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화 백기 (2) >
한 방안.
일가의 모든 사람들이 한 때를 풍미했던 전 종주의 임종을 지켜보고 있다.
그렇게 정정하던 분이 호흡마저 거친 모습에 모두가 눈물을 삼켰다.
당대 종주인 백용이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버님. 더 남기실 말씀은 없습니까?”
“하아.....하아...본 종을 부탁한다.”
“여부.....여부가 있겠습니까? 저희 순각종이 천년대계를 이어갈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부친인 백기의 무뚝뚝함마저 닮은 그였지만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만은 어찌 막을 수가 없었다.
임종하는 부친을 앞두고 슬프지 않을 자가 누가 있겠는가.
그런 백용에게 호흡이 서서히 약해져가고 있는 백기가 말했다.
“확인......해볼....것이다.”
“네?”
이해할 수 없는 그의 말에 백용이 반문했다.
"아버님.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그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백기의 고개가 힘없이 옆으로 돌아갔다.
“아버님!”
“조부님!”
일가의 모든 사람들이 침통을 금치 못했다.
순각종의 전설이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임종 후, 사십구재(四十九齋)가 치러지는 43일 째.
스무날이 넘게 이어지던 조문도 사십구재의 막바지에 이르면서 발걸음이 조용해졌다.
축시(丑時) 무렵,
향이 피워져 있는 병풍 뒤 관으로 누군가 다가왔다.
다가온 그 자가 관 뚜껑을 옆으로 밀었다.
그곳에 창백한 얼굴로 가지런한 자세로 누워있는 백기의 시신이 있었다.
-슥!
그 누군가가 백기의 입으로 무언가를 집어넣고서 코에 어떠한 향을 맡게 했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죽은지 43일이 지난 백기가 갑자기 눈을 떴다.
“쿨럭! 쿨럭!”
깨어난 백기는 호흡이 힘들었는지 연신 기침을 해댔다.
그러다 어느 정도 진정되었는지 백기가 고개를 들어올려, 그림자로 드리워진 남자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늦었군. 성무천.”
그를 죽음으로부터 다시 불러온 남자.
그는 천마신교의 대 예지가인 성무천이었다.
성무천이 그에게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다시 죽을 준비는 되셨습니까?”
“실없는 소리.”
“역시 육검의 일인답군요. 눈을 뜨시면 세상이 많이 달라져 있을 겁니다.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입니다. 지금이라도 마음이 바뀌신다면 언제든지 포기하셔도 됩니다.”
그런 그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백기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답했다.
“......주군을 다시 뵐 수 있다면 상관없다.”
그렇게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그의 앞에 보이는 낯익은 얼굴.
머리카락이 짧아지고 복장이 달랐지만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와 전혀 다르지 않은 그 얼굴이었다.
“주군!”
“백기.”
두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는 것만으로 감정을 교감했다.
말수가 원채 없는 둘이다보니 이렇게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무사하다면 그걸로 족하다.’
백기는 천여운의 안위가 예전과 다름없음을 확인하고 안심했다.
그는 그런 남자였다.
‘대체 이게 뭐지?’
오히려 자신의 몸 상태가 이상했다.
몸에 입혀져 있는 것은 옷이라기보다는 철로 만든 기계 장치 같았다.
그런 것에서 마치 단전이 하나 새로 생기기라도 한 것처럼 가슴 정중앙부 쪽에서 굉장한 기운이 느껴졌다.
“괜찮다. 네 몸에 해가 가지 않도록 조치를 취해 놓았다.”
물론 나노가 해킹해서 조정해놓은 것이다.
“아!”
그 말에 백기는 안심했다.
마도관 시절부터 천여운을 최측근으로 모신 그였다.
천여운은 절대로 근거 없는 말을 하지 않는다.
“굉장히 혼란스러운 곳이군요.”
백기가 주변을 살펴보면서 말했다.
동면하기 전까지 그가 바라왔던 것과는 정말 다른 세상이었다.
사람들의 복장하며 건물의 형태부터 모든 것이 말이다.
‘빌어먹을!’
채문탁은 이 상황이 너무나도 어이없었다.
자신의 모든 기술력을 집대성한 프로토 타입이 천여운의 손에 넘어간 것도 모자라 한 구를 완성하는데도 힘든 4세대 개체 24대가 전부 전투불능이 되고 말았다.
“아무래도 이번 경매는 더 이상 진행되기 힘들겠어.”
“나갑시다.”
“괜히 여기에 남아 있다가 목숨이 두 개라도 위험하겠소.”
그의 귓가에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어느새 돔을 빠져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바보가 아닌 이상 경매가 엉망이 되었다는 사실을 인지할 수 있었다.
“이틈을 노립시다.”
“갑판 밑에 물건들이 있을 지도 모릅니다.”
혼란스러운 틈을 노리려는 동아시아 연합도 있었다.
그들은 이 상황을 이용해 MS 그룹이 각국에서 탈취했다고 의심되는 경매 물건들의 재탈취를 노렸다.
-으득!
채문탁이 이를 갈았다.
고작 한 사람 때문에 지금까지 조직에 많은 이문을 가져왔던 경매가 쑥대밭이 된 것이었다.
‘천무성!’
그룹에서 새삼 그를 위험하게 여기는 것이 이해가 갔다.
-슥!
채문탁의 옆으로 회색 가면을 쓴 정장의 사내가 나타났다.
“선임 연구원님. 지금 쾌속선이 정박된 곳으로 고객님들의 상당수가 향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바다 한가운데였다.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였다.
“철륭. 물건들은?”
“말씀하신 대로 미리 배에 옮겨놨습니다.”
“잘했다.”
채문탁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서 대부분의 경매 물건들을 옮겨놓았다.
천여운을 이 자리에서 처리한다면 다시 진행할 생각으로 조치를 취한 것이었는데, 오히려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경매를 완전히 중지하고 빠져나가시겠습니까?”
“그래야지.”
어차피 천여운과는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이쯤 되면 그 역시도 자신들이 목숨을 노렸다는 사실을 인지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곳에 계속 있는 것은 위험했다.
“놈은 어떻게 할까요?”
철륭이라 불린 회색 가면의 사내가 부서진 돔의 단상에 있는 천여운과 백기를 쳐다보며 물었다.
이에 채문탁이 살기 어린 눈빛으로 말했다.
“여기서 수장시켜야지.”
그런 그의 결정에 철륭이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것을 씁니까?”
“써야지. 아무리 놈이 강하다고 해도 이 밤바다에서 그 괴물을 상대할 수 있을까?”
그 말과 함께 채문탁이 서둘러 돔을 빠져나가려 했다.
이를 발견한 천여운이 피식하고 웃었다.
“허튼 짓을 하는군.”
천여운이 채문탁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심후한 진기가 일어나 도망치려 하는 그를 묶으려 들었다.
바로 그때였다.
-파파파파파팟!
“죽어랏!”
돔의 주변에 있던 진행 요원들이 일제히 천여운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그들 하나하나가 절정의 무공을 가진 고수들이었다.
하지만 천여운이 손을 쓸 필요도 없었다.
“흥!”
백기가 손을 들어 밑으로 내리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강한 전격이 일어나 그들을 향해 내리쳤다.
-파치치치치칙! 콰콰콰콰쾅!
“끄악!”
“크헉!”
개량된 인간 병기들조차 견디지 못한 백기의 전격을 무공을 익힌 자들이라고 해서 견딜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 사이에 도망치려 했던 채문탁이 허공으로 끌려오려고 했다.
“선임 연구원님!”
이를 철륭이라는 자가 뛰어올라 채문탁의 몸을 붙들고서 막으려고 들었다.
‘무슨 진기가?’
하지만 도리어 같이 끌려가려 했다.
“큭!”
당황했는지 철륭이라는 자가 채문탁을 놓아버리고 말았다.
같이 끌려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어찌 보면 옳은 판단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수하의 행동으로 보긴 힘들었다.
-팍!
“컥!”
“그다지 충성스럽지 않은 부하로군.”
철륭은 붙잡힌 채문탁을 버리고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돔을 빠져나갔다.
어차피 천여운의 목적은 간부급이라 할 수 있는 그였다.
백기를 되찾았지만 이 조직은 그를 많이 거슬렸다.
“어디 낯짝을 봐볼까?”
-팍!
천여운이 그의 가면을 벗겨냈다.
가면을 벗기자 양쪽 눈의 색깔이 다른 사내의 얼굴이 드러났다.
생각보다 평범한 인상을 가진 자였다.
채문탁이 두려움에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힉!”
“나와 거래를 하겠다는 놈이 내 목숨을 노리다니, 한입으로 두 말을 하는....”
천여운이 하던 말을 멈추고서 인상을 찡그렸다.
뭔가 이질적인 느낌을 받았다.
‘뭐지?’
붙잡기는 했는데, 채문탁이 어딘가 굉장히 이상했다.
겉보기에는 그저 평범했는데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가 않았다.
“.....네놈 뭐지?”
“왜, 왜 그러는 겁니까?”
천여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목을 잡고 있는 손바닥의 감각에 집중했다.
분명 손바닥이 따뜻하고 체온이 느껴졌지만 정작 중요한 맥박은 전혀 감지되지 않았다.
-팍!
천여운이 채문탁의 오른팔을 잡았다.
“가, 갑자기 팔은?”
그리고는 인정사정없이 팔을 뜯어버렸다.
-콰직!
고통스러울 만도 했는데, 채문탁은 두려운 표정만을 짓고서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팔을 뜯은 천여운의 표정이 바뀌었다.
“하!”
기가 막히다는 듯이 말이다.
팔을 뜯어냈더니 어깨 부근에 기계처럼 된 선들이 주렁주렁 뜯겨져 나왔다.
-파칙! 파칙!
뜯겨진 곳에서 스파크가 튀어 올랐다.
피부 쪽이 워낙 정교하게 만들어져서 몰랐는데, 설마 몸이 기계일 줄은 몰랐다.
“네놈 뭐냐?”
그런 천여운의 물음에 채문탁이 두려워하던 표정을 지웠다.
그리고는 기계처럼 무표정한 얼굴이 되어서 말했다.
“아바타를 이렇게 빨리 눈치 챌 줄은 몰랐군. 하지만 이미 늦었다.”
“아바타?”
의아해하는 천여운의 머릿속으로 나노의 음성이 들려왔다.
[아바타(Avatar)는 본래의 육체가 아니라 사용자가 조정하는 임의적인 육체입니다. 지금 시기 때 나온 기술은 아닙니다.]
기계로 만든 가짜 육신.
원래는 하반신 불구와 같은 장애가 있는 자들을 위해 나온 미래의 기술이었다.
지금으로부터 수십 년은 더 지나야 휴먼 형태의 안드로이드가 보급화 되는데, MS 그룹의 기술력을 보여주는 예였다.
“......쥐새끼 같은 짓을 하는군. 내가 네놈을 못 잡을 것 같나?”
그런 천여운의 말에 아바타의 육체가 어색하게 웃어댔다.
“하하하하하핫, 그러기에는 이미 늦었다.”
“뭐?”
“이미 배는 떠났거든.”
선상 경매장의 서쪽 부근에 모든 등을 암전시키고 조용히 출항하고 있는 배 한척이 있었다. 그것은 고객들이 타고 온 쾌속선이 아니었다.
배 안의 조타실.
그 안에 독특한 헬멧을 쓰고 있는 사내가 있었다.
사내가 쓰고 있는 헬멧의 고글의 시야로 목을 움켜쥐고 있는 천여운의 모습이 보였다.
‘F에게서 최근 개발되었다는 아바타를 미리 받길 잘했구나.’
이 기술은 MS 그룹 내에서도 아직 상용화하지 못했다.
몇몇 간부들만 위험에 대처할 수 있도록 받았는데, 이렇게 유용하게 사용될 줄은 몰랐다.
채문탁이 웃으면서 말했다.
“설마 내가 그대와 직접 대면할 거라는 그런 무리수를 둘 거라 착각하진 않았겠지?”
-꽤 머리를 굴렸구나.
“네놈은 이 바다에서 수장될 거다.”
-수장?
“왜 우리가 이런 바다 한가운데서 경매를 한 거라 생각하나?”
MS 그룹을 노리는 자들은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정부에서도 그들의 뒤를 밟으려고 했고, 세계 각국에서도 그들의 진보한 기술을 빼내기 위해 여러 첩보원들을 투입시켰다.
그런 상황에서 경매장을 이곳에서 한 것은 언제라도 모든 것을 파기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때 헬멧을 쓰고 있는 채문탁에게 누군가가 보고 했다.
“철륭이 빠져나왔습니다.”
-픽!
고글의 정보창에 영상 하나가 나왔다.
워터 스쿠터를 타고서 암전한 배를 향해 다가오고 있는 검은 인영이 보였다.
이에 채문탁이 명했다.
“크라켄을 풀어라.”
“......아직 VIP 고객들은 빠져나오지 못했는데, 괜찮겠습니까?”
조타실의 요원이 우려됐는지 물었다.
사실 좀 더 시간을 끌려고 했는데, 이렇게 아바타가 빨리 들통 날 줄은 몰랐다.
채문탁이 고민을 하다가 명했다.
“풀어라.”
저 정도 괴물이라면 바다라고 해도 문제가 전혀 없을 지도 몰랐다.
아직까지 확실하게 안전거리가 확보되지 못했기 때문에 조금 더 시간을 벌어야 했다.
“알겠습니다.”
조타실 요원의 대답에 채문탁이 긴장한 얼굴로 숨을 내쉬었다.
실제로 이 크라켄을 푼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A등급 알파 위험 개체 크라켄(Kraken)
전설에 나오는 괴어의 이름을 붙였는데 그에 걸맞는 거대함과 바다의 포식자라 불릴 만한 괴물이었다.
위험 개체를 통제하는 실험을 위해서 붙잡았지만 실질적으로 이것들을 제대로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적어도 타깃을 지정하는 것 외에는.’
크라켄에게 신호를 보내면 그것이 경매장 선박을 덮칠 것이다.
고글 화면에 탐지기가 떴다.
바다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빠르게 바다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밤바다의 무서움을 잘 새기길 바란다.”
채문탁이 천여운에게 그 말을 하고서 헬멧의 마이크를 끄려고 했다.
그런데,
“어?”
그의 아바타를 움켜잡고 있는 천여운이 갑자기 어딘가로 빠르게 향했다.
그곳은 경매장 선박의 서쪽 편이었다.
‘멍청하긴. 이미 늦었다. 크라켄이나 열심히 상대하라...’
그때 천여운이 바닷물을 향해 발을 내딛는 모습이 보였다.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쩌저저저적!
천여운이 밟는 곳을 중심으로 바닷물이 급속도로 얼어붙는 것이 아닌가.
그 속도는 상상을 초월했다.
“바다가.....얼어?”
-쿠웅!
그 순간 갑자기 배 전체가 심하게 흔들렸다.
"으헉!"
-쿠당탕!
헬멧을 쓰느라 균형을 잡지 못한 채문탁이 선실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
당황한 그가 헬멧을 벗고서 난간을 붙잡고 일어났다.
“서, 선임 연구원님 밖을 보십쇼!”
그때 조타실의 요원 중 한 사람이 외쳤다.
그 말에 채문탁이 밖을 바라보았다.
이를 본 채문탁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이, 이게 대체......”
배의 주변 바다 표면이 전부 얼어붙어 있었다.
“말도 안 돼.”
경매장 선박에서 이곳까지 적어도 300미터 이상은 멀어진 상황이었다.
이 정도 거리의 바다 위가 전부 얼어붙었다는 소리였다.
< 51화 백기 (2) > 끝