
정말 대단한 각법이라고 생각했다.
단순함 속에서 이런 움직임을 보인다는 것이 경외스러울 정도였다.
그런 그에게 백기가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하! 천년대계는 무슨.”
동면에 들어가기 전에 아들에게서 순각종의 천년대계를 약속받은 그였다.
한데 천 년이 지난 순각종의 종주는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이 정도까지 망가졌을 줄은 몰랐다.
각법이 발전하기는커녕 퇴보하다시피 했다.
‘대체 왜 실망하는 거지?’
백종서는 왜 눈앞의 사내가 자신을 보면서 실망을 금치 못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허봉이 나무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기껏 만난 후손에게 발차기부터 날리고. 인성 인증하네. 쯧쯧.”
“후손?”
영문을 알 수 없어하던 백종서의 두 눈이 왕방울 만하게 커졌다.
그러고 보니 허봉이나 문란영을 통해서 대련 수업을 할 당시에 몇 차례 들어왔던 이야기가 있었다.
[백기가 있었다면 참 잘 가르쳐 줄 텐데 말이야.]
[후에 네 선조께 가르침을 청하는 편이 나을 수도 있겠구나.]
당시에는 그 이야기가 크게 와 닿지 않던 그였다.
두 눈이 커져서 어쩔 줄 몰라 하던 백종서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뗐다.
“호, 혹시 선조님이십니까?”
백기가 뒷짐을 진 채, 못마땅하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안타깝게도 그렇구나.”
‘!!!’
긍정을 표하는 백기의 말에 백종서가 화들짝 놀라서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어떻게 이런 일이!’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자신의 눈앞에 순각종의 전설이라 불리는 14대 종주 뇌풍각(雷風脚) 백기가 있었다.
< 62화 만남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