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화 크라켄 (2) >
‘어찌 이런!’
채문탁은 제대로 뒤통수를 맞았다고 생각했다.
그가 지금까지 들어온 천여운의 행보는 철저하게 여론을 의식한 것 같았는데, 완전히 예상이 빗나간 셈이었다.
‘하!’
사람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이 사달이 난 것에 분해진 채문탁이 어처구니가 없어하다가, 이내 문득 무언가를 떠올렸는지 말했다.
“그래. 이건 내가....그대를 파악하지 못했다고 치고.....데려온 일행들도 전부 죽게 내버려둘 셈이냐?”
“일행?”
채문탁은 호텔에 들어온 순간부터 천여운을 감시했다.
그렇기에 그의 일행들이 누구인지 인적사항 정도는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일반 경매와 이곳으로 일행들을....둘로 나눈 것을 모를 것 같나? 그대의 괴물 같은 무력은 예상 밖이었지만....다른 자들도 똑같을까?”
채문탁이 창백한 얼굴로 비릿하게 웃었다.
역시 죽으라는 법은 없었다.
이것은 절대로 허패가 아니었다.
이미 일반 경매장 쪽에 천여운의 수하들의 신변을 확보해두라고 지시해놓았다.
“게다가 그대의 사람들은 아직 저곳에 있겠지?”
채문탁이 눈짓으로 선상 경매장을 가리켰다.
천여운 혼자 이곳에 나타났으니, 분명 그의 수하들이 아직 경매장에 있을 것이다.
채문탁은 이를 빌미로 자신의 목숨을 살리기 위한 딜을 할 생각이었다.
“거래를 하자. 다른 경매장 쪽도 그렇고 내게는 위험 개체 크라켄의 행동을 멈추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래서?”
뭔가 탐탁지 못한 목소리.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채문탁이 말했다.
“나와 이 배를 놓아준다면 그대의 수하들의 안위를 보장하겠다.”
“안위를 보장해?”
천여운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채문탁은 확실하게 승부수를 던지기 위해 더욱 강하게 말했다.
“그렇지 않는다면.....나 역시도 죽겠지만 그대의 수하들도 전부 주검이 될 거다!”
죽을 각오를 한 자만이 살아남을 거라 생각했다.
적어도 그런 결의를 보여야 상대를 압박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천여운의 반응은,
-꽉!
“어억!”
오히려 머리채를 잡고 있는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두피 채 뜯겨나갈 것 같은 고통에 채문탁이 컥컥거리면서 소리쳤다.
“네, 네놈의 수하들이 죽어도 좋단 말이냐?”
이에 천여운이 피식하고 웃으며 말했다.
“내 수하들을 어지간히 우습게 보았군.”
“뭐?”
“네놈 눈으로 똑똑히 봐라.”
천여운이 그의 머리채를 잡고서 위로 들어올렸다.
“끄윽! 무, 무슨....엇?”
그때 채문탁의 두 눈에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거의 반파되어 부서진 경매장 갈라진 선상 틈 사이로 무언가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구!
거대한 그것은,
“크, 크라켄이....”
본체에 수많은 가시가 돋아 있는 거대한 괴생명체.
보이는 다리만 하더라도 스무 개가 넘는 그것은 분명 크라켄이었다.
마치 중력이 사라지기라도 한 것처럼 크라켄이 허우적거리면서 물방울들과 함께 떠올랐다.
“중력마녀!”
채문탁은 천여운이 데려온 여비서를 떠올렸다.
중력장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중원에 셋뿐인 SS급 게이트 키퍼.
‘SS급 키퍼가 이 정도였단 말인가?’
중력마녀에 관한 명성은 익히 들어왔었다.
하지만 설마 물속에 있는 저 거대한 크라켄을 끌어올릴 정도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 * *
“이럴 수가?”
“이, 이걸 들어 올리다니?”
쾌속선을 사수하기 위해 크라켄의 다리들과 사투를 벌이던 무인들이 경탄을 금치 못했다.
갑자기 나타난 저 여인의 두 손을 위로 들어 올리는 시늉만을 했을 뿐인데, 저 거대한 괴물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중력마녀!”
“중력마녀 유소화다!”
“와아아아아!”
그녀를 알아본 배 갑판 위에 있던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명성이 있다보니 당연히 게이트 관련 종사를 하는 자들은 알아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 환호성과 달리 유소화의 표정은 상당히 좋지 않았다.
‘반발력이 너무 강해.’
평범하게 무겁기만 했다면 중력장의 조절로 들어올리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알파급 위험 개체만 되더라도 코어로 인한 반발력이 강했다.
-팡팡!
크라켄의 몸에서 나오는 에너지가 끊임없이 유소화의 중력장을 무너뜨리기 위해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
유소화가 옆에 있는 두 사람에게 소리쳤다.
“오래 버틸 수 없어요. 서두르세요!”
그 둘은 천여운의 육검 중 하나인 백기와 제자 악영이었다.
“알겠소이다. 소저.”
“조금만 참으시오.”
천여운에게서 크라켄을 처리하라는 명을 받은 두 사람이 내공을 십성으로 끌어올렸다.
그들이 세운 전법은 매우 간단했다.
그녀가 중력장으로 크라켄을 가두면 두 절대고수들이 최고의 절기로 처리하는 것이었다.
“투신의 후예라고 했나?”
“그렇습니다. 선배.”
“한 번 실력을 보도록 하지.”
-팟!
백기가 먼저 허공을 날아올랐다.
심후한 진기의 소유자인 그는 능공허도를 펼쳐 순식간에 허공에 떠오른 크라켄의 사정거리로 들어왔다.
마찬가지로 악영 역시 반대편으로 나타났다.
‘뇌각패철!’
-파치치치칙!
백기가 다리를 위로 들어 올리자 거대한 뇌전이 일렁이며, 그것이 거대한 다리 형태를 이뤘다.
뇌기를 실은 무형각이었다.
반대쪽에서는 악영이 오른손 주먹을 안쪽으로 끌어당겼다.
-고오오오오!
바람이 회오리 치듯이 일어나며, 풍압이 한 점으로 집중되기 시작했다.
이것은 역량의 일원화였다.
아직까지 생사경의 경지에 오르지 못했지만, 천여운에게 모든 공력을 한 점에 실을 수 있는 법을 배웠기에 불완전하지만 쓸 수 있었다.
“하압!”
“합!”
두 사람이 동시에 강한 기합을 내뱉으며 최고의 역량을 담은 일격을 날렸다.
뇌전의 형태의 발차기가 크라켄을 위에서 내려찍고, 풍압이 한 점으로 모인 권격이 크라켄의 중심부를 향해 쇄도했다.
“대단하군!”
“저런 괴물이었다니?”
크라켄의 다리를 상대했던 신속의 코하쿠와 성검 잭 오렌이 놀라워했다.
특히 백기의 무형각의 위력에 혀를 내둘렀다.
저 둘이라면 크라켄을 충분히 제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파파파파파팍!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크라켄의 모든 다리에 있는 눈들이 일제히 떠졌다.
심지어 본체의 가시 틈들 사이에 있는 눈들 역시도 말이다.
‘!?’
그 순간 크라켄을 아작 낼 기세로 내려치던 백기의 무형각이 보이지 않는 어느 지점에서 역으로 튕겨나가 그를 덮쳤다.
“이런!”
백기가 허공에서 몸을 틀어 다시 한 번 뇌전의 무형각으로 자신의 공격을 막아냈다.
그것은 악영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공격을 다시 되받아쳐야 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이럴 수가....”
“저 정도면 S등급 알파 위험 개체가 아닌가.”
무인들이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런 엄청난 역량의 공격마저 튕겨낼 정도라면 절대 A등급 위험 개체가 아니었다.
정말 S등급 알파라면 모두가 목숨을 걸어야할 수도 있었다.
-주르륵!
유소화의 얼굴이 땀범벅이가 되었다.
갑자기 폭발적으로 상승한 크라켄의 에너지로 인해 반발력이 몇 배나 뛰었다.
더는 버티기 힘들었다.
그때였다.
-쿠오오오오오!
크라켄이 괴이한 포효를 내지르더니, 이내 본체에 있는 흉악한 눈들이 일제히 선상 위에 있는 그녀에게로 향했다.
자신을 허공에 붙들고 있는 것이 그녀임을 눈치 챈 것이다.
“이런!”
그녀가 어떻게 해보기도 전이었다.
크라켄의 본체에서 수많은 가시들이 튀어나와 그녀를 향해 날아왔다.
"꺄악!"
엄청난 수의 가시들에 놀란 그녀가 자신도 모르게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파파파파파파팍!
뭔가를 튕겨내는 소리와 함께 그녀는 어떠한 타격도 받지 않았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눈을 떴더니,
“이건?”
황금빛 털로 보이는 무언가가 그녀를 휘어 감고 있었다.
영문을 알 수 없는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야! 잘 붙잡고 있어라냥.
‘!?’
그녀가 의아한 표정으로 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내렸다.
그때 언제 나타난 건지 그녀의 앞 쪽에 도도하게 엉덩이를 내리고 앉아있는 조그만 여우가 보였다.
‘금모 구미호!’
천여운의 품속에 있던 금모 구미호였다.
주위를 두르고 있는 황금빛의 거대한 털은 그녀의 꼬리가 커진 것이었다.
그런데 놀랄 일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고오오오오오!
금모 구미호의 몸이 눈부신 황금빛으로 뒤덮였다.
그러더니 이내 그 크기가 거대해졌다.
“아아!”
엄청나게 커다래진 금모 구미호의 모습에 유소화가 탄성을 내뱉었다.
황금빛 털에 꼬리 일곱 개가 넘실거리고 있는 거대한 여우의 모습은 크라켄의 위압감에 절대로 뒤떨어지지 않았다.
-쿠오오오오오!
금모 구미호의 등장에 크라켄이 괴이한 포효를 내질렀다.
체외의 모든 눈들이 그녀에게 향했다.
엄청난 요기를 내뿜고 있는 금모 구미호를 극도로 경계하는 눈빛이었다.
-어디서 굴러들어온 개뼈다귀 같은 것이 까불고 있구나. 흥!
-우우우우우웅!
금모 구미호가 입을 쩌억하고 벌리자, 그 입에서 요기의 덩어리가 응집했다.
“저, 저건 대체 뭐야?”
“이 말도 안 되는 요사스러운 기운은....”
무인들이 응집되는 요기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크라켄의 힘에 놀랐는데, 그것이 우스워질 만큼 엄청난 기운이 넘실거리니 놀라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팡!
사방에 바람이 폭풍처럼 몰아칠 만큼 방대한 요기의 구에서 광선이 뿜어져 나오며 허공으로 떠오른 크라켄에게 쇄도했다.
-쿠오오오오!
크라켄이 이를 막기 위해 백기와 악영에게 그런 것처럼 보이지 않는 막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금모 구미호의 요기는 급이 달랐다.
-파창!
순식간에 크라켄이 만든 막이 꿰뚫렸다.
그와 동시에 요기의 광선이 크라켄의 몸을 관통했다.
-콰콰콰콰콰! 푸슈슈슝!
-쿠오오오오오!
크라켄이 고통의 포효를 내질렀다.
긴 다리를 뒤틀며 벗어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으으으!”
유소화가 전력을 다해서 중력장으로 붙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중력장에 붙잡힌 크라켄은 결국 도망가지 못하고 본체에 구멍이 휑하니 뚫려서 그대로 축 늘어지고 말았다.
“하아...하아...”
유소화가 거친 호흡을 내뱉었다.
더 이상의 반발력은 없었다.
그 의미는 크라켄이 죽었다는 것을 뜻했다.
-쿠웅!
중력장을 거두고 크라켄의 사체를 떨어뜨린 그녀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S등급으로 추정되는 알파 위험 개체를 이런 식으로 들어올려 본 것은 그녀에게도 난생 처음 있는 일이었다.
-뭐, 그럭저럭 쓸 만하네. 계집.
그녀 덕분에 손쉽게 크라켄을 처리한 금모 구미호가 밑을 쳐다보며 칭찬했다.
칭찬 아닌 칭찬에 유소화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우우우우웅!
어느새 할 일을 마친 금모 구미호가 다시 작게 변했다.
누가 이 귀여운 새끼 여우가 방금 전에 그런 일을 했다고 상상이나 하겠는가.
-그럼 전리품을 챙겨보실까냥!
금모 구미호가 신이 나서 일곱 개의 꼬리를 빳빳이 세우고서 선상으로 떨어진 크라켄의 사체를 향해 부리나케 달려갔다.
* * *
“저, 저게 대체....”
두 눈으로 크라켄이 허무할 정도로 죽는 광경을 보게 된 채문탁이 할 말을 잃었다.
갑자기 나타난 금모 구미호의 존재가 어이가 없었다.
천여운이 혀를 찼다.
“쯧쯧, 위험하면 나서라고 했더니.”
‘!?’
그 말에 채문탁의 눈동자가 떨려왔다.
‘설마 저런 괴물도 다룬다고?’
그렇게 그룹에서 게이트의 위험 개체를 통제하기 위한 수많은 실험을 기했어도 이를 완벽하게 해낸 자는 누구도 없었다.
그런데 저런 엄청난 괴물이 천여운의 뜻대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가 두렵게 느껴졌다.
‘이, 이놈은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니야.’
천여운을 제거하지 않으면 그룹의 행보에 차질이 생길 거라 확신했다.
< 52화 크라켄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